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anti)-비(in)-미학(aesthetics):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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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관객>의 구성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랑시에르의 예술이론 혹은 미학주의적 노선의 진면목을 요약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덧붙여도 좋다면, 이 저작은 이론의 정치를 조직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비판(critique)’이란 개념을 기각하는데 모든 주의와 신경을 바치는 작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거부하고 저주하는 비판이란 대관절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 연작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정수로서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이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크스주의가 기꺼이 스스로를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라 칭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뒤이어 언급하겠지만 비판은 현실을 부정하고 변형하려는 지적, 정치적 기획의 어떤 이름이다. 한편 우리는 랑시에르의 미학과 정치학에 대한 관계를 사유하는 방식을 요약하고자 채택한 미학주의란 개념을 19세기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풍미했던 유미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윌리엄 모리스W. Morris의 예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이나 오스카 와일드(O. Wilde), 버나드 쇼(G. B. Shaw)처럼 사회주이자이면서 동시에 유미주의자였던 이들의 노선은, 랑시에르의 생각에 빗대자면, 비판에 가까운 자리에 놓여 있다. 따라서 유미주의의 미적 정치는 랑시에르의 미적 정치와 다르다. 유미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이 초래한 삶의 비참을 비판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내세운다. 자본주의는 거짓이기도 하고 부정의하기도 하지만 추한 것이다. 그것은 미(beauty)를 파괴한다. 따라서 파업과 시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렇지만 랑시에르의 미학주의는 더 이상 비판으로서의 미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미적인 것을 따라다니는 경제의 타자로서의 정체성은 랑시에르에겐 아무런 흥밋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술의 자율성과 타율성이라는 미학 이론의 완곡한 질문은 비판에 집착하는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쓸모없는 문제설정으로 기각된다.

랑시에르에게 감성적인 것 혹은 미적인 것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미적인 것의 영원한 타자였던 경제와의 관계는 자리잡을 곳이 없다. 미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던 정치는 이제 미적인 것(감성적인 것)의 자기동일성의 문제로 내재화된다. 랑시에르에게 예술과 경제의 타율성/자율이라는 접근은 모더니즘이라는 예술에 관한 독특한 접근의 산물일 뿐이며 사회학주의라는 사고 습관의 효과일 뿐이다. 그런 탓에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이 제기하는 것처럼, 비판적 예술이론을 구성하는 핵심 지형인 경제와 예술의 관계는 그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도르노의 경우 음악사회학입문이든 미학이론이든, 자신의 모든 예술 이론을 전개한 주저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회’라는 결정적인 장(章)을 포함한다. 비판이론이라는 개념이 마르크스주의를 가리키는 암호와도 같은 개념이었던 것처럼, 사회란 개념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을 연장하며 칸트-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비판적 사유의 전통을 자본주의라는 객관적 현실(교환사회)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 혹은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을 추구한다. 그것은 객관적 현실이 지속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주관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유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비판은 그에 관한 인식과 감각에 대한 비판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가. 그럼 그에 앞서 혹은 그에 못지않게 그를 인식하고 감각하는 방식을 문제 삼아야만 한다. 그것이 “비판”이란 것에 깃든 절대적인 함수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탈식민이성 비판, 인민주의이성에 관하여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 혹은 설령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인 접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유와 경험이 구조적으로 구속되어 있음을 고집한다. 그렇지만 인식과 경험은 그렇게 주조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비판은 철회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랑시에르의 결정적인 돌파의 시도는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비판에 의지하지 않은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며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자신의 정치철학적 사변을 구축한다. 그것은 새로운 좌파적인 인민주의의 현신인가, 아니면 무정부주의의 또다른 동시대적인 판본인가. 우리는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그의 생각을 좇아가보기로 한다.

“피착취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착취의 법칙을 설명해줄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상태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피지배자들이 계속 복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종을 계속하는 것은 상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에 대한 감정은 그들이 감각적 자료들의 구성을 변화시키고 기존 세계의 내부에 다가올 세계의 형태들을 건설하는 정치적 과정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랑시에르 2008b, 83-4) 알튀세르에게 퍼부었던 악명 높은 비판을 떠올리는 이 구절에서, 랑시에르는 역설한다. ‘노동자들은 달리 착취당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비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물신주의? 그것은 비판이란 이름으로 노동자, 여성, 유색인종, 이주노동자 등으로 이어지는 주체들에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호도할 뿐이라는 것이 랑시에르의 생각이다. 그가 무지한 스승에서 역설한 지적 평등의 주장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비판적 페다고지pedagogy”, 어떤 교육학적 기획을 용인할 수 없다. 랑시에르에게 현실의 뒤편에 놓인 비밀이 있다는 주장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는 셈이다. 그것은 대중들이 이미 알고, 보고, 말하고, 느끼고 있는 것(감성적인 것의 그릇된 분배, 혹은 잘못wrong)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가 보기에 문제는 그러한 감성적인 것의 분배인데도 대중은 가상에 현혹 당했을 뿐이라고, 억척스럽게 당party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좌파 지식인들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꾸준히 믿는다. 그러므로 해방의 정치를 위한 사유는 새로이 방향 전환을 이룩해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랑시에르는 자신의 정치철학적 사유를 공들여 마름질한다. 그것은 이런 식이다. 우리는 감성적인 경험을 자연화하는 치안police의 정치, 각각 주어진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는 인식, 감성, 경험을 배치시키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몫 없는 자의 몫, 정원외적 주체의, 말을 해도 들리지 않고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기존의 소통의 구조에서는 오직 소음으로만 청취될 뿐인 그것을 통해 기존의 감성적-미적 질서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연의 정치proper politics를 열어젖힐 것이다. 비판으로서의 정치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예속을 당연시하는 태도를 타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문제는 감성적 질서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즉 새로운 미적 주체화를 통해 진정한 정치를 도입하여야 한다.

