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 (2)


In The Mood For Love. Song Yumeji’s theme

 

기분의 사회학 – 세계는 존재인가 아니면 객체인가

“여기서 내의 의도는 철학에서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마키아벨리, 홉스, (두 번째 <논고 Discours>인간불평등기원론의) 루소, 마르크스, 하이데거의 전통입니다. 그들이 주장해 온 공백(vide), 한계, 주변(marge: 여백), 중심의 부재, 중심의 주변으로의 전위(傳位)(또 그 반대), 그리고 자유라는 범주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통상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것으로 돌려지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다시 말해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인 저 유물론을 포함하여 유물론으로 인정받던 유물론들에까지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우연성의 유물론, 요컨대 우발성의 유물론(matérialisme de l’aléatoire)입니다.” (L. 알튀세르)

나는 하이데거에게 먀르크스주의와 매우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위 실용주의적 하이데거, 즉 도구, 그리고 작업과 생산의 하이데거지요.이것이 일상 삶의 현상학인데, 갖가지 역사적․철학적 이유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의 일부는 아니었어요.일상 삶의 현상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 전체 그 어디에서도 개발된 적이 없는 텅 빈 영역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실용주의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개념을 위한 토대로서 매우 매력적인 것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이 다른 형태로 싸르트르에게도 존재했어요.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여기저기에 보이는 처음에는 행동적이며 나중에야 명상적이거나 인식론적이 되는 현존재(Dasein)에 대한 전체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틀에서도 매우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F. 제임슨)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 인식하고 드러내는 일들이 심리학적이거나 혹은 감정 혹은 정동이란 렌즈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은 것이 그리 새삼스런 일은 아닐 것이다. 감정적, 정동적 전환이라고 으스대며 자신들의 주장이 그간의 ‘이론’을 대단히 혁신하는 듯 강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지배적 방식을 꽁무니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것에 불과한 짓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색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를 빌려 대꾸하기로 하고, 일단 심리학적 개념이나 용어로 현실을 묘사하거나 밝히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심리적인 언어로 제시하고 병리화하며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저속한 관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 역시 강조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를 따로 상세히 소개하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리만치 우리는 이런 변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단지 지난 수십 년간 베스트셀러가 되어 온 책들이나 유행했던 어휘들이나 언어적 표현들을 되짚어보기만 해도 사정은 뻔히 짐작된다. 불안, 우울, 과잉행동장애, 정동장애 같은 말들이 우리 주변에서 개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적시하며 버티고 있게 된 꼴은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갖는 특징을 요약한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적 불행을 개별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고 표현하는 언어를 개인을 위해 마련된 언어인 심리적 언어를 채택하도로 몰아부친다. ‘긍정의 심리학’이나 다중지성, 감성지능, 자기주도성, 자존감 같은 악취를 풍기는 심리적 개념은 과학인 듯 생색을 낸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학적이면 과학적이고 그것이 제시한 처방이 효험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이는 현실에 달라붙어 그것에 상응하고 타협하는 것이란 점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한 가지를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스스로 세상을 살피고 겪는 방식을 헤아리도록, 스스로를 더 현명하게 주조하도록 윽박지른다.

이 모두는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모델 인간이라고 고발했던 기업가적인 자아(the entrepreneurial self)가 되도록 부추기는 데 여념이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혜롭게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부와 행복, 안녕, 건강이 좌우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고 경영할 것인가, 자신의 삶의 주인, 관리자, 경영자가 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개인화의 계율이고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드러내는 출구로서 심리학이라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었다면, 즉 신자유주의적 지배가 초래한 고통을 그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자폐적인 해법이 심리적 언어와 테크닉이었다면, 그에 맞장구를 치듯 상품 세계를 그려내는 말과 이미지들은 모두 경험과 감정, 기분을 내세워 왔다. 라이프스타일이나 정체성, 쿨과 힙함(hipness), 행복과 웰니스 따위가 오늘날 누구나 멍하니 쫓아야 하는 윤리적, 미적 덕목이 되었음을 다들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201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올 해의 낱말로 선정했다는 ‘탈-진실(post-truth)’은 우익 포퓰리즘이 석권해버린 역사적 시점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감정과 정동적인 역능이니 하는 것이 정치를 주조하는 힘이 되어버린 세계를 말해준다.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옳은 것, 올바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무망한 일이라는 것, 그 대신 우리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아수라장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탈-진실’이라는 신조어가 실토하는 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진리 대신에 경험, 감정, 정동 등에서 비롯된 생각은, 현실을 밝히겠다고 나서는 모든 서사, 이미지 속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앞서 말했던 ‘원한사회’라는 말 속에 깃든 시점은, 감정이나 정동, 심리적 정서 같은 개념들을 대거 동원하는 오늘날의 사회비평이 그렇듯이, 반쯤 닫힌 언어로 세계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그것을 겪는 이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보고하며 해석한다. 그러한 거의 충일하다고 해도 좋으리만치 경험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언어들은 정작 경험을 형성하는 규정적인 힘을 밝히지 못한 채 머문다. 그것은 반쯤 열려진 문을 통해 힐긋 바라본 현실에 관해 말할 뿐이다.

