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리 괴르제 & 앙투완 드푸르의 <제르미날>에 관하여

무대란 소우주

<제르미날>은 에밀 졸라의 전설적인 소설, <제르미날>을 제목으로 삼는다. <제르미날>은 광부들의 척박하고 고단한 삶에 관한 소설이다. 알로리와 앙투완은 자신의 작업이 소설 <제르미날>과 무관하다고 능청을 부리지만 그것은 그저 시치미 떼기에 불과할 것이다. 무대의 표면을 채굴하는 퍼포먼스의 주된 동작들은 분명 광부의 몸짓을 빌린다는 점에서나, 자연주의적 역사소설이 기대했던 것처럼 역사의 재현을 기대하고자(기대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나 두루 이 작업은 <제르미날>로부터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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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거주자의 알레고리적 실천

DCNXTR Live at “เห็ดสด#2” โดยฟังใจ

– 전보경이 동시대 미술에 간섭하는 방식에 관하여

전보경 작가의 궤적은 동시대미술의 현장에서 레지던시라는 제도를 통해 생존하는 작가의 전기(傳記) 혹은 인류학적인 자료로서 손색이 없는 듯하다. 물론 이런 훔쳐보기의 태도가 작가 스스로에게는 탐탁지 않은 것이리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호기심을 지우기 어렵다. 1990년대 이후 유학을 다녀온 시각예술 작가들은 호기심과 욕망에 의해서이든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이든, 레지던시라는 제도에 의지해 왔다. 전시를 위한 기회는 희박하며, 작업을 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고, 넓디넓은 미술계에서 ‘오지랍’은 좁디좁은 작가들이라면 마침 등장해 구원의 손길을 뻗어가던 레지던시는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작은 유토피아적인 장소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전보경 작가와 만났을 때 첫 대화의 주제가 탈출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더 나은 미래가 없을 듯 뵈는 세계에 살 때, 도래할 찬란한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다른 곳을 찾는다. 미래 시제의 시간은 다른 곳이라는 공간으로 이항(移項)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여행을 꿈꾼다. 여행이란 적어도 혁명은 불가능하겠지만 탈출은 가능하도록 도울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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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스펙터클 그리고 이미지 ‘비판’

Beach House – Black Car

기억과 기념이 역사적인 의식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눈여겨 본 이들에겐 상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을 대신해 기억학(memory studies)이라는 학문이 부상한 것이나, 역사적 경험이 놓였던 자리에 트라우마, 국가폭력, 애도 등이 기세를 떨치는 것이나 모두 역사의 상실 혹은 패주를 가리키는 징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인 시간성을 의식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일차적인 소임인 줄 알았던 미술적 근대성 자체가 패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예술, 그 가운데서도 시각예술은 처음부터 자신을 ‘모던’ 아트라고 명명하며 자신의 역사적 시간성을 모든 실천 속에 기입하는 기염을 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동시대’, ‘당대’, ‘컨템포러리’ 예술같은 낱말로 슬며시 대체되었다. 이런 추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둘러싸고 여전히 분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미래라는 시간이나 유토피아적인 정치 기획을 둘러싼 적의,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회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카이브적인 실천 혹은 전시의 범람, 역사적 건축 유산을 기억의 경험을 상연하는 장소로 둔갑시키는 전시시설이나 제도의 성행 등은 어쨌거나 반(反)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추세에 모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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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의 재미와 교훈

Itsuroh Shimoda – Everybody Anyone (1974)


자기-패러디로서의 퍼포먼스

1. 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는 동시대 예술의 동시대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원리를 추궁하고 풍자하는 코미디 퍼포먼스이다. 비록 관객들은 떠들썩하게 웃지 않았지만 말이다.

2. 헤첼은 자신의 렉처 모두에서 노골적으로 동시대성의 으뜸가는 미학적 원리인 <현존 presence>을 비웃으며 시작한다. 설치와 더불어 동시대 예술의 양대 장르로 부상한 퍼포먼스의 인기 뒤에서, 그는 현존(성)에 대한 애착을 발견하고 조롱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재/현(re-presentation)의 비판으로서의 미술, 즉 반미학적 예술과 <동시대> 예술이 자신을 구분하는 결정적 간극이다.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의 냄새를 풍기는 그리고 그의 재현(표상)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진정성, 직접성, 본래성, 고유성, 지금-여기-있음, 현존재, 함께-있음(Mit-Sein) 등등은 퍼포먼스가 애호하는 미학적 긍지이자 격률이다. 헤첼은 그것을 교활하면서도 신랄하게 비웃는다. 그의 작업이 사회사업가를 흉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작업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시큰둥하게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안에서 가득 군침이 돌았다.(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야유는 얼마나 애교스럽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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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테레사의 미니멀리스트 댄스를 2018년 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RE:ROSAS