결국 랑시에르는 해방의 정치를 좌절시키는, 그 속에 깊이 박힌 가시를 뽑아내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 가시의 이름은 비판이다. 먼저 I) 비판은 대중의 역능을 믿지 못한다. ii) 비판은 숨겨질 것이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기만이라고 우긴다. iii) 비판은 진정한 비판의 자질을 가진 주체를 할당함으로써 부정의 주체의 이름인 ‘아무나anybody’를 부인한다. iv) 비판은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역사적 객관성을 맹신함으로써 부정의 근본적인 우연성, 부정의 시간인 아무 때나anytime를 질식시킨다. 그러므로 랑시에르의 미학주의는 비판의 과학주의에 수반된 모든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다. 비판은 부정의 변비를 초래한다. 그렇지만 대중이 기존에 듣고 보고 느끼던 것을 다르게 듣고 보고 느끼게 된다면 부정은 언제나 가능하며 누구나 부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감성 공동체sensual community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필연성이라는 공산주의를 대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핵심이 ‘비판의 비평’ 혹은 ‘비판의 폐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검토할 해방된 관객은 비판이란 이름으로 수행된 정치에 대한 고소장이자 그것을 가장 상세하게 주해한 텍스트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저작에서 비판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몸짓이 완고하게 되풀이되는 결정적인 영역을 겨냥하여 비판의 추문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것은 예술이다. 혹은 비판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힌 예술이다.

비판의 참회?

따라서 해방된 관객은 비판을 거부하기 위한 다양한 사고의 시도를 변주하는 저작이다. <해방된 관객>에서 <생각에 잠긴 이미지>로 이어지는 6개의 장은 각기 비판이라는 모토 하에 이뤄진 예술적 실천의 사례들과 그것에 스며있는 원리를 추궁하고 거부한다. 우리는 각 장을 모두 주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장에서 전개되는 사유를 집약하는 하나의 장을 깊이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판적 사유의 재난>이란 장이다. 이 장에서 비판 전통의 시대에서 성장했음을 자처하는 랑시에르는 비판에 관한 자신의 회한을 서술한다. 그것은 에두른 마르크스주의적인 예술 이론에 대한 혹은 나아가 비판이란 이름으로 지속된 예술이론 혹은 미학의 전통에 대한 거부를 기록한다. 랑시에르는 비판을 거부하는 새로운 흐름마저 비판에 가담한다는 연유로 비판 청산의 시도가 불충분했음을 고발한다. 그렇다면 보다 완전한 비판의 제거, 보다 과격한 표현을 택하자면 비판을 확인사살하려는 랑시에르의 결의와 그 의중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이 장에서 비판의 전통이 완고하게 자리 잡은 예술을 겨냥함으로써 비판이 소멸하거나 제거되기는커녕 암약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그는 먼저 몽타주와 콜라주라는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을 둘러싼 신화를 지적한다. 흔히 V-효과(Verfremdung-effekt)라 부르는 전설적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는 그런 작업방식을 뒷받침하는 논거이다. 초현실주의라면 “부르주아의 범속한 일상 아래에 있는 욕망과 꿈의 억압된 현실을 현시하는 데 쓰인” 것이고, 마르크스주의라면 “이질적 요소들의 부적합한 마주침을 통해 평범한 일상과 민주적 평화라는 외양 아래 감춰진 계급 지배의 폭력에 민감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라며, 랑시에르는 빈정거린다.(42) 그리고 이러한 반-이미지를 사용하려는 시도, 즉 “비판 장치”가 “은폐된 현실에 대한 의식과 부인된 현실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노리곤 한다”며 이런 비판의 (예술적) 테크닉 안에 감춰진 인식론적-미학적 의도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그에게 주된 관심은 비판의 패러독스, 즉 비판 스스로를 비판하는 비판을 겨냥한다.

