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줌-인

Dj Koze – Pick Up

줄리앙 프레비유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궁극의 핀치투줌)>은 타공판 위에 설치된 물리치료기계에 연결된 손을 보여준다. 타공판의 지지대에 장착된 고리와 끈은 ‘핀치-투-줌(pinch-to-zoom)’ 동작을 완강히 제약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는 구속에 저항하며 그 동작을 실행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꼬집어 확대해 보기란 동작을 가리키는 ‘핀치투줌’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관습적 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고 조작을 수행할 필요를 절약하며 그 모두를 우아한 동작 하나에 집적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해당 영역을 설정하고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의 복잡한 정보처리와 명령을 행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두 손가락을 모았다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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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적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음모 다큐멘터리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의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오늘보다>가 있다. 나는 그 잡지의 정기구독자이다. 배달된 지난 5월호를 보다 적잖이 놀랐다. 그 달치에 이례적이라 할 “여는 글”이 실렸던 탓이다. 편집자 노트쯤에 해당될 글에서 편집실장은 마침 개봉해 관심을 모은 어느 한 다큐멘터리를 상대한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털어놓으며 그 작품이 의지하고 있는 음모론에 대한 이의를 적는다. 글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고의침몰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있다. 아직도 이 사건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과 구조 실패, 이후의 국가 탄압까지. 2014년 4월 16일 하루가 아니라 전후(前後) 몇 년에 걸친 이 참사의 과정을 우리는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침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 의도를 감추기 위해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했다는 답은 너무나 쉬운 답이다.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답을 쉽게 찾으려는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도 있다. 이를 잊어서도 안 된다.” 박상은, 세월호에 대한 어떤 쉬운 답 <그날, 바다>, 오늘보다, 2018년 5월호, 1쪽.
어느 다큐멘터리 작품이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된다. 이는 흥미로운 사태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형세를 생각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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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8.

Sufjan Stevens – Visions of Gideon

계속된 몸살로 옴짝달싹 못한 채 누워있다, 바람이라도 쐴 겸 영화를 보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멜로라면 가장 거리가 멀 듯 뵈는 제자가 강추한 멜로란 것도 이 영화를 볼 의지를 북돋웠다. 오프닝 크레딧에 각본 제임스 아이보리를 확인했을 때, 나는 얼추 무엇을 볼지 예상할 듯한 확신이 들었다.(확인해보니 그는 이 영화의 각본으로 오스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보리 형제의 <모리스 Maurice>를 이미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에서 그것의 흔적을 뻑뻑하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의 윤리에 천착하는 근년의 멜로 영화 가운데 제법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장점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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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물의 계곡을 넘을 수 있을까

 

위로공단 (Factory Complex, 2015) 

1.
임흥순의 <위로공단>은 한국 현대사의 눈물겨운 흔적, 그 가운데서도 여공애사(女工哀史)를 추적한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애틋하고 치열한 것은 아마 무엇보다 감독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역사적 곡절을 통해 쓰다듬고 위안하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여성 의류 노동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사랑은 또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공경심 가득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70년대의 구로공단과 같은 의류 산업 공단을 대신하는 베트남과 다른 아시아지역의 의류 노동자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그들에게 가해진 착취와 폭력을 응시하려는 의지가 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빼어난 기억의 유사(類似)-다큐멘터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위기의 어떤 면모와 함께 하기도 하면서 또 그를 추월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인 계기를 확보하고자 애쓴다. 무엇보다 그것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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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赵亮-上訪 Petition

踏遍靑山, 問計人民
청산을 다니며 인민에게 계책을 묻는다.

계시와도 같은 영화들

얼마 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사회참여적 독립 다큐멘터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의 저자인 댄 에드워즈(Dan Edwards)는, 서두에서 자신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예기치 않은 계기를 술회한다. 그는 홍콩국제영화제의 프레스룸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자오량(赵亮, Zhao Liang)의 다큐멘터리 작품 <고소(上访 Petition)>을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을 한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 역시 마주했던 순간을 전한다. 그가 보았던 장면은 어느 노구의 고소인들이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차에 치여 온 몸이 산산조각 난 후의 모습이다. 그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의 고소인들은 철로를 누비고, 철로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그의 살점, 머리 조각을 찾아내다 결국 바닥에 뒹굴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주워든다. 몇 년간 중국 정부가 소유했던 월간 잡지에서 일하던 댄 에드워즈는 자신이 매일 북경의 거리를 오가며 감지했던 불편하고 음산한 느낌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한 영화와 마주쳤다. 개혁과 개방 이후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그것도 수도인 북경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곧잘 맞닥뜨려야 했던 남루한 행색의 겉도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는 마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소>는 번영하고 있는 표면의 현상 뒤앙에 놓인 중국 동시대적 상황의 숨겨진 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중국 다큐멘터리 세계에 대한 열광과 몰두는 그 첫 상영을 통해 굳어졌다.” Dan Edwards,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Alternative Visions, Alternative Publ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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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존재론적 전환이란 게 가능할까

RAT FILM (Theo Anthony dir.)

