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빈더처럼 a la Fassbinder

Fox and His Friends (1975) – Rainer Werner Fassbinder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은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하고 또 감독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이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라스 서크를 사숙했던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는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래서 “파스빈더처럼 à la Fassbinder”이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대한 지루한 농담은 거기엔 없다. 소수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단언하기에 바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쳐다보자면 비동일성을 만드는 대립에 골몰하는 파스빈더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냉정한 야유일 것이다.

나는 20대가 저물 무렵 커밍아웃을 했다. 한국이란 나라가 더없이 흥청대던 1990년대 어느 날이었다. 이전부터 나는 나의 은밀한 욕망을 설명해줄 문자와 이미지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면 게걸스럽게 매달렸다. 싸구려 주간지의 선정적인 기사와 신문 사회면의 음산한 보도에서부터 소문과 낙서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와 같은 세계에서 거주하는 자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해독했다.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섹슈얼리티에 관한 책을 샅샅이 뒤지고 프로이트나 라이히, 마르쿠제의 책을 꼼꼼히 읽고 성과학에 관한 책들 역시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때마침 세기의 역병을 알려진 AIDS가 미국에서 창궐했고 그를 둘러싼 억압과 투쟁의 소식들이 알려졌다. 호모나 동성연애같은 말들이 게이나 퀴어란 말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아주 사적인 라이브러리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자들의 이미지에 관한 아카이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퀴어 세계화 queer globalization’의 회로 속에서 낯선 언어와 신체, 이미지들을 더듬으며 자신과 세계의 불화를 등록하는 흔적들을 수집한 자취이다. 수집, 읽기, 주시, 욕망, 동일시, 거부, 환상, 도발, 은닉, 도피, 모멸, 백일몽. 아마 그 외에도 이 문서와 이미지들에 연루된 것은 더 있을 것이다.

_합정지구 <Read My Lips> 전시를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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