그가 이 장을 서술하기 위해 참조한 맥세퍼의 <무제>라는 시위대 사진은 운동 자체가 스펙터클화되어가고 자신이 대항하는 것을 모방하는 어떤 원리를 암시한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주장이다. 그렇기에 그는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가난의 존재론’ 비판을 통해 제시한 주장, 즉 현실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면 둘수록 거꾸로 현실에 대한 견고한 믿음과 비참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증대하는 역설적인 효과에 대한 고발을 인용한다. 그리고 얄궂게도 슬로터다이크 역시 비판을 제거하려 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비판의 논리를 재도입하는지 폭로한다.(47) “(…) 비판 전통에 대한 이런 비판은 비판 전통의 개념과 절차를 여전히 사용한다. 어떤 것이 바뀐 것도 사실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절차들은 해방 과정으로 향하는 의식 형태와 에너지를 불러일으킬 계획이었다. 이제 그 절차들은 해방의 지평과 완전히 절연했다. 곧, 명확히 해방의 꿈에 맞서는 쪽으로 돌아섰다.”(49) 랑시에르는 이렇게 추론한다. 물론 비판은 거꾸러졌다. 현실에 드리워진 가상을 폭로하는 것이 비판이었다면 그런 비판은 그것의 전도(轉倒), 즉 비판하면 할수록 그 대상을 에워싼 가상의 두께가 엷어지기는커녕 더욱 두꺼워지는, 즉 비판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몸짓도 결국엔 현실을 비참함으로 채색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슬로터다이크의 말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판이 비판의 반대쪽으로 나아간다는 당신의 주장 역시 비판의 원칙을 좇지 않는가. 그는 앞서 언급했던 맥세퍼의 작품을 언급하며 슬로터다이크에게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모습을 확인한다. “이미지들의 진열이 현실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지고, 따라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그가 볼 줄 모르는 것을 보여주고, 그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갖게 하는 것”이 이런 작품에서 운반되는 사고이다.(46) 이런 사고는 자신이 활용하는 비판 장치 자체가 허영 가득한 상품처럼 보이는 것을 무릅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급진적인 척 하는 예술적 실천은 비판의 패러독스를 뒤쫓는다. “비판적 패러다임의 고발에 내재하는 변증법”(46)은 물론 전과 같은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인간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하늘에 비참한 현실의 전도된 이미지를 투사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면, “우리 동시대인들은 견고한 현실이라는 허구에 일반된 경감 과정의 전도된 이미지를 투사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게 슬로터다이크의 생각이다. 이제는 현실의 전도된 이미지를 비판하는 일이 식은 죽 먹기가 되었고, 모든 언어와 이미지는 이제 현실의 비참함을 말하도록 촉구받는다. 그러나 현실과 가상의 거리를 유지하는 한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은 여전히 비판의 궤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미지는 비참을 아늑함으로 위장했다는 연유로 비판되었다면 이제 이미지는 충분히 비참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연유로 고발당한다. 그리하여 좌파의 멜랑콜리가 번창하게 된다. 비판은 비판이 번성하는 자신의 세계의 언어에 기생하며 그것의 숙주인 세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멜랑콜리 좌파

 

그렇다면 비판이 비판되는 대상의 원리, 상품적 등가와 스펙터클의 원리를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 이후의 비판, 그것이 초래하는 출구 없는 세계에 갇힌 듯한 느낌일 침울함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방향을 전환하여 프랑스의 베버주의 사회학자 및 경영학자의 역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참조한다. 그가 보기에 비판이란 개념과 미적인 것이란 개념 모두를 남용하는 대표적 사례이자, 그가 내걸게 될 미적 정치의 깃발에 남아있을지 모를 어떤 비판 개념의 얼룩도 말끔히 제거하는 데 있어, 이 저작보다 더 적절한 상대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간단히 그들이 비판의 역사로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제시하려는 방식을 거부한다. 볼탕스키와 시아펠로는 19세기 후반 사회주의(정치)를 낳은 사회적 비판이 1960년대 이후 예술적 비판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들은 참여와 창의성 등의 테마를 납포하여 반위계적이며 자율적이고 또 성과주의적인 경영 형태를 밀어붙인 새로운 자본주의는 예술적 사유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랑시에르는 이를 용인할 수 없다. 그는 격분하여 이렇게 힐난한다. “사회적인 것과 감성적인(미학적인) 것 사이의 연대, 모두를 위한 개인성의 발견과 자유로운 집단성을 찾는 기획의 연대가 노동자 해방의 핵심이었다. 그 연대는 동시에 사회학적 세계관이 한결 같이 거부했던 계급과 정체성의 무질서를 의미했다. 사회학적 세계관은 19세기에 그런 무질서에 맞게 구축됐다. 아주 자연스럽게도 사회학적 세계관은 1968년의 시위와 슬로건에서 그 무질서를 다시 발견했다. 사회학적 세계관이 1968년 탓에 계급, 계급의 존재방식, 계급의 행위 형태의 적절한 배분에 야기된 교란을 기어이 없애려고 애쓰는 것도 이해가 된다.”(53)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토스카나A. Toscana가 “반-사회학(anti-sociology)”이라고 비난했던 자신의 입장을 다시 확인한다. 그가 말하는 사회학적 세계관 혹은 경멸적으로 사회학주의라고 불리는 입장은 사회적 형세나 구조 속에 배당된 위치로부터 비롯된 입장이나 태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조합주의(corporatism)적인 사유를 비판하고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전체와 비-전체, 몫업는 자의 몫이라는 정치적 존재론으로 대체한 랑시에르의 핵심적 입장은 비판을 용인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도약한다. 그는 비판보다 감성적인 것의 분배(portage)를 새롭게 조직하는 데 내기를 건다.

