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빈더처럼 a la Fassbinder

Fox and His Friends (1975) – Rainer Werner Fassbinder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은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하고 또 감독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이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라스 서크를 사숙했던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는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래서 “파스빈더처럼 à la Fassbinder”이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대한 지루한 농담은 거기엔 없다. 소수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단언하기에 바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쳐다보자면 비동일성을 만드는 대립에 골몰하는 파스빈더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냉정한 야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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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Daughters of the SoHo Riots – THE NATIONAL

최순실게이트를 둘러싼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이 사태에 연루된 자들을 에워싼 괴담에 가까운 추문들은, 주의해 듣자면 민망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쓰레기더미에서 집어올린 작은 오물의 단편을 꺼내 이것이 당신의 것이 맞느냐 다그칠 때, 우리는 일제히 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곳은 곧 입술을 달싹일 증인들의 낯이다. 그들은 초조한 죄책감과 부산한 수치심에 쫓겨 어떤 낯을 지을 것이다. 낯빛은 헤아릴 길 없는 그 혹은 그녀의 내면적인 도덕을 비춘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의 낯빛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줄 아는 ‘포커페이스’는 악인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연민을 잃은 채 위악한 미소를 짓는 표정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였다. 그 만큼 우리는 얼굴이란 표면에 깊은 윤리적 믿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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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


Beacon – Drive

언제부터인가 근절해야 할 악 가운데, 폭력이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말았다. 국가폭력에서부터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나 폭력은 낱낱이 색출하고 징벌해야할 대상이 되었다. 폭력은 모든 곳에서 악 중의 악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런 탓일까. 나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질 때마다 폭력에 삼켜진 세계의 심연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폭력이 그만치 절대적으로 투명한 악으로서 규탄 받아야 할까. 나는 예상할 수 있는 저항과 거부를 무릅쓰고 이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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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라는 낱말을 되살린다는 것


Cut Copy – Future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엘 다녀오는 길이다. 제법 부담스런 참가비를 내고 참여해야 하는 자리라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등록을 하려 찾은 로비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발표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망설였다. 기본소득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치고 보는 것은 임금인상이 개량적이라며 발끈하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이 많은 것을 약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냥 거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많은 경우 빵을 달라는 사소한 요구에서 출발해 세상을 뒤바꿀만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기본소득을 마냥 지지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기본소득이 시장경제를 넘어서거나 제한하는 전략으로 제 구실을 하려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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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basic income break through money fetishism?


Songs: Ohia – Back On Top

Basic income is a fascinating strategy to go beyond the poverty and a wide range of terrible economic and social effects brought about by neo-liberal capitalism. But we could not but raise whether it would be helpful to break through the money and commodity fetishism. In principle, basic income is based on the payment of money for redistribution of social wealth. While aiming to resist the inequality, it does not grapple critically with capitalist characteristics of money form. Basic income is trying to overcome the labor(-addiction) and consumer society, that is, work-fetishism. However, is it likely to sublate the money fetishism, along with the restriction of capitalist exploitation? I mean by the fetishism that money, commodity and (abstract social) labor are necessary social form and appearance in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Without it, capitalism fails to o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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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날가

 

한 발짝 떨어진 마로니에 공원에서 전국 농민 대회가 열리는 주말 오후, 난 도우미를 맡은 공연을 위해 부산스레 극장을 드나들며 가끔 극장 문간에서 집회장에서 들려오는 구호를 들었다. 지하 극장에서는 젊은 안무가들이 몇 달 간 자신이 곤구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듯이 그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나는 끈질긴 세상의 관성을 보는 듯 했다. 어쩐지 아도르노의 어느 글에서 본 듯한 문구가 오늘의 기분을 말해주는 데 적격일 듯한데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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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다도해를 떠다니는 여객선의 승객들 – 퀴어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


James Blake – Radio Silence

얼마 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임성순의 신작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제법 허를 찌른다. 이 소설은 우연히 비뇨기과엘 들러 전립선치료를 받던 중 전립선 오르가즘의 신세계에 입문한 중년 남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 여섯으로, “그곳이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중산층의 대체로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만성전립선염을 치료받으러 간 그는 인생 최고의 굴욕을 겪는다. 버젓이 엉덩이를 깐 채 항문을 남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가 전립선마사지를 위해 처방받은 아네로스라는 신기한 도구에 눈을 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러기아빠인 그는 이제 변태와 게이라는 욕설이 주렁주렁 달린 게시판을 눈으로 밟으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즐기는 신세계의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멀쩡한 아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순종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압축하는 ‘아재’ 혹은 ‘개저씨’의 화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뜻밖의 인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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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꺼져다오, 좆같은 호모새끼들아


