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James Brown – It’s a Man’s World(Paris 1967)

“그의 노동은 경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봉 처리되어 있다.
즉 그의 노동에서 연습은 그 권리를 상실했다.
놀이공원에서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은
비숙련공이 공장에서 받게 되는 기계적 훈련을 시험해 보는 것에 불과했다.
… 포의 텍스트는 야만성과 규율 사이의 진정한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행인들은 마치 기계장치에 적응되어 단지 자동적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은 충격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이다. ‘서로 부딪힐 경우 사람들은 자기를 밀친 상대방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W.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김영옥, 황현산 옮김, 길, 2010, 218쪽.(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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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찮은 일일까? 잘은 모르겠다. 2017년이라는 한 해는 한국에서 문학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숨 가쁘게 바뀐 해이다. 어떤 역사적인 풍파에도 끄떡없던, 아니 아랑곳하지 않던 문학잡지들이 거듭나거나 변신을 꾀하는 시늉을 했다. 세계의 문학은 릿토르 Littor라는 격월간지로 변신하였고, 문학과사회는 재 창간에 가까운 혁신을 꾀하였고, 문학동네는 새로운 편집진을 꾸림으로써 이전과 다른 문학 저널로 변신하고자 했음을 기별하였으며, 창작과비평은 제3문학이라는 자매지를 창간함으로써 어쨌든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부응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문학잡지를 챙겨보는 일이 시들해진 내게도 이런 동정이 알려질 정도라면 문학 저널리즘에 가까이 있는 이들에겐 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신의 풍경은 대중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이라 그것을 달리 복기하는 짓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왜 하필 오늘날 이뤄져야 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일이 충실하게 이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학저널리즘의 변화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장에서 통용되는 마케팅의 수사학을 베끼는 것이다. 독자들은 새로운 문학잡지를 요구하고 있고 그 때문에 독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잡지를 만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는 소비자의 욕구에 따라 시장의 판세는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경영담론의 수사를 서툴게 흉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이 문학 자체의 변화를 가리키는지 헤아리려면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디에서 찾으면 좋을까.

2

달관 세대란 이름으로 일본 청년 세대가 시대를 경험하는 방식을 보고해 이름을 날린 신예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최근 펴낸 대담집을 펴냈다. 그 대담집은 자신의 작업을 사회학자로서의 작업으로 여기는 후루이치가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들을 두루 만나 사회학이란 무엇이며 일본에서 사회학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대담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오늘의 문학저널리즘의 행방을 짐작하려는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다. 그가 나눈 대담 가운데 첫 번째 대화 상대는 사회를 바꾸려면이란 책을 써서 한국에도 그 이름을 알린 사회학자 오구마 메이지이다. 그는 오늘날 일본에서 사회학자란 무엇인가냔 후루이치의 물음에 불쑥 평론가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사회학자란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학자라기보다는 “사회학자=사건이나 사회현상을 명쾌하게 읽어내는 사람”에 가깝다고 말한다. 덧붙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학자가 대중매체에서 무언가를 쓰거나 발언하는 일은 드물었어요.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대중매체에서 ‘조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문예평론가였죠. 80년대 후반쯤부터 문예평론가를 대신해서 사회학자가 대중매체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이소담 옮김, 코난북스, 2017, 20쪽.

어쩌다 우리는 일본의 어느 사회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문예평론가가 사회평론가를 겸했던 시대가 있었음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꼭 남의 사정을 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우리는 떨치기 어려다. 1970-80년대, 어쩌면 조금 시간의 폭을 넓히자면 90년대까지, 그러니까 2-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문학저널리즘은 혹은 문예비평은 사회평론을 겸업하였기 때문이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같은 문학잡지를 읽는 것이, 그리고 두 잡지가 견지하는 ‘노선’ 가운데 무엇을 지지하느냐가 곧 매개된 정치적 논쟁이자 참여였던 시대가 있었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까마득한 신화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잡지들 가운데 대부분은 건재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난 시대의 문학잡지와는 전연 다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잡지는 문학잡지이긴 하지만 문학작품이나 비평을 수록한다는 뜻에서의 문학잡지일 뿐 문학 작품과 비평을 모은 잡지라는 것을 초과하는 요인, 무엇보다 문학‘잡지’ 혹은 저널로서의 특성을 거의 잃은 채 연명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판되고 소비되는 책으로서의 잡지라는 특성은 문학이 시간의 경험에 바짝 붙어 그것을 인식하여야 함을 가리킨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잡지의 시간성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잡지는 각각의 시간들의 차이와 특수성을 헤아리고 그것을 상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통속적인 패션잡지나 대중문화 잡지에서 떠들어내는 시시껄렁한 유행과 시즌의 담론이라 해도, 그것은 어떻게든 시간적 차이를 잡아내고 어떻게든 재현하고자 애쓴다. 그럼 문학잡지에서의 시간성은 무엇이었을까.

