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물의 계곡을 넘을 수 있을까

 

위로공단 (Factory Complex, 2015) 

1.
임흥순의 <위로공단>은 한국 현대사의 눈물겨운 흔적, 그 가운데서도 여공애사(女工哀史)를 추적한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애틋하고 치열한 것은 아마 무엇보다 감독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역사적 곡절을 통해 쓰다듬고 위안하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여성 의류 노동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사랑은 또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공경심 가득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70년대의 구로공단과 같은 의류 산업 공단을 대신하는 베트남과 다른 아시아지역의 의류 노동자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그들에게 가해진 착취와 폭력을 응시하려는 의지가 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빼어난 기억의 유사(類似)-다큐멘터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위기의 어떤 면모와 함께 하기도 하면서 또 그를 추월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인 계기를 확보하고자 애쓴다. 무엇보다 그것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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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Hiroshi Yoshimura (吉村弘) – Water Copy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오랜 불화가 종결되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모두 악이란 개념을 향해 줄달음쳤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의 지적 인플레이션은 조지 부시의 악명 높은 ‘악의 축’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진부한 말장난이다. 테러지원국을 지칭하고자 창안된 개념인 악의 축은 이미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을 악의 울타리 안에 놓기 때문이다. 테러는 폭력이란 비유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선제적으로 윤리화한다. 윤리적 악당으로서의 적이란 시점은, 지구화 이후 미국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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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몸으로 쓸 수 있을까?

Four Tet – New Energy (201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역사를 몸으로 쓰다> 전시에 관한 간단한 비평적인 메모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2017년의 전시 프로그램 <역사를 몸으로 쓰다>(2017. 9. 22 ~ 2018. 1. 21)는 지난 수십 년간 몸을 매개로 한 다양한 예술적 실천의 사례들을 한데 모은다. 그것이 한자리에 묶이기기 위해서는 일종의 조작적인 몸짓이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동일한 종류의 예술적 실천으로 환원되도록 이끄는 등가성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그래서 부르는 당시에 그것을 지칭하는 개념도 각이했을(신체예술, 행위예술, 전위예술, 반예술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동일한 것으로 호환(互換)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퍼포먼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퍼포먼스라는 동시대 미술의 독특한 개념이 그 이전의 역사적인 시대의 작품들까지 모두 퍼포먼스로 환원할 수 있는지 물어볼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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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포럼A와 이 포럼A, 그리고 90년대의 한국 미술

Norman McLaren – Dots (1940)

[1]

 

새 <포럼A>는 경계성 성격 장애를 호소한다. 진단이 필요하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말이다. 기억상실과 기억포화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방황하고 있다. 포럼A는 그 방황의 어느 자락에서 더욱 깊은 방황의 고통을 앓는 듯 보인다. 그들은 옛 포럼A의 이름을 승계하자는 선택 앞에서 신경증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계속하기로 한 그 것, 포럼A라는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채택하게 되었을 때의 혼란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듣자면 먼저 이런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그들이 유산상속자임을 머뭇대는 포럼A는 과연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이에 대해 새 포럼A는 그것은 별 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안소현은 “옛 포럼A의 중요한 글들을 읽고 토론을 했지만 그 의의를 정리하고 역사화하는 일은 별도의 비평사적 연구를 통통해 진행할 일이라는 판단”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유산상속을 위해선 먼저 상속될 유산의 가치를 저울질해야 한다. 땡전 한 푼 남기지 않고 파산한 자에게서 상속받을 유산같은 건 없다. ‘어마무시’한 유산을 남겼다면 유산상속 싸움이 불가피하다. 누가 그 유산을 챙길 것인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데 새 포럼A는 유산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무슨 말로 새겨야 옳을까. 새 포럼A가 옛 포럼A로부터 상속, 계승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심지어 알고 싶지 않다면 그러한 명명을 브랜딩(branding)처럼 다루면 될 일이 아닐까. 가볍게, 실용적으로, 마케터의 전술처럼 이름을 사용하면 될 일이다. 백두산에서 길은 물이라 백산수라 부르고, 제주 한라산에서 길은 물이라서 삼다수라고 부른다 한 들, 우리가 그 물의 연원과 정체성을 두고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던가. 그런데도 자기 지명(指名)을 통해 자신의 상속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것, 자신을 호명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은 새 포럼A의 비평 실천에 도사린 어떤 위험과 불안을 토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90년대 문제’라고 부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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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동아시아 역사의 정신분석_로이스 응의 <쇼와의 유령>에 관하여

오시마 나기사 – 감각의 제국

로이스 응은 한동안 동아시아 역사의 음란한 뒤꼍을 해부하는 일을 즐겨왔다. <쇼와의 유령>은 메이지(明治)시대보다 일본인들에게 더 사랑받는 쇼와(昭和)시대의 찬란함 뒤에 깃든 어둡고 음란한 배후를 살핀다. 이는 물론 양차대전과 전후의 부흥기 동안의 단기 20세기의 시대와 일치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냉전 체제의 형성과 소멸에 이르는 시대와 겹치기도 한다. 그런데 로이스 응은 이번 작업에서 동북아시아라는 어떤 역사적인 지정학적 권역의 기원을 향한 탐색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한동안 역사학자들이 쾌재를 부르며 달려들었던 일본 군국주의의 기원적인 인물인 기시 노부시케(岸信介)와 그의 동반자이자 후계자이며 어쩌면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박정희라는 인물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를 아시아 파시즘의 정신분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이스 응이 강변하듯이 박정희는 만주의 부활이자 만주의 (재)탄생일 남한 근대화의 주역이고 그는 기시 노부스케의 분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만주의 죽음은 전후 아시아가 탄생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기시 노부스케라는 한 명의 비범하고 괴물 같은 인물이 있었다고 능청스레 말하며 인격의 해부학에서 역사의 고고학으로 비약하는 것은 지지할만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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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모순, 역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또 다른 가설

