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말들 그리고 억류된 말들

Gang of Four – At Home He’s A Tourist (Peel Session)

말이 마음을 드러내고 밝힌다고 우리는 믿는 편이다. 그러나 이제 말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다그치는 데 더욱 이바지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터무니없이 낡은 용어라고 정색하겠지만, 오늘날 언어는 세상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알바 천국’이라는 어느 회사의 이름은 어떨까. 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말의 등뼈가 부러졌는지 목격하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알바 지옥은 그럭저럭 말이 된다. 그러나 알바라는 불안정하고, 보상도 형편없으며,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에겐 더욱 끔찍한 하루살이 노동을, 천국이란 말과 천연덕스럽게 이어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못해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도 용감한 알바천국 광고는 알바의 권리를 주장하며 너스레를 떤다. 알바천국이라는 말은 노예나리란 말처럼 속수무책의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용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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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모순, 역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또 다른 가설

Stalin

그로이스라는 광인(狂人)

그로이스를 세상에 알린 것은 뭐니 해도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란 저작이었다. 그는 기절초풍할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구 소련의 혁명적 아방가르드에서 스탈린 체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둘러싼 세간의 일치된 의견을 거부하였다. 둘 사이에 단절, 타락, 억압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 상식을 부인한다는 것은 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조잡하고 진부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타락하고야 말았다는 생각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예술을 망치는지 여봐란 듯이 증명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서구 좌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타락 이전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아방가르드와 타락 이후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대비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사회주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준적 또는 지배적인 가설을 그로이스는 여봐란 듯이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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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Men At Work – Down Under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가 인간을 이해하는데 널리 권장하고 또 사용하며 오늘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수련해야 할 행위의 덕목을 가리키는 말. 컴퓨터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업자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였던 과거를 물리치고 오늘날 인간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로서, 시대의 낱말이 되었다. CPU속도, 모니터 해상도, 스피커 채널 등을 가리키는 스펙이란 용어는 이제 노동자 나아가 모두의 됨됨이를 역량(competence)으로 환원하고 측정하는 데 두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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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의 사회

Guy Debord – La Société Du Spectacle (1973)

추석 연휴를 틈타 일본 요코하마와 도쿄엘 다녀왔다. 벼르던 전시들을 한 번에 보려던 심사에서였다. 그리고 몇 개의 전시를 악착스레 보았다. 목적지는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였지만 또 하나 눈여겨보고자 했던 것은 소문이 자자했던 도쿄 롯폰기의 아트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세 곳 유명 미술관이었다.
오늘날 예술이 도시 개발의 끄나풀이 되어 방문할 만한 장소로서 가치를 높이는 데 톡톡한 구실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세계적인 사치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서울 청담동이 그렇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즉 디디피(DDP)가 그렇다. 하다못해 재기를 노려보려는 세운상가도 예술을 앞세우고 버려진 산업공단들도 재개발을 위해 예술을 모신다. 땅값을 올리는 데 미술관이 한몫한다면 그 미술관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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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중딩을 아느냐

Siouxsie And The Banshees – Hong Kong Garden

거의 이십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느 해 보았던 한편의 영화가 자꾸 기억에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어느 여자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였다. 그 영화의 제목은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였다. 방송반 학생들이 만든 그 영화는 큰 상을 탔지만, 충격적인 내용에 놀란 학교 측이 문제 삼으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만든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끼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요즈막 여중생 폭력 사태를 둘러싼 주변의 심상찮은 기운을 생각하면 이 영화가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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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주의자인 척 한다는 것: 스펙타클의 사회 출간 50주년을 자축하며

GANG OF FOUR At Home He’s a Tourist

이룩할 공동체는 없다. 단지 파괴할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가하기로 하자. 우리는 상품과 화폐가 매개하고 군림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거룩한 자본주의라는 상품-화폐-자본 공동체(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이윤, 임금 지대의 성삼위일체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상품과 화폐는 지금껏 역사상 존재했던 초월성 가운데 그 무엇도 넘볼 수 없는 초월성을 자랑한다. 우리는 화폐라는 끈을 통해 서로와 마주한다. 우리는 각자의 돈이며 돈인 한 우리는 서로를 친절히 상대한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과 미움과 분노로 엮여있기 전에, 의식할 수 없는 화폐 + 자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내게 돈이 되기 때문이라면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매개된다는 뜻이다. 그런 것을 부인한 채 온기 가득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개똥이다. 개똥 더미 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은, 입을 닥쳐야 한다. 그리고 상황주의자들의 글과 구호와 저주와 악담과 축복과 놀이를 조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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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만으로는 턱도 없다

 

[Charli XCX – Boys]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점점 헤아리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사이임을 염두에 두고 허투루 대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오랜 속담은 낯선 이를 대할 때 견지할 윤리를 간결하게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은 아무런 쓸모 없는 세상의 풍경을 매일 마주한다. 누가 누구를 험하게 대했다는 소식은 거의 매분마다 들려오지 싶다. 막돼먹은 자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사는 듯싶다며 누군가 푸념을 해도 꼼짝없이 대꾸 한마디 못할 지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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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회과학: 사회성격논쟁과 마르크스주의

Four Tet – Planet

사회성격논쟁 ‘속’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성격논쟁 혹은 사회구성체논쟁으로 알려진 논쟁은 한국의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라는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의 분과학문을 넘어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분야에 역시 큰 영향이 반향 되었던 ‘학술적인’ 사건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회상되곤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분단 이후 남한에서 거의 전례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부활 또는 재기를 가리키는 사태로 기억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논쟁이 촉발된 시점의 일종의 시대착오성(anachronism)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한국의 민주항쟁 이후 도래한 잇단 세계적 사태들, 중국 천안문사태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현실사회주의’란 이름으로 지칭되던 동구권의 잇단 몰락 혹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이나 쇠퇴를 예고하였다. 물론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형태로의 서구 자본주의의 전환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폄훼하고 나아가 악마시하는 과정을 통해 성사되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에 관련된 사회주의 정치는 전례 없는 쇠퇴를 겪고 있던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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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유토피아가 지겹다

LCD Soundsystem – tonite

그래서 장차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누가 물어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들 그런 꿈을 꾸고는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갑작스레 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을 뽑은 지 몇 달이 되어간다. 다들 참을성이 큰 탓일까. 대통령을 몰아낼 만큼 대단했던 기세는 변화를 향한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싶다. 다들 팔짱을 끼고 일단 지켜보자는 심산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그간 쌓였을 변화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 꿈속엔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일까. 꿈이란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것이 오늘날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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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경제 시대의 스펙터클 – 시각예술의 관객/소비자

Guy Debord – 분리 비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

아마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참조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잊지 않고 새기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테제 34)라거나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테제 1) 등. 그런데 이제 슬슬 그의 비범한 주장에 의심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어떨까.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제 값을 하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것을 지켜보아야 또 그것에 얼마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 혹은 관심 경제란 새로운 경제학이나 마케팅 용어는, 오늘날 이미지가 처한 희한한 운명을 약삭빠르게 설명한다. 말 그대로 주목이 오늘날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구실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목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얼마나 오랜 동안 보는 이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융단폭격에 시달린다. 관람자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것을 응시하고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지는 시야를 급습한다. 혹은 꽁무니를 뺀다. 관람객은 미처 몇 초도 견디지 못한 채 다른 이미지로 이동한다. 과연 누가 스펙터클의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이제 스펙터클은 자신들끼리 서로의 적이 되어 더 선동적인 스펙터클이 되겠다고 잔인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펙터클의 적은 그를 응시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다른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제 더욱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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