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폭력의 세계 그리고 비판의 유령- 반지성주의적 지성을 거슬러 사유하기

Patti Smith – Gloria (1979)

사이코패스의 증오

오늘날 무엇을 겨냥한지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는 폭력이 주변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인상이 점점 짙어지는 듯 싶다. 그리고 그 폭력을 향한 신경질적인 눈길은 잔인하고 터무니없는 광적인 인물들 쪽으로 향한다. 지금 가장 강렬한 폭력적 범죄자의 형상은 ‘묻지 마 살인’을 저지른 ‘싸이코패스’라는 인물의 모습으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미친 자 혹은 싸이코패스. 그리고 지난 해 모두를 경악하게 한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 직후 경찰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정신질환자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는 이른바 행정입원 조치를 실행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잇달아 정신질환자를 단속하거나 제약하는 입법조치를 예고했다. 명분인즉슨 여성들의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부터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면서 곳곳에서 항의와 비판이 쏟아졌다.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라는 우려에서부터 가뜩이나 불행한 처지에 놓인 정신질환자들을 보다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의견들은 분분했다. 그리하여 “정신질환자의 광기에서 비롯된 묻지 마 범죄”라는 도식은 흉포한 살인을 설명하기 위한 거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태세이다.

그리고 강남역 살인 사건은 한국 사회에 누적된 여성혐오의 발로라는 주장에 직면해야 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강남역에는 피해자를 애도하고 여성혐오를 규탄하는 포스트잇 메모들이 나붙었다. 그리고 이 살인은 여성혐오 범죄라는 세간의 맹렬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은 1차면담 이후에 5명의 프로파일러를 투입하였다.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프로파일러 4명과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인 권일용 경감 등 모두 5명의 프로파일러를 투입한 것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강남역 노래방 살인사건 피의자 심리분석결과”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 결론이란 것은 “망상적 태도, 표면적인 범행동기 부재,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촉발 요인이 없는 전형적인 묻지 마 범죄 중 정신질환, 조현병 유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프로파일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지난 해 6월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열린 <정신질환자 사회 혐오 대책 마련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에서 나온 말이 그런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어느 인권변호사는 한국 사회에서 “묻지 마 범죄”란 것의 유형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묻지 마 범죄 가해자 대부분은 남자이며,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경우가 60%다. 또한 범행 당시 직업이 없는 경우가 75%다. 즉, 가정을 구성하지 못하고 불안전한 주거환경에서 저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성 하층민이 저지르는 범죄를 묻지마 범죄로 분류한다”고 전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묻지 마 범죄의 유형은 외환위기 이후 널리 확산된 현상이다. 그리고 그는 묻지 마 범죄를 둘러싼 서사가 심리적 개인으로서의 가해자에만 주의하는 것을 비판하며 “묻지마 범죄 가해자 유형이 일정함에도,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정신질환만 강조한다. 우리 사회가 살기 힘들어 발생하는 일련의 범죄에 대해 가해자를 혹은 정신질환자를 예비 범죄자로 몰아 무조건 정신병원에 보내는 것이 범죄 예방의 유일한 방법인가.”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의 프로파일링 접근이 경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프로파일링이란 범죄자를 유형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는 대개 범행을 저지른 자의 나이나 성격, 직업, 범행수업, 습관 같은 요인들을 추론하여 범인을 찾아내는 수사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범죄 행동 사이에 의미심장한 연관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것은 해묵은 기능주의사회학이나 심리학 이론들이 가정하는 것과 닮아있다. 이들 이론은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가정하고 그로부터 이를 떠맡은 개인의 성격과 정체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프로파일링은 이런 발상을 범죄학의 가설로 윤색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탓에 프로파일링 역시 개인과 사회 가운데 무엇이 일차적인가를 규정하기 어려운 악순환에 갇혀 버린다. 한 쪽에서 개인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가 처한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쪽에서는 사회를 이해하려면 개인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각은 서로를 전제하고 그래서 둘은 해석학적 순환과 다르지 않은 악순환 속에서 길을 잃는다.

