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 (1)

Men At Work – Down Under

“전래의 철학적 문제틀은 물론 그것의 문제들과 연결된 상태에서, 규정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객관적으로 총체성에 얽힌 세계는 의식을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그런 세계는 의식이 떠나고 싶어 하는 자리에 부단히 의식을 고착시켜 놓는다.그러나 자신의 문제들의 역사적 형태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처음부터 상쾌하고 즐겁게 시작하는 사유야말로 그런 세계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아도르노, 부정변증법, 72)

원한사회? : 분위기(atmosphere)로서의 사회

두어해 전 대통령에 소속된 국민대통합위원회란 기관에서 연구용영을 발주하였다.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이 프로젝트는 “한국형 사회 갈등 실태 진단 연구”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먼저 그 연구 과제를 수행한 곳은 서울대학교였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과 한국정치연구소는 2014년 10월 첫 번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 연구가 미진했거나 보완적 연구가 필요했는지, 아니면 명문대끼리 고루 기회를 나눠주려는 이유였는지 사정은 모르겠지만, 뒤이어 2차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연구를 맡은 곳은 고려대학교의 산학협력단이었다. “한국형 사회갈등 실태진단 2차 연구”란 이름으로 진행된 이 연구는 2015년 10월 완료되었고, 그 연구 결과의 내용은 일부 언론매체를 통해 대서특필되었다.

이 보고서의 결과를 열심히 보도하고 또 사설에서 다루기조차한 「매일경제」는 어느 기사에서 이렇게 보고서의 내용을 소개한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의 진원지는 ‘빈부격차’다. 경제력의 차이로 인한 위화감과 불만이 극에 달하고 분노사회를 넘어 ‘원한사회’가 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갈등 양상이 사회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위험수위에 다다랐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 등 5명의 국내 대표적 정치·사회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은 지난해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지역·성별·연령·월소득 등을 기준으로 선발된 전국 성인남녀 105명을 심층 인터뷰한 ‘한국형 사회갈등 실태진단’ 연구보고서를 작성했다. 연구팀은 보고서에서 ‘불안·경쟁·피로 등 한국사회에 축적된 갈등이 포기와 단절·원한·반감 등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며 ‘경제력에 따른 계층간 갈등이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강력 경고했다. … 연구진은 방대한 심층면접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갈등 유형으로  불안을 넘어선 강박  경쟁을 넘어선 고투  피로를 넘어선 탈진  좌절을 넘어선 포기 격차를 넘어선 단절 불만을 넘어선 원한  불신을 넘어선 반감  갈등을 넘어선 단죄 등 8개로 분류했다. 학계와 언론이 불안과 경쟁·피로·좌절·불신 등으로 완곡하게 표현하는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실제로는 단절·원한·반감·단죄의 감정 등 극단적 트라우마 상태로 빠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 이처럼 양극화한 계층구조에서 젊은세대는 물론 기성세대까지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총체적 불만이 한국 사회를 분노 이상의 원한사회로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사회과학자들이 쓴 그것도 정부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 쓴 보고서를 한 언론매체가 열심히 보도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무슨 꿍꿍이였을까. 그 사정을 헤아릴 수 없지만 덕분에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묵살되었을 그 보고서는 사람들의 시야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사회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한국 사회 갈등 실태를 분석했다는 그 보고서가 피력하는 내용은 사회학을 전공한 내가 보기에도 기이하고 어색해 보인다. 보고서는 한국사회가 ‘원한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안, 경쟁, 피로, 단절, 원한, 반감 단죄” 등의 개념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 개념들은 한국 사회라는 현실을 분석하고 규정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보고서가 이러한 다양한 개념들을 아우르는 핵심 범주로 골라낸 하나의 낱말과 마주하게 된다. “원한”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내용을 전해들은 우리는 적잖이 당혹케 된다. 사회과학자들이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분별하기 위해 제출한 개념이 ‘원한사회’이다? 원한은 과연 자신이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세계를 규정하는데 적절한 과학적 개념일 수 있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원한이란 무엇일까. 스스로의 삶이 곤핍하고 비참해지지만 이를 적절한 분노와 항의로 해결하거나 표출하지 못하면서 마음속에 축적된 심리적인 태도일까. 그것은 자신이 겪은 세계를 인지하고 평가하며 판다나면서 비롯된 주관적 정서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원한이란 그것을 촉발하고 초래한 세계의 부정의, 불평등을 가리키는 은어(隱語) 혹은 알레고리적인 표현일까. 다시말해 원한이란 원한을 초래한 사회의 객관적인 상태 혹은 구조를 얼핏 가리키는 암호 같은 말일까.