식견 있는 이성의 무능력

랑시에르는 포스트-비판적 비판의 두 사례를 대조한다. 먼저 좌파적 멜랑콜리, 즉 비판은 결국 비판하는 대상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비판하는 대상과 공모관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슬픔에 휩싸이는 좌파적인 노선이 있다. 다음으로 민주주의는 테러리즘과 공동체의 파괴의 주범이라면서 이성에 내재한 비이성을 고발하며(어떤 소속도 없이 시장법칙을 통해서만 전적으로 처분가능하게 존재하는 분자들의 자유로운 집적이 되어버린 서구 세계 혹은 상징 질서를 최종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무제한한 자유와 선택의 추구를 용인한 서구 민주주의의 병폐 운운), 격분한 채 어쩔 줄 모르는 우파적인 노선이 있다.(54-58) 그렇지만 이러한 비판의 좌초를 진단하는 이 두 가지의 정치적 당파의 반응, 즉 ‘식견 있는 이성의 무능력’을 표시하는 이 두 가지의 증상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랑시에르의 답변은 비판의 노선을 해방의 노선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식견 있는 이성의 무능력은 우연이 아니다. 무능력은 포스트-비판적 비판의 이 형상에 본래적이다.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의 테러리즘에 맞서 계몽의 이성이 패배했다면 한탄하는 예언가들은 이 이성 자체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는다. 그 예언가들은 자신들이 고발하는 ‘테러’가 인간을 함께 붙잡아두는 전통적 제도의 끈-가족, 학교, 종교, 전통적 연대-에서 풀려나간 개인적 원자들이 자유롭게 동요한 결과라고 본다.” 이렇게 요약한 다음 랑시에르는 이러한 전통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재확인한다. 마르크스의 비판 역시 “민주주의 혁명을 공동체의 조직을 분열시키는 개인주의적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하는 혁명 이후의 반혁명적 해석 지형 위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0)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비판은 바로 그러한 반혁명적 비판의 지형으로 다시 비판을 운반한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비판의 전통을 모두 결산한 셈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카드를 꺼낸다. 그것은 해방의 노선이다.

그는 해방을 통한 새로운 감각적 공동체의 노선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해방이란 “플라톤적 공동체”와도 다르고 “감각적인 것의 치안적 나눔”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른 것. 즉 “점유/업무와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을 쟁취할 수 없는 무능력을 뜻했던) ‘능력’ 사이의 일치와 단절하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해방이란 “일이 기다려주지 않음을 알고, ‘시간 없음’에 의해 가공된 감각된 지닌 장인의 점유/업무에 맞추어진 노동자의 신체를 해체하는 것을” 뜻한다.(61) 그렇지만 그것은 해방의 경과를 이해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부터 철저하게 면역될 필요가 있다. 그 구래의 비판적 해방의 노선은 청년 마르크스에게서 예시되듯이 잃어버린 재화를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재전유하는 것, 그리고 그 재전유는 자신들이 겪은 전반적인 분리과정에 대한 인식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 진정한 해방은 사회를 그것의 진리에서 분리해냈던 전반적 과정의 종언으로서만 도래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귀착된다.(62-63). 즉 관건은 소외의 비판이었다. 그 결과 랑시에르가 보기에 재앙과도 같은 과정이 일어났다. 해방은 새로운 능력의 구축이 아니라 “가상의 능력에 빠진 자들에게 과학을 약속하는 것”이었고, 이는 또한 “약속을 무한정 지연하는 논리”였다.(63) 그러므로 이러한 가면 벗기기의 신화는 바르트의 신화론이든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이든 모든 텍스트에서 반복되었고 이제 이미지 자체가 현실이 되었다는 선언을 통해 전도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비판의 전통 전체를 결산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결산된 비판

 