묻지 마 범죄의 프로파일링은 이러한 악순환의 전형을 보여준다. 묻지 마 범죄의 프로파일링은 두 갈래로 나뉘어 다툰다. 하나는 묻지 마 범죄라는 이름으로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묻는 것을 피하고 이를 심리적 개인에게 귀착시키는 프로파일링의 테크닉이다. 아니 어쩌면 프로파일링 자체가 그런 틀 짜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범죄심리학에서 사회란 단지 개인의 인성이나 심리적 소질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 추상화된다. 혹은 여기에서 사회는 개인의 뒤 편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자연과 같은 사실의 세계이다. 한편 다른 하나의 프로파일링은 이른바 범죄를 개인의 심리적 기질, 정신질환적 특성에서 찾을 게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을 헤아릴 것을 주문한다. 말하자면 범죄의 진짜 원인은 실업과 빈곤, 차별이라는 것이다. 이는 가난과 멸시가 죄를 낳았지 마음의 병이 죄를 낳은 것은 아니라는, 단 한 번도 위축되거나 부정되어 본 적이 없는 이 나라의 직관적 믿음에 호소한다.

그런 탓에 사회학적 프로파일링이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프로파일링은, 반쯤 진실을 말해준다. 사실 많은 이들은 오랫동안 범죄자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이 어쩌면 세상의 불의와 차별에 대한 비합리적인 반발이라고 은근히 믿곤 한다. 그런 점에서 범죄의 진짜 원인은 그들을 절망의 구렁에 몰아넣고 원한에 휩싸이게 한 세상에 돌려야 한다는 심증은 꿋꿋한 신화로 버텨왔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전연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의 프로파일링, 즉 심리적 개인의 프로파일링을 뒤집어 사회적 지위의 프로파일링으로 바꾸면서, 앞과는 반대로 개인을 추상화해 버린다. 여기에서 개인은 사회의 규정을 반영할 뿐이고, 반성적 사고를 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수동적 작인(agency)으로 추상화된다. 이는 개인주의와 사회학주의 사이에서 영원히 진동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원형적 관념을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개인으로 이뤄진다는 말도 옳고 개인은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말도 옳은 것 같은 낭패스런 이율배반은, 자살이든 범죄이든 정신질환이든 ‘사회 문제’를 설명하는 데 항시 되풀이되었던 사고의 규칙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부터 범죄의 원인을 찾으려드는 심리적 개인주의가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면 사회학적인 설명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일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뜻하지 않게 사회학주의(sociologism)가 범람하는 상황을 말해준다. 사회학주의는 연령이든 계층이든 성별이든 인종이든 자신이 사회에서 주어진 위치에 따라 고유한 의식과 태도, 행위방식을 갖게 된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어떤 사회집단이 특정한 의식이나 행위 지향을 보이는 것이 주관적 의지나 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처한 사회적 조건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제법 객관적인 규정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객관적인 규정을 행하는 현실이란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되는 조건이라기보다는 거꾸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편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주관적인 허위의식이나 편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객관적인 현실이란 것이 있다는 믿음 자체라면 말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일수록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심리적 개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따르는 프로파일링이나 사회학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프로파일링이나 모두 부적절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사이코패스 혹은 비합리적 반란

 

이즈음에서 얼마 전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미국 판 묻지 마 범죄, 레이건 시대 이후 미국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목격된 총기난사사건을 파헤치는 어떤 논픽션 사회 비평을 참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그것은 마크 에임스가 쓴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란 책이다. 이 책에서 에임스는 미국의 직장과 학교에서 벌어진 잇단 총기난사사건을 추적하며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병폐에서 비롯된 것임을 치밀하게 파헤치려 애쓴다. 그가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쓸 때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개인의 비합리적 행동을 결정한 사회적 배경을 그가 간단히 ‘배경’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결국 가난한 보수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개인의 결함과 한계를 깨닫도록 거만하게 훈계하면서 정작 자신은 천문학적 보수와 수당을 챙겨 역외 계좌에 냉큼 예치하는 자본가들로 이뤄진 양극화된 세계가 총기난사사건의 진정한 원인임을 고발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때 사회를 단순히 개인적 행동의 배경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비록 그 역시 많은 부분에서 소박한 사회심리학적인 가설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그는 개인의 비합리적 행동의 합리성을 설명하려 애쓴다. 그는 나쁜 사회가 병든 개인적 반응을 낳았다는 단순한 가정이 사회도 개인도 추상화시키고 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회를 개인의 바깥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작동시키는 내재화된 원인으로서 파악하려 애쓴다.

