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주의자인 척 한다는 것: 스펙타클의 사회 출간 50주년을 자축하며

GANG OF FOUR At Home He’s a Tourist

이룩할 공동체는 없다. 단지 파괴할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가하기로 하자. 우리는 상품과 화폐가 매개하고 군림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거룩한 자본주의라는 상품-화폐-자본 공동체(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이윤, 임금 지대의 성삼위일체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상품과 화폐는 지금껏 역사상 존재했던 초월성 가운데 그 무엇도 넘볼 수 없는 초월성을 자랑한다. 우리는 화폐라는 끈을 통해 서로와 마주한다. 우리는 각자의 돈이며 돈인 한 우리는 서로를 친절히 상대한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과 미움과 분노로 엮여있기 전에, 의식할 수 없는 화폐 + 자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내게 돈이 되기 때문이라면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매개된다는 뜻이다. 그런 것을 부인한 채 온기 가득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개똥이다. 개똥 더미 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은, 입을 닥쳐야 한다. 그리고 상황주의자들의 글과 구호와 저주와 악담과 축복과 놀이를 조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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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유토피아가 지겹다

LCD Soundsystem – tonite

그래서 장차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누가 물어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들 그런 꿈을 꾸고는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갑작스레 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을 뽑은 지 몇 달이 되어간다. 다들 참을성이 큰 탓일까. 대통령을 몰아낼 만큼 대단했던 기세는 변화를 향한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싶다. 다들 팔짱을 끼고 일단 지켜보자는 심산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그간 쌓였을 변화를 향한 기대가 무엇인지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 꿈속엔 어떤 세계가 있었던 것일까. 꿈이란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것이 오늘날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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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경제 시대의 스펙터클 – 시각예술의 관객/소비자

Guy Debord – 분리 비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

아마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참조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잊지 않고 새기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테제 34)라거나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테제 1) 등. 그런데 이제 슬슬 그의 비범한 주장에 의심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어떨까.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제 값을 하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것을 지켜보아야 또 그것에 얼마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 혹은 관심 경제란 새로운 경제학이나 마케팅 용어는, 오늘날 이미지가 처한 희한한 운명을 약삭빠르게 설명한다. 말 그대로 주목이 오늘날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구실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목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얼마나 오랜 동안 보는 이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융단폭격에 시달린다. 관람자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것을 응시하고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지는 시야를 급습한다. 혹은 꽁무니를 뺀다. 관람객은 미처 몇 초도 견디지 못한 채 다른 이미지로 이동한다. 과연 누가 스펙터클의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이제 스펙터클은 자신들끼리 서로의 적이 되어 더 선동적인 스펙터클이 되겠다고 잔인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펙터클의 적은 그를 응시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다른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제 더욱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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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정치적인 문자들

Jim O’Rourke – Simple Songs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3년 겨울, 나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띤 그렇지만 또 조금은 스스로를 으쓱해 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품은 제자들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들어섰는지 모를 스케이트장이 시청 앞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집회라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아이들을 거기로 불러낸 것은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 때문이었다. 줄여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혹은 더 줄여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로 알려진 그 대자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한 대학생이 붙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주현우란 학생은 대학 후문에 그 대자보를 붙였고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신문은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대화를 두고 ‘안녕 세대’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우리가 안녕들 할 수 있을지 되뇌며 친구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 묻는 이 대자보가 왜 그토록 큰 호응을 받았는지 그 연유를 짐작해 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회학적인 분석, 그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세대론적인 담론을 가볍게 들먹이며 그들이 처한 고통과 비참이 그 발언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안녕들하십니까 만큼의 효과를 촉발하는데 이르지 못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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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


Billy Bragg – The Internationale

“사회적 긴장관계들의 저 건너편에서 존재론적인 즉자존재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음악은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절규한다. 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노래하지 않는 역사