그러나 왜 자본주의적 착취와 지배라는 물질적 사회관계를 비판하지 않고 감정, 정동의 역학이 만들어내는 경관을 묘사하는데 급급한 것이냐고, 애도, 공감, 연민, 진정성 등의 윤리적, 미적 주체성에 호소하는 데 머물고 마느냐고 볼 멘 푸념을 늘어놓는다고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 ‘기분의 사회학’이라고 칭할 이러한 접근은, 주관적인 미망(迷妄)이나 착란에서 비롯된, 말하자면 자신의 처한 현실에 속은 탓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거꾸로 우리는 그것이 충분히 타당하며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라 현실적 규정의 효과로서 즉 ‘객관적인’ 경험이자 인식, 정동이라 보아야 옳다. 아도르노의 끈질긴 주장을 빌자면, 정동, 감정, 기분의 존재론은 ‘주관성 안에 기재된 객관성’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가 경험하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 나의 의지나 선택과 무관한 채 현실이 규정한 대로 이뤄지고 반복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주관성은 이미 객관적인 대상처럼 굳어버린다. 나는 바람직한 경험을 위해 나를 기꺼이 조작한다. 이 때 나의 경험과 느낌,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자폐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축소할 수 없다. 그런 생각에 머문다면 이는 빈혈 상태의 관념론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주체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원한사회나 모멸사회, 단속사회, 피로사회 따위의 정동, 기분, 분위기의 사회학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거추장스럽고 또 골치 아프지만 그러한 사유를 선구한 하이데거의 사유와 대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감정, 정동, 기분에 의거한 현실 이해를 선구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오늘날의 정동론이나 감정론을 주제로 한 비평들이 선보이는 어수선하고 조잡한 주장보다 훨씬 엄밀한 사유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동 이론을 역설하는 이들이 자주 들먹이는 주장, 정동은 심리적 개인의 감정과 구별되는 것이라는 반심리학주의는 (독일 관념론 내에서 끈질기게 지속된 전통이기도 했지만) 하이데거가 전개한 논변에서 가장 집요하게 주장되어 온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나 정동과 같은 개념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 개념은 ‘기분(Stimmung, mood)’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기분: 존재론과 역사유물론 사이에서

하이데거의 기분이란 개념은 그의 기초존재론(fundamental ontology)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분이라는 낱말은 얼핏 듣기엔 너무나 소박하고 심지어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용어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변을 뒷받침하는 주춧돌 가운데 하나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역저 존재와 시간 속에서 특히 그 가운데 1편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29절에서 기분이란 개념을 본격적으로 논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기분이란 범주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주관 대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객체라는 주관성의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자신의 사유를 선보인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분위기란 개념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다. 무엇보다 이는 주체/객체라는 개념적인 짝을 해치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하이데거의 독특한 유물론을 주도한다. 기분은 주체의 반성, 즉 의식 안으로 현실이나 실재를 환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규정이나 효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가리키기 위해 하이데거가 활용하는 개념은 다양하게 변주를 이룬다. 조율(attunement)이나 처해있음(Befindlichkeit/situatedness)같은 것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처해있음이란 그 안에서 현존재가 그의 ‘거기에’로서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실존론적 근본양식의 하나이다.”

“기분이란, 긍정적으로 보자면, 하나의 근본양식, 즉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는 근본방식이다. … 기분이란 그 안에서 각각의 현존재가 어떠하게 그인 바 그렇게 존재하는 그런 근원적인 ‘어떻게’인 까닭에, 기분은 가장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에게 근본에서부터 존립과 가능성을 주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인용구에서도 하이데거가 스스로 밝히듯이 기분이란 세계를 인식하거나 객체로부터 비롯된 감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 혹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런 심리작용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을 따르자면 기분은 현존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그 어떤 지각이나 인식작용보다 근원적으로 열어 밝힌다(혹은 개시한다). 하이데거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하이데거에게는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거나 의식한다는 식의 주장은 용인될 수 없다. 그것은 어쨌거나 존재망각 이후 서구 형이상학이 만들어낸 주체-객체의 이분법, 세계를 표상으로 환원하는 사유의 태도가 빚어낸 병리일 뿐이다.