이 때 단연코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총기난사사건을 벌인 희대의 살인마들을 둘러싼 프로파일링에 대한 그의 조소이다. 그는 콜롬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어떤 아이들이었는지 꼼꼼히 말한 후 프로파일링이란 것이 얼마나 허접한 것이지 말한다. “성인 광란자들과 마찬가지로 학내 총격자들도 프로파일링이 불가능하다. 처음에 사람들은 콜럼바인의 딜런 클리볼드와 에릭 해리스가 약에 절어 정신이 이상해진 중퇴자, 나치에 열광하는 동성애자, 붕괴된 가정의 자녀, 고스족, 트렌치코트 마피아, 마릴린 맨슨을 좋아하는 깡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들은 훨씬 평범하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저지른 학살과 관련해 참 혼란스러운 점이었다. 둘 다 양친이 모두 살아있었고 부모에게서 사랑받았으며 대단히 똑똑했지만 엉뚱한 학생이었다.” 그는 단호히 프로파일링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역시 프로파일링 비슷한 것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총기 난사 사건의 원형이었던 우체국 직원들의 묻지 마 범죄를 설명하며 미국에서 등장한 신조어를 소개한다. 그것은 우리말 역자가 “우체국 직원처럼 격분하다(going postal)”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다. 아마 이를 우리말에 가장 가깝게 옮기자면 분노조절장애를 겪어 “또라이가 되어버렸다” 쯤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잠재적 사무실 분노 살인자의 프로필은 25-50세 사이의 자존감이 낮고 무기력한 외톨이 백인 남성”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프로파일링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어떤 영문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스스로 버젓이 직장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들의 프로필을 읊어대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해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에임스는 기꺼이 프로파일링을 하면서도 프로파일링은 불가능한 것이라며 말하며, 이율배반에 가깝게 진술한다. 그렇다면 그는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꾀하지 못하고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려 나는 그가 범죄심리학(심리적 개인의 정신적 소질에서 범죄의 원인을 찾으려는 접근)과 범죄사회학(고통스런 사회적 지위야말로 진정한 범죄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접근)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진력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혹한 차별과 폭력을 겪은 자들이 슬프게도 범죄와 같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통해 반항하고자 했다는 주장에서 나타난다. 이 때 핵심은 이성과 비이성,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있다. 세상은 구조적으로 어떤 사회집단을 지배하고 학대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구조적 지배는 어떤 누군가의 악의와 부정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합리적인 것이다. 경제적 질서는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야 가장 효율적이며 최대의 효과를 낳는 이성적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깔린 자들이 반발하며 벌이는 행동은 온순히 받아들이는 정상적인 대다수와 달리 분노조절 장애를 겪는 자나 악랄한 사이코패스의 몸짓으로 단정되어 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 엉뚱한 그렇지만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게 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구조적인 고통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자신이 겪는 경험을 상징화할 수 있는 비판적 서사가 불가능하게 될 때 그에 저항하는 행동은 어쩔 수 없이 비이성적인 것이자 비합리적인 것, 즉 정신병적 광기를 분출하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에임스 자신은 이를 노예제의 역사에 비교한다. 수백 년의 노예제의 기간 동안 그 잔혹한 지배에 맞선 저항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외려 노예제에 맞선 반란은 요샛말로 사이코패스의 총기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광기의 살육으로 묘사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유혈이 낭자했고, 봉기 당시에는 전적으로 왜곡되어 전해졌으며 반란자가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벌인 일이고 대개가 희비극적인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반란이 반란이 되기 위해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해석할 틀이 없으면 합리적 반란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범죄나 살인은, 만약 그런 일들이 부당한 환경(가령 노예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자체로 그런 환경에 대한 반란행위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치의 영도(零度), 이데올로기의 영도

그렇다면 그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저지른 잔인한 범죄를, 비합리적인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온당한 정치적 반란으로 비호하는 궤변을 펼치는 것일까. 그러나 에임스는 니체가 말한 것과 같은 ‘능동적인 허무주의’, 타락한 세계를 파괴하려는 열정적 충동을 진정하고 참된 삶을 추구하는 발작적인 몸짓으로 예찬하는 생각과는 거리를 둔다. 외려 그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이 ‘말 없는’ 폭력의 분출이 곤경에 처한 오늘날의 어떤 상황을 드러내고 있음을 고발한다. 그 곤경이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적대적인 사회관계에서 비롯되는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상상적이든 상징적이든) 해결책도 불가능한 듯 되어버린 처지를 가리킨다. 자본주의적 적대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적 이념으로 상징화되거나 지배계급의 정치와 노동자계급의 정치라는 이항대립으로 구조화되었던 지난 세기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합리적인 좌파를 외치거나 더 이상 대안은 없다는 식의 주장에 굴복하며 포스트-사회주의적인 제3의 길 이후의 정치로 좌파들은 전향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적어도 말로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대표하는 것처럼 자처하거나 불평등을 축소하고 모두에게 균등한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겠다고 주장했던 좌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그들은 스스로 계몽된 것처럼 허풍을 떨며 현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사실주의자가 되겠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모순을 억압하면서 정치는 이제 적대적 사회관계를 상징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자기반영이라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으로 둔갑했다. 그런 점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와 거부가 확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포스트-좌파 정치는 제도적 정치 자체를 불신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적 국가권력 자체를 경멸한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이나 자발적 참여, 네트워크, 시민사회 등을 물신화하며 무정부주의적 유혹에 빠져든다. 포스트-우파란 것이 있다면 그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포스트-좌파보다는 어느 정도 적대적 사회관계를 감지하고 이를 정치적 투쟁에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단 그 때 그들은 계급투쟁을 모호하기 짝이 없는 국민적, 인종적 자기정체성과 인종투쟁이나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협하는 상상적 타자 사이의 투쟁으로 치환한다.