3

한국 사회에서 문학저널리즘이 차지하는 위치는, 막연한 믿음이기는 했지만, 문학은 어쨌든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이라는 가정을 통해 획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 혹은 그 곁에서 함께 겨뤘던 문학적 실천들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선택했던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이나 민중, 지성, 참여 같은 개념들이었다. 문학 앞에 혹은 곁에 장착된 이러한 개념들은 문학적 텍스트를 망라하고 그것의 성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분류 개념은 절대 아닐 것이다. 문학잡지들의 제호에 등장하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개념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때의 개념이란 객관적 현실을 효과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제시하거나 재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객관적 현실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가리키는 단어를 선취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말들을 배치하고 조직한다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개념은 문학이란 실천 안에 사회가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그런 잡지들은 문학적 실천이 사회와 어쩔 수 없이 연루되는 상황을 언급한다. 한 편의 소설을 쓴다거나 시를 쓴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개인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것’과 접촉할 수밖에 없음을 직관적으로 타전하고 있다고 독자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학적 실천 어느 곳에서나,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의심 없이, 문학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임을 확신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그랬듯이 문학을 평론한다는 것은 사회를 평론한다는 것이었고, 문학저널리즘은 사회적 저널리즘으로 통했다. 문학 안에는 사회가 그림자처럼 비쳐 있었고, 문학에 연루된 이는 그 그림자의 모습을 문학이 취하는 모습과 대조하기 위해 ‘사회’과학에 의지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문학평론가들이 철학이론을 읽을 뿐인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 자신의 문학 평론의 방향을 새로운 사회과학의 성과와 함께 수정하는 평자는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필자의 궁색한 읽기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사정은 외국이라 해서 다르지 않은 듯 하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비평을 실천하는 이로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거의 유일하다. 물론 그에게는 흥미롭게도 그리도 당연하게도 사회과학은 정치경제학(비판)이다.
그리고 문학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믿음은 깨어지지 않는 유산(遺産)처럼 건재한 듯 보였지만 90년대를 경유하며 슬그머니 쇠락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문예평론가가 사회학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면 한국에서는 문화평론가란 직함을 단 이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가 이내 그마저 맥을 못 추게 되었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를 상대한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듯 보이던 시점에서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은 뜻하지 않은 반격을 시도한다. 오늘날 문학저널리즘은 사회의 귀환을 강변한다.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을 선언하는 말들 속에는, 문학이 더 이상 사회를 상징화할 수 없는 무력함을 견디지 못한다는 듯이, 더욱 직접적으로 성난 듯이, 문학 속에 사회가 들어와 있다고 강변한다.
