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Maximum Joy – Stretch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오랜 불화가 종결되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모두 악이란 개념을 향해 줄달음쳤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의 지적 인플레이션은 조지 부시의 악명 높은 ‘악의 축’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진부한 말장난이다. 테러지원국을 지칭하고자 창안된 개념인 악의 축은 이미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을 악의 울타리 안에 놓기 때문이다. 테러는 폭력이란 비유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선제적으로 윤리화한다. 윤리적 악당으로서의 적이란 시점은, 지구화 이후 미국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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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빈더처럼 a la Fassbinder

Fox and His Friends (1975) – Rainer Werner Fassbinder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은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하고 또 감독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이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라스 서크를 사숙했던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는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래서 “파스빈더처럼 à la Fassbinder”이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대한 지루한 농담은 거기엔 없다. 소수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단언하기에 바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쳐다보자면 비동일성을 만드는 대립에 골몰하는 파스빈더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냉정한 야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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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Daughters of the SoHo Riots – THE NATIONAL

최순실게이트를 둘러싼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이 사태에 연루된 자들을 에워싼 괴담에 가까운 추문들은, 주의해 듣자면 민망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쓰레기더미에서 집어올린 작은 오물의 단편을 꺼내 이것이 당신의 것이 맞느냐 다그칠 때, 우리는 일제히 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곳은 곧 입술을 달싹일 증인들의 낯이다. 그들은 초조한 죄책감과 부산한 수치심에 쫓겨 어떤 낯을 지을 것이다. 낯빛은 헤아릴 길 없는 그 혹은 그녀의 내면적인 도덕을 비춘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의 낯빛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줄 아는 ‘포커페이스’는 악인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연민을 잃은 채 위악한 미소를 짓는 표정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였다. 그 만큼 우리는 얼굴이란 표면에 깊은 윤리적 믿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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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


Beacon – Drive

언제부터인가 근절해야 할 악 가운데, 폭력이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말았다. 국가폭력에서부터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나 폭력은 낱낱이 색출하고 징벌해야할 대상이 되었다. 폭력은 모든 곳에서 악 중의 악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런 탓일까. 나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질 때마다 폭력에 삼켜진 세계의 심연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폭력이 그만치 절대적으로 투명한 악으로서 규탄 받아야 할까. 나는 예상할 수 있는 저항과 거부를 무릅쓰고 이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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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라는 낱말을 되살린다는 것


Cut Copy – Future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엘 다녀오는 길이다. 제법 부담스런 참가비를 내고 참여해야 하는 자리라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등록을 하려 찾은 로비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발표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망설였다. 기본소득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치고 보는 것은 임금인상이 개량적이라며 발끈하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이 많은 것을 약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냥 거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많은 경우 빵을 달라는 사소한 요구에서 출발해 세상을 뒤바꿀만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기본소득을 마냥 지지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기본소득이 시장경제를 넘어서거나 제한하는 전략으로 제 구실을 하려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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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basic income break through money fetishism?


Songs: Ohia – Back On Top

Basic income is a fascinating strategy to go beyond the poverty and a wide range of terrible economic and social effects brought about by neo-liberal capitalism. But we could not but raise whether it would be helpful to break through the money and commodity fetishism. In principle, basic income is based on the payment of money for redistribution of social wealth. While aiming to resist the inequality, it does not grapple critically with capitalist characteristics of money form. Basic income is trying to overcome the labor(-addiction) and consumer society, that is, work-fetishism. However, is it likely to sublate the money fetishism, along with the restriction of capitalist exploitation? I mean by the fetishism that money, commodity and (abstract social) labor are necessary social form and appearance in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Without it, capitalism fails to o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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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날가

 

한 발짝 떨어진 마로니에 공원에서 전국 농민 대회가 열리는 주말 오후, 난 도우미를 맡은 공연을 위해 부산스레 극장을 드나들며 가끔 극장 문간에서 집회장에서 들려오는 구호를 들었다. 지하 극장에서는 젊은 안무가들이 몇 달 간 자신이 곤구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듯이 그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나는 끈질긴 세상의 관성을 보는 듯 했다. 어쩐지 아도르노의 어느 글에서 본 듯한 문구가 오늘의 기분을 말해주는 데 적격일 듯한데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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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다도해를 떠다니는 여객선의 승객들 – 퀴어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