적어도 서구의 국가들과 ‘민주화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자본주의적 모순을 좌파와 우파라는 대립적인 정치적 상징 세계로 구조화하고 각각을 특정 계급(즉 자본가계급과 부유한 중산층 대 노동자계급과 농민 등)을 대표/재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현실정치’는 그러한 모순적 사회관계를 정치적으로 상징화하는 무대가 아니다. 외려 그것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만 ‘티파티’와 같은 미국의 극우 집단의 ‘장외 정치’가 웅변하듯, 정치 바깥의 정치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이는 광우병 촛불집회에서부터 최순실게이트 촛불집회에 이르는 이른바 광장의 정치와 보수언론의 비호와 방조 속에서 이른바 좌파척결을 외치는 극우집단의 정치의 대립에서 역시 동일하게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정치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어제 말하던 정치가 아닌 듯 보인다. 적어도 사회적 관계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는 듯한 외양을 만들어내며 유효한 정치적 형식을 제도화할 때 정치는 작동한다. 그렇지만 현실정치는 오늘의 여론조사 정도를 제외하면 자신이 반영하거나 대표할 현실이 없는 것처럼 움직여 간다. 그렇다면 대의제적 자유민주주의 정치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낫다는 무정부주의적 좌파의 요구나 믿을만한 도덕적, 종교적 지도자나 우리의 진정한 친구에게 정치를 맡기자는 포퓰리즘적 요구가 발흥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치의 영도(零度)에 우리가 처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문제는 무정부주의이든 포퓰리즘이든 정치 이후의 정치를 대표하는 새로운 흐름들에 대응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 항이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계급적 대립의 비대칭성을 말해준다. 계급이란 개념을 주어진 사회 내에서 분화된 각 층위나 계층을 가리키는 정태적인 사회학적 용어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사회관계가 현실화되면서 일시적으로 안정된 사회적 집합체의 구조로서 파악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계급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적대적 사회관계가 제도화되면서 행정기관의 통치나 사회 기관의 기능적 활동 속에 숨어있던 계급의 문제는 적나라하고 또 극적인 형태로 분출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를테면 산업노동자 수의 감소라든가 노동조합의 조직률, 파업을 비롯한 전통적 노동자투쟁의 위축 등을 들어 계급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인구통계표를 들여다보고 계급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신의 필연적 모순을 거대한 규모의 실업과 불안정한 고용, 극단화된 빈부격차,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만회할 수 없는 격차 등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계급이 지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법을 좇자면 계급투쟁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더 이상 계급투쟁으로 보이지 않는다. 외려 그 자리에는 현실에 대한 투명한 과학임을 자처하는 지배계급의 이성과 자신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유효하게 상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린 피지배계급의 비이성적인 반응이 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의 총회장인 다보스포럼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역겨운 선언은 미래를 알리는 예보처럼 받아들여진다.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선언된 제4차산업혁명의 도래는 이제 어지간한 시사 토론이라면 빠짐없이 들먹이는 경고가 되었다. 심지어 어린이의 미래를 말하는 자리에서조차 4차산업혁명이 없애게 될 직업에 관한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소식을 접한 뒤에 으레 뒤이어 등장하는 뉴스를 마주한다.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의 내전, 미국과 유럽에서의 총기난사나 테러, 폭동에 관한 이야기, 아니면 난폭하고 경악할만한 살인에 관한 소식이다. 한쪽에는 더 할 나위 없이 그 어떤 갈등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과학적 담론의 무한반향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헤아릴 길이 없는 ‘말 없는’ 폭력이 구토처럼 펼쳐진다.