김미정은 문학3의 창간호에 실린 비평에서 문학의 공공성이라는 모호한 문학의 윤리적, 정치적 규범을 향해 다가가며, ‘4.16 이후의 글쓰기’라는, 널리 회자되는 문학적 실천이 처한 정황을 사색한다. (이 글은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특징을 살피고자 한다. 김미정의 글을 하나의 범례적인 글로 택한 것은 그의 글이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의 포부를 가장 잘 요약하기도 하거니와 새로운 문학의 시대성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김미정의 글을 언급할 뿐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의 프로그램을 향해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글쓰기를 인용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쓴다는 행위는 어쩌면, 명확하게 구분되어 존재한다고 믿어온 나와 타자의 완고함이 지워지는 과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무이한 ‘나’의 완고함마저 지워진다. 그러므로 쓰는 이는 어떤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등을 쓰기도 하지만, 실은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이’ 쓰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현실구속력없는 유동적 주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나’의 특이성을 지우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쓰는 ‘나’의 내면이나 자기의 ‘비밀’이 주변세계와 마주치며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세계가 어떻게 나의 비밀을 경유해 고유한 세계로 재창조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빈번하게 교차되는 ‘나’와 ‘우리’는 미리 설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물의 모든 ‘관계’ 들로부터 솟아나온 ‘나’와 ‘우리’이다. 쓰는 주어는 분명 쁘리모 레비이지만, 그는 그의 신체 주위의 모든 것이 미세하게 마주친 관계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기록을 단지 ‘개인적인’ 죄책감, 수치, 윤리의 문제로 환원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고, 그 까닭에 이것이 인간인가가 프리모 레비의 책이 아니라는 말은 비로소 가능하다.” 김미정,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갈 공통성들”, 문학3, 2017년 1호, 15-6쪽.

“그러므로 4.16 이후 다양한 쓰기의 경험은, 선한 의지로서 ‘함께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공유, 실천한 것으로서 의미화되어서는 곤란하다. ‘사람이라면 무릇 …’ 식으로 공감에 접근하는 것은 신념, 이념에 대한 맹목 못지 않게 교조적일 수 있다. 이 다양한 매체의 쓰기들은. ‘○○의 이름으로’와 같은 재현․대표․표상의 규범적 정서 ‘이전’ 혹은 ‘너머’의 것이었다. 이 ‘거대한 함께 쓰기’는 ‘우리’라는 선험적 주어의 작동 결과가 아니라, 세월호-국가권력-자본권력-헬조선-친구-가족 등의 모든 관계 속에서 비롯된 ‘나’들의 자발적 연결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 이것이 특정한 정서에 고착되지 않고 계속 합성․변이하고 다른 ‘정동-쓰기’로 ‘이행’해간 것이야말로 강조되어야 한다.” 앞의 글, 19쪽.

따온 글에서 김미정은 한창 유행 중에 있는 정동 이론(affect theory) 나아가 존재론적 전환 이후의 철학적 어휘들을 참조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철학적 참조가 소홀히 무시되지 않을까 염려하듯 숨 가쁘게 작은따옴표를 이용하면서, “4.16 이후”의 “정동-쓰기”를 역설한다. 먼저 그는 “‘나’와 ‘우리’는 미리 설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물의 모든 ‘관계’ 들로부터 솟아나온 ‘나’와 ‘우리’”라고 말하며 나와 우리가 주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미리 설정된 실체, 즉 (인격적) 주체라는 범주를 통해 실체화된 주체가 아니기에, 그것은 관계들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라 말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관계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동-쓰기라는 그의 개념적 선호로 인해 그가 일컫는 관계란 것이 무엇일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글을 시작하며 자신의 비평적 접근을 드러내는 쁘리모 레비의 글에 대한 주석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레비-수용소-실험실 문지방-휴식시간-연필-노트가 절합(節合)되면서 그(것)들은 서로 정동하고 정동되어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신체가 되었다. 앞서 살폈듯, 그것은 애초부터 부여받아도 믿어진 각각의 역할과 ‘무관하게’ 서로 연결된다. 이른바 ‘정동-쓰기의 기계’라 할 상황이 되었다.” 앞의 글, 15쪽.

