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둥의 밤-대본 초고

BING SLAMET – Genjer Genjer

 

#1
암전된 채 겐제르-겐제르 재생(Bing Selamet)
반둥의 밤 제목만 프로젝션

#2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오늘 나임 모하이멘의 <두 번의 회의와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작업에 대한 주석이자 또한 그를 보충할만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눠볼까 합니다. 그럼 오늘의 강연을 시작하기 위해 어쩌면 진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발터 벤야민의 저 유명한 역사철학테제 가운데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출발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비동맹운동과 제3세계주의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이 될 시간의 변증법을 벤야민이 마침 매우 능숙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른 문장은 이런 것입니다.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만이 매 순간 자신들의 과거가 인용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류가 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그날, 즉 최후의 심판일이 될 날의 의사일정에 인용 대상이 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테제3 중에서

이 짧은 단락에서 벤야민은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흔한 상식을 바로잡겠다는 듯이 숨 가쁘게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놀랍고 흥미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나간 시간에 벌어지고 기록된 객관적인 사태들”로서의 과거만이 과거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하게 주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여기에서 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와 불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가 있으며 이를 분간할 필요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 즉 역사적인 한 단계가 종료하고 다른 단계가 열리는 순간,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인류의 전사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 그것은 물론 혁명적 단절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류가 구원되지 못했을 때 과거는 불완전하게 주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구원을 원한다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잘못을 바로잡는 위대한 실천을 하고자 한다면, 과거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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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현상학을 넘어, 갑의 폐절을 위하여: 민주주의에 머물지 말자

Oneohtrix Point Never – The Station

 

“괴로움(Leiden)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이란 주체에 짐 지어진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주체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73쪽.

“경제는 핵심영역이고 전투는 이곳에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주문(呪文)을 깨야 한다. 하지만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S.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이서원 옮김, 길, 157쪽

1. 을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적 프로젝트

프랑스와 유럽의 급진 정치철학의 충실한 번역자이자 주해자인 진태원은 <을의 민주주의>에서 그간의 자신의 작업을 한데 결집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한국에서의 급진 정치의 조건을 위한 사색으로 발전시킨다. 문재인 정권의 집권과 더불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더욱 중요한 토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한국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과 민주주의 사이의 착종은 민주주의란 언표를 둘러싼 희구와 애착의 정념을 휘발시킨 듯 보인다(적어도 우리는 김지하가 자신의 시의 선율, “신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읊을 때의 민주주의를 향한 정념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권력의 게임에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라면 누구든 제 입맛대로 가용할 수 있는 타락한 기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동요의 상황에 개입하고자하는 시도로서 매우 큰 가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재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둘러싼 회의와 냉소적 체념을 극복하는 데 요청되는 사고의 주춧돌을 마련하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여기에서 나는 <을의 민주주의>에서 그가 참조하고 주해하는 ‘포스트-포스트주의적’인 정치철학에 대한 농밀한 대화에 주의하기보다는 그를 통해 그가 수확한 일종의 정치적 프로그램, 즉 을의 민주주의론에 스민 사고에 대하여 간략한 비평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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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리 괴르제 & 앙투완 드푸르의 <제르미날>에 관하여

무대란 소우주

<제르미날>은 에밀 졸라의 전설적인 소설, <제르미날>을 제목으로 삼는다. <제르미날>은 광부들의 척박하고 고단한 삶에 관한 소설이다. 알로리와 앙투완은 자신의 작업이 소설 <제르미날>과 무관하다고 능청을 부리지만 그것은 그저 시치미 떼기에 불과할 것이다. 무대의 표면을 채굴하는 퍼포먼스의 주된 동작들은 분명 광부의 몸짓을 빌린다는 점에서나, 자연주의적 역사소설이 기대했던 것처럼 역사의 재현을 기대하고자(기대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나 두루 이 작업은 <제르미날>로부터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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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Metronomy – The Look

어제 오랜 만에 다시 본 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에서, 다시 그 나고야 사내의 이야기가 다시 들렸다. 애인과 헤어지고 그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나고야에 사는 그 사내는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고 그는 전자분야의 직장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듬해 봄 자살을 하고 만다. 그는 다른 모든 걸 견딜 수 있었지만 봄이란 낱말 만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커는 유럽인이 수사적인 형용사를 많이 쓰는 반면 일본인은 하이쿠에서 보듯이 낱말 그러니까 명사나 동사 같은 것에서 직접 어떤 정서적인 힘을 느끼고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말의 정동(affect)일 것이다. 봄. 그러나 그 말은 편의점에 붙은 광고에 적힌 <나, 이제 설레나 봄> 따위의 봄이란 낱말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어느 말도 상품을 위한 인질이 되길 피할 수 없는 말들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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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8.