“기분은 덮친다. 기분은 ‘밖’에서 오는 것도 ‘안’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서 이 세계-내-존재로부터 피어올라온다. 이로써 우리는 ‘내면’을 반성하며 파악하는 것에 대해서 처해있음을 소극적으로 제한규정하는 것을 넘어서 처해 있음이 가지는 열어밝힘의 성격에 대한 궁극적인 통찰에 이르게 된다. 기분은 그 때마다 이미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열어밝혀왔고 무엇에로 향함을 처음으로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기분잡혀 있음은 우선 심적인 것과 연관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 내면적 상태도 아니며, 그 내면상태에서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사물들과 사람들을 물들여버리는 것이 아니다. 처해 있음은 세계, 함께 거기에 있음[공동현존재], 실존 등이 동일근원적으로 열어밝혀져 있는[있음의] 실존론적 근본양식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실존 자체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분에 관한 발언 중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일 앞의 인용구에서 하이데거는 그에 관한 자신의 주장의 윤곽을 간략히 요약해준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 사회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적인 범주로서 ‘기분’을 내세우는 최근의 이론적 추세를 집약하는 시도 가운데 하나일 미국의 어느 학술저널의 <기분> 특집호는 근대적 형이상학에 갇힌 문화, 사회이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으로 ‘기분’을 전면화하면서, 이렇게 하이데거의 주장을 간추린다.

“기분의 시간성은 다층적이다. … 하이데거는 기분이 먼저 온다고, 즉 그것이 의지와 인지의 활동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고 말한다. 분위기는 관념들을 위한 길을 닦으며, 어떤 의지가 우리에게 중요할지(혹은 하지 않을지)를 규정하도록 돕는다. 호기심, 경탄, 초조 혹은 낙천 같은 상태로 인해 우리는 어떤 탐색의 길로 가도록 부추김을 받는다. 동시에 그 과정은 상호적이면서도 역동적이다. 사유의 스타일들은 자신의 차례에서 또 기분을 진작하고 유지한다. 근대 사유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주도적 기분들(key moods[근본기분(Grundstimmung), 주도적 기분(Leitstimmung) 등은 하이데거가 기분을 규정할 때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이다.-인용자])-불안, 권태, 우울-의 다수가 철학이나 시 작품들 속에 포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작품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촉진, 확산되어 왔음을 깨달을 수 있다. 기분은 전염적인 것으로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고, 정서적일뿐 아니라 윤리적, 해석적이기도 한 세계와의 관계를 이뤄낸다. 구토를 읽는 것은 실존적인 두려움의 경험에 단련되는 방식이다. 요컨대 기분들이란 전-인지적(pre-cognitive)이면서도 후(post)-인지적이다. 기분들은 주장, 관념, 대화, 기술 등에 의해 불러일으켜질 수 있다.

그렇기에 기분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기분은 내적으로 생성되는 것일까 아니면 외부로터 오는 것일까. 우리의 기분은 자주 실재보다 커 보이고 그 기분의 위치를 확언하거나 적시하는 것 역시 어려운 듯 싶다. 우리의 기분의 음울함(greyness)은 온 세상을 칙칙하게 만든다. 신난 느낌(sense of elation)은 모든 것을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떤 기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그 반대는 아니다). 우리는 기분에 감싸이거나 엄습 당한다. 기분은 나-그리고-세계의 함께함(I-and world together)의 느낌이다. 이를테면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지루함을 느낄 뿐 아니라 동시에 세계 역시 지루한 것으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독일어 낱말인 Stimmung은 이런 점에서 계시적이다. 하이데거가 이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기분(mood)’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기분이 그것의 관계적 측면, 타자들과 공명하거나 하지 못하는 방식을 가리킨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기분을 조정한다는 낱말인 ‘맞춤(attunement)’[하이데거 연구자들에 따라 이 낱말을 번역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기분에 동조된다는 뜻이 음이나 현을 맞춘다는 말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조율, 조음(調音), 조현(調絃) 같은 말도 씌지만 여기에서는 뜻을 살려 맞춤이라고 옮겼다.-인용자]으로도 번역된다. 이런 뜻에서 기분은 간(間)-인격적(inter-personal)이면서도 초-인격적(transpersonal)이다. 그것은 도처에서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고로 기분은 종종 공유적이고 집합적이며 사회적인 것으로 타자들과 더불어 존재함의 경험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생각을 확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성격 좋은 사람은 어떤 집단에다 좋은 기분을 가져다준다. … 아니면 죄다 흥을 깨버리고 침울하게 하는 방식으로 집단에 있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 누구도 외향적이지 않다. 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기분은 부대적인 현상(accompanying phenomenon)이 아니다. 기분들이란 앞서서(in advance) 서로 함께 존재함(being with one-another)을 규정하는 종류의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기분이란 일종의 우리가 잠겨있는 정동적인 분위기(affective atmosphere)이다. 그것은 우리가 타자에 대해 느끼는 연관 혹은 그것의 결핍과 더불어 사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준다.”

