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적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음모 다큐멘터리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의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오늘보다>가 있다. 나는 그 잡지의 정기구독자이다. 배달된 지난 5월호를 보다 적잖이 놀랐다. 그 달치에 이례적이라 할 “여는 글”이 실렸던 탓이다. 편집자 노트쯤에 해당될 글에서 편집실장은 마침 개봉해 관심을 모은 어느 한 다큐멘터리를 상대한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털어놓으며 그 작품이 의지하고 있는 음모론에 대한 이의를 적는다. 글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고의침몰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있다. 아직도 이 사건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과 구조 실패, 이후의 국가 탄압까지. 2014년 4월 16일 하루가 아니라 전후(前後) 몇 년에 걸친 이 참사의 과정을 우리는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침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 의도를 감추기 위해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했다는 답은 너무나 쉬운 답이다.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답을 쉽게 찾으려는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도 있다. 이를 잊어서도 안 된다.” 박상은, 세월호에 대한 어떤 쉬운 답 <그날, 바다>, 오늘보다, 2018년 5월호, 1쪽.
어느 다큐멘터리 작품이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된다. 이는 흥미로운 사태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형세를 생각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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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의 재미와 교훈

Itsuroh Shimoda – Everybody Anyone (1974)


자기-패러디로서의 퍼포먼스

1. 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는 동시대 예술의 동시대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원리를 추궁하고 풍자하는 코미디 퍼포먼스이다. 비록 관객들은 떠들썩하게 웃지 않았지만 말이다.

2. 헤첼은 자신의 렉처 모두에서 노골적으로 동시대성의 으뜸가는 미학적 원리인 <현존 presence>을 비웃으며 시작한다. 설치와 더불어 동시대 예술의 양대 장르로 부상한 퍼포먼스의 인기 뒤에서, 그는 현존(성)에 대한 애착을 발견하고 조롱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재/현(re-presentation)의 비판으로서의 미술, 즉 반미학적 예술과 <동시대> 예술이 자신을 구분하는 결정적 간극이다.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의 냄새를 풍기는 그리고 그의 재현(표상)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진정성, 직접성, 본래성, 고유성, 지금-여기-있음, 현존재, 함께-있음(Mit-Sein) 등등은 퍼포먼스가 애호하는 미학적 긍지이자 격률이다. 헤첼은 그것을 교활하면서도 신랄하게 비웃는다. 그의 작업이 사회사업가를 흉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작업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시큰둥하게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안에서 가득 군침이 돌았다.(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야유는 얼마나 애교스럽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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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테레사의 미니멀리스트 댄스를 2018년 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RE:ROSAS

– 미니멀리스트적인 조각으로 가득한 미술관을 떠나 안느 테레사의 공연을 보는 것은 레트로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 빈티지 소비에 참여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느 테레사의 무용사적 아카이빙 작업에, 그렇게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끈 무용 컴퍼니인 <로사스 댄스 로사스>가 몇 해 전 LG 아트센터에서 공연했을 때, 무용에 과문했던 나는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조우한 그녀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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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레트로 미니멀리즘의 쓸쓸한 재미

BEACH HOUSE – DARK SPRING

– 아트선재센터의 <포인트카운터포인트> 전시에 대한 간단한 메모

&lt;포인트카운터포인트>는 저 먼 나라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을 흉내내는데 열심인 동시대 포스트-조각에 익숙한 이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재미난 전시였을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조각 이후의 조각을 실행했던 미니멀리즘 혹은 그것의 원리에 동승한다. 미니멀리즘은 거의 모든 것이 조각과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칼 앙드레이든 로버트 모리스이든 리처드 세라이든 그들은 모두 조각 이후의 조각을 위해 애썼다. 미술사의 표준적인 서사는 형태나 오브제로서의 조각으로부터 순수한 공간적 지각의 경험이 미니멀리즘의 모두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표준적인 서술이 허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엔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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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Maximum Joy – Stretch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오랜 불화가 종결되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모두 악이란 개념을 향해 줄달음쳤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의 지적 인플레이션은 조지 부시의 악명 높은 ‘악의 축’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진부한 말장난이다. 테러지원국을 지칭하고자 창안된 개념인 악의 축은 이미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을 악의 울타리 안에 놓기 때문이다. 테러는 폭력이란 비유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선제적으로 윤리화한다. 윤리적 악당으로서의 적이란 시점은, 지구화 이후 미국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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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사 이후의 유토피아적 기억 – <옥토버>의 분투(奮鬪)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유산이 죽은 개 취급을 당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유산 목록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추궁을 당하고 금지당한 관념은 보편사(universal history) 혹은 세계사일 것이다. 근대철학 자체와 같은 것으로 알려진 계몽적인 이성이나 데카르트적 주체를 구원하거나 그것의 죄를 경감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들은 제법 시끌벅적하게 시도된 편이다. 그러나 보편사란 개념만큼은 눈곱만큼도 구제받지 못한 채 새로운 이론적 기소자들을 충원하여 왔다. 얼마 전부터는 탈식민주의적인 저술가들이 그 대열에 합류해 헤겔적 보편사를 심문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하곤 했다. 모두 보편사란 개념을 향한 적의로 똘똘 뭉쳐있는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비록 많은 단서를 단 조건 하에서이지만 수전 벅-모스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을 확장한 신작 헤겔, 아이티, 보편사에서 보편사란 녹슨 개념을 숫돌에서 벼리는 도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직 파문당한 관념인 보편사란 관념이 조만간 귀환할 것인지 여부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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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로지스틱스의 도시, 자카르타와 방콕