지난 십여 년간 동시대 철학을 급습하여 성가를 높이고 있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은, 다큐멘터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런 물음은 너무 성급한 것일까. 혹은 비평이나 이론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나 즐겁게 곱씹을 주변적인 질문일까. 그것을 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라 치부하기엔 이미 주요 미술 전시를 석권한 작업들, 무엇보다 영상 작품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몇 해 전부터 영상 전시를 찾을 때면, 혹시 알아보지 못할 관람자들에게 충고라도 하듯이 자신이 존재론적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는 작품과 마주칠 일이 잦아졌다. 이를테면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마주하게 된 영상작품 가운데 하나는 작품설명에서 작가 자신이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tned Ontology)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버젓이 역설한다. 마리에 쾰백 이워슨(Marie Kølbæk Iversen)의 거울 치료(Mirror Therapy)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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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다도해를 떠다니는 여객선의 승객들 – 퀴어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


James Blake – Radio Silence

얼마 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임성순의 신작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제법 허를 찌른다. 이 소설은 우연히 비뇨기과엘 들러 전립선치료를 받던 중 전립선 오르가즘의 신세계에 입문한 중년 남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 여섯으로, “그곳이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중산층의 대체로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만성전립선염을 치료받으러 간 그는 인생 최고의 굴욕을 겪는다. 버젓이 엉덩이를 깐 채 항문을 남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가 전립선마사지를 위해 처방받은 아네로스라는 신기한 도구에 눈을 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러기아빠인 그는 이제 변태와 게이라는 욕설이 주렁주렁 달린 게시판을 눈으로 밟으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즐기는 신세계의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멀쩡한 아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순종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압축하는 ‘아재’ 혹은 ‘개저씨’의 화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뜻밖의 인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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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격동 어느 어둑한 골목 끝 환한 불빛, 퀴어 극장


My own private idaho trailer

벌써 20여년 가까이 되어버린 오랜 시절의 일이었다. 지금은 문을 닫고 사라지고 만 시네코드선재가 자리하고 있던 곳, 아트선재센터 지하에 인적 드문 극장이 있었다. 프로시니엄 무대 뒤편으로 흰 색의 스크린이 놓여있고 그 맞은편엔 아마 붉은 색이었으리라 짐작하는 푹신한 팔걸이의자들이 느긋한 부채꼴로 펼쳐져 있었다. 그 때 인사동을 지나 종로경찰서 앞 건널목을 건너 다시 풍문여고를 거쳐 극장에 이르는 길은 소란스러운 지금과 달리 제법 한적했다. 그러나 한 번도 스산했던 적은 없다. 외려 그곳은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몰려든 이들로 갑자기 부산한 세계로 둔갑하기도 했다. 1998년 10월 16일, 1년 전 무산되었던 서울퀴어영화제가 아트선재센터에서 마침내 개최되었던 날도 그랬을 것이다. 그 날 어떤 이들이 영화제를 찾아주었는지 낱낱이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화제를 찾는 일 자체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일일 밖에 없던 시절, 영화제를 찾은 이들은 불안하고 근심어린 낯빛으로 혹은 적잖이 상기된 표정과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극장을 서성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가운데 누군가는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이를 난생 처음 조우하기도 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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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8.

Brody-Son-of-Saul-1200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 안티고네적 윤리의 삽화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이 영화의 모든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슈비츠라는 집단적이면서 정치적인 악을 고발하기보다 끝까지 자신의 아들을 온전히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사울의 집요한 고집을 과연 옹호해도 좋을 것인가. 감독은 이를 말하는 데 영화의 모든 것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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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에 대한 몇 가지 생각

