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 모순, 역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또 다른 가설

Stalin

그로이스라는 광인(狂人)

그로이스를 세상에 알린 것은 뭐니 해도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란 저작이었다. 그는 기절초풍할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구 소련의 혁명적 아방가르드에서 스탈린 체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둘러싼 세간의 일치된 의견을 거부하였다. 둘 사이에 단절, 타락, 억압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 상식을 부인한다는 것은 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조잡하고 진부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타락하고야 말았다는 생각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예술을 망치는지 여봐란 듯이 증명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서구 좌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타락 이전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아방가르드와 타락 이후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대비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사회주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준적 또는 지배적인 가설을 그로이스는 여봐란 듯이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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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주의자인 척 한다는 것: 스펙타클의 사회 출간 50주년을 자축하며

GANG OF FOUR At Home He’s a Tourist

이룩할 공동체는 없다. 단지 파괴할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가하기로 하자. 우리는 상품과 화폐가 매개하고 군림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거룩한 자본주의라는 상품-화폐-자본 공동체(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이윤, 임금 지대의 성삼위일체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상품과 화폐는 지금껏 역사상 존재했던 초월성 가운데 그 무엇도 넘볼 수 없는 초월성을 자랑한다. 우리는 화폐라는 끈을 통해 서로와 마주한다. 우리는 각자의 돈이며 돈인 한 우리는 서로를 친절히 상대한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과 미움과 분노로 엮여있기 전에, 의식할 수 없는 화폐 + 자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내게 돈이 되기 때문이라면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매개된다는 뜻이다. 그런 것을 부인한 채 온기 가득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개똥이다. 개똥 더미 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은, 입을 닥쳐야 한다. 그리고 상황주의자들의 글과 구호와 저주와 악담과 축복과 놀이를 조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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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유토피아가 지겹다

LCD Soundsystem – tonite

그래서 장차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누가 물어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들 그런 꿈을 꾸고는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갑작스레 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을 뽑은 지 몇 달이 되어간다. 다들 참을성이 큰 탓일까. 대통령을 몰아낼 만큼 대단했던 기세는 변화를 향한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싶다. 다들 팔짱을 끼고 일단 지켜보자는 심산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그간 쌓였을 변화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 꿈속엔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일까. 꿈이란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것이 오늘날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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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경제 시대의 스펙터클 – 시각예술의 관객/소비자

Guy Debord – 분리 비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

아마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참조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잊지 않고 새기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테제 34)라거나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테제 1) 등. 그런데 이제 슬슬 그의 비범한 주장에 의심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어떨까.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제 값을 하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것을 지켜보아야 또 그것에 얼마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 혹은 관심 경제란 새로운 경제학이나 마케팅 용어는, 오늘날 이미지가 처한 희한한 운명을 약삭빠르게 설명한다. 말 그대로 주목이 오늘날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구실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목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얼마나 오랜 동안 보는 이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융단폭격에 시달린다. 관람자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것을 응시하고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지는 시야를 급습한다. 혹은 꽁무니를 뺀다. 관람객은 미처 몇 초도 견디지 못한 채 다른 이미지로 이동한다. 과연 누가 스펙터클의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이제 스펙터클은 자신들끼리 서로의 적이 되어 더 선동적인 스펙터클이 되겠다고 잔인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펙터클의 적은 그를 응시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다른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제 더욱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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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우울은 내게로 옮겨집니다. – 렌 항 任航에게

Metronomy – The Upsetter

당신이 세상을 떠난 그날, 당신이 살던 기이한 세계, 아마 당신을 알고 지내던 이들이라면 모두 당신을 처음 조우하고 또 그 후에도 당신을 알기 위해 항상 찾던 곳인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나 역시 당신의 부음을 들었답니다. 먼저 페이스북에서 전 당신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제 친구들의 잇단 피드를 보았지요. 일본에서 게이 포르노 배우기도 하고 퀴어 독립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이마이주미 씨(氏)는 당신의 사진집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당신의 영면을 기원했습니다. 지난 해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인 타셴(Taschen)에서 출판한 책이지요. 렌항, 당신의 이름 뒤에 R.I.P(Rest In Peace)이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낱말이 함께 짝을 이뤄,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제 시야에 출몰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다운 장례식과 당신다운 추모였겠지요. 저도 당신을 처음 해후한 것은 핀터레스트(Pinterest)인가 하는 인터넷의 소셜 미디어 채널 가운데 하나였지 싶어요. 당신의 이미지를 위한 아주 적절한 플랫폼이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부터 알게 된 텀블러(Tumblr)의 당신 페이지를 이따금 찾곤 합니다. 이제 그것은 영원히 업데이트되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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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赵亮-上訪 Petition

踏遍靑山, 問計人民
청산을 다니며 인민에게 계책을 묻는다.

계시와도 같은 영화들

얼마 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사회참여적 독립 다큐멘터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의 저자인 댄 에드워즈(Dan Edwards)는, 서두에서 자신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예기치 않은 계기를 술회한다. 그는 홍콩국제영화제의 프레스룸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자오량(赵亮, Zhao Liang)의 다큐멘터리 작품 <고소(上访 Petition)>을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을 한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 역시 마주했던 순간을 전한다. 그가 보았던 장면은 어느 노구의 고소인들이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차에 치여 온 몸이 산산조각 난 후의 모습이다. 그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의 고소인들은 철로를 누비고, 철로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그의 살점, 머리 조각을 찾아내다 결국 바닥에 뒹굴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주워든다. 몇 년간 중국 정부가 소유했던 월간 잡지에서 일하던 댄 에드워즈는 자신이 매일 북경의 거리를 오가며 감지했던 불편하고 음산한 느낌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한 영화와 마주쳤다. 개혁과 개방 이후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그것도 수도인 북경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곧잘 맞닥뜨려야 했던 남루한 행색의 겉도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는 마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소>는 번영하고 있는 표면의 현상 뒤앙에 놓인 중국 동시대적 상황의 숨겨진 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중국 다큐멘터리 세계에 대한 열광과 몰두는 그 첫 상영을 통해 굳어졌다.” Dan Edwards,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Alternative Visions, Alternative Publ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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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존재론적 전환이란 게 가능할까

RAT FILM (Theo Anthony dir.)