오해를 미연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한마디.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시쳇말로 ‘폴리티컬리 코렉트’하기는 커녕 그 말만 들어도 사지가 부르르 떨리는 세칭 동성연애자 혹은 호모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동성애혐오적인 증오도 아니며, 동성애혐오를 내면화한 어느 비뚤어진 게이의 자기혐오도 아니라, 친애하는 나의 재수 없는 벗들에게, 우리가 동성애자란 이유로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을 털어놓고자 하는, 의리 반 푼어치 없는 욕설일 뿐이다. 이제 모두들 노골적인 자기의 음험한 욕망을 자제하며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유지하기 위해 짐짓 위선적인 공중파 텔레비전을 보던 시대는 사라졌다. 이를테면 미국 텔레비전을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제 <코스비가족>이나 <달라스>가 아니라 <섹스 앤 시티>와 <퀴어 애즈 포크>이다. 케이블 채널이 창궐한 이래 우리가 바라보는 텔레비전은 갖은 싸구려 욕망을 전시하며 우리는 얼마나 솔직한가 얼마나 반항적인가 자화자찬하는 저능아들의 세계이다. 나는 거의 모든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증오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제일 증오하는 채널은 “온스타일”이다. 이 유치찬란한 채널의 미덕이 있다면 인생은 스타일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허무주의적인 채널 이름에 있다) 그러나 진정 내가 증오하는 프로그램의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들은 대개 미국산 “리얼리티 쇼”이다.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추문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현장 고발 치터스>나 <제리 스프링거쇼>같은 저질 폭로 프로그램에서부터 <미운오리새끼>같은 이른바 변신 쇼를 거쳐 <백만장자와 결혼하기2>, <배철러>같은 사랑을 두고 장난치는 기괴한 변태 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리얼리티쇼이다. 그러나 그 중에 날 가장 돌게 만드는 쇼는 단연 <퀴어 아이>이다. 그것은 적어도 게이로서의 내 삶의 위엄을 무참히 짓밟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퀴어 아이> 이후에 게이는 더 이상 성정체성이 아니다. 퀴어란 무엇인가?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상식적인 답변은 그것은 21세기 초반에 극성을 부린 어떤 소비자 집단의 정체성이란 것이다. <퀴어 아이>가 볼 품 없고 미련한 이성애자 남자를 끌어내어 그들을 ‘쿨’한 존재로 탈바꿈시킬 때, 그 극성맞은 놈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는 몸짓은 쇼핑객의 제스처이다. 하긴 그들만 그러한가. 자유란 이념조차 상품의 카탈로그로 만들 줄 아는 이 멋진 “소비의 신세계”, 어디 한 구석 안 그런 데가 있는가.
<피처>라는 잡지의 청탁을 받고 기고한 글.