Stalin

그로이스라는 광인(狂人)

그로이스를 세상에 알린 것은 뭐니 해도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란 저작이었다. 그는 기절초풍할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구 소련의 혁명적 아방가르드에서 스탈린 체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둘러싼 세간의 일치된 의견을 거부하였다. 둘 사이에 단절, 타락, 억압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 상식을 부인한다는 것은 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조잡하고 진부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타락하고야 말았다는 생각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예술을 망치는지 여봐란 듯이 증명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서구 좌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타락 이전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아방가르드와 타락 이후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대비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사회주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준적 또는 지배적인 가설을 그로이스는 여봐란 듯이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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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주의자인 척 한다는 것: 스펙타클의 사회 출간 50주년을 자축하며

GANG OF FOUR At Home He’s a Tourist

이룩할 공동체는 없다. 단지 파괴할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가하기로 하자. 우리는 상품과 화폐가 매개하고 군림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거룩한 자본주의라는 상품-화폐-자본 공동체(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이윤, 임금 지대의 성삼위일체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상품과 화폐는 지금껏 역사상 존재했던 초월성 가운데 그 무엇도 넘볼 수 없는 초월성을 자랑한다. 우리는 화폐라는 끈을 통해 서로와 마주한다. 우리는 각자의 돈이며 돈인 한 우리는 서로를 친절히 상대한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과 미움과 분노로 엮여있기 전에, 의식할 수 없는 화폐 + 자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내게 돈이 되기 때문이라면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매개된다는 뜻이다. 그런 것을 부인한 채 온기 가득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개똥이다. 개똥 더미 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은, 입을 닥쳐야 한다. 그리고 상황주의자들의 글과 구호와 저주와 악담과 축복과 놀이를 조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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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유토피아가 지겹다

LCD Soundsystem – tonite

그래서 장차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누가 물어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들 그런 꿈을 꾸고는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갑작스레 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을 뽑은 지 몇 달이 되어간다. 다들 참을성이 큰 탓일까. 대통령을 몰아낼 만큼 대단했던 기세는 변화를 향한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싶다. 다들 팔짱을 끼고 일단 지켜보자는 심산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그간 쌓였을 변화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 꿈속엔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일까. 꿈이란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것이 오늘날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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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경제 시대의 스펙터클 – 시각예술의 관객/소비자

Guy Debord – 분리 비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

아마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참조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잊지 않고 새기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테제 34)라거나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테제 1) 등. 그런데 이제 슬슬 그의 비범한 주장에 의심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어떨까.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제 값을 하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것을 지켜보아야 또 그것에 얼마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 혹은 관심 경제란 새로운 경제학이나 마케팅 용어는, 오늘날 이미지가 처한 희한한 운명을 약삭빠르게 설명한다. 말 그대로 주목이 오늘날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구실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목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얼마나 오랜 동안 보는 이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융단폭격에 시달린다. 관람자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것을 응시하고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지는 시야를 급습한다. 혹은 꽁무니를 뺀다. 관람객은 미처 몇 초도 견디지 못한 채 다른 이미지로 이동한다. 과연 누가 스펙터클의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이제 스펙터클은 자신들끼리 서로의 적이 되어 더 선동적인 스펙터클이 되겠다고 잔인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펙터클의 적은 그를 응시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다른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제 더욱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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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우울은 내게로 옮겨집니다. – 렌 항 任航에게

Metronomy – The Upsetter

당신이 세상을 떠난 그날, 당신이 살던 기이한 세계, 아마 당신을 알고 지내던 이들이라면 모두 당신을 처음 조우하고 또 그 후에도 당신을 알기 위해 항상 찾던 곳인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나 역시 당신의 부음을 들었답니다. 먼저 페이스북에서 전 당신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제 친구들의 잇단 피드를 보았지요. 일본에서 게이 포르노 배우기도 하고 퀴어 독립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이마이주미 씨(氏)는 당신의 사진집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당신의 영면을 기원했습니다. 지난 해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인 타셴(Taschen)에서 출판한 책이지요. 렌항, 당신의 이름 뒤에 R.I.P(Rest In Peace)이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낱말이 함께 짝을 이뤄,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제 시야에 출몰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다운 장례식과 당신다운 추모였겠지요. 저도 당신을 처음 해후한 것은 핀터레스트(Pinterest)인가 하는 인터넷의 소셜 미디어 채널 가운데 하나였지 싶어요. 당신의 이미지를 위한 아주 적절한 플랫폼이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부터 알게 된 텀블러(Tumblr)의 당신 페이지를 이따금 찾곤 합니다. 이제 그것은 영원히 업데이트되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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