지난 십여 년간 동시대 철학을 급습하여 성가를 높이고 있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은, 다큐멘터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런 물음은 너무 성급한 것일까. 혹은 비평이나 이론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나 즐겁게 곱씹을 주변적인 질문일까. 그것을 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라 치부하기엔 이미 주요 미술 전시를 석권한 작업들, 무엇보다 영상 작품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몇 해 전부터 영상 전시를 찾을 때면, 혹시 알아보지 못할 관람자들에게 충고라도 하듯이 자신이 존재론적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는 작품과 마주칠 일이 잦아졌다. 이를테면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마주하게 된 영상작품 가운데 하나는 작품설명에서 작가 자신이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tned Ontology)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버젓이 역설한다. 마리에 쾰백 이워슨(Marie Kølbæk Iversen)의 거울 치료(Mirror Therapy)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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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정치적인 문자들

Jim O’Rourke – Simple Songs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3년 겨울, 나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띤 그렇지만 또 조금은 스스로를 으쓱해 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품은 제자들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들어섰는지 모를 스케이트장이 시청 앞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집회라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아이들을 거기로 불러낸 것은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 때문이었다. 줄여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혹은 더 줄여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로 알려진 그 대자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한 대학생이 붙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주현우란 학생은 대학 후문에 그 대자보를 붙였고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신문은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대화를 두고 ‘안녕 세대’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우리가 안녕들 할 수 있을지 되뇌며 친구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 묻는 이 대자보가 왜 그토록 큰 호응을 받았는지 그 연유를 짐작해 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회학적인 분석, 그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세대론적인 담론을 가볍게 들먹이며 그들이 처한 고통과 비참이 그 발언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안녕들하십니까 만큼의 효과를 촉발하는데 이르지 못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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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


Billy Bragg – The Internationale

“사회적 긴장관계들의 저 건너편에서 존재론적인 즉자존재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음악은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절규한다. 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노래하지 않는 역사

1980년대 후반, 종로나 영등포의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할 이들을 부르는 구호를 외치고 곧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근처에서 딴전 피우듯 눈길을 던지던 이들은 노래를 이어 부르며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로 시작되는 <흔들리지 않게>이기 일쑤였다. 그 노래는 어쩌면 연행될지 모를 불안, 미리 누설된 정보로 들이닥칠 경찰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그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에 대한 다짐을 전송하였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그들의 노래였으며, 함께 할 미래의 누구와 함께 되는 하나를 예언하는 노래였으며,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투쟁을 간청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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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사진의 유령들

Arca – Desafío

만취한 채 책을 읽었던 탓일까 아니면 나이가 먹어 심약해진 탓일까. 결국 늦은 밤 나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항복한 채 책을 덮었다.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책”이란 제목의 글을 쓰는 것은 어떨까 잠시 생각하였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새벽 3시가 지나고 있었다. 결국 손에서 놓고 만 책은, 며칠 전 세상에 나온 디디에-위베르만의 사진 에세이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2017)이었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으려 했던 나치수용소의 유태인의 광기에 가까운 용기를 생각하면, 책의 제목처럼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진-이미지를 세상에 남기겠다는 각오를 생각하면, 나의 뒷걸음질은 비겁한 짓이리라. 끔찍한 살인과 죽음의 광경을 전하는 언어를 견디지 못한 채 욕지기를 느끼며 책을 덮은 물러터진 비위 역시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자들의 살갗과 표정 가까이 바싹 다가가 그것의 표면을, 윤곽을, 보이지 않는 비명을 확인하도록 하는 윤리적 요청은 가누기 어려웠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들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 무엇보다 아무런 값을 못하는 사진-이미지의 무력함에 대하여 한 비평가가 보내는 고문과도 같은 글은, 우리를 아니 어쩌면 나를 걷잡을 수 없는 죄의식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진적 진실’(photographic truth)을 비웃고 조롱하며 보낸 지난 포스트모던 사진 비평의 철없는 불장난에 대하여, 그는 거칠게 화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숨 막힐 듯 빠른 속도의 문장을 따라가며 어느 사진-이미지 앞에서도 미처 몇 초를 머물지 못하는 부박함을 힐난하는 듯한 저자의 고집에, 몇몇은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사진-이미지는 즐거움을 주고, 잠시 쾌적한 기분에 젖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냉소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단 한 장의 사진-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보전되고 증언하는데 동원되었던 압도할만한 사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손에 주어진 4장의 아우슈비츠의 사진, 영원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그 끔찍한 지옥이 실재했음을 고발하는 그 사진은, 우리에게 사진-이미지는 그렇게 거품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촉구한다. 이 때 사진은 어떤 정보를 담은 기록이기에 앞서 이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진-이미지에서 어떤 윤리적 부하(負荷)도 찾을 수 없는 듯 보이는 교만한 이미지 소비의 시대를 끔찍하게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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