자하문 밖 안골

– N씨는 노무현이 탄핵 이후 곧잘 들러 유명해졌다는 안골이 저 안쪽에 있다고 가리켰다. 아직도 이 대명천지 서울에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동네라며. 그리고 효자동 사람들은 안골에서 나오는 채소가 오길 기다려 김장을 한다던가 그런 말도 덧붙였던 듯하다. 뒤안을 가리키는 그의 손길과 달리 나는 눈 앞의 창밖에 더 시큰했다. 북한산성의 흔적이 드문드문 늘어선 산자락을 따라 잘 생긴 70년대의 이층양옥집들이 보였다. 우습게도 삼각형 꼴의 다락방을 얹은 산장 풍의 양옥들. 회벽에 붉은 벽돌 색깔의 타일을 덕지덕지 바른, 그 을씨년스런 양옥들이 그곳에선 안성마춤같았다. 무엇보다 고요했고, 차분하여, 멎어버린 세상같았다. 그 풍경이 어찌나 좋던지 서울에서 제일 손맛이 좋다는 그 집 만두도 내겐 시큰둥했다. 이렇게 철렁한 풍경 하나가 눈에 붙으면 기분이 묘하다. 파노라마라고 부르는 시선, 보행자의 시선 혹은 탈 것에 조율되어 있는 눈길로 세상을 보다 어느 순간 靜物로 화한, 멎은 세상을 볼 때의 놀라움 때문일까. 한 해에 몇 장 이런 풍경을, 아니 풍경은 쏘다니는 자들이 찍어 놓은 눈 앞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니 다른 무엇으로 칭해 마땅할 그 이미지들을, 마음 속에 접어 넣어야겠다. 두어해 전 겨울 장성 어느 마을의 논바닥의 풍경, 그것도 역시 이만치 훌륭했었지.
– 금요일 오후의 수업은 마감 때의 께른한 기분을 넘기기 어렵다. 그래서 수업하기 싫지않냐고 농을 건네며 수업을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아우성이다. 놀러가잔다. 난 추워 바깥에 놀러 나가기 싫댔더니, 영화를 보러 가잔다. 뭘 볼테냐고 물었더니, 맙소사, 마파도란다. 니네들 취향 너무 후지다고 놀리며 수업을 하려다, 일전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생각나 이야기해 주었다. 한 녀석이 상기된 표정으로 오늘 예매를 했다 길래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시놉과 상관없는 곁가지 에피소드 몇 개를 들려주겠다고 말문을 뗐다.(듣던 중에 예매했다는 친구가 오늘 다른 영화 볼 테니 이야기 마저 다 해달라고 조른다. 물론 마다했다). 그리고 시작한 수업, 그게 아이들의 기분을 누그러뜨린 모양이다. 길이가 모자라 옷깃에서 자꾸 떨어지는 마이크를 바꾼다고 어디서 길이가 긴 마이크를 가지고 온 녀석도 있고, 캔 녹차를 사다가 주는 놈도 있다.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에는 글 자주 보았다고 벙글벙글 웃으며 따뜻한 홍차 캔을 건네는 녀석도 있다. 이렇게 일순 친해지려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고 뭉클하다. 내게 뭘 배우자고 온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나와 사귀자고 오는 아이들이기도 한데, 난 사귀려는 노력은 별로 않는다.
– 그간 꾸준히 글을 쓰던 매체에서 청탁이 없길래 내심 짐작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아차 그게 적중했다. 어렵게 보낸 메일에서 그래도 그 매체를 연명하고 싶다면서 외상으로 원고를 사겠다고 전해왔다. 창업할 즈음 곁에서 설레발치며 거들었던, 거래처라기보다는 내게는 늘 빚지거나 무안한 곳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무슨 희한한 직함을 달고 그곳이 문을 연 몇 달 동안 식객이 되어 몇 번 좋은 저녁도 얻어먹고, 같이 술자리도 했던 동네다. 6달 동안 매달 한 꼭지씩 원고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길래, 그러겠다고 넙죽 답장을 보냈다. 여유만 된다면야 더 많이 보내주고 싶다. 그간 몸서리치며 꽈서 쓴 글, 쉽게 즐겁게 써서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흥하는 사람보다 기울거나 꺼져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왜 이렇게 칙칙해진 걸까. 다시 계속 낼 수 있을지 말지 의논하러 편집회의엘 가는 걸음이 영 무겁다. 책임지지 않고 권한만 누리는 편집위원 자리가 과분하다. 큰 전주를 찾아 저널을 살릴 능력도 없고 올망졸망한 광고를 따올 변변한 인맥도 내겐 없으니, 무능하다. 그러면서 그 저널에서 제 입심을 발휘할 생각이라면, 않는 게 낫다.
– 생계가 바닥을 치고 나서 혼비백산한 박군이 직장을 구했다. 어느 디자인 펌이라는데, 들어봐선 주류 본산인 듯 하다. 기회가 되고 도움이 될 듯 하다. 별다른 밑천이라곤 없고 오직 재능과 감각 뿐인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정일 것이다. 그걸 얻는 게 어쩌면 취업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 커서 출가하는 아이를 보는 듯 하여, 기분이 아삼하다. 슬슬 나도 채비를 해야겠지.