이러한 표현은 ‘생기론적(vitalist) 유물론’을 옹호하는 저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거의 한 두 페이지 건널 때마다 만나게 되는 흔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서술은 얼마든지 비틀어볼 수 있다. 안온하고 빛나는 조명, 향긋한 냄새, 적절히 진열된 상품의 우아한 배치, 귓전을 간지럽히는 쾌활한 음악, 상품의 매력을 비평하는 점원의 말솜씨, 도저히 손을 가만히 두기 어렵도록 재촉하는 아름다운 포장 등이 결합해 사지 않을 수 없는 신체가 되었다. 그렇기에 나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정동-구매의 기계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어떨까. 아마 이는 약과일 것이다. 지젝은 인식과 경험의 ‘주체’를 거부하는 새로운 유물론의 주된 철학적 사변, 즉 다양한 힘들의 결합, 연쇄, 중첩 등에 의한 효과의 일부로서 행위를 설명하는 주장을 조롱하며, 김미정이 언급한 레비의 사례에 대한 정확한 반례가 될 만한, 악담에 가까운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학살이 나치라는 정치적 주체의 범죄가 아니라 화학가스니 소각로 등이니 하는 살인-기계-어셈블리지를 구성하는 힘들의 관계에 따른 효과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외설스럽고 지독한 일이 되는지 반문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미정의 주장이 이러한 생기론적 유물론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기에 그는 정동이론의 어휘를 빌려 쓸 뿐이라는 의구를 떨치기 어렵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그가 말하는 관계는 인격적, 비인격적인 힘들이 결합된 효과를 가리키는 것인 듯 보이지만 대개의 경우 그 관계란 그저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정동-쓰기를 강변하면서 전-주관적이면서도 후-주관적인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 표면이자 마디로서 주체를 강등하는 척 한다. 그러나 ‘나’들 사이의 관계를 역설할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강한 주관성의 사례일 뿐이라는 의심에서 멀어지기 어렵다. 그는 문학에서 작용하는 주관성을 개인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공통성으로 환원함으로써, ‘주체 없는 글쓰기’가 아니라 보다 농밀한 주체를 불러들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정동론에 대하여 시비하는 것은 적절치도 않거니와 주어진 지면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김미정의 새로운 시대의 문학을 요청하며 정동론에 의지하려는 위태한 몸짓을 비판적으로 헤아려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는 “쓴다는 행위는 어쩌면, 명확하게 구분되어 존재한다고 믿어온 나와 타자의 완고함이 지워지는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나와 타자 등의 ‘완고함’, 즉 주체로서의 실체성이 소실되거나 부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쓰는 이는 어떤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등을 쓰기도 하지만, 실은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이’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격적 주체에게 정박되어 있거나 그로부터 말미암는 정서나 감정이 아니라 정동 자체가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혹시나 그의 그러한 주의를 우리가 소홀히 할까 걱정되었는지,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 등‘이’” 쓴다고 적으며, 비인격적인 정동을 가리키는 기쁨, 슬픔, 안타까움, 분노란 낱말 뒤에 주격 조사인 ‘이’를 붙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강조는 글의 막바지까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 “이 다양한 매체의 쓰기들은. ‘○○의 이름으로’와 같은 재현․대표․표상의 규범적 정서 ‘이전’ 혹은 ‘너머’의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역시 같은 낱말일 것을 세 번으로 증식, 변주하며 “재현․대표․표상”의 “이전 혹은 너머”의 쓰기가 오늘날 행해지는 글쓰기라고 못 박는다. 그는 세월호 이후의 정동-쓰기에서의 그 쓰기의 작인을 주체로 오해할까 싶었는지,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한다. “이 ‘거대한 함께 쓰기’는 ‘우리’라는 선험적 주어의 작동 결과가 아니라, 세월호-국가권력-자본권력-헬조선-친구-가족 등의 모든 관계 속에서 비롯된 ‘나’들의 자발적 연결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 이것이 특정한 정서에 고착되지 않고 계속 합성․변이하고 다른 ‘정동-쓰기’로 ‘이행’해간 것이야말로 강조되어야 한다.” 정동-쓰기로 작동하는 오늘날의 쓰기의 실천을 오인하도록 하는 나쁜 적으로서 선험적 주어(주체)는 재차 소환되어 곤욕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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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문학, 4.16 이후의 글쓰기라는 표제어는 그 사태가 야기한 충격을 감안하자면 새삼스러울 것도 어색할 것도 없는, 우리가 지금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윤리적 마음을 더 없이 충실하게 담아내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학의 역사적 연대기를 위한 표지로서 구실한다는 점에 조금이라도 유의한다면 그리 간단히 수긍할 수만은 없을지 모를 일이다. 