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


Billy Bragg – The Internationale

“사회적 긴장관계들의 저 건너편에서 존재론적인 즉자존재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음악은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절규한다. 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노래하지 않는 역사

1980년대 후반, 종로나 영등포의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할 이들을 부르는 구호를 외치고 곧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근처에서 딴전 피우듯 눈길을 던지던 이들은 노래를 이어 부르며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로 시작되는 <흔들리지 않게>이기 일쑤였다. 그 노래는 어쩌면 연행될지 모를 불안, 미리 누설된 정보로 들이닥칠 경찰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그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에 대한 다짐을 전송하였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그들의 노래였으며, 함께 할 미래의 누구와 함께 되는 하나를 예언하는 노래였으며,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투쟁을 간청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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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주의적인 (탈)가면극- “그랑디바”의 발레


“장 조르주 노베르”의 “발레 닥시옹”이 발레의 근대성을 대표한다면, 아마 그것은 가면 벗기에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랑디바”의 발레가 탈근대적인 발레의 흐름을 표시한다면 아마 그것은 다시 가면씌우기에 있지 않을까. 근대 발레의 근대성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정체성은 제의(祭儀)로서의 춤에서 벗어나 춤추는 자의 주관적인 표현이 되었다는데 있다. 노베르가 근대 발레를 정초했던 인물이라면 이는 그가 발레로 하여금 가면을 벗어 던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 발레로의 이행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가면”에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면극은 춤추는 자의 고유한 주관성을 지우고 이미 주어진 이야기의 얼개에 자신을 얽매어 놓는 전근대적 구속을 상징한다. 따라서 가면으로부터의 해방이 또한 무용을 근대화시키는 몸짓 그 자체인 듯 보이는 것도 억지는 아니다. 니진스키나 덩컨이 현대 예술의 도상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인습과 전통이 예술에 드리우는 관례적인 규칙에 도전하려 했던 인물로 기억될 때 또한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몸짓은 언제나 가면 벗기에 있었다. 이를테면 덩컨은 발에 씌워진 마지막 가면인 토슈즈까지 벗어 던지려 했다. 따라서 우리가 맨 발의 디바에게서 근대 무용의 어떤 근본적인 몸짓을 찾는다면 바로 그 가면 벗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랑디바”의 발레는 이런 근대 발레의 신화를 다시 뒤집는 것 아닐까. 그들은 다시 여장(女裝)이라는 가면쓰기를 통해 발레의 벌거벗은 몸짓을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랑 디바”로부터 관객들이 얻어내는 쾌감은 냉소적인 유머에 있을 것이다. “그랑 디바”는 매튜 본의 발레처럼 근대 발레의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를 비판하는 시늉을 취한다. 이는 우리의 신체와 욕망을 체험하는 조건이 언제나 선험적으로 이성애적인 남/녀 구분에 규정된다는 점을 비판한다는 뜻이다. “그랑디바”는 성별이라는 것이 이미 주어진 삶의 속성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적인 몸짓 그리고 의례화된 가장(假裝)임을 주장한다. 여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여성적이라고 알려진 몸짓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아니면 무엇인가. 그렇지만 “그랑 디바”를 단지 전통 발레의 성별화시키는 몸짓을 풍자하는 패러디로 생각하는 것은 반쯤만 옳다. “그랑 디바”는 남성 무용수들이 여장을 한 것이 아니라 여성 무용수들의 여장을 다시 여장하는 것, 즉 벌거벗은 채 있던 여성성의 환상이 언제나 여성성의 가장이라는 몸짓에 다름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랑 디바”는 우리에게 근대 발레가 성별의 이분법을 생산했던 또 하나의 문화적인 힘이었음을 폭로한다. 그러나 그러한 폭로에서 생겨나는 유머가 무력한 희극적인 쾌감에 그치고 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면극의 쾌감은 가장되는 것과 가장하는 것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가장하는 것(남성)을 다시 강조하고 그것을 가장되기 이전의 본래적인 정체성으로 승격시켤 때, 그것의 비판적인 위력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그랑 디바”는 이성애주의적인 가장을 폭로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결국 그것을 다시 재확인하고 만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냉소주의적인 웃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
– 무용전문지 <몸>에 기고한 글. 발레라니 언감생심이다. 내게 아직 발레는 생래적으로 적응이 되지 않는 휘황한 구경거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핑계로 몇 번 발레를 보게 된다. 안은미씨의 춤에 끼고 몇번 글을 쓴 것이 화근인 듯. 아직 국내 공연 전이라 직접 보지는 못하고 공연기획사에서 보낸 일본판 DVD를 보고 쓴 글이다. 국내 공연 레퍼토리는 조금 다른 모양. 매튜 본의 성공 이후 이런 공연들이 잦은 것은 다행이지만 소개의 몸짓이 어정쩡하고 비겁하다. 그들은 남자이지만 여장을 함으로써와… 같은 어법이 현해탄을 건너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장을 했는데도…운운의 어법으로 바뀐다. 그런 번역의 전의식을 생각하면 이 냉소적인 조작도 쓸모있을 것이라는 개운치 않은 뒷걸음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