이를 고쳐 말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원한사회란 저 편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이편에 있는 것인가. 원한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경험 속에 드러나고 또 등록되는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현상학적 사회이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말하자면 원한이란 사회를 겪는 이들의 마음속에 우럭우럭 끓어오르는 심리적인 상태나 사회에 대한 이미지 혹은 표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원한을 품을 만큼 극악하고 또 절망적으로 펼쳐진 세계를 가리키는 것일까. 따라서 원한이란 사회의 구조나 체계적 특성을 가리키기 위해 준비된 개념인가. 원한사회라는 특정한 사회적 짜임새라는 것이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물음은 이렇게 간략히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한이란 주관적인 것일까, 객관적인 것일까. 그것은 이편에 서 있는 나 또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것은 저 편에 있는 원한의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의 모습을 지시하는가. 저간 한국 사회 안에서 사회 비평 혹은 사회 이론이라 할 만한 것에 주의를 기울인 이들이라면, 굳이 원한사회란 개념을 두고 정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마음, 감정, 심정성, 정서, 기분, 정동, 분위기 등의 개념을 통해 사회를 읽는다는 접근은 일종의 시대정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고서를 쓴 사회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들 역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으로 원한을 채택한다.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아니 그것을 전개하는 다른 개념들, 즉 불안, 강박, 경쟁, 고투, 피로, 탈진, 좌절, 포기, 불만, 원한, 불신, 반감 등의 감정 – 혹은 오늘날 많은 비평가들이 선용하는 정동(affect) 따위에 해당되는 – 개념들을 스스럼없이 고른다. 이 보고서의 핵심적인 주장을 듣다보면 그간 오늘의 한국사회가 처한 모습을 규정하고 비난하기 위해 제시된 많은 글이나 책에서 이미 제시했던 용어들, 이를테면 피로, 수치심, 모멸, 단속 등의 개념을 짜깁기하고 편의에 맞게 배열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서사(narrative) 혹은 제시 방식은 학술적인 논문에 갇혀있지 않고 ‘사회’를 이야기하는 자리 어디에서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위의 신문 기사가 인용하듯 보고서는 착취와 차별로 인한 고통의 체험을 ‘극단적 트라우마’ 상태로 기꺼이 표현한다. 그렇지만 트라우마가 사회적 경험을 말하는 주요한 낱말로 잡게 될 때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경험하는 방식에서의 어떤 특성을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내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임의적으로 빌려 온 용어일 뿐일까. 아니면 트라우마는 그냥 사회적 경험의 고통스러움을 강렬히 전하려 골라낸 수사적 표현일까. 그도 아니면 사회를 분석하고 제시하는 접근 자체를 물들이며 사회를 재현하는 이론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가리키는 것일까.