여기에서 저자들은 ‘기분’이란 개념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두루 열거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규탄당할 대로 규탄당한 주체와 객체의 개념을 대신할 수 있는 후보로서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하이데거 스스로 여러 글에서 반복해 언급하듯이, 기분이란 전-반성적(pre-reflective)이며, 전-표상적(pre-representational)이다. 그것은 주체의 심리적 감정이나 마음 상태도 아니고, 어떤 것을 의식하거나 의지한 후에 딸려 나오는 어떤 사고나 의욕의 아래에 놓인 “수반현상으로서 격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뛰어넘는다. 기분을 갖는다거나 기분에 처한다는 것은 어떤 심리적 개인이 무엇에 대해 느끼거나 아니면 그 개인의 내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 자신의 말을 빌자면 “기분은 덮친다. 기분은 ‘밖’에서 오는 것도 ‘안’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서 이 세계-내-존재로부터 피어올라온다.” 밖, 즉 객체에서 말미암는 것도 아니며, 안, 즉 주체의 정신이나 심적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도 아닌 기분은, 그런 점에서 기초존재론의 중핵에 해당되는 현존재, 즉 세계-내-존재를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계-내-존재와 현존재란 개념은 기분에 처한 존재를 세계-내-존재란 말은 주체도 객체도 아닌 방식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역시 하이데거가 ‘의식으로 불러들임’이라는 의식화에 반해 내세우는 표현을 빌자면 ‘일깨워 지는’, 다시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철학적 인간학의 실존론적 선험”으로서 구실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기분은 하이데거의 유물론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것은 주체/객체의 인간중심적 형이상학으로부터 탈출하여 우리가 세계에 놓이는 방식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렇지만 기분의 유물론은 자본의 유물론은 아니다.

한편 기분이란 개념은 이른바 사회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주요한 전환을 초래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기분이란 마음속에서 체험으로서 발견되는 그런 존재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서로 함께-거기에-있음의 ‘어떻게(방식)’인 것이다.” 또는 이에 못잖게 널리 알려진 서술을 인용하자면, “우리의 사유와 행동거지를 위한 전제, 즉 거기에서 우리의 사유와 행동거지가 비로소 일어나는 그런 ‘매개체’이다.” 함께-거기에-있음의 방식으로서의 기분, 앞서 인용한 글의 저자들의 말을 빌자면 “기분은 간(間)-인격적이면서도 초-인격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분이란 개념은 그 내부 깊숙이 사회에 관한 가설을 내장하고 있다. 그것은 실증주의적인 사회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들의 세계 즉 객체로서 사회를 파악하거나 의미, 가치체계, 문화 등과 같은 주체로서 사회를 조망하는 접근들로부터 갈라선다. 기분은 “우리가 함께-거기에-있음”을 포착함으로써,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인데도 단숨에 전연 다른 길을 통해 사회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런 점에서 기분이란 개념을 직접 참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개념 주위를 선회하는 관념들, 대표적으로 일상성, 일상생활, 진정성과 같은 개념에 많은 급진 사회이론가들, 그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울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일상생활이나 일상성, 구체성 등의 개념에 호소하며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 인간의 진정한 삶을 소외시키는 물상화를 비판하는 앙리 르페브르를 위시한 프랑스의 상황주의자들이나 구체성의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려 했던 마르쿠제 등은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아마 이러한 추세를 가장 간명하게 요약하는 것이 제임슨일 것이다. 그는 역사유물론의 또 다른 반쪽으로서, 기존의 역사유물론 속에 삭제되어 있던 부분, 삶의 현상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보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전회-이전의 하이데거는 생활세계의 현상학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연구 대상이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였다면 마르크스주의가 그 현상학을 포함하는 것은 의무이며, 그 면에 있어, 인간적인 허풍들(순-독일풍(Ur-Germanic) 어원학들)이나 기술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진단들을 빼낸다면, ‘실용적(pragmatic)’ 하이데거는 분명 근본적인 기여를 했다.” 이런 주장을 들을 때, 국가사회주의에 가담한 대학 총장 출신 철학자 하이데거를 경계하는 것이 마치 윤리적 의무인 것처럼 간주하는 이들이라면, 귀를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하이데거의 만남?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일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하이데거를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 영유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삶을 둘러싼 진정한 경험을 으깨고 소외시키는 물화의 원리에 대한 비판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유물론적 경향에 주목하면서 글의 앞머리에서 인용했던 알튀세르의 단언, 마르크스 이후의 가장 탁월한 유물론자로서 하이데거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그 주장은 우리를 아찔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알튀세르 역시,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인정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처럼 들리겠지만 어떤 점에서 하이데거 마르크스주의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런 주장이 터무니없게 들린다면 자본을 읽는다 Reading Capital의 저자로서 마르크스 사상의 결정적인 특징을 역사적인 사회관계의 분석에서 찾았던 초기의 알튀세르와 마주침의 유물론이란 이름으로 우연과 마주침과 같은 개념에 의지하며 유물론적 존재론을 구상하는 후기의 알튀세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억지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쨌거나 후기의 알튀세르는 어떤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보다는 더욱 크게 하이데거적이다.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열정으로 역사유물론을 존재론화하고자 몸부림친다. 조금 짓궂게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전회(Kehre)에 맞먹는 알튀세르의 전회를, 어떻게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쟁점은 흥미로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그를 다룰 여지는 없다.