James Blake – Radio Silence

얼마 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임성순의 신작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제법 허를 찌른다. 이 소설은 우연히 비뇨기과엘 들러 전립선치료를 받던 중 전립선 오르가즘의 신세계에 입문한 중년 남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 여섯으로, “그곳이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중산층의 대체로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만성전립선염을 치료받으러 간 그는 인생 최고의 굴욕을 겪는다. 버젓이 엉덩이를 깐 채 항문을 남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가 전립선마사지를 위해 처방받은 아네로스라는 신기한 도구에 눈을 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러기아빠인 그는 이제 변태와 게이라는 욕설이 주렁주렁 달린 게시판을 눈으로 밟으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즐기는 신세계의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멀쩡한 아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순종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압축하는 ‘아재’ 혹은 ‘개저씨’의 화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뜻밖의 인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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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꺼져다오, 좆같은 호모새끼들아


오해를 미연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한마디.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시쳇말로 ‘폴리티컬리 코렉트’하기는 커녕 그 말만 들어도 사지가 부르르 떨리는 세칭 동성연애자 혹은 호모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동성애혐오적인 증오도 아니며, 동성애혐오를 내면화한 어느 비뚤어진 게이의 자기혐오도 아니라, 친애하는 나의 재수 없는 벗들에게, 우리가 동성애자란 이유로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을 털어놓고자 하는, 의리 반 푼어치 없는 욕설일 뿐이다. 이제 모두들 노골적인 자기의 음험한 욕망을 자제하며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유지하기 위해 짐짓 위선적인 공중파 텔레비전을 보던 시대는 사라졌다. 이를테면 미국 텔레비전을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제 <코스비가족>이나 <달라스>가 아니라 <섹스 앤 시티>와 <퀴어 애즈 포크>이다. 케이블 채널이 창궐한 이래 우리가 바라보는 텔레비전은 갖은 싸구려 욕망을 전시하며 우리는 얼마나 솔직한가 얼마나 반항적인가 자화자찬하는 저능아들의 세계이다. 나는 거의 모든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증오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제일 증오하는 채널은 “온스타일”이다. 이 유치찬란한 채널의 미덕이 있다면 인생은 스타일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허무주의적인 채널 이름에 있다) 그러나 진정 내가 증오하는 프로그램의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들은 대개 미국산 “리얼리티 쇼”이다.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추문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현장 고발 치터스>나 <제리 스프링거쇼>같은 저질 폭로 프로그램에서부터 <미운오리새끼>같은 이른바 변신 쇼를 거쳐 <백만장자와 결혼하기2>, <배철러>같은 사랑을 두고 장난치는 기괴한 변태 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리얼리티쇼이다. 그러나 그 중에 날 가장 돌게 만드는 쇼는 단연 <퀴어 아이>이다. 그것은 적어도 게이로서의 내 삶의 위엄을 무참히 짓밟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퀴어 아이> 이후에 게이는 더 이상 성정체성이 아니다. 퀴어란 무엇인가?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상식적인 답변은 그것은 21세기 초반에 극성을 부린 어떤 소비자 집단의 정체성이란 것이다. <퀴어 아이>가 볼 품 없고 미련한 이성애자 남자를 끌어내어 그들을 ‘쿨’한 존재로 탈바꿈시킬 때, 그 극성맞은 놈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는 몸짓은 쇼핑객의 제스처이다. 하긴 그들만 그러한가. 자유란 이념조차 상품의 카탈로그로 만들 줄 아는 이 멋진 “소비의 신세계”, 어디 한 구석 안 그런 데가 있는가.
<피처>라는 잡지의 청탁을 받고 기고한 글.