비판적 사회이론이나 문화이론에서 하나하나의 낱말과 용어, 개념들은 자신이 인식하고 분별하려는 대상을 향한 태도나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론이나 지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느낌을 표현하는 것에 가깝다. 자신이 분석하는 대상이 적어도 체계와 구조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면, 이론은 절대 자의적일 수 없다. 이를테면 자신이 이야기를 건네는 현실이 자본주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론이나 비평이 상대하는 대상이 더 이상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입에서 자본주의란 말을 뱉는 순간 나는 자본주의의 체계적 폭력에 의해 나의 인식과 체험이 매개되고 구성된다는 점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사소한 경험과 의식, 사태라 해도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체계 혹은 구조가 매개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비판적 사회이론이나 문화이론은 합리화, 탈주술화, 이데올로기, 신화, 재현 같은 개념들에 의지해야 했다. 이러한 개념들은 자신이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대상은 언제나 체계 혹은 구조가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 인식과 경험에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하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인 시대를 경유하며 그것이 생산한 사회적 결과들을 분절하기 위해 제출된 숱한 분석들을 만난다. 이러한 분석들은 ‘지각’과 ‘경험’의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이는 마치 지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독점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단계로 칭하는 부르곤 하는 역사적 전환의 시기에 나타난 이론적 자장에서의 소용돌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즈음 철학에서는 신칸트주의 생철학을 필두로 현상학과 해석학, 실존주의 등의 잇단 철학적 담론들이 등장해 지각과 경험이라는 쟁점에 깊이 골몰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사회, 문화이론들 역시 성행하였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변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분주히 나타나고 있다. 언뜻 기시감(Dejavu)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는 이런 변화는 철학 및 사회 문화 이론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앞서 보았던 감정, 정동, 기분, 분위기 따위의 개념이 사회와 문화 분석을 하는데 점점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 것 역시 그에 해당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론적 접근과 분석, 비평은 현실을 경험하고 지각하는 방식을 묘사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이론적 기획을 향한 충동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프로그램을 내장한다. 그리고 이는 어쩔 수 없이 역사유물론에 중대한 도전을 제기한다.

역사유물론이 역사철학이 아닌 한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시대에 따라 변모하고 변형되는 지각, 경험, 인식 등의 문제에 무심할 수 없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이론적 상황에 대한 개입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연재될 이 글은 다음 글에서 다룰 하이데거에서 연원을 갖는 기분과 분위기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그의 존재론적 사유가 갖는 유물론적 성격을 역사유물론과 간단히 대조한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기분(Stimmung, attunement), 분위기(atmosphere), 처해있음(Befindlichkeit, situatedness) 등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이 개념들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존재론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차지하며 불안, 두려움, 권태 등의 정동 혹은 ‘근본 기분’을 설명하기 위한 전거로 구실한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처해있음이라는 명칭으로 게시하고 있는 것은 존재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일상적인 것인 기분, 기분잡혀 있음이다.”라는 하이데거의 전설적인 서술은, 주체/객체의 구분을 초월해 세계-내-존재라는 즉 주체에 의한 객체의 인식과 전유라는 데카르트 이래의 철학적 전통을 ‘해체’하는 그의 손길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주장은 주체로서 객체, 현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분위기, 기분을 통해 현존재는 ‘존재의 짐’을 깨닫는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하이데거는 의식된 대상으로서의 세계라는 관념론적 전통이나 의식과 지각은 외부에 있는 대상을 반영하거나 기록한 것이라는 경험주의를 뛰어넘으며 독특한 유물론을 향해 발걸음을 딛는다. 그렇다면 이는 역사유물론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이데거가 고발하듯이 역사유물론은 서구의 인간중심적 형이상학의 나쁜 상속자로서, 존재론적 사유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험과 체험,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피하고, 나아가 세계의 근본적 전환을 포기한, 가짜 유물론일까.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런 물음에 직접 답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려 우리는 원한사회 혹은 이와 유사한 이름을 단 오늘날의 사회이론과 비평의 추세에 유의한다. 이는 사회를 인식하고 비평하는 주된 접근이 되었고 또 스스로 새로운 사회의 이론을 구성할 수 있음을 강변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접근들을 기분의 사회학 혹은 분위기의 사회론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변증법적 비평을 위한 대화를 시도해볼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이번 글에서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유물론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역사유물론의 관계를 사색해 보고자 한다.