문학적 연대의 시대구분(periodization)은 아무렇게나 상상력을 발휘해 시대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난과 참화 이후의 문학은 전연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도르노의 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이후(Nach Auschwitz)’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일 것이라는 그의 서술은 훗날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일인 불가능하게 될 것이란 말로 (매우 의미심장하게) 와전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재난과 심적 외상(trauma)을 통해 문학을 헤아리려는 비평적인 접근의 곁을 항상 배회하였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파국, 재난, 참화, 공포, 전율 등의 개념을 통해 문학의 좌표를 만들어내려는 비평적 시도가 증대하면서 우리는 문학과 시간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란 말은 문학, 시간, 경험이라는 세 가지 차원이 포개진 낱말이자 그것이 각각 하나의 주제로서 깊이 천착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그를 순식간에 뛰어넘으며, 사유되지 않은 채 포착되고 장악된 판단을 전달하고 있다. 이런 가정이 설득력이 있다면 나는 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먼저 경험에 관하여 말하기로 하자. 그것은 앞서 보았던 정동-쓰기라는, 애꿎게 철학적 사변으로 덧칠된 표현이 징발되어야 했던 연유를 짐작해 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벤야민의 글은 거의 모든 글에서 그가 천착했던 경험의 문제에 대한 사색이 작은 단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는 문학과 문화를 다루는 거의 모든 글에서 경험의 위기와 변조, 빈곤과 사이비 풍요, 자발성과 타율성, 경험의 위기에서 비롯된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경험과 빈곤」이라는 제목을 단 글에서부터 방금 언급한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는 물론 전근대적인 이야기꾼이 점차 고독한 저자로서의 근대적 소설가로 대체되면서 비롯된 경험의 위기를 곤구하는 「이야기꾼」,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핵심 개념으로서 훗날 정동이란 개념을 선구하게 될 기분(Stimmung, mood)이란 개념을 쏙 빼어 담은 아우라(aura)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적인 예술 경험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험을 파고든다. 그리고 벤야민의 경험에 관한 사유의 중심적 모티프를 들자면 그것은 경험의 위기 혹은 빈곤(화)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경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봉 처리되어 있다”고 벤야민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적이면서 사회적인 분업이 일반화되고 노동이 점차 단순한 지시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 과업이 되었을 때 누구도 노동을 하면서 노동을 경험하지 못함을 벤야민은 고발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단 노동에 제한된 사례가 아닐 것이다. 경험은 어디에서나 바닥나거나 금지되어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1백여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에 관한 한 벤야민의 우울한 조사와 진단을 통해 내려진 결론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는 더욱 역설적인 것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는 거의 경험의 영도(零度)에 처해 있다. 이를테면 장소에 대한 경험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터넷의 검색엔진에서 어떤 지리적 명칭을 입력하면 가장 먼저 따라 나오는 연관검색어는 맛집이거나 핫플레이스이다. 그곳은 나에게 한 번 방문하여 식당을 찾아가는 곳일 뿐이다.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같은 글에서 장소를 둘러싼 진정한 경험을 강변하는 하이데거를 떠올리자면, 우리는 더 이상 거주하기라는 장소의 경험을 갖지 않는다. 마르틴 하이데거,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강연과 논문, 신상희 외 옮김, 이학사, 2008.
장소는 경험으로부터 탈락되어 있고,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주체가 가정했던 과학적 공간론은 거주하기라는 경험을 밝히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박탈하고 제거하기조차 한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주체-객체의 분할에 의지한 인간중심적 형이상학을 추궁하며 존재론적 전환을 꾀했던 하이데거에게 있어 결정적인 질문 역시 경험의 문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동, 통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머나먼 곳에 있는 대상이 코앞의 가까이에 놓이게 된 충격적 변화를 살피며 그는 그의 주된 철학적 용어 가운데 하나인 ‘가까움(nearness)’을 끄집어낸다. 마르틴 하이데거, “사물”, 앞의 책.