“그러므로 ‘비판에 대한 (실질적) 비판’은 그 논리를 한번 더 뒤집는 것일 수 없다. 비판에 대한 실질적 비판은 비판 개념과 비판 절차들, 그것들의 계보와 그것들의 사회 해방의 논리와 교착되는 방식에 대한 재검토를 거친다. 재검토는 특히 강박적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거친다. 재검토는 특히 강박적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거친다. 그 강박적 이미지를 둘러싸고 비판적 모델의 역전, 즉 상품과 이미지의 파도에 휩쓸리고 상품과 이미지의 허망한 약속에 속아 넘어간 소비자 개인이라는 가엾은 백치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상품과 이미지의 진열에 대한 이 강박적 고민 그리고 상품과 이미지의 피해자인지도 모르고 우쭐해 있는 자에 대한 표상은 바르트, 보드리야르, 드보르의 시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19세기 후반에 아주 특정한 맥락에서 부과됐다. 그 때는 생리학이 영혼의 통일성과 단순성이었던 것 대신에 자극과 신경회로의 다수성을 발견한 시대였고, 이폴리트 텐과 더불어 심리학이 뇌를 ‘이미지의 군락’으로 변형한 시대였다.”(65-66)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감성적인 것의 분배와 관련한 체제의 역사적 계보에 대한 그의 지론을 다시 암시한다. 아니 그가 불화와 감성의 분할에서 제시했던 주장의 요체를 밝힌다. 그것은 비판과의 단절을 통한 해방의 노선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미학적 체제라고 부른 감성적인 것의 분배 체제를 압축하는 인물, 플로베르와 그가 문서고에서 찾아낸 노동자들의 형상을 다시 한 번 짝지운다. “서민으로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실험한 동시대의 쌍둥이 형상-엠마 보바리와 국제노동자 협회-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은 먼저 ‘소비사회’의 기만적 유혹을 규탄했다. 물론 이 두려움은 가난한 자들-그들의 빈약한 두뇌는 이 다수성을 제어하지 못한다-에 대해 온정 넘치는 심려의 형태를 취했다. 달리 말하면, 삶을 재발명하는 이 능력은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변환됐다.”(67) 랑시에르의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어떠한 매개도 거부하는 입장, 혹은 독일 철학자들이 생산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맞서 수용미학에 가까운 것에 대한 옹호,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역사적 형태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가리키는 주장은 모두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일치 혹은 동일성을 전제한다. “정치적인 주체화의 행위들에 의해 가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어떤 주체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재정의된다는 의미에서 정치의 감성학(미학)이 존재한다. 말을 유통하고 가시적인 것을 전시하며 정서를 생산하는 새로운 형태들이 이전 가능태의 짜임새와 단절하고 새로운 능력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미학의 정치가 존재한다. 예술의 정치란 이런저런 대의에 봉사하려는 예술가들의 소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작동하는 공통 경험의 대상들에 대한 독특한 마름질이다. 미술관, 책, 극장의 효과는 이런저런 작품의 내용에 기인하기에 앞서 그것들(미술관, 책, 극장)이 수립하는 시공간의 나눔과 감각적 제시 방식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효과는 예술 자체의 정치적 전략을 정의하지도 않고 예술이 정치적 행위게 계산 가능하게 기여하는 것을 정의하지도 않는다.”(91)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랑시에르는 자신이 수행한 과제가 어떤 상대를 거부하고자 한 것이었는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동일한 기계장치(비판이라는 기계장치-인용자)를 끝없이 유지하는 이 회전에 한 바퀴를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행보를 바꿀 필요성과 방향을 제안했다. 이 행보의 핵심에는 능력에 대한 해방의 논리와 집단의 농락을 비판하는 논리 사이 연결을 끊으려는 시도가 있다.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전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전제할 것이다. 무능력한 자들은 그들의 위치에 가둬두는 기계의 숨겨진 비밀 따위는 없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할 것이다. 현실을 이미지로 변화하는 불가피한 메커니즘 따위는 없다. 모든 욕망과 에너지를 자신의 배 속에 흡수하는 괴물 같은 짐승 따위는 없다. 복원해야할 잃어버린 공동체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나 돌발할 수 있는 불일치dissensus의 무대들뿐이다. 불일치란 외양아래 숨겨진 현실도 없고, 모두에게 소여의 명증함을 강제하는 식으로 소여를 제시하고 해석하는 단일 체제도 없는 감각적인 것의 조직화를 뜻한다. 모든 상황은 내부에서부터 쪼개질 수 있고, 상이한 지각, 의미화 체제 하에서 재편성될 수 있다. … 정치적 주체화 과정은 바로 소여의 통일성과 볼 수 있는 것의 명증성을 쪼갬으로써 가능태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는 셈해지지 않은 능력들의 행위 속에서 구성된다. 해방의 집단적 지적 능력은 전반적인 예속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불일치의 무대 안에 투자된 능력들의 집단화이다. 나는 물신의 가면을 벗기는 종결될 수 없는 과제에서 또는 짐승의 전능함에 대한 종결될 수 없는 증명에서보다는 이 힘에 대한 탐구에서 오늘날 찾거나 발견할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69)

랑시에르의 불화(불일치)의 정치학 혹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분배)의 조직화와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랑시에르 스스로에 의해 간략하게 요약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제가 겨눈 잠재적인 적이 무엇인지도 덩달아 분명해졌다. 그것은 비판이라는 무능력한 실천이다. 그렇지만 랑시에르가 끈질기게 기소하고 고발한 비판을 엄호할 수는 없을까. 무엇보다 물신주의 비판을 비자본주의적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정치적 변혁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생각하는 이에겐 비판을 철회하도록 요구하는 랑시에르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랑시에르가 추궁했던 비판을 계속하여 옹호할 수 있을까.