역사유물론자로서의 하이데거?

푸코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다가올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세기가 될 공산이 더 높다. 들뢰즈를 계속 읽는 독자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이데거라는 영향 아래에 놓인 철학적 사유의 흐름 속에, 이를테면 하이데거 식의 전체론적 생기론 철학의 한 사례로서의 들뢰즈가 될 여지가 높다. 최근 존재론적 철학의 유행을 들여다보면 이미 들뢰즈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되고 있음을 누누이 확인할 수 있다.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이나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 포스트휴먼 전환(posthuman turn) 등의 슬로건(혹은 지적 유행의 상표?)을 내걸고 등장한 새로운 이론들은, 스스로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하이데거의 사유방식을 좇거나 그것이 가진 사유의 회로 속에서 움직인다. 존재론이란 이름 자체가 이미 하이데거에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세는 역사와 사회에 관한 유물론적 분석과 비판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반세기 전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두고 “우리 시대의 뛰어 넘을 수 없는 철학”이란 악명높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실존주의자였던 그는 놀랍게도 자신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있는 한 독립된 영토”라고 생각한다고 겸손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 선언은 현재에도 유효할까.

이는 물론,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자면, 이론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달려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사정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전반적으로 무력함은 물론 최근의 과학기술적인 변화는 물론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이론적으로 성찰하는 데 있어 초라한 성적표를 보이고 있음을 주저 없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은 하이데거적 사유의 흐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든 사물인터넷이든 유전공학이든 인공생명이든 무엇이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쩐지 뻣뻣하고 초라한 동어반복적인 외재적 비판을 늘어놓는데 머문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인가 근대성인가라는 쟁점이 제기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모두들 모더니티 비판을 자신의 사유의 좌표로서 삼았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반쯤 하이데거의 ‘문제설정’ 혹은 사회적 관계의 주제화 방식에 종속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를 여전히 고려한다는 것은 모더니티의 문제를 자본주의생산양식이란 문제로 번안하고 이해했던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 즉 하이데거 식으로 처리된 마르크스라는 조건에서 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이나 사르트르, 루카치보다 심지어 아도르노보다 모더니티 비판가로서의 벤야민이 오늘날 가장 각광받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도 딱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한동안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마르크스보다 더 인기 있는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군림하여 왔다는 것은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소외, 착취, 계급투쟁, 자본주의 같은 개념은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된 좌파 지식인이나 운동가들의 전문 용어처럼 들리는 반면, 진정성, 속물, 해체, 불안, 존재론, 일상성, 세계내존재, 네트워크 같은 개념들은 귀에 가까울 뿐 아니라 직관적으로도 더 많은 경험의 함량을 담아내는 말처럼 들리게 되었다. 데리다나 낭시, 레비나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꼽지 않더라도 칸트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판철학을 격렬히 비난하며 새로운 존재론을 꿈꾸는 새로운 철학자들은, 우리가 처한 세계를 이해하는데 기꺼이 하이데거를 참조하거나 아니면 드러나지 않게 암시한다. 이는 짐짓 좌파적인 지식인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발판 위에 벤야민 같은 철학자들의 관념을 세우며 급진화된 하이데거 식 가건물을 끊임없이 짓고 허물어뜨리기를 되풀이 한다. 겉으로는 제법 거리가 멀어 보일 듯 보이는 J. 랑시에르 같은 전직 마르크스주의자는, 이제는 ‘비판’이란 개념에 진저리를 치며 하이데거의 ‘처해-있음’과 기분(Stimmung)의 현상학을 번안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감성적인 것의 나눔’이란 담론을 주조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미적인 것의 정치학으로 개조하고 급진민주주의적 해방의 원리로 삼는다. 그가 이데올로기(비판)에 진저리를 치며 ‘몫 없는 자’의 경험에 열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과학기술연구나 기술철학에서 이는 한술 더 뜬다. 행위자네트워크이론(actor-network theory)을 대표하는 라투어 같은 이는 주체-객체라는 구분을 격렬히 거부하며 네트워크라는 인간-세계, 주체-객체의 위계적인 구분을 제거한 ‘네트워크 세계’를 사유할 것을 주문한다. 왜 인간 주체만을 행위자로서 여겨야 마땅한가. 그는 사물, 기계, 환경을 기꺼이 효과를 생산하는 행위의 작인(agency)으로 승인하기를 요구한다. 당연히 그의 모든 개념과 사변에서 휴머니즘의 형이상학을 고발한 하이데거의 메아리를 듣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비판’은 끝난 것인가. 우리는 진정성, 본래성, 존재로의 귀환, 인간세(anthropocene) 이후의 시간에 대한 기약, 주체성으로부터의 해방, 인간을 유일한 주인으로 내세우는 인간학적 형이상학의 오만함을 꾸짖는 후-인간적(post-human), 비-인간적(in-human) 세계로의 전환 등등으로 이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관념적 미래 혹은 간단히 ‘이후(after)’를 예감하는 데 머무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앞의 하이데거적인 사변으로 채색된 오늘날의 철학적 사유의 시도들이 실천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비판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상품생산이 지배하는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를 노동자계급이나 혹은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주체를 통해 폐지하거나 개조하는 것과 같은 실천은 아닐 것이다.