가깝다는 말은 경험을 집약하고 경험이 어떻게 초래되는지 알려주는데 더 없이 요기한 말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 가까운 곳, 가까운 마음 등 가까움은 경험이 처한 상태를 단숨에 그리고 확연히 말해준다. 옆집에 사는 이웃보다 화상채팅을 통해 친교를 쌓는 머나먼 이국의 친구가 더 가까운 세계에서, 경험은 말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은 또한 정반대로 엄청나게 제작되고 처방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용자경험디자인을 강변하는 상품디자인은 상품은 곧 경험이라고 기염을 토한다.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주겠다고 다짐하고 꾀는 여행상품은 장소를 둘러싼 경험이 희박해지거나 소멸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지 자랑한다. 앞 다투어 문을 여는 쇼핑몰과 아웃렛은 쇼핑에서부터 영화관람, 놀이, 식도락, 스포츠에 이르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고 합창한다. 모두가 경험을 이야기하고 경험을 제공하겠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경험의 상품화, 객체화는, 하이데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아가 정동이론을 주창하는 이들에겐 아쉬운 말이지만, 경험이 주체와 객체의 분화를 넘어서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욱더 객체로서 분석, 예측, 생산, 소비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정치적 경험에 대해서는 어떨까. 여기에서 우리는 재난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이 왜 전면에 나서게 되는지를 분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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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더 할 나위 없이 불평등이 증대되는 세계에 살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넘어간 세계는 양극화로 상징되는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부가 분배되는 세계를 초래했다. 삶을 연명하기 위한 결정적인 수단이 돈인 세계에서 그 돈을 얻는 유일한 원천은 노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시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생산성을 증대하기를 즐기고 외주나 하청, 생산라인의 이전을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자행하는 현실에서, 그 돈을 얻을 기회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는 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결국 계급투쟁은 생존투쟁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지시하기 위해 거의 유행처럼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개 동일한 현실을 지시하는 말이지만 새로운 용어들은 지옥 같은 세계에 대한 경험을 전보다 깊이 길어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든가 계급사회라든가 하는 용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가리키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대량생산하고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겪는 삶의 사실들을 더 이상 그러한 개념들이 비추지 못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은 단지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표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개념들은 동시에 어떠한 정치적 경험을 품고 있거나 그에 의해 물들어 있다. 격렬한 계급적인 갈등이 벌어질 때 자본주의란 개념은 객관적 현실을 지시하는 표상에 머물지 않고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일망타진하여 밝혀주는 지극히 실존적인 어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경험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비롯된 고통을 하나의 개념 속에 모으고 안정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간 숨 가쁘게 ○○사회란 개념들이 꼬리를 물고 행진하게 된 것은, 온전한 정치적 경험이 사라진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을 어떻게든 표식하려는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정치의 원천이 고통의 경험을 조직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이라고 치자면, 오늘날 정치는 더 이상 경험을 밝히고 담아내는 데 제 구실을 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세월호 사태가 터졌다. 그리고 참사 이후 우리가 가장 먼저 듣게 된 말은 “이것이 나라냐”는 것이었다. 이 말은 더 이상 지루하고도 끔찍하게 지속되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지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호소하였을 것이다. 경험이란 직접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겪는 이들이 주관적으로 그것을 새기고 그것에 관해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우리는 거의 경험을 박탈당해 있다. 그것을 경험으로서 환기시키려는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현실과 맺는 실천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경험은 어떤 정조를 통해 어렴풋이 묘사되기만 한다. 경험을 성숙하게 반성함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적인 시간을 지시하는 ‘시대 정신(Zeitgeist)’ 대신에 ‘시대의 기분(mood)’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셈이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는 그러한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어떤 경험을 일순 환기시켜주는 것처럼 보였다. 경험이 불가능한 듯 보이는 세계에서 경험은 오직 충격(shock)을 통해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벤야민이 끊임없이 환기시킨 자본주의에서의 경험의 변증법, 즉 ‘산만함 대 주의(attention), 충격의 변증법’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조너선 크래리는 거의 벤야민과 동일한 어조로 동시대의 문화를 산만함과 주의, 충격의 변증법을 통해 분석한다.