 

인지적 지도그리기? 왜 감성적인 것의 (재)배치가 아니라…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인 접근은 실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비판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사고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일은 제법 널리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이론가들만도 수두룩하다. 독일의 문학 및 예술 이론가들인 한스 울리히 굼브레히트Hans Ulrich Gumbrecht, 칼 하인츠 보러Bohrer, Karl Heinz, 게르노트 뵈메 Gernot Böhme를 위시하여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투안 콩파뇽Antoine Compagnon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비판을 규탄한다. 이는 예술의 역사적인 규정을 해부함으로써 예술 작품이 지배질서와 맺는 관계를 밝힐 수 있다고 본 영미의 마르크스주의적 미술사에 대한 미학주의의 대대적인 역공을 통해서도 완강하게 전개된 것이다.(cf. D. Beech & J. Roberts) 따라서 신미학주의가 대두되어 위세를 떨치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들 모두는 예술이 비판의 시녀가 되었던 역사를 개탄한다. 그리고 그들은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나 헤겔의 미학 강의를 밀어내고 실러의 미학 편지를 앞세운다. 이들은 미적인 것이 이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든 아니면 미적인 것에 이성과 윤리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기는 것이든 모두 결국에는 이성의 비판을 위해 미적인 것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귀착시키는 비판의 전통에 맞선다. 그렇기에 미적인 것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미적 국가aesthetic state’(혹은 노발리스의 ‘시적 국가’)를 주창한 실러가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제 바야흐로 비판은 미적인 것의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미학적 민주주의론’ 혹은 ‘미학의 정치’에 깃들어 있는 미학주의와 대칭을 이룰 만한 사유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격렬히 비난하는 비판의 입장에서 그렇지만 미적인 것을 주변화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 비판과 미적인 것을 교차하는 시도들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로 제임슨의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미학the aesthetic of cognitive mapping을 참조할 수 있다.(Jameson 1990, 347) 알다시피 이는 랑시에르의 미적 정치에 관한 주장이 소개되기 전인 1990년에 제임슨에 의해 제안되었다. 제임슨 역시 인지적이란 개념이 감성적인 것에 대립하거나 적어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미적인 것을 감성적인 것에 국한하기를 절대 거부한다. 그의 동료인 마르크스주의 문학평론가인 수빈D. Suvin의 주장을 좇아 그 역시 미적인 것의 인지적 성격, 즉 미적 비판의 가치를 강력히 엄호한다. 인지적 지도그리기는 급진적 미적 실천을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인지 아니면 아도르노에게서처럼 모나드(단자(單子))와 같이 개별 작품 안에 자족적으로 구성되어있는 경험과 구조의 이중적인 효과를 판별하고 사유하라는 비평의 프로그램인지, 명확히 확정하기 어렵다. 도식적으로 말해 그것은 창작의 원리인가, 비평의 규범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둘러싼 의구들을 잠시 유예하고 인지적 지도그리기라는 어쩌면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을 그리고 랑시에르라면 절대 수락할 수 없었을 이 개념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인지적cognitive? 그것은 미적인 것의 영역에서 비판을 함의하는 가장 강력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배움을 주고, 감동을 전하고, 기쁨에 젖게 하는to teach, to move, to delight”(Jameson 1990, 337) 예술 작품의 효과 가운데 오늘날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바로 가장 앞의 것인 배움을 주는 것teach에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예술이론에서 가장 강력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맨 앞의 것이다. 미술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거나 미적인 것을 신경과학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분석할 수 있다거나 하는 주장을 우리는 간단히 승인할 수 있다. 미술치료라는 것이 당혹스러운 발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진지하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미술치료사의 친절하고 따뜻한 설명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이 때 예술은 관객 혹은 수용자에게 미치는 순전한 감성적 효력으로 환원되고 예술이 가진 독특한 능력과 자기동일성은 사라진다. 아로마치료이든 요가이든 여행이든 안마이든 아니면 요리이든 그것은 신경과학적인 척도를 통해 측정되고 규정된 감성적 효과로 등치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접근의 압권은 단연코 경제행동의 감성적, 심리적 성격을 추적하고 규명하는데 골몰하는 오늘날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첨단, 행동경제학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지적인 것, 예술의 진리로서의 성격에 대한 물음은 어떤 자리에 놓이게 될까. 미학주의가 예술의 진리 혹은 인지적 성격을 극구 부인하고 배제하고자 애쓴다면 정반대의 편에는 예술의 진리로서의 성격을 주장하며 예술을 감성적 행위와 지각의 영역에 묶어두려는 시도를 열정적으로 거부하는 바디우의 입장을 상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디우는 예술은 감각적인 것을 통한 인식의 드러남이라는 가정을 단연코 거부하며 예술적 효과를 진리의 발생과 떼어놓는 혹은 매개적인 관계로 사고하려는 어떤 시도와도 갈라선다. 그에게 예술은 그 자체 내재적이고 단독적인 진리를 만들어내는 진리 절차의 한 분야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많은 이들에게는 충격적일 비미학을 선언한다. “(…) 달리 말하자면 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의 절차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철학적 정체성 찾기는 진리라는 범주와 관련이 있다. 예술은 작업의 결과[작품]가 (효과가 아니라) 실재인 사유이다. 그리고 이 사유는, 또는 그 사유를 움직이게 하는 진리들은, 그것이 과학적 진리이든 정치적 진리이든 사랑의 진리이든 간에, 다른 진리들로 환원될 수 없다. 이는 또한 예술을 독특한 사유로서, 철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바디우, 23-24)