자하문 밖 안골

– N씨는 노무현이 탄핵 이후 곧잘 들러 유명해졌다는 안골이 저 안쪽에 있다고 가리켰다. 아직도 이 대명천지 서울에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동네라며. 그리고 효자동 사람들은 안골에서 나오는 채소가 오길 기다려 김장을 한다던가 그런 말도 덧붙였던 듯하다. 뒤안을 가리키는 그의 손길과 달리 나는 눈 앞의 창밖에 더 시큰했다. 북한산성의 흔적이 드문드문 늘어선 산자락을 따라 잘 생긴 70년대의 이층양옥집들이 보였다. 우습게도 삼각형 꼴의 다락방을 얹은 산장 풍의 양옥들. 회벽에 붉은 벽돌 색깔의 타일을 덕지덕지 바른, 그 을씨년스런 양옥들이 그곳에선 안성마춤같았다. 무엇보다 고요했고, 차분하여, 멎어버린 세상같았다. 그 풍경이 어찌나 좋던지 서울에서 제일 손맛이 좋다는 그 집 만두도 내겐 시큰둥했다. 이렇게 철렁한 풍경 하나가 눈에 붙으면 기분이 묘하다. 파노라마라고 부르는 시선, 보행자의 시선 혹은 탈 것에 조율되어 있는 눈길로 세상을 보다 어느 순간 靜物로 화한, 멎은 세상을 볼 때의 놀라움 때문일까. 한 해에 몇 장 이런 풍경을, 아니 풍경은 쏘다니는 자들이 찍어 놓은 눈 앞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니 다른 무엇으로 칭해 마땅할 그 이미지들을, 마음 속에 접어 넣어야겠다. 두어해 전 겨울 장성 어느 마을의 논바닥의 풍경, 그것도 역시 이만치 훌륭했었지.
– 금요일 오후의 수업은 마감 때의 께른한 기분을 넘기기 어렵다. 그래서 수업하기 싫지않냐고 농을 건네며 수업을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아우성이다. 놀러가잔다. 난 추워 바깥에 놀러 나가기 싫댔더니, 영화를 보러 가잔다. 뭘 볼테냐고 물었더니, 맙소사, 마파도란다. 니네들 취향 너무 후지다고 놀리며 수업을 하려다, 일전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생각나 이야기해 주었다. 한 녀석이 상기된 표정으로 오늘 예매를 했다 길래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시놉과 상관없는 곁가지 에피소드 몇 개를 들려주겠다고 말문을 뗐다.(듣던 중에 예매했다는 친구가 오늘 다른 영화 볼 테니 이야기 마저 다 해달라고 조른다. 물론 마다했다). 그리고 시작한 수업, 그게 아이들의 기분을 누그러뜨린 모양이다. 길이가 모자라 옷깃에서 자꾸 떨어지는 마이크를 바꾼다고 어디서 길이가 긴 마이크를 가지고 온 녀석도 있고, 캔 녹차를 사다가 주는 놈도 있다.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에는 글 자주 보았다고 벙글벙글 웃으며 따뜻한 홍차 캔을 건네는 녀석도 있다. 이렇게 일순 친해지려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고 뭉클하다. 내게 뭘 배우자고 온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나와 사귀자고 오는 아이들이기도 한데, 난 사귀려는 노력은 별로 않는다.
– 그간 꾸준히 글을 쓰던 매체에서 청탁이 없길래 내심 짐작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아차 그게 적중했다. 어렵게 보낸 메일에서 그래도 그 매체를 연명하고 싶다면서 외상으로 원고를 사겠다고 전해왔다. 창업할 즈음 곁에서 설레발치며 거들었던, 거래처라기보다는 내게는 늘 빚지거나 무안한 곳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무슨 희한한 직함을 달고 그곳이 문을 연 몇 달 동안 식객이 되어 몇 번 좋은 저녁도 얻어먹고, 같이 술자리도 했던 동네다. 6달 동안 매달 한 꼭지씩 원고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길래, 그러겠다고 넙죽 답장을 보냈다. 여유만 된다면야 더 많이 보내주고 싶다. 그간 몸서리치며 꽈서 쓴 글, 쉽게 즐겁게 써서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흥하는 사람보다 기울거나 꺼져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왜 이렇게 칙칙해진 걸까. 다시 계속 낼 수 있을지 말지 의논하러 편집회의엘 가는 걸음이 영 무겁다. 책임지지 않고 권한만 누리는 편집위원 자리가 과분하다. 큰 전주를 찾아 저널을 살릴 능력도 없고 올망졸망한 광고를 따올 변변한 인맥도 내겐 없으니, 무능하다. 그러면서 그 저널에서 제 입심을 발휘할 생각이라면, 않는 게 낫다.
– 생계가 바닥을 치고 나서 혼비백산한 박군이 직장을 구했다. 어느 디자인 펌이라는데, 들어봐선 주류 본산인 듯 하다. 기회가 되고 도움이 될 듯 하다. 별다른 밑천이라곤 없고 오직 재능과 감각 뿐인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정일 것이다. 그걸 얻는 게 어쩌면 취업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 커서 출가하는 아이를 보는 듯 하여, 기분이 아삼하다. 슬슬 나도 채비를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