주체도 객체도 아닌 것: 존재인가 자본주의사회형태인가

그렇다면 많은 이를 숨 멎게 하는 하이데거의 매혹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왜 우리는 그의 존재론적인 철학에 기꺼이 의탁하려는 것일까. 그것을 단지 이론적인 호사가들의 기호(嗜好)와 욕망 탓으로 돌리는 것은 썩 좋은 가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로부터 하이데거적 사유의 유혹을 규정하는 요인들을 찾아내고 이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비판’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변증법적 비판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비판을 참조하는 것은 어떤 사유를 상대함에 있어 특히 그것이 아무리 고매하고 정교한 철학적 담론이라 해도 그것 역시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종교와 다름없이 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나쁜 이데올로기이다. 그렇지만 종교는 유토피아적인 희망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좋은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율배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올바른 대답은 종교(-이데올로기)의 이율배반을 온전히 승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대적 사회관계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불행한 현실을 초월하겠다고 약속하는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변증법적 비판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변증법적 비판은 눈물의 계곡이라는 지상의 현실이 천상의 현실로 소외되어 나타나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나아간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비판은 의식과 현실의 일치를 위해 현실에 대한 잘못된 표상, 즉 종교라는 잘못된 의식을 진정한 의식이나 삶의 태도로 바꾸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마르크스가 비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반영을 바로잡는 행위, 의식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를 조응하는 상태로 바꾸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악명 높은 테제1에서 마르크스는 기존의 유물론이 현실을 객체로서만 파악하지 그것을 주체로서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훗날 자본에서 보다 자세히 규정하고 분석하게 될 ‘사유 객체(thought object)’ 같은 모순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현실을 객체로서만 간주하는 한 그것은 실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사유(하는) 주체’란 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데, 사유 객체란 대관절 무슨 뚱딴지같은 개념일까.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은 인간 주체라는 상식에 따르자면 사유는 주체의 편에 속한다. 그렇다면 사유 객체란 무슨 말일까. 우리는 조금 대담한 가설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출간되지 않은 짧은 비망록에 가까운 테제에서의 마르크스의 생각, 그가 사유객체라고 규정한 것의 진면목은 훗날 자본에서 전개될 분석의 핵심적 윤곽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의 첫 번째 권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의 이중성(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 상품의 모순(사용가치와 가치), 화폐의 모순(가치척도와 유통수단) 등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동시에 객체이면서 동시에 사유라는 것, 헤겔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세심하게 밝힌다. 이는 문자 그대로 객체가 주체를 대신해 사유한다는 것, 후기구조주의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주체가 ‘탈중심화되어(de-centered)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실천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마르크스의 생각의 요점은 사유와 현실을 대립시키는 한 사유 자체가 현실이자 객체이며 또 그 역(逆)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실천이란 주체가 자신의 기대와 소망대로 현실, 객체를 조정하거나 변형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어떤 생각이나 관념이 충분히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를 따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주체가 객체이고, 아도르노 식으로 말해, 주체와 객체는 각각 대립항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실천이란 곧 그러한 주체-객체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형태(social form) 혹은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를 변혁(transformation)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아찔하리만치 하이데거와 유사해진다.