비수씨에게

아웃팅반대 캠페인을 고통에 대한 저항이란 평범한 의미에서 놓고 보자면 그건 당연하고 또한 정당한 일입니다. 그것을 비판한다고 그러므로 아웃팅에 따른 고통을 외면한다고 떠드는 것은 무례하고 또한 유치한 비난입니다. 그러나 아웃팅을 겪어 고통을 겪는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과 아웃팅을 당하지 않고 제 스스로 홀로 있을 수 있는 권리(이것이 저 유명한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커밍아웃을 자기결정의 권리란 이름으로 곡해하는 것은 웃긴 일입니다. 커밍아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이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회사나 학교에서 내가 레즈비언이요 고백하는 것을 커밍아웃이라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커밍아웃을 권리의 취득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사회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권리의 취득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동성 섹스 파트너와 거리낌없이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지난 10년간 거의 신속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커밍아웃이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삶이 천하거나 나쁜 것이 아님을 인정받으려는 사적인 윤리적인 선택에 가깝습니다. 만약 지금 성장하고 있는 젊은 세대의 레즈비언, 게이들이 장기적인 동거의 관계를 당연시하고, 직장과 학교, 공적 제도에서 자신들의 성정체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권리의 침해에 저항할 경우 커밍아웃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럴 가능성에 반신반의합니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커밍아웃이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문제입니다. 굳이 하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들 사이에선 조금은 불편하고 거북한 사람으로 취급당합니다. 커밍아웃한 사람을 대단히 치하하고 용기있다고 주장하는 리버럴한 이성애자들의 말을 들으면 더욱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은 자신의 삶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사적인 선택 대개 윤리적인 울림을 갖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협소한 의미에서 이해와 욕구의 실현이란 뜻에서 권리란 면에서 보자면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 게이의 권리란 문제는 사실 불가능하거나 요원한 의제입니다. 따라서 권리의 운동이란 틀에서 성소수자 운동을 바라볼 경우 많은 레즈비언 게이 운동가들이 결국 권리와 피해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그 탓에 핫라인을 만들어 피해자 상담을 한다거나 아니면 아웃팅에 반대 캠페인을 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난데없이 아무도 관심없는 결혼 권리 운동을 제기하고 나선다거나 하는 식의 거의 울며겨자먹기 식의 운동이 난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니네 뭐 해줄까 묻는 권리의 수혜자로부터 우리는 내가 무엇 불행한게 뭐 있지 캐물어보아야 하는 측은한 처지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권리란 개념으로 주장될 수 있는 현실을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들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은 미국 사회와 같은 양극적인 흐름으로 나뉘게 되겠지요. 결혼할 권리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게이 운동가와 문화적 시민권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게이 운동가, 그러나 전자의 경우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연 손대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한심하고 또한 반동적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자신의 급진성을 게이, 레즈비언의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와 보호에 한정한다는 점에서 퇴행적입니다. 섹스 패닉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우리는 이성애규범성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이성애적 규범에 의해 간섭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식의 주장에 머물러 버립니다. 80년대 이후 이른바 퀴어 이론이란 것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요를 볼 때 저는 이런 우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저로서는 매우 실망하는 셈이지요.
한편 저는 이런 흐름이 비단 성소수자 운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소수자 운동을 피해자의 권리의 운동, 이해관심의 실현의 운동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그런 욕구와 이해의 권리로서의 운동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그런 운동이 운동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유지하는 것도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지를 위한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한편 이는 제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인도주의적인 운동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인도주의적인 단체의 자선과 기부, 사회봉사보다 외채의 탕감, 세계시장으로부터 탈퇴할 권리의 인정, 호혜적인 무역 제도의 보장같은 정치적인 투쟁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란 말에서 듣는 역겨움도 그런 것이지요. 이주노동자운동을 소수자의 인권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온갖 실용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라는 주체가 아니라 소수자라는 주체로서의 거푸집을 씌워 그들의 예외적인 지위를 규정하고 돌보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권리를 진정으로 권리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바 있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그들에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한 그들의 권리란 사실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지닌 자가 제한한 특수한 삶의 내용 안에서 살도록 한정한 그 한계 안에서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죄수들은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감옥을 나갈 권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안에서 더 나은 이해를 실현할 권리를 가질 뿐이지요. 죄라는 것을 감금, 관리, 통제, 교정 등의 복잡한 제도와 연결시키는 체제를 비판할 무제한적인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의 시민의 권리는 무제한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겐 자신의 권리를 규정하는 틀을 규정하고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예속당할 권리일 뿐입니다. 더 복잡하게 말하자면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행히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권의 지위에 의해 매개됩니다. 따라서 범법자, 정신병자,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이 소수자라 정의되는 이유는 그들이 시민권적인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인 권리는 곧 정치적인 권리를 둘러싼 투쟁입니다. 