아무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기분이란 개념이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노동이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위치와 거의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기분의 유물론을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대조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사회관계를 비판함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쟁점일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기분을 떠날 수 없다. 더 나아가 현존재의 존재는 모든 인식과 의지 이전에 그리고 인식과 의지의 개시범위를 훨씬 넘어서 항상 기분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어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우리는 얼마든지 마르크스주의의 어법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우리는 상품교환관계를 떠날 수 없다. 더 나아가 개인은 모든 인식과 의지 이전에 그리고 그것이 나타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항상 계급과 계급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분의 유물론과 생산양식의 유물론을 통해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는 각기 의식, 정신, 관념 등에 의해 표상되는 세계라는 생각을 제거하고자 애쓴 상이한 시도인 것일까. 둘의 생각 근대세계 혹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데 있어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가지 입장인 것일까, 아니면 충분히 교차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하나는 다른 하나의 효과에 따른 것일 뿐 결코 하나의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우리의 답은 마지막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조금 더 밝히기 위해, 우리는 아도르노를 경유하고자 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어떤 유물론

아도르느와 하이데거의 관계는 진정성의 은어란 책을 통해 알려져있다. 물론 하이데거는 한 번도 아도르노의 글과 사유에 대하여 비평을 한 바 없다. 우회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아도르노 혼자 만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판하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걸작이라 할 수 있을 부정변증법은 곳곳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비평적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침내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하이데거의 전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에서 저자인 자프란스키는 이례적으로 한 장을 할애하여 하이데거와 아도르노의 관계를 (그러나 매우 피상적이라 할 수밖에 없을 방식으로) 소개하며 이렇게 비꼰다.: “보통은 무척 신중히 처신했던 아도르노이지만 하이데거에게만은 철학적 망치질을 해댔으며, 철학이라는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멀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했다. 아도르노가 하이데거를 공격한 이후로(두 사람은 1945년 이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하이데거는 아도르노와 관련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변증법의 은어가 행진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아도르노의 철학적 망치질은 무엇일까. 하이데거 이후 아도르노가 장악한 철학의 무대에서 벌어진 변증법의 행진, 무엇이든 해치우고 삼켜버렸다는 그 변증법의 미친 춤은 무엇일까. 자프란스키는 그에 대해 직접 상세히 언급하기보단 비판이론이 독일에서 누린 명성과 패권을 둘러싼 저널리즘적인 비평으로 그를 대신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우리는 그가 말했던, 어쩌면 그가 짐작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다를 아도르노의 망치질 가운데 일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난해하고 요령부득으로 보이기까지 한 부정변증법에서 몇 개의 아포리즘에 가까운 서술을 들춰볼 작정이다. 부정변증법은은 기분의 사회학을 비롯한 주체/객체 이후의, 재현 이후의, 토대주의 이후의 철학을 기획한다고 자처하는 숱한 이론 프로그램과의 대결을 선제적으로 시도한 저작으로 읽어도 손색없다. ‘새로운 유물론(new materialism)’이나 ‘존재론적 전환’의 사유들은, 유물론을 진정으로 고수하고 싶다면 주체란 개념을 제거하여야 하며 기꺼이 주체를 사물(Thing/things)의 하나로서 간주할 수 있어야 하며, 세계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수많은 행위주(行爲主) 가운데 하나로서 물질화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의 기술적 문화적 조건(흔히 포스트휴먼, 비-인간이란 이름으로 제시되는 조건들)을 감안 할 때 이들이 그런 변화를 적극 설명하고 분석하며 소개하는 유물론의 화려함과 설득력은 넋을 잃을 지경에 빠트리곤 한다. 특히 기분과 분위기란 개념을 경유하여 우리가 직면한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도록 촉구하는 새로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쇄도하는 주장들과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이제는 청산 날짜를 기다리는 주체나 객체란 개념을 손아귀에서 놓아버려야 할지 말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 기분과 정동에 근거한 사회, 문화이론이 쇄도할 것을 마치 예고라도 한 듯이 시대를 읽는 것은 시대의 기분을 읽는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문화비평과 사회비평이 주변에서 번창한다. 그런 비평은 ‘절망’, ‘불안’, ‘공포’, ‘파국’과 같은 개념에서 뿜어내는 빛으로 사회라는 지평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듯이 말한다. 그것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를 피하고, 바꿔 말해 그것이 어떤 체계와 구조로서의 객관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규정하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 스스럼없이 ‘존재론적 불안’의 시대 운운의 이름을 세계에 가져다 붙인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생산양식, 상품과 화폐, 임금노동, 계급/계급투쟁 등의 ‘개념’은 초라하고 무력하며 심지어 유물론이라 자처하지만 결국은 은밀하게 관념론적 사유를 운반한 가면 쓴 이론이자 사유로서 무시당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역사유물론이 실패한 것임을 확인하려면 존재론적 전환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질의를 집요하게 시도했던 아도르노의 질문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도르노라는 개인적인 철학자의 사고를 마치 이론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는 반창고처럼 임의대로 끌어들이는 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글에서 기분의 사회학이라고 지칭한 사회 비평과 이론을 뒷받침하는 그 유물론적 존재론이 과연 충분히 유물론적인 것이냐는 점을 따지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당장 아도르노의 아포리즘 가운데 몇 가지만을 참조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체와 객체의 형이상학을 폐지하자는 철학적 요청을 비웃으며 그것은 당신들이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요구하기 전에 이미 완수되었다고 응수하는 아도르노의 놀라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자연사’라는 개념과 ‘객체의 우위’라는 아도르노의 역사유물론적 사고의 특장을 보여주는 개념들은 각기 ‘존재역사’나 ‘세계-내-존재’같은 개념과 대조를 이루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물질성을 표상으로 환원한 철학에서 만들어낸 나쁜 개념인 ‘주체/객체’에 등을 돌리기 위해 딜타이나 후설 나아가 하이데거같은 철학자가 필요한 것일까. 또 주체/객체란 개념에서 벗어날 새로운 시야를 얻기 위해 지향성이나 존재사, 기분, 세계-내-존재, 퇴락, 현존재 같은 낱말들을 모으는 일에 착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이런 물음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아도르노의 답변은 파격적인 만큼이나 보다 더 유물론적이다. 아마 이렇게 요약하여도 좋다면 아도르노의 답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 “당신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존재론적 전환, 즉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세계는 이미 충분히 실현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 교환사회이다.”