여기에서 바디우는 예술은 인지적 지식이 아닌 감성적인 경험을 다룰 뿐이라는 흔한 믿음을 단호히 물리친다. 그는 예술은 진리 일반은 아니지만 그에 내재적이면서도 또 예술을 통해서만 독특하게(singular) 산출되는 진리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사랑, 수학, 정치 등의 영역에서 산출되는 진리와 대등한 또 다른 진리의 종목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로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기원하는 랑시에르의 정치철학과 사건의 존재론에 근거하여 새로운 주체화의 조건을 선언하는 바디우의 정치철학 사이에 기이한 불일치 혹은 반목을 목격한다. 둘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조건(불화와 사건)에 의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말하며 사회적 규정이든 대상적인 규정이든, 물질적 현실에 의한 타율적 규정을 제거한다. 그렇지만 겉보기에 너무나 유사하고 심지어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두 철학자의 사유는 예술을 둘러싼 사유에서는 서로의 적(敵)이 된다.

그렇지만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이는 아마 두 철학자의 사유 사이에 어떤 차이와 유사성이 있는지 궁금한 독자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원-모더니스트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또한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바디우라는, 비미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다소 경멸적인 비평은, 예술의 미적 체제라는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한 견강부회에 가깝다.(랑시에르 2008b, 107-142)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와 바디우의 미학을 대조하고 결산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고 양자의 대립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아무튼 제임슨의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미학이란 것은 바디우의 비미학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인지적 지도그리기와 예술에 내재적이면서 단독적인 진리라는 비미학 사이에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닮은 점이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의 사유는 랑시에르와 제임슨의 주장보다 더 먼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제임슨 역시 예술의 교육적 성격(바디우라면 지도적didactic 성격이라 불렀을 법한)을 적극 인정한다. 예술은 진리를 담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성적인 것의 차원은 어디에 있는가. 제임슨은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과 유비한다.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개인이 자신의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인 관계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의 상상적imaginary 관계란 예술에 한정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예술에 더욱 특권화될 수밖에 없는 차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지적 지도그리기는 결국 개인이 현실과 맺는 관계와 그를 둘러싼 감성적 경험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지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자 사유이다. 사유에서 경험을 빼내거나 경험에서 사유를 빼내는 것, 즉 하이데거가 하듯이 세계-내-존재란 개념을 통해 사유에 앞선 경험의 주체 즉 현존재를 앞세우는 것은 제임슨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경험을 사유로 번역하는 것과 같은 것, 혹은 어떤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감성적인 경험이 진리의 언어로 도약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철학의 인식론이나 심리학의 주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관성의 물질적, 역사적 규정을 헤아리는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용인되지 않는다.