 

폭력과 지성

그러나 이러한 선정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극단적인 대차대조표를 그려보이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적대적 사회관계를 상징화하는데 따르는 실패를 온전히 말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적대적 사회관계가 상징화될 수 없을 때 즉 그것이 안정된 정치적 대립의 내용과 형식으로 구체화되지 못할 때 사회적 경험을 제시하고 기술(記述)하는 것이, 마치 비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성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고통을 겪는 이들의 표정과 목소리에 눈길을 던지고 귀기울이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일부의 산업화된 국가나 도시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거의 세계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자본주의의 추상적인 총체성은 더 이상 개인이나 집합적 삶의 경험으로 매개되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르는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지배가 등장한 이후 경험이나 체험(lived-experience), 몸(body) 등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일상성(everdayness), 기분(Stimmung, mood) 같은 개념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적 소외에 이르는 개념들에 이르는 일련의 사유 흐름은 자본주의적 추상성에 대응하여 구체성 혹은 일상생활과 같은 것들을 환기하고 나아가 경험의 주관적 현상 자체를 철학의 모토로 삼는 길로 나아가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반쯤은 마르크스의 자본에서의 흥미로운 표현을 빌자면 상품의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다. 감각적으로 매우 구체적이며 직접적이기까지 한 노동생산물이란 대상이 신비하고 추상적인 상품이 되는 조건에서만 세상에 존립할 수 있게 될 때 자본주의적 추상성은 더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구체적인 경험과 감각적인 체험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처럼 보이고 자본주의 비판은 흔히 형이상학 비판이나 동일성 비판과 같은 주제를 통해 현란하고 수다스러운 문화비판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변화를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는 이는 마르크스주의 문학평론가 제임슨일 것이다. 그는 집요하리만치 자본주의의 모순의 재현불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나아가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단계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연유로 개인의 경험, 체험과 구조 간의 모순이 어떻게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는지 따져 묻는다. 그의 문화비평의 방법으로 알려지게 될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의 미학’을 제시한 어느 글에서 그는 이런 경험과 구조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약술한다. “우리의 관심사인 형상화의 문제들은 다음 단계, 즉 시장자본에서 독점자본으로 혹은 레닌이 제국주의단계라고 불렀던 것으로의 이행 속에서만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체험과 구조 사이에, 혹은 개인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description)과 그런 경험의 존재조건에 대한 보다 적절한 구조적 모델 사이에, 모순이 증대하는 방식을 통해 운반된다. 서둘러 말해보자면 과거의 사회들에서라면, 그리고 아마 시장 자본(market capital)의 초기 단계에서 조차, 개인들의 직접적이고 제한된 경험이 그 경험을 지배하는 사회경제적 형태를 포괄하고 또 그 형태와 일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이 두 차원은 더욱 떨어져 표류하고 고전적 변증법이 인식과 경험, 본질과 현상, 구조와 체험으로 기술하는 그 대당관계로 확립되어 버린다. … 그리하여 개인적 경험이 진정하면(authentic) 그것은 진리일 수 없고, 동일한 내용에 대한 과학적 인지적 모델이 진리라면 그것은 체험을 벗어나 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지막 부분이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진정한 경험을 역설하는 비평이 어느덧 비판적 분석과 비평의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고매한 문화 비평의 형태로 사회의 바깥에 머문 채 타락한 문화를 비웃고 개탄하던 비판의 언어들은 매우 낮은 자세로 사회의 내부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비참한 사회에 깊은 공감 혹은 감정이입을 행하면서 고백, 증언, 인터뷰, 구술사적인 아카이브, 탐사 취재, 그리고 다양한 인류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조사기법 등을 동원한다. 그리고 고통을 겪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모습들을 불러내고 만화경 같은 삶의 면면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제시한다. 이는 저널리즘적 비평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탐사보도 아닌 탐사보도가 취재의 표본으로 정착하면서 몇 개월에 걸친 기자의 노고를 말해주듯이 다양한 사회집단의 삶의 고통이 드라마처럼 제시된다. 그리고 n포세대부터 고향집을 찾지 못한 채 알바를 하거나 근무를 해야하는 혼설족(혼자서 설을 보내는 이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에 이르기까지 경험과 체험의 인류학을 통해 명명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사회적 초상이 끝없이 시야 앞으로 운반되었다 사라진다. 마치 달라질 것 없는 세계를 확증이라도 하듯 끝없이 고통스런 자들의 경험을 부감하는 ‘휴먼다큐’가 지난주에도 금주에도 방영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적 총체성은 경험적인 사실로 환원될 수도 없으며 감성적인 지각으로 직접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지배하는 그 구조적 총체성이 투영되지도 못한다는 점을 무시한 채, 경험과 체험을 사물화한다. 현실에서 비롯된 고통과 비참이란 이름으로 현실을 고발하고 규탄할 때 그 때의 현실은 더없이 흐릿하고 모호하다. 그것은 경험을 위해 암시되는 막연한 배경으로 축소된다. 이렇게 될 때 현실의 모순을 재현하기 위한 과학적 분석은 축소되거나 추방되고 사회는 모호한 악의 이미지로 둔갑하고 만다. 따라서 경험과 체험에 호소하는 비평은 윤리적으로 힐난하기 위한 대상으로 사회를 엉거주춤 끌어들이거나 배려, 환대, 나눔, 이웃과 공동체 같은 윤리적인 구호로 지친 이들을 격려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무심함과 부주의를 닦달한다. 그렇지만 참여와 협력, 호혜 같은 가치는 이미 상품 광고에서도 거침없이 읊어대는 구호가 되었다. 숫제 기업들은 제품을 광고하기보다는 이런 윤리적 덕목을 통해 사회를 가꾸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며 욕지기나는 캠페인을 벌이기 일쑤이다. 그리고 그러한 윤리적 가치는 이미 하나의 상품처럼 제조되고 가공되며 연출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형된 지 오래이다.