1980년대 후반, 종로나 영등포의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할 이들을 부르는 구호를 외치고 곧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근처에서 딴전 피우듯 눈길을 던지던 이들은 노래를 이어 부르며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로 시작되는 <흔들리지 않게>이기 일쑤였다. 그 노래는 어쩌면 연행될지 모를 불안, 미리 누설된 정보로 들이닥칠 경찰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그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에 대한 다짐을 전송하였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그들의 노래였으며, 함께 할 미래의 누구와 함께 되는 하나를 예언하는 노래였으며,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투쟁을 간청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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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The Doors – Alabama Song At The Hollywood Bowl Live

나이 먹은 탓인가. 걸핏하면 심화가 치밀어 오른다. 눈이 침침하고, 자고나면 흰 머리가 희끗하고, 매일 다르게 눈 밑이 쳐지는 꼴을 봐서는, 분명 짜증을 달고 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도 그런 나이에 따른 짜증인지 모를 일이다. 걸음을 했댔자 찾는 책도 없어 걸음을 마다하던 서점엘 우연히 들렸다, 그만 또 짜증이 났다. 사단의 원인은 서점 입구에 자리한 가판대 때문이었다. 거기엔 서로 다른 장정과 표지를 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처음 책이 나올 때의 표지를 복원한 판본부터 그간 이런저런 곳에서 낸 갖은 모양의 책들이 주르르 낯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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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이후의 세대 – 청년세대는 어떻게 소멸하게 되었는가

Sonic Youth – Superstar

사회이론이 세대를 다루는 방식은 뜻밖으로 소박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심하리만치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대란 것을 자연스런 사회적 사실로 여기고 각 세대의 정체성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 청년세대, 장년 세대, 노년 세대 등으로 분류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연령이라는 눈금에 따라 다양하게 세대를 구분하고 그렇게 구분된 각 세대에 공통된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세대의 사회학이란 것이 허술한 생각임을 간파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세대란 것, 즉 자신의 세대적 소속을 주어로서 삼으면서 “우리 세대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청년세대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청년세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대들은 평범한 인구학적 사실들, 즉 연령, 건강, 학력, 소득 등의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딱히 자신 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노인문화란 말은 어쩐지 어색하다. 노년 세대나 장년 세대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인구학적 지식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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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다도해를 떠다니는 여객선의 승객들 – 퀴어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


James Blake – Radio Silence

얼마 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임성순의 신작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제법 허를 찌른다. 이 소설은 우연히 비뇨기과엘 들러 전립선치료를 받던 중 전립선 오르가즘의 신세계에 입문한 중년 남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 여섯으로, “그곳이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중산층의 대체로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만성전립선염을 치료받으러 간 그는 인생 최고의 굴욕을 겪는다. 버젓이 엉덩이를 깐 채 항문을 남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가 전립선마사지를 위해 처방받은 아네로스라는 신기한 도구에 눈을 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러기아빠인 그는 이제 변태와 게이라는 욕설이 주렁주렁 달린 게시판을 눈으로 밟으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즐기는 신세계의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멀쩡한 아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순종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압축하는 ‘아재’ 혹은 ‘개저씨’의 화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뜻밖의 인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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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디즈니랜드화, TV 생활사 박물관 [다모]

어디서 보았는지 가물거리지만 곱씹을수록 섬뜩한 이야기가 있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도무지 영문을 알길 없는 괴이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단다. 그 사건을 취재하러 온 방송국 기자가 한 동네 사는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겠냐고. 그랬더니 주민 왈, “글쎄요. 몇 년 안에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도 뭔 일이 났는지 알겠지요.” 그 주민은 아주 영특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 시대에 역사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지는지 정곡을 짚고 있다. 지금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굳이 애써 물을 필요가 없다. 하물며 내가 살기도 전에 벌어진 일들이 무슨 진실을 갖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조만간 대중문화가 먹기 좋고 보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여 방부처리된 패스트푸드처럼 내게 배달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대중문화는 역사가 어떤 이미지로 규정되고 소비되어야 할지 결정해주고 있다.