“(…) 초월적 주체의 보편성은 사회의 기능적 연관관계의 보편성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개별적 자발성과 성질로부터 만들어졌으나 그것을 다시 평준화의 교환원칙으로 제한하고 잠재적으로는 무기력하게 전체에 의존하는 것으로 제거하는 전체의 보편성인 것이다. 주체들이 주체로 되는 것을 아 프리오리하게 거부하고 주관성 자체를 단순한 객체로 격하시키는 인간에 대한 교환가치의 보편적 지배는 주체의 주도권을 수립한다는 그 보편성의 원칙을 허위로 만들어 놓는다. 선험적 주체의 보다 큰 몫(das Mehr)은 자체로서 고도로 축소된 경험적 주체의 보다 작은 몫(das Weniger)이다.”

인용한 글에서 아도르노는 하이데거 못잖은 신속한 일격으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 진정으로 유물론적 몸짓일 것이라는 거짓 주장을 논파한다.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하이데거에 의해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의 폐단으로서 저주받은 초월적 주체란 개념을 기꺼이 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초월적 주체의 보편성”을 쓸어버리고 싶다면 교환사회의 기능적 연관관계의 보편성(즉 상품교환관계와 가치법칙)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확인한다. “초월적 주체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라고 말하는 바대로, 유물론적 존재론이 그토록 제거하고 싶어 하는 ‘주체’를 제거하려면 바로 사회를 제거하여야 한다. 그러지 못한 채 바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의 바깥으로 자유롭게 물러나 그것을 제 멋대로 조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편 위에서 아도르노는 초월적 주체는 이미 객체이며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현실에서 폐지되어 있고, 그것은 바로 상품교환관계의 형식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추상의 사물화는 주체의 잘못으로 비난받아 왔지만, 추상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로 만들어주는 원칙이자 주체 자신의 본질”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아도르노의 추상을 하이데거의 어법, 표상 혹은 재현으로 고쳐 읽는다면, 이는 존재론적 유물론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돌려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토록 표상이나 재현으로부터 주체를 떼어놓고 싶은가. 그럼 떼어내라. 그렇다면 당신이 만회하고 싶었던 그 주체, 자아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객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물(Thing)과 사물성(Thingness)으로 대하고 그것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주체의 대상화, 대상의 주체 앞에 보임이라는 표상으로 환원하여서는 안 된다는 하이데거의 주문은, 얼핏 들었을 때 더없이 우아하고 깊이 있는 지혜의 말처럼 들린다. 아름답게 들린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르크스의 표현을 준용하자면, 상품의 사용가치의 편에 매달린 채 상품의 동일성을 지배하는 본질적 규정인 교환가치를 잊거나 뛰어넘을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더욱 역설적인 것은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 세계-내-존재는 상품이 더욱 화려하고 능숙하게 연출하고 조종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딜타이 이래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지적 감각적 경험(Erfahrung)이 아닌 (미적인 것에 가까운) 삶의 체험(Erlebnis)이 박탈되었다거나 소멸되었다고 하는 슬픈 송가는 거꾸로 ‘체험경제’, ‘스타일의 경제’ 따위를 말하는 마케터와 경영학자들의 열정적인 선전에 딸려 나오는 체험의 시대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예찬과 대조를 이루지 않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성분은 바로 이 체험이라는 자아의 소중한 보물은 상품이라는 객체를 통해서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유럽풍의 카페의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라는 스타벅스(Starbucks)나 말쑥한 컴퓨터를 구입하여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하며 인터넷을 검색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유하기(different thinking)를 택한 것이라고 능청을 떠는 애플(Apple)이나 모두 더 이상 객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매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모두가 간파하고 있듯이 그것은 객체 중의 객체인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이끄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그리고 선험적 주체를 이루는 상품 세계의 주체의 형상의 또 다른 반면 즉 체험에 넋을 잃은 주체라는 모습 뒤에 그것이 어둡게 감추는 “고도로 축소된 경험적 주체”는, 가끔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 커피를 재배하거나 아이폰을 조립하는 농장이나 공장의 섬뜩한 풍경 속에서 삐죽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 더욱 짓궂게 농담을 하자면 하이데거의 ‘기분’이라는 개념을 뻔뻔하게 번안하는 한 예를 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분의 음악, 무드음악으로서의 무자크(Muzak)®일 것이다. 경음악(light music)이니 배경음악(BGM: Background music), 엘리베이터 음악이니 하는 따위의 음악으로 경멸받았던 이 음악은 직접적으로 기분을 조직하고 생산하는 것을 겨냥한다. 그것이 자극향상(stimulus progression)이라는 원리에 따라 능률과 효율을 극대화하고 평정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1954년 미국의 무자크(Muzak) 유한회사란 회사에 의해 의장특허를 획득한 기분의 음악은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 마침내 캐나다 기업에 매각되었다. 그 회사의 이름은 재미나게도 ‘무드 컴퍼니(Mood Company)’이다. 그리고 이 회사는 회사 이름이 알려주듯이 무드(mood)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론적 유물론을 승인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장애물은 “개념(적 규정)”에 관한 것이다. 존재론적 유물론은 주체의 형이상학을 유지하는 주범인 개념을 탐탁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념적 규정과 체계를 대신해 시적인 언어와 같은 언어에 골몰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언어론은 그의 존재론적 사유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면서 개념과 그 개념으로 구성된 체계를 거부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고 또 다행스러운 일일까. 그러나 기분에 빠져듦으로서 그 과정에서 들이닥치는 세계-내-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주체를 제거한다고 할 수 있다고 제 아무리 웅변해봤자 별로 얻을 것은 없어 보인다. 거칠게 말하자면 내 수중에 들어있는 작은 물건 하나가 내겐 너무나 소중하고 그렇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닌다고 역설해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예술 작품으로 둔갑하여 어떤 마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품적 가치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품적 가치는 주관적 개념이자 객관적 실재이다. 이를테면 금융화된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것을 개념화, 즉 상품화한다. 하다못해 예술작품 조차 마치 주식시장의 변동처럼 그것이 지닌 화폐적 가치의 변동으로 환원되어 미술 작품에서 미술 상품으로 둔갑해 주가와 다르지 않게 지수(index)로 측정되고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나 현존재, 세계-내-존재, 기분과 같은 개념을 향해 돌진함으로써 표상이니 개념이니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는 것은 바보와도 같은 짓이다.