제임슨에게 감성과 사유는 주관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객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객체도 참조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객체가 있다면 차라리 객체의 영도(零度)라고 불러도 좋을 우연적인 불화의 지점(랑시에르), 장소 없는 사건(바디우)이 있을 뿐이라는 사유만큼 마르크스주의자인 제임슨에게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법칙의 총체성은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적 동기도 아니고 사물 자체의 운동 법칙도 아니다. 화폐는 종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감각적 대상이거나 가상화된 부호로 물질화되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은 초감각적인 것으로 거의 유사-초월적인 선험처럼 노동과 노동생산물을 사회적으로 등가화하고 지배한다(즉 임노동과 상품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의 총체성은 경험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대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 따라서 제임슨의 시기구분의 도식을 좇자면 적어도 독점자본주의단계 혹은 제국주의단계를 거치고 난 이후 개인의 경험 혹은 체험lived experience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총체성 사이에는 어떤 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험과 주관적인 체험을 갈망하는 현상학이나 해석학 그리고 외적 세계의 주관적 규정을 초월한 실재성을 추구하는 존재론적 시도들이 이 단계에는 성행하게 된다. 제임슨의 생각을 좇자면 바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가 초래한 경험/체험과 자본주의적 총체성 사이의 분열 혹은 끝없는 분기가 벌어진다. “이 순간, 개인 주체의 현상학적 경험-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의 으뜸가는 재료였던-은 사회 세계의 자그마한 모퉁이, 런던, 시골 혹은 그 어떤 곳의 특정한 구역에 대한 고정 카메라의 시점으로 한정되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경험의 진리는 더 이상 그것이 벌어지는 장소와 일치하지 않는다. 런던의 그 한정된 일상적 경험의 진리는 외려 인도나 자메이카 혹은 홍콩에 있다. 개인의 주관적 삶의 특질을 규정하는 것은 대영제국의 식민체계와 결부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좌표들은 더 이상 직접적인 체험에 접근할 수 없고 종종 대다수 사람들에게 인식조차 될 수 없다”(Jameson, 349) 물론 세계화, 금융화 이후의 자본주의 단계에서 우리가 처한 조건은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과 총체성 사이의 분열/분기를 조정하고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인지적 지도그리기는 미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것은 미적인 것(감성적인 것)이 자본주의적 총체성에 의해 규정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자율적인 동일성을 구성한다고 간주한다. 그 점에서 그것은 미학주의도 비미학도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할 포스터Hal Foster라는 미술이론가가 제안했던 반-미학anti-asethetics이란 개념을 골라볼 수 있을 것이다.(포스터는 여러 차례 랑시에르를 혹독하게 규탄한 바 있다. ‘후기-비판성post-criticality’이란 레테르를 붙이며 그는 랑시에르의 미적 정치를 ‘예술계 좌파의 새로운 아편the new opiate of art world Left’으로 힐난한다.) 그것이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미학에 기재된 제거불가능한 아포리아, 즉 자본주의 사회에 특유한 경험과 구조적 규정, 감성과 인식 사이의 불일치 혹은 괴리를 매개함으로써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비판할 수 있도록 한다. 제임슨의 말처럼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미학이 사회주의 정치 기획의 불가결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불가불 비판을 요청한다. 경험과 구조적 규정이 일치하거나 적어도 가까이 있던 역사적 시대와 달리 우리는 둘 사이에 그 어떤 유사성과 모방관계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과 의식은 더욱더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다. 자본주의에서 상품(화폐)의 보편성이 존재하는 한, 감성적인 것을 교체하고 새로운 감성적 질서의 체제를 만든다고 하여 랑시에르가 기약하는 평등과 해방의 정치가 도래하지 않는다. 바디우(상황의 상태, 민주적 유물론 등을 생각해 보라)나 랑시에르(치안과 정치의 차이 등을 생각해보라)가 사고하는 것처럼 경제는 정치의 하부영역이 아니다. 랑시에르나 바디우같은 정치철학적 전회, 해방의 정치로의 전환은 “(물질적 생산의) 경제란 영역을 존재론적 위엄이 박탈당한 존재자적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사회-초월적인 선험a priori’이자 ‘사회-정치적 관계의 총체성을 만들어내는 매트릭스”이다.(S. Žižek, 116)

정치적이든 미적이든 법률적이든 어떤 영역이나 심급에서 비롯된 것이든 모든 행위와 정서, 의식은 우리의 경험과 체험을 물신화한다. 이 때 예술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감성적 경험을 비판하여야 한다. 혹은 예술 안에서 내적인 투쟁을 조직하여야 한다. 더 이상 이데올로기도 물신도 스펙터클도 텍스트도 없다는 말은 적어도 우리가 투명하게 자본주의의 구조적 총체성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그 말보다 더 사기에 가까운 말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변함없이 TV뉴스에서 우리 시대의 두 가지 종의 자연이라 불러도 좋을 것에 관한 소식을 접한다. 하나는 오늘의 날씨와 오늘의 환율, 증시 동향이다. 그것은 매일 자신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의 사실fact처럼 현상한다. 물론 오늘의 환율과 증시의 동향이 우리의 물질적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관계 자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겐 이데올로기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실업, 저성장, 불안, 테러리즘, 이주, 노후, 주거 따위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면, 극단적인 계급 간, 국가 간 빈부격차를 증오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형태가 변화하고 폐지되도록 하는 유토피아적인 실천을 위해 비판은 불가결하다. 이데올로기를 혐오하였던 대중의 지적 평등을 믿었던 랑시에르의 아름다운 꿈처럼 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직접적인 일치와 결렬의 순간은 적어도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감성적인 것 가운데 오늘날 식민화되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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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망원사회과학연구실 월간평론을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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