대박까지는 아니겠지만, [옥탑방 고양이]를 대신해 등장한 새 티비 드라마 [다모]가 뜰 기세이다. “퓨전 무협 사극”이라는 아리송한 간판을 달고 나온 이 드라마는 [와호장룡]의 유려한 와이어 액션을 본뜬 데다 유치찬란한 멜로적 요소와 수사극이라는 연속극의 얼개를 뒤죽박죽 뒤섞어 놓은 짬뽕 드라마이다. [다모]란 드라마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역사를 소비하는 포스트모던한 방식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신분차별의 사회에서 서얼 출신의 포청 관리와 역적을 꾀한 양반 가문 출신의 노비인 여주인공과 대동 세상을 꿈꾸는 어느 혁명아의 진부한 삼각관계가 이 드라마를 엮는 얼개이다. 조선시대 후기란 배경은 물론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즐겁게 소비하기 위해 시청자들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저 분위기를 잡아주는 배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독특한 이야기의 장르가 언제나 현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쓰여진 과거일 뿐이라지만 그 과거는 더 이상 무슨 의미심장한 역사의 법칙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현재가 무엇인지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역사는 이미 그 역사를 전유할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잃은 지 오래이다. 국민적 정체성 아래 우리를 묶어주던 공통의 과거로서의 역사는 고작 공무원 시험에나 등장하는 국사일 뿐이다. 피억압 계급으로서의 민중의 역사는 탈근대의 낭만적 신화가 되어 대하무협지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에서의 18일]을 읽으며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 머리를 싸매는 것은 바보짓이다. [나폴레옹과 조세핀 문화미술대전] 박람회에 가면 우리는 프랑스의 역사를 전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모]는 지금 우리가 역사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가장 잘 압축하고 있는 예일 것이다. 이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며 역사라는 문자에 전율했던 386세대, 식민지반봉건이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냐를 놓고 단내를 뿜으며 논쟁했던 6월항쟁 세대의 역사와 매우 다른 것이다. 역사란 사회적으로 소비하는 이야기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자면 둘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반공자유민주주의의 주술로부터 해방되는데 우리는 한 점의 사소한 역사적 지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때의 역사 역시 물론 이야기인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온건한 역사책을 빨갱이 책의 대표 선수로 낙인찍고 그토록 집요하게 금지한 것은 그 책의 이야기로서의 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학자들이 이야기로서의 역사란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탈근대 자본주의는 벌써 훨씬 앞서나가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가 역사를 가리키기 위해 쓰는 가장 흔한 용어는 “문화콘텐츠”일 것이다. 역사는 자연사박물관과 문화축제, 테마 파크, 시뮬레이션 게임, 패키지 여행을 만들어내는 우리 시대의 훌륭한 문화상품이다. 우리는 허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허준 의료박물관을 건립하여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릴 수도 있고, 허준의 간난에 찬 삶을 추념하며 그의 이름을 딴 약초 박람회를 열 수도 있을 것이며, 허준의 이름을 딴 브랜드 마케팅을 특허로 등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지식 경제에서 역사도 역시 문화상품이며 콘텐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디즈니랜드화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역사의 이야기가 폭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역사의 이야기로서의 빈곤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이야기란 것은 굳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와 다른 라이프스타일의 한 종류로 상연되는 역사를 관전할 때, 그 역사는 알다시피 이야기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소비되는 역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때의 역사란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지 않은 채 영원한 동일성의 순환이라는 질식할 듯한 침묵에 빠져든 역사이다. 역사가 이야기일 때 그것은 현재의 삶을 말하는 방식을 차별화한다는 뜻이다. 역사가 삶의 서사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서사란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이야기된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가 끊기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헤라자데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포스트모던한 역사의 소비로부터 우리가 구제해야할 것이야말로 이야기로서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