 

비판의 죽음을 넘어

지난 몇 년간 ○○사회란 이름으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책들의 이름을 대는 것도 이젠 어려운 일이 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이런 현상에 대하여 ‘사회를 말하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자기반영적인 분석이 이뤄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자신이 처한 세계의 모순이 직접적으로 가시화되고 경험적인 대상으로 적시될 수 없는 세계가 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특히나 가치의 증식 혹은 이윤증대라는 맹목적인 필연성이 현기증 나는 금융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오늘의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모순은 더욱 더 불투명하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물러나고 경험이나 체험이라는 개인적인 지각이 확대된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유명한 페미니즘의 구호를 엉뚱하게 남용하면서 경험이나 체험을 증언하고 보고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가진 듯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결국에는 고통이나 비참, 분노나 희망 같은 주관적 정서나 경험의 현상학적 제시가 더욱 실감나고 값진 것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이는 누가 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참담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는지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보이는 반지성주의적인 비평이 성행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는 거개의 ○○사회란 이름을 단 글들이 저지르는 짓이기도 하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을 그리고 러셀 제이코비는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s)을 내세우며 지식인과 자본주의 비판의 관계를 성찰하려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적대적 사회관계를 비판함에 있어 지식인이 직면하는 한계를 반성하는 그러한 지식인 담론은 오늘날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고야 만다. 이는 냉전적인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국제정치를 성찰할 수 있도록 애쓴 이영희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비판하는 것이 금기처럼 간주되는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원리를 드러내는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인 박현채나 정운영 같은 지식인이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된 이유를 말해주기도 한다.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급 논문을 써야 자리를 잡거나 승진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대학에서 지식인이 나올 수 있을 가능성은 무망할 것이다. 기업화된 대학에서 학생은 취업기회를 잡기 위한 경력 관리의 도구로서 학업을 생각하기 마련이고 교원은 자신의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하려 지적인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데 분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화석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식인은 혁명가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니다. 그렇지만 지식인은 그들 못지않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언어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비판적인 주체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대학과 같은 학술기관이 비판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릴 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불행에 처한 세계를 고발하는 문필가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비참한 세계를 말하게 될 때 비판의 깊이는 비평의 수사학적인 차이로 대체되어 버린다. 그리고 누가 더 경험이나 체험의 진정성을 말하는 데 능란한가를 가리는 일은 페이스북의 좋아요 개수와 트위터의 리트윗의 개수를 통해 측정된다. 그것은 비판 없는 비평이 우리 시대의 지성이 되어버린 현실의 윤곽을 그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개인적 경험과 자본주의의 추상적 총체성 사이의 거리를 더 이상 좁힐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거리를 매개하는 것을 가리키는 비판이 더 이상 맥을 출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비판이 위기에 처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인이든 비판적 지성이든 그것을 되살리려면 경험이나 체험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의 구조적 규정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간절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실천이 가능할 때에만 오늘날 비판적 지식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비판적 지식을 대신하는 비합리적인 울분이 맹위를 떨치는 끔찍한 세계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_황해문화 2017년 봄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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