Sufjan Stevens – Visions of Gideon

계속된 몸살로 옴짝달싹 못한 채 누워있다, 바람이라도 쐴 겸 영화를 보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멜로라면 가장 거리가 멀 듯 뵈는 제자가 강추한 멜로란 것도 이 영화를 볼 의지를 북돋웠다. 오프닝 크레딧에 각본 제임스 아이보리를 확인했을 때, 나는 얼추 무엇을 볼지 예상할 듯한 확신이 들었다.(확인해보니 그는 이 영화의 각본으로 오스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보리 형제의 <모리스 Maurice>를 이미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에서 그것의 흔적을 뻑뻑하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의 윤리에 천착하는 근년의 멜로 영화 가운데 제법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장점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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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5.

어느 매체로부터 더 이상 글을 싣고 싶지 않다는 통화를 나누었다. 다음에 쓸 글의 주제를 뭐로 하면 좋을지 의논하려 말을 꺼냈다 말문이 막혔다. 망원사회과학연구실 멤버시죠? 누군가 외압을 넣었을 것이라는 참담한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이미 다른 이는 문제를 제기해 자신이 활동하던 곳에서 물러난 바 있다. 유령계정을 만들어 익명으로 험구와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 넣고 공유하기를 하는 짓도 우습다. 솔직히 모든 짓이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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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8.

– 어쩌면 루카치의 재림일지도 모르겠다며 존경했던 모이시 포스톤 Moishe Postone이 오늘 영면했다. 심란하기 그지 없는 마음을 달래려 힘든 때면 찾아보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뒤지다, <동년왕사>를 보던 중에 그의 부고를 들었다. 그는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활동한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 명임에 분명하다.  그의 제자였던 누군가가 메일로 자신의 새 블로그 내용을 알린 뒤였다. 그의 글을 전한다. 포스톤,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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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1.

BEACH HOUSE – LEMON GLOW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폭력으로 경험되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대신해 인격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폭력의 전부로 환원하는 발상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적대적인 구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모든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되고 비난받는 것은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필요하며 또 불가피할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을 차별화할 필요 때문이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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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연구> “68 운동” 50주년 특집

 

2018년은 1968년의 ‘운동’의 뜨거운 폭발로부터 50년째 되는 해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68 운동을 둘러싼 열띤 논쟁과 그를 결산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어 왔다. 68 운동은 현대사의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았고 또 이를 다룬 책들도 다수 소개되고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68 운동은 여전히 새로운 기억을 촉구하며 그것이 남긴 유산과 과제를 재평가하도록 이끌고 있다. 68운동은 ‘신좌파’의 출현,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등장,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두 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68운동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정치제도에 대한 비판과 거부을 주도했던 프로그램인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68운동은 그것을 비판하고 개조하고자 한 시도들이 다투어 각축을 벌인 역사적 실험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8운동은 자본주의 비판을 사고하고자 하는 이론적 실천이나 정치적 기획에 있어 피할 수 없는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68운동의 혼란스러운 성격은 또 다른 접근을 허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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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Norman McLaren – Pen Point Percussion

좌파세력을 후려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접두어로 21세기 한국의 정치적 형세를 상징하는 낱말이다. 종북은 종북 좌파 세력이라는 발언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북이란 좌파를 가리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과거에 유행했던 용공 좌파란 말을 동시대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 종북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좌파 내부에서 종북으로 지칭되는 정치세력을 견제하고 비판하기 위해 좌파 세력 스스로 만들어낸 말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이끈 주된 세력인 민중민주파와 민족해방파 가운데 민족해방파의 일부를 가리키고자 사용된 종북이란 용어는 훗날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그 정당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치가들과 활동가들의 구속과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종북은 극우 보수세력이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주문처럼 사용하는 낱말이다. 또한 현실에 좌절을 느끼며,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을 뿐 아무런 이렇다 할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환멸 하는 ‘일베’ 류의 낙오자적 청년집단이 즐겨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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