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한편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지만 후기자본주의에서의 경험의 현상학을 분석한다고 볼 수 있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단독성의 미학」 역시 단독성(singularity)이란 이름으로 충격 혹은 독특한 경험을 향한 관심이 오늘날 경험의 주된 형식임을 폭로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박진철 옮김,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경험이 사라진 세계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객관적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은 충격을 통해 잠시 섬광처럼 출현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에 대한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충격을 바로 충격적인 재난에서 확보하고자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이것이 나라냐란 말을 통해 정치적 경험을 모처럼 드러내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대한 경험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을 겨냥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면 오늘날의 리얼리즘은 충격에서 비롯된 정신적 외상을 통해 출연하는 리얼리즘, 트라우마적 리얼리즘(traumatic realism)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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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란 표현은 반쯤 옳기도 하고 반쯤 그르기도 하다. 먼저 그것은 옳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이 재난과 같은 충격을 통해 가까스로 감지될 수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겪는 현실에 대한 경험을 말해줄 어떤 표상을 획득하고 나아가 그 잘못된 현실을 낳은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정치적 반성에 이르게 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또 옳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충격적인 경험으로서의 재난에 몰두하고 열광하는 것은 정작 경험을 철저히 부인하고 밀봉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험은 경험되지 못한 경험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험으로서 경험되지 못하는 삶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에서의 연쇄살인 사태에 관한 르포르타주이면서 오늘날 자신의 고통을 고통으로서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에 관한 빼어난 서사를 제공하는 마크 에임스의 글인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는 그것을 역력히 보여준다. 마크 에임스,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2016.

그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살아가지만 그것을 경험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이르게 되는 막다른 길을 보여준다. 희대의 악마처럼 보이는 그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사실들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삶의 단편들을 적절히 경험함으로써 그 경험을 가리킬 이름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한 자들이다. 그들은 경험 없는 경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는 사막처럼 황폐하고 사지분간이 어려운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 재난이나 참사와 같은 충격으로부터 현실에 대한 경험을 비로소 찾는 이들은 경험으로서 경험될 수 없는 현실에 감금당한 이들을 무시한다. 그런 연유로 충격이라는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경험을 말하는 이들은 경험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소홀히 하는 것을 넘어서 충격이나 전율과 같은 경험 자체에 넋을 잃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의 경험에서 문학의 행방(行方)을 찾고 문학의 시대적 연대기를 제안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무한한 공감을 보여주기는커녕 고통을 겪는 이들의 경험을 부인하고 무시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고통스럽게 세계를 경험함을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실은 우리가 겪는 경험을 경험으로써 드러내고 말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 문학은 바로 그러한 경험될 수 없는 것을 미적인 경험으로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그런 미적 경험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재난과 그로부터 비롯된 전율을 이야기하는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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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충격을 전해주는 사태일수록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통의 경험을 더 핍진하게 전하고 또 유익하기도 하다는 생각은 위험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러한 위험은 무엇보다 시간의 경험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재난, 참사, 재앙과 같은 충격 체험은 바로 현재의 충만한 경험 속에 빠져들며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순식간에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란 말은 정작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적 분할을 도입하면서도 시간에 관해 아무런 말을 들려주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암시해줄 뿐이다. 말하자면 세월호 이후 우리는 시간을 충격의 현재로서 겪고 있으며 그것은 종래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발언할 뿐이다. 그러나 고통을 고통으로서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정동적 경험이란 이름으로 비호할 것이 아니라 비판과 저항을 가능케 하는 ‘사유-경험(thought-experience)’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시간의 경험에 관하여 전력을 다해 사유해야 한다. 시간은 사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현존재(Dasein)가 세계-내-존재로서 겪는 지금의 경험도 아니다. 