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비동일성을 말하면서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마르크스는 역시 그와 동일한 논변을 자신의 ‘(서구) 문명’ 비판의 핵심적 공리로 삼았던 하이데거와 수렴한다. 마르크스는 주객동일성을 사유하기 위해 물질적 생산을 분석의 초점으로 삼았다면 하이데거는 주체/객체를 대신한 세계-내-존재(being-in-world)라는 것을 자신의 분석의 본령으로 삼았던 것 아닐까.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와 물신주의(fetishism)란 개념으로 주체와 객체의 매개 혹은 모순을 분석하고자 했다면 하이데거는 기분/처해-있음(심정성, Befindlickeit, disposedness)이란 개념을 통해 현존재의 존재와의 은폐/탈은폐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통해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의 비판을 겨냥했다면 하이데거는 실존론적 존재론을 통해 세인들(Das Man, the they)과 잡담(idle talk)의 초극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것 아닐까. 마르크스가 생산양식과 계급투쟁의 변전을 통해 유물론적으로 역사를 사유하려 했다면 하이데거는 존재사라는 시점을 통해 역사를 사유하려 했던 것 아닐까. 마르크스가 독일 관념론과 고전정치경제학을 비판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의식과 표상으로 환원하는 것을 돌파하려 했다면 하이데거는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역시 동일한 것을 목표했던 것 아닐까. 우리는 이를 빼고도 마르크스와 하이데거의 사유 사이에 거의 평행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니면 거의 조목조목 대응한다고 말해도 좋을 점들을 계속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사유와 마르크스 사이에 유사성을 지적하는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간」이 알려진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하이데거 혹은 하이데거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더 이상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휴머니즘 서간」이 프랑스 급진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르트르식의 사유의 절대적인 지평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금기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계시처럼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최근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를 대조하고 둘 사이에 어떤 중첩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를테면 스스로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라 자처하는 F. 제임슨 역시 마르크스와 하이데거가 수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시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자본주의의 표상(체계)를 비판한 저작으로 읽고자 시도하는 자본을 표상하기란 책에서, 하이데거의 근대 형이상학의 현전/표상(presence/representation)과 마르크스가 일정 부분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시사한다.

나아가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독일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C. 헤닝은, 비록 독일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 이후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경유한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및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존재론화’하고자 한 궤적이라 규정한다. 그러면서 20세기 (독일)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특성을 하이데거 철학과의 수렴에서 찾는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상부구조에 대한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전락했음을 비판하는 페리 앤더슨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필적할 만한 흥미로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역시 이러한 마르스주의의 존재론화를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위반한 일탈로 규탄한다.

