Creedence Clearwater Revival, Have you ever seen the rain?
일전 어느 미술 관련한 토론회에서 들은 말이다. 꽤나 유명한 대안미술관을 운영하던 그 사람은 단호하게 현대미술의 트렌드를 열거하면서 지난 10년간 현대미술의 핵심적 변화 가운데 하나로 미술의 금융화를 단호하게 꼽았다. 그가 말한 미술의 금융화란 미술이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방식과 경로가 더 이상 미술관을 비롯한 공공기관 혹은 개인 수집가들이 소장하거나 전시하기를 위한 것에 머물지 않고 효과적인 금융상품으로서 즉 투자 대상으로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움직임이 1980년대 이후 서구 미술에서 아방가르드적인 혹은 유사 아방가르드적인 미술운동이 소멸하면서 등장한 이런저런 움직임과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 young British artist)’나 ‘중국 현대미술’ 열풍은 물론 금융세계화라는 경제체제의 논리가 맹위를 떨치는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 어쨌거나 ‘아트펀드’와 같은 파생금융상품이 만들어지고 단기적인 투자이익을 기대하며 미술작품을 대하는 것이 21세기 초반의 미술제도를 정의하는 중요한 징후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요즈막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의 파산이나 그를 뒤이어 주요 거대 은행의 파산 위기를 대하다 보면 또한 금융화된 미술-상품의 처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나는 금융화한 미술시장의 붕괴라는 시나리오를 예상하려는 것은 아니다. 외려 우리가 생각해야 볼 것은 미술시장의 미래가 아니라 금융화한 미술이 연루된 미술체제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less.. 신자유주의는 산만하고 애매한 용어이다. 신자유주의란 신장개업한 자유주의적 이념 혹은 지적인 이상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또 197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정치적 관리 모델의 변화를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공적인 부조를 삭감하며 시장을 통한 조정으로 경제 질서를 관리하는 등의 경험적 현실을 서술하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 나아가 미적 현실(aesthetic reality)과 신자예유주의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정치적 현실이나 경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신자유주의란 개념은 어떤 변경을 가하지 않으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 그런 연유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일러 사용했던 표현을 빌려 써, 신자유주의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혹은 미적 논리”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생각하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서 취급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를 변화된 자본주의가 현실을 표상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식과 체험의 원리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나아가 그것의 미적인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몇 가지 특징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무엇보다 그것은 아서 단토같은 사이비 헤겔주의적 미술이론가가 떠들어대는 “미술의 종말”이란 단언으로부터 미술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사유의 진면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미술의 종말이란 거칠게 말해 아방가르드적인 미술 다른 말로 하자면 지성적인 행위로서의 미술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을 떠들썩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미술의 종말 이후의 미술을 말할 때, 그것은 미술이라는 감성적인 실천이 미술 안팎의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통해 변혁이나 해방같은 이상을 꿈꿀 필요가 없는 미술, 즉 이제 지성적인 규범(전위, 새로움, 삶과 예술의 일치 등)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은 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혹은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미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따를 때 놀라운 점은 더 이상 그것이 미술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외려 그것은 미술의 종말을 외칠 필요조차 없는 미술의 소멸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근대 사회에서 예술 나아가 미술이 제의적이고 장식적인 기능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를 미술로 명명할 수 있는 자율적인 행위가 될 때, 그것은 무엇보다 감성적인 것을 통해 지성적인 행위를 한다는 조건을 따를 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근대 미술의 지나간 유행이 아니라, 실은 근대 사회에서 미술이 존립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란 유령으로부터 해방되어 미술이 미술다워질 때 잃는 것은 미술 자체일 것이다.
‘미술의 종말’ 버전 따위가 이야기하는 그 것, 즉 미술이 그간 짊어졌던 지성적인 짐으로부터 벗어남이 후쿠야마 식의 역사의 종말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술을 혹은 미술이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전유하는지 이해하는데 관건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다른 세계가 없다는 폐소공포증적인 협박이라면 그것은 또한 전지구적인 미술체제를 통해 다양한 미술적인 실천을 규제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한다. 가장 구체적인 예로 우리는 미술가의 사회적 정체성 혹은 작가의 페르소나를 규정하는 새로운 언어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 20년간 미술 교육에서 거의 관례처럼 강조된 것은 바로 ‘포트폴리오’의 제작과 작가로서 자기 서사를 구성하라는 끈덕진 압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고 책임지며 나아가 홍보하고 광고하는 예술가, 즉 기업가(entrepreneur)화된 예술가의 형상은 매우 독특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유파, 스타일, 정치적 그룹 등에 속해 있는가 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브랜드화된 페르소나”가 출현하고 그것이 기존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대체하는 것은 분명 현대 미술 제도에서의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 자체를 상품으로서 판매하는, 신자유주의를 경제적 행위의 논리로 번역하는 자동언어기계라고 할 신경영담론의 표현을 빌자면, 비가시성의 경제 혹은 기호와 상징의 경제는, 미술과 상품 사이의 경계를 한층 좁혀놓거나 아니면 숫제 그 거리를 삭제한다. 미술작품이 별개의 대상으로 취급된다고 해도 미술과 다른 비예술적 상품 사이의 거리는 디자이너의 미적인 아이디어와 감성이 투여된 브랜드 상품과 보통의 상품들 사이에 놓인 거리와 일치한다. 즉 미술작품과 디자이너 브랜드의 상품(물론 그렇지 않은 상품을 찾기란 이젠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은 논리적으로 일치하고, 이는 신자유주의적인 전시의 현상학이라 할 만한 현상을 만들어낸다. 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적인 미술 이벤트가 글로벌한 브랜드의 광고와 과연 무엇이 다르겠는가. 설령 그것이 지역성과 정체성, 차이의 정치를 내세운다 해도 이를 규제하는 자본의 보편성 앞에서 농담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 안에서 신자유주의를 돌파할 길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물론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미학’이라는 유령과 씨름한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미적인 체험을 통해 사람들이 깨우침을 얻을 때 그 ‘미적 충격’은 언제나 ‘지성적 반성’을 대신하는 것이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지성적인 반성은 미술의 예..편에서 나오기는커녕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삶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극히 슬픈 일이지만 그 정치적 삶은 아주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미술의 편 안에서 스스로에게 신자유주의적인 타락을 추궁하는 것은 그저 자학에 불과할 뿐이다. 신자유주의적인 미술체제로부터 미술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미술 내부가 아니라 모든 사회적 삶의 연관을 찢고 나오는 사건에서 비롯될 뿐이다. 그 사건의 이름이 무엇일지 우리는 모를 뿐이다.
- BAF의 전시도록을 위해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