– 미니멀리스트적인 조각으로 가득한 미술관을 떠나 안느 테레사의 공연을 보는 것은 레트로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 빈티지 소비에 참여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느 테레사의 무용사적 아카이빙 작업에, 그렇게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끈 무용 컴퍼니인 <로사스 댄스 로사스>가 몇 해 전 LG 아트센터에서 공연했을 때, 무용에 과문했던 나는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조우한 그녀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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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레트로 미니멀리즘의 쓸쓸한 재미

BEACH HOUSE – DARK SPRING

– 아트선재센터의 <포인트카운터포인트> 전시에 대한 간단한 메모

&lt;포인트카운터포인트>는 저 먼 나라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을 흉내내는데 열심인 동시대 포스트-조각에 익숙한 이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재미난 전시였을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조각 이후의 조각을 실행했던 미니멀리즘 혹은 그것의 원리에 동승한다. 미니멀리즘은 거의 모든 것이 조각과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칼 앙드레이든 로버트 모리스이든 리처드 세라이든 그들은 모두 조각 이후의 조각을 위해 애썼다. 미술사의 표준적인 서사는 형태나 오브제로서의 조각으로부터 순수한 공간적 지각의 경험이 미니멀리즘의 모두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표준적인 서술이 허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엔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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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Maximum Joy – Stretch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오랜 불화가 종결되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모두 악이란 개념을 향해 줄달음쳤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의 지적 인플레이션은 조지 부시의 악명 높은 ‘악의 축’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진부한 말장난이다. 테러지원국을 지칭하고자 창안된 개념인 악의 축은 이미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을 악의 울타리 안에 놓기 때문이다. 테러는 폭력이란 비유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선제적으로 윤리화한다. 윤리적 악당으로서의 적이란 시점은, 지구화 이후 미국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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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사 이후의 유토피아적 기억 – <옥토버>의 분투(奮鬪)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유산이 죽은 개 취급을 당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유산 목록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추궁을 당하고 금지당한 관념은 보편사(universal history) 혹은 세계사일 것이다. 근대철학 자체와 같은 것으로 알려진 계몽적인 이성이나 데카르트적 주체를 구원하거나 그것의 죄를 경감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들은 제법 시끌벅적하게 시도된 편이다. 그러나 보편사란 개념만큼은 눈곱만큼도 구제받지 못한 채 새로운 이론적 기소자들을 충원하여 왔다. 얼마 전부터는 탈식민주의적인 저술가들이 그 대열에 합류해 헤겔적 보편사를 심문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하곤 했다. 모두 보편사란 개념을 향한 적의로 똘똘 뭉쳐있는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비록 많은 단서를 단 조건 하에서이지만 수전 벅-모스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을 확장한 신작 헤겔, 아이티, 보편사에서 보편사란 녹슨 개념을 숫돌에서 벼리는 도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직 파문당한 관념인 보편사란 관념이 조만간 귀환할 것인지 여부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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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로지스틱스의 도시, 자카르타와 방콕

물류 자본주의 이후의 도시

얼마 전 우연찮게 세계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두 도시를 잇달아 찾을 기회가 있었다. 두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도시 순위에서 1-2등을 두고 다투는 도시이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태국의 방콕. 나의 여정은 태국의 방콕을 경유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다시 그 곳에서 반둥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반둥이었다. 그곳은 1955년 반둥회담이 열렸던 역사적인 도시이다. 나는 수카르노, 네루, 낫세르, 주은래와 같은 이름들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비동맹운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자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가 발진한 그곳에 대한 야릇하고 조바심 나는 애착을 품고 있었다. 벼르던 그 도시를 찾겠다는 꿈을 이번 겨울엔 이룰 작정이었다. 음력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나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막상 도착한 반둥에서 나를 제압한 것은,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 거리의 아르데코 풍의 유사 식민지적 건물들과 그 사이에서 초라하게 뙤약볕을 견디고 있던 아시아-아프리카 회담이 열린 곳을 재단장한 박물관만은 아니었다. 이 도시들의 끔찍한 인프라가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미 나는 그곳을 찾기 전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관한 책을 여럿 읽었고,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도시의 참혹한 생활 환경을 두고 쏟아진 개탄과 저주, 고발에 익숙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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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은 세계의 기억 : 임흥순의 작업에 관한 메모

Damon & Naomi – Song to the Siren

사례로서의 임흥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제법 오랜 동안 철학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관념, 역사철학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행했던 강의 노트와 이른 죽음으로 미처 출판되지 못한 원고를 모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 저작은 20세기 역사학을 뒷받침하는 기초적 관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더 이상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대한 적대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사변을 꼽자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반성이다. 왜냐하면 반성이란 사고행동에 대한 사고이며 모든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그러한 사고라는 것을 이미 보아왔다. … 이 문제는 기억이나 지각에 대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R. G. 콜링우드, 서양사학사: 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김봉호 옮김, 탐구당, 2017,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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