The Field – A Paw in My Face

뒤척이며 고백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기분이 쾌적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모래>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모래>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성장한 여성 감독의 자술서이다. 감독은 반목하거나 아니면 무심했던 아버지의 세계를 헤쳐 보는 딸이다.
그녀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고, 꾀죄죄하게 영락한 아파트에서 얼마라도 더 건지겠다고 버티는 부모님을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진보적인 당파를 지지하고 아버지는 열성 여당 지지자이다. 그러나 그 여당은 정치적 신의를 바치는 정당이라서 지지하는 당이 아니다. 악착같이 살아 마련한 유일한 삶의 자산인 아파트의 값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인 탓에 여당은 아버지의 당파이다. 물론 지배 당파는 항상 그렇게 지지를 동원하지만 말이다. 반면 맏딸인 감독은 배우겠다는 것이라면 두 말 없이 밀어줘 대학원까지 보내놓았더니 취미 생활로나 삼았을 영화를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나쁜 딸이다.
그렇게 살았던 한 가족이 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가족이란 인연으로 흩어지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 말이다. 그리고 그 가족은 대치동을 떠난다.
누구는 부동산 공화국이라고 혀를 차며 개탄하고, 누구는 토건 국가라며 진저리를 치는 이 나라에서, 치부의 가장 안전한 수단은 뭐니 뭐니 해도 강남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과 상관없이 안전하게 제 값을 지켜주기에 은행에 맡겨두는 돈보다 안전하고 사업을 하는 것보다 믿음직스럽다. 펀드니 주식이니 설쳐도 그것은 언제나 생각하기도 싫은 리스크란 이름의 유령을 동반하고 다니지만, 그래도 강남의 아파트는 아직은 리스크 제로이다. 강남 아파트는 사회적인 쓸모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가치를 유지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물신이다.
<모래>의 주인공일 아버지는 퇴직 후 옷 공장을 운영하고 어머니는 남대문에서 그 옷을 판다. 아마 사업 수완이 있거나 했다면 덤볐을 리 만무한 사양 산업에, 부모는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것은 매 달 꼬박 갚아야 하는 빚만 안겨준다. 따라서 다시 아파트이다. 어쩌다 목돈이 생겨 욕심을 부려 빚을 좀 더 얹어 장만한 유일한 미래의 보증일 그 아파트 말이다. 해결책은 안전한 생존의 모든 약속인 아파트를 처분하는 것이지만 그러기 어렵다.
어쩌다 목돈을 쥐게 되어 강남으로 건너 간 이들이 모여 사는 곳, 아마 그런 곳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대치동의 은마아파트일 것이다. 중동에서 공사장에서 일을 하였고, 다시 서울에서 답십리에서 아파트를 짓고, 집 장사를 한다는 게 무슨 짓인지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부모님은 강남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국 퇴장한다.
<모래>는 그렇게 은마아파트에 살게 된 그러나 그곳을 떠나게 되어버린 한 가족에 관한 초상을 그린다. 아파트 한 채가 좀 더 나은 형편으로 상승할 수 있는 모든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기만일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사고 팔 수 있는 자산에 불과한 아파트를 소유한 자들과 모든 부는 아파트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은 채 아파트 한 채에 인생을 걸게 된 이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라곤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강남에 입성하였지만 결국 실패를 한 채, 아니 그 물신의 유혹에서 마침내 풀려난 채 강북으로 떠나게 된 가족의 초상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그런데 <모래>를 자전(自傳) 다큐멘터리로 읽는 것은 아무래도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모래>는 아무런 자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자술을 피하려 애쓴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외려 자술하는 것은 은마아파트 그 자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길지 않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시정이 넘치는 부분을 찾는다면, 혹은 감독이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드러내는 주관적인 장면을 찾는다면, 내 생각엔 그것은 쓸쓸하게 부식하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롱 테이크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 얼굴 없는 장면들은 다큐멘터리에서이든 혹은 아니면 극영화에서이든 낯선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는 클리셰(cliché)라고 불러도 좋을 장면들일 것이다. 그런 장면들은 전개되는 이야기를 쪼개고 나눠주는 삽입구일 수도 있고 영화에서 지속되는 정조를 상기하기 위해 수사적인 반복 어구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
<모래>에서도 그런 관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창을 통해서 바라본 아파트 바깥의 풍경이거나 달리는 차창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 혹은 미국 뉴욕의 마천루 혹은 차창에서 바라본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투여된 분주하고 화려한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을 찾을 수 없는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의 풍경, 이런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래>라는 영화 속에 어쩌면 과하다 싶으리만치 자주 등장하는 이 삽입어구에 대하여 마땅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중재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떤 서사적인 매듭일까. 나는 그것이 마치 문장 속의 말줄임표처럼 카메라가 어떤 생략을 표시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이미지를 찾지 못한 채 거기에 시야 속으로 들어온 화면일 것이다.
감독은 차마 말을 다 못하거나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화면은 감독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래>가 아름답다. 그것은 은마아파트에 살았다 떠나게 된 어느 가족의 사회사를 그려내는데 급급하지 않으려 하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화해하고자 다가서는 윤리적인 대상이 가족일 때, 과연 누가 그것에 완벽한 말을 가지고 있을까. 감독은 범람하는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TV 속의 감상적 휴먼 다큐들과 거리를 둔다. 거기에서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황폐하고 불임일 뿐인 수다일 뿐이다.
그러나 <모래>는 ‘차마’ 혹은 ‘미처’ 같은 수사적인 말들을 화면으로 옮긴다. 어떤 이야기에서 진실이란 이런 세부의 수사법에 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