“존재철학에는 일종의 정신적 반응방식인 즉물성(Sachlickeit)의 역사적 신경조직이 낯설지 않다. 즉물성은 제2의 자연으로 되어버린 주관적 정립이라는 중간층, 즉 사유가 자기 주위에 쌓은 벽들을 깨뜨리려 한다. 후설의 프로그램 속에는 그러한 진동들이 있고 하이데거도 이에 동조한다. 관념론적 인식활동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은 관념론이 몰락한 연후, 없어도 그만인 거슬리는 장식물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기초존재론은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의 상속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즉물성이 재주를 넘는다. 즉 그는 아무 형식 없이 순수하게 사물들만을 근거로 철학하려고 하지만, 이로 인해 사물들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인식의 주관적 감옥에 신물이 나, 하이데거는 주관성을 초월하는 것이 인식에 대해 직접적이며, 인식이 개념을 통해 초월적인 것을 오염시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게 된다. 뒷날의 청년운동(Jugendbewegung)과 같은 낭만주의적 조류들과 유사하게, 기초존재론은 제약과 혼란을 초래하는 주관성의 계기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 자신을 반낭만주의적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는 하이데거조차 서슴없이 사용한 공격적 표현을 빌자면, 그 주관성을 제압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관성이 매개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기초존재론은 주관성이나 매개에 대한 반성 이전의 인식단계로 돌아가길 원한다. 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기초존재론이 주체 없이 사물의 현상성을 고집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아울러 질료에 합당하고 본원적이며 신즉물적인 듯해 보일 때, 사유로부터 모든 규정들을 제거한다. 이는 한 때 칸트가 초월적 물자체로부터 모든 규정을 제거했던 것과 같다. 그 규정들은 단지 주관적 이성의 산물로, 혹은 특수한 존재자의 그 규정들은 단순한 주관적 이성의 산물로서 혹은 존재자의 후예들로서 똑같이 불쾌한 것이다.”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하이데거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일지 모를 비난을 퍼붓는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또 다른 모습을 한 실증주의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철학사에 관해 초보적이라도 지식을 가진 이라면 하이데거와 가장 거리가 먼 철학적 이념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일 실증주의가, 실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본질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억지같이 들릴 것이다. 그렇지만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것은 그리 틀려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제 아무리 뭐라 스스로를 부른다 해도, 존재망각 이후 표상으로 환원된 존재자일 뿐이라고 퉁명스레 목소리를 높여도,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이든 뭐든 그것은 주체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채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하이데거와 그를 뒤따르는 새로운 유물론은 세계가 규정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한다. 적어도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것이 자연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든, 주관적으로 매개되지 않은 사물 그 자체, 객체가 아닌 사물의 위엄을 옹호하는 것은 거짓이거나 헛소리에 가깝다. 이를테면 소유물로서의 집이라는 생각을 떨치고 거처로서의 집, 거주하기의 현존재의 터로서 집을 생각하자는 속삭임은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근대 사회의 가장 지독한 병리적 증상으로서 거주함을 잊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반향이라도 하는 듯이 ‘장소 상실’을 애틋하게 힐난하는 오늘날의 물질주의 비판은,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위선이다. 평온한 안식처로서의 집을 포기하고 극구 노후를 보장해줄 유일하게 믿을 만한 안전한 자산으로 부동산에 투자하는 아무개 씨를 흉보는 것은 누워 떡먹기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도덕적으로 오만할 뿐 아니라 진실을 가린다. 누구나 머물고 거주하는 경험을 보장하는 집을 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포기하는 것은 그것의 물성(物性)을 포기하고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홀린 탓이라 핀잔하는 것은 비겁할뿐더러 악랄한 것이다. 