역사적 시간은 물질적 사회관계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평면과 지금 여기에서 겪는 시간 경험 사이를 잇고 그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기구분(periodization) 혹은 시대(period)란 시간을 사유하는 방법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더 없이 무뚝뚝하게만 느껴지고 거칠 기만 하게 들리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나 ‘금융자본과 문화’같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 제목은 역사적 시간과 경험 사이의 연관을 풍부하게 관찰하고 해부하며 들춰낸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역사적 변화가 어떻게 경험이 현상하는 방식을 낳도록 하는지 살피면서 경험을 실체화하지 않고 그것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 속에 끌어들인다. 또 그래야만 다른 주체 혹은 저항하고 투쟁하는 주체가 가능할 수 있음을 엿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신자유주의 이후가 아니라 세월호 이후인가, 왜 외환위기 이후가 아니라 세월호 이후인가, 왜 87년 체제 이후가 아니라 세월호 이후인가를 이 글에서 따질 생각은 없다. 단지 나는 경험을 보다 세심히 살핌으로써 경험이 우리에게 어떻게 들이닥치는지를 밝히는 것이 문학적 실천의 요체라면 오늘날 문학은 그러한 일에 더없이 무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서글픈 의심을 밝혀두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경험이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문학에서의 형식이라는 문제를 추방하는 듯 보인다. 문학적 형식이란 경험을 매개하는 장치나 기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경험이 분기하고 질식되며 우회되는 방식을 문학 속에서 찾고 드러내려면 바로 형식에 대한 섬세한 고려와 탐색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재난 이후의 문학은 경험의 직접성에 넋을 잃은 채 경험이 얼마나 매개되어 주어지는지를 잊는다. 그렇다면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란 프로그램은 반형식주의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보다 급진적인 글쓰기와 비평을 위해 요구되는 과제를 외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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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하릴 없이 아도르노의 「서정시와 사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펼쳐 읽는다. 그는 이 글에서 극단적이리만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할 뿐인 서정시가 왜 부르주아 사회에서 가장 사회적인 작품인지를 밝힌다. 이 글은 경험의 사회적 원천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재난의 문학, 파국의 문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서정시일지 모른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사회로부터 서정시를 연역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것의 사회적 실체는 정확히 그 안에 자발적으로 있는 것, 바로 그 때의 조건에서 따라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 바로 자신의 주관성 탓에 서정시의 실체(substance)는 사실 객관적 실체로서 말해질 수 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는 서정시를 예술 장르로서 근거지울 수 있는 바로 그 사실, 서정시가 독백을 늘어놓는 시인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자기 자신으로의 물러남, 스스로에의 몰두, 사회적 표면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이야말로 시인의 등 뒤에서 작용하는 사회적인 원인이다. … 서정시에 특유한 역설, 객관성이 되어버린 주관성이라는 것은 서정시 안에서 언어형태의 선차성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문학 일반(산문 형태에서조차)에서의 언어의 선차성이 파생되는 그 선차성이다. … 이것이 왜 서정시가 사회를 끌어들이며 옥신각신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의사소통하지 않을 때, 자신의 표현에 성공하는 주체가 언어 그 자체와 일치하고 언어의 내재적 경향과 일치할 때, 사회 속에 가장 깊이 근거하게 되는가의 이유이다.” On Lyric Poetry and society, p. 43

여기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라고 음울하게 되뇌이는 아도르노가 아니라 서정시를 쓰고 읽어야 한다는 또 다른 아도르노를 만난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가 겪게 된 경험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문학적 실천이라면 좇아야 할 나침반을, 서정시를 분석함으로써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고통의 경험을 겪는 이들의 토로, 고백, 증언을 중계하며 언어가 더없이 직접적으로 투명하는 오늘날의 확신에 경고가 될 만한 말을 들려준다. 고통의 사회적 기원을 말하고자 한다면 더욱 주관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주관성은 바로 언어를 통해 객관화된다고 말이다. 고쳐 말하자면 그는 경험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밝히려 한다면 언어에 다가서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사회를 직접적으로 들먹이는 메시지로서의 언어도 어떤 주장을 던지며 의사소통하는 언어도 아닌 독백에 가까운 서정시의 언어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경험이 어떻게 매개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부호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란 개념은 오늘날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고 문학적 실천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프로그램을 요약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은 앞 다투어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선언하며 새로운 문학적 실천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회를 더욱 충실히 담아내고 문학적 경험을 통해 사회에 대한 경험과 반성에 이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러한 의문 때문에 우리는 다시 아도르노의 「서정시와 사회」라는 해묵은 에세이를 꺼내 읽는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면서 말이다.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_<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 인용은 수정한 문학동네 원고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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