아니 모든 권리를 둘러싼 투쟁은 정치적인 투쟁입니다. 결혼의 권리를 둘러싼 투쟁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차이가 나날이 넓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의 권리는 성과 시민권을 매개하는 사회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저 유명한 부락민(즉 죽은 생물을 다루는 사람들인 백정같은 사람들)처럼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지위는 일종의 부락민에 가깝습니다. 불가촉 천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권리의 틀이란 면에서 보자면 둘은 형식적으로 같은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런 그렇다치고 부락민들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부락민들은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부락민들은 다른 시민들이 누리는 만큼의 이해와 욕구를 실현할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또한 쓰여지지 않은 규칙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죽음과 삶 그리고 권리를 매개하는 상징적인 규칙을 해체하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후자는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면 후자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복잡한 사회적 삶의 관습과 규칙을 흔드는 일이고 그것은 부락민뿐 아니라 “정상인”의 삶의 질서까지 뒤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말장난을 하자면 부락민의 생사의 문제의 퀴어입니다. 레즈비언, 게이가 성의 문제의 퀴어라면 말입니다.
성과 시민권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간통을 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녀를 가진 미혼 여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낙태를 하는 여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극렬한 논쟁과 대립을 불러일으킨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시민권 운동은 알다시피 흑인과 여성의 운동이고 후자는 무엇보다 낙태의 권리를 둘러싼 투쟁을 통해 하나의 결절점을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문제들은 매우 안타까운 방식으로 풀리고 있습니다. 성과 시민권을 매개하는 고리(저는 이것이 굳이 가부장제라면 가부장제라고 생각합니다)를 끊어내고자 노력했던 기존의 운동은 알다시피 거의 주변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바로 성모순이냐 계급모순이냐는 식의 계산을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성과 시민권의 문제를 매개하는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해체하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궤도에서 벗어나 최근의 많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제가 느끼는 불편함은 성과 시민권의 매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 시민권이 더욱 매개되게 하는 즉 여성으로서의 권리와 남성으로서의 권리로 구분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성의 권리 대 남성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 대 시민의 권리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게이, 레즈비언의 권리 대 이성애자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게이, 레즈비언의 권리 대 시민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그럼 여성의 독특한 경험과 신체성은 중성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현재의 악순환에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백인 중산층 여성의 여성과 흑인 노동계급 여성의 여성이 다르다는 식의 주장으로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정말이지 배부른 주장일 뿐입니다. 일전 어느 페미니스트 후배와 술을 마시며 울적하게 이야기하였던 한국의 일부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트랜스나 혼종성에 관한 주장에 느끼는 제 불편과 혐오 역시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정성과 영토성에서 벗어나 트랜스하라, 보편적인 정체성의 신화를 타도하고 혼종성을 긍정하라는 주장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멋있게 들립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권리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란 점을 그들은 인정하길 꺼려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혼종성, 트랜스 따위의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보편성을 통해 보증된다는 것을 망각하지요.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볕좋은 대학 캠퍼스에서 타자성과 혼종성, 트랜스를 떠들며 온갖 탈식민주의를 주장하고 자국의 민족영화에 관하여 떠드는 모습은 곧 이주할 권리, 표현할 권리, 심지어 낯선 문화를 소비할 권리 등에 의해 항상 꿰매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권리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과연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블랑카”를 두고 트랜스, 혼종성, 타자성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수많은 블랑카들이 이주노동자 단속반과 탈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추적당하는 모습은 매우 우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체 게바라가 그들의 타자성을 느끼고 탈식민지식인처럼 행세했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그들은 그들과 일체화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그들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의 건방일까요.
쓰다보니 너무 장황하고 두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못다한 말들은 많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성폭력 운동과 성매매 단속에 관한 현재의 진행방식에 깊은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성매매가 이젠 불법을 저지르는 쾌락까지 더해졌으며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성매매 단속을 해봤자 역시 성을 둘러싼 교환은 계속된다는 태도를 즐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알량한 냉소주의를 보여주는 이성애자 남성의 지지까지 업음으로써 성매매는 더욱 굳건히 정착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비수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제가 여성-레즈비언 주체와 게이-남성 주체로서의 성별적인 차이가 아니라 성별화시킬 수 없는 차이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적인 통계에서 나오는 식의 그런 종적인 차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실체화된 여성으로서의 본성으로서의 차이도 아닌, 그런 차이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어쓸 시간이 열려있으므로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날이 다시 쌀쌀하고 바람도 냉랭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