물류 자본주의 이후의 도시

얼마 전 우연찮게 세계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두 도시를 잇달아 찾을 기회가 있었다. 두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도시 순위에서 1-2등을 두고 다투는 도시이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태국의 방콕. 나의 여정은 태국의 방콕을 경유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다시 그 곳에서 반둥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반둥이었다. 그곳은 1955년 반둥회담이 열렸던 역사적인 도시이다. 나는 수카르노, 네루, 낫세르, 주은래와 같은 이름들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비동맹운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자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가 발진한 그곳에 대한 야릇하고 조바심 나는 애착을 품고 있었다. 벼르던 그 도시를 찾겠다는 꿈을 이번 겨울엔 이룰 작정이었다. 음력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나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막상 도착한 반둥에서 나를 제압한 것은,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 거리의 아르데코 풍의 유사 식민지적 건물들과 그 사이에서 초라하게 뙤약볕을 견디고 있던 아시아-아프리카 회담이 열린 곳을 재단장한 박물관만은 아니었다. 이 도시들의 끔찍한 인프라가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미 나는 그곳을 찾기 전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관한 책을 여럿 읽었고,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도시의 참혹한 생활 환경을 두고 쏟아진 개탄과 저주, 고발에 익숙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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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Norman McLaren – Pen Point Percussion

좌파세력을 후려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접두어로 21세기 한국의 정치적 형세를 상징하는 낱말이다. 종북은 종북 좌파 세력이라는 발언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북이란 좌파를 가리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과거에 유행했던 용공 좌파란 말을 동시대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 종북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좌파 내부에서 종북으로 지칭되는 정치세력을 견제하고 비판하기 위해 좌파 세력 스스로 만들어낸 말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이끈 주된 세력인 민중민주파와 민족해방파 가운데 민족해방파의 일부를 가리키고자 사용된 종북이란 용어는 훗날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그 정당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치가들과 활동가들의 구속과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종북은 극우 보수세력이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주문처럼 사용하는 낱말이다. 또한 현실에 좌절을 느끼며,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을 뿐 아무런 이렇다 할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환멸 하는 ‘일베’ 류의 낙오자적 청년집단이 즐겨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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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은 세계의 기억 : 임흥순의 작업에 관한 메모

Damon & Naomi – Song to the Siren

사례로서의 임흥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제법 오랜 동안 철학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관념, 역사철학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행했던 강의 노트와 이른 죽음으로 미처 출판되지 못한 원고를 모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 저작은 20세기 역사학을 뒷받침하는 기초적 관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더 이상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대한 적대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사변을 꼽자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반성이다. 왜냐하면 반성이란 사고행동에 대한 사고이며 모든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그러한 사고라는 것을 이미 보아왔다. … 이 문제는 기억이나 지각에 대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R. G. 콜링우드, 서양사학사: 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김봉호 옮김, 탐구당, 2017,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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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물의 계곡을 넘을 수 있을까

 

위로공단 (Factory Complex, 2015) 

1.
임흥순의 <위로공단>은 한국 현대사의 눈물겨운 흔적, 그 가운데서도 여공애사(女工哀史)를 추적한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애틋하고 치열한 것은 아마 무엇보다 감독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역사적 곡절을 통해 쓰다듬고 위안하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여성 의류 노동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사랑은 또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공경심 가득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70년대의 구로공단과 같은 의류 산업 공단을 대신하는 베트남과 다른 아시아지역의 의류 노동자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그들에게 가해진 착취와 폭력을 응시하려는 의지가 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빼어난 기억의 유사(類似)-다큐멘터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위기의 어떤 면모와 함께 하기도 하면서 또 그를 추월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인 계기를 확보하고자 애쓴다. 무엇보다 그것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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