거주하기를 포기하고 집을 객체화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상품과 화폐가 지배하는 세계를 얼마든지 관념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물스런 부동산 투자자가 거주하기의 윤리를 떠벌이는 문화평론가나 건축비평가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는 집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주관적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상품과 화폐적 가치가 아닌 채,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세계는 없다고 솔직히 자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하이데거의 유물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이에 놓인 아슬한 간극을 지적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라는 표현은 비록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바 아니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한다. 사유에 대한 존재의 선차성 혹은 존재의 ‘초월성’이라는 존재론적 강령에서는 극히 먼 곳에서이기는 하나 유물론적 메아리가 울려온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강령이 사유 속의 유물론적 계기를 모두 존재자의 피안에 있는 순수한 기능성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정신화하고, 허위의식 비판에서 유물론적 존재 개념에 내재하는 것을 마술로 몰아낼 경우,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된다. 이데올로기에 맞서 진리를 지칭하려는 단어가 가장 허위인 것으로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떤 관념적 영역을 선언하기 위해 관념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하이데거의 유물론적 충동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마르크스와 하이데거가 어떤 점에서 공유하는 바가 있다고 기꺼이 승인한다.

그렇지만 객체의 선차성을 승인하려면 주체 없는 객체, 즉 존재를 향해 도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주체에 의해 매개된 것인지 모른 척하면서 객체/대상이 아닌 사물 자체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 유물론은 이데올로기에 머물고 만다. 상품이라는 개념 없이, 화폐라는 개념 없이 사물 자체를 영유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가 상품물신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못잖게, 아니 그보다 더욱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서 유물론적 존재론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객체로서 얼어붙게 만드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 물화된 사유를 성토한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단지 자신의 사유 속에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이 최고라는 추악한 물신적 태도를 비웃으며 진정한 체험을 찾아야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몸짓은 더더욱 물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얼마나 객관적인 것인지를 망각하며 사유 자체가 혹은 주체 자체가, 얼마나 객체, 상품생산이 지배하는 사회에 구속된 것인지를 부인한다. 알다시피 진짜 경험, 충만한 체험은 오늘날 얼마나 지독하게 상품으로서 제공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론적 유물론의 유혹에 맞서 역사유물론을 지켜야 한다. 존재 같은 것을 구조하고 싶다면, 우리는 상품과 화폐가 지배하는 세계를 이루는데 불가결한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을 가볍게 뛰어넘어 세계-내-존재, 현존재, 분위기로서의 세계라는 개념으로 나아가려면, 진정성을 추구하는 개인적 자아에 추파를 던질 것이 아니라 계급 없는 세계를 향한 실천을 기약해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유물론을 사보타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기분의 사회학으로 요약했던 오늘의 사회비평에 스며있는 어떤 유물론적 충동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주체와 객체, 개념과 체계, 나아가 변증법과 같은 역사적 유물론을 구성하는 개념들이 마비되었거나 무능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_<말과활> 2017 봄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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