하이데거는 그간 국가사회주의의 국정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현상학적 실존주의자로서 알려져 있었다. 그런 탓에 그의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시도들과 수렴 혹은 평행하다는 주장은 지극히 외설스러운 주장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성의 철학’(코지크, 마르쿠제)이든 ‘일상성의 철학’(르페브르, 상황주의)이든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혁신하려 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역사를 조망할 때 마치 불가역적인 힘처럼 하이데거의 지문이 묻어있음을 식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하이데거와 마르크스가 수렴할 수 있다는 주장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무엇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H. 마르쿠제의 하이데거-마르크스주의는 물론이고 집요하리만치 하이데거를 비판했던 아도르노 역시 하이데거와 대립하는 부분만큼이나 많은 부분 하이데거의 사유와 연속하기도 한다. 아도르노의 주저인 부정변증법의 1부는 하이데거 비판을 위한 부분이며 이 책에 수록될 예정이었다가 독립적인 저술로 출간된 진정성이란 은어를 비롯해 그의 초기를 대표하는 논문인 「자연사라는 관념」과 「철학의 현실성」 등 역시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데 골몰한다. 그렇지만 이 글들을 면밀히 읽는 이들은 도처에서 하이데거의 사유와 일치하거나 그를 변주한 듯 보이는 대목들을 수두룩하게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의 하이데거 비판은 많은 오해를 품고 있어도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의 새로운 유물론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데 있어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아도르노는 “자연사”와 “객체의 우위(ponderance)”라는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을 집요하게 다듬어 가며,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한 ‘신-존재론(neo-ontology)’ 비판을 실천했다. 심연과도 같은 호텔 방에 갇힌 우울한 사색가로서의 아도르노라는 인상은 상당 정도 오해에 가깝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상응하리만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을 비롯한 사회이론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아도르노의 이론적 작업들은 예술의 영역 가운데서도 가장 추상적이고 형식화되어 있는 음악 비평에서도, 교환사회라고 그가 즐겨 말하는 부르주아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형태에 대한 비판이 핵심적인 몫을 차지한다. 그런 점에서 미메시스나 주체와 객체의 화해 같은 미학적인 사변을 뇌까리는 침울한 사색가로서의 아도르노라는 인상은 현상학과 실존주의, 해석학, 하이데거적 존재론 등에 맞서 역사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옹호한 이론가로서의 아도르노란 생각을 통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와 아도르노의 관계, 그리고 하이데거주의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적 관계는 중요한 쟁점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를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아도르노의 역사유물론적인 접근이 오늘날 성행하는 새로운 유물론 혹은 존재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을 위해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따지는 일일 것이다. 이는 무리를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존재론적 사유의 유혹에 면역되지 못한 역사유물론을 방어하기 위해 객체의 우위와 주체의 구성적 활동성이라는 모순적 테제를 제출하며 역사유물론의 유물론을 방어한 것이 아도르노의 결정적인 업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 하이데거적 존재론적 사유를 탐색할 때 아도르노에 적잖이 의지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마르크스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유물론자이다. 그것이 지나친 표현이라면, 아도르노가 집요하게 지적하듯,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을 절묘하게 은폐하며 유물론자인 척 변장한 채 기존 철학의 관념론적 흔적을 소제(掃除)하고자 한 위장 유물론자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유물론(new materialism)’임을 자처하는 많은 유물론적 철학 담론은 마르크스보다 하이데거에게 더 크게 의지한다. 새로운 유물론 혹은 존재론적 전환 이후의 철학들이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유물론을 가공하고 제시하려 할 때, 자본주의 비판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된다. 새로운 유물론은 자본주의 비판을 하이데거의 현존재/존재의 관계에 대한 사유와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론적 현실 비판을 구성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착취적 사회관계를 비판하는 것 따위에는 코웃음을 치며 생태적인 위기를 비롯한 보다 ‘근본적인’ 존재적 위기를 강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오늘날 철학은 물론이려니와 좌파적인 사회 이론 안에서 맹위를 떨친다. 그렇다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를 여전히 지켜내고자 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사유들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비평적 접근을 기분의 사회학, 분위기의 사회론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 이러한 접근들이 어떻게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전유하며 오늘날의 사회형태에 관한 표상을 생산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최근 부상한 어떤 표현을 빌자면 ‘존재론적 좌파(ontological left)’의 사유와 역사유물론적 좌파의 변증법적 사유를 대조할 것이다. 이 때 우리의 분석의 초점은 지각과 경험이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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