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정치적인 문자들

Jim O’Rourke – Simple Songs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3년 겨울, 나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띤 그렇지만 또 조금은 스스로를 으쓱해 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품은 제자들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들어섰는지 모를 스케이트장이 시청 앞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집회라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아이들을 거기로 불러낸 것은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 때문이었다. 줄여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혹은 더 줄여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로 알려진 그 대자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한 대학생이 붙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주현우란 학생은 대학 후문에 그 대자보를 붙였고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신문은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대화를 두고 ‘안녕 세대’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우리가 안녕들 할 수 있을지 되뇌며 친구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 묻는 이 대자보가 왜 그토록 큰 호응을 받았는지 그 연유를 짐작해 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회학적인 분석, 그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세대론적인 담론을 가볍게 들먹이며 그들이 처한 고통과 비참이 그 발언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안녕들하십니까 만큼의 효과를 촉발하는데 이르지 못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신기하게 보이는 대목은 그 메시지가 대자보라는 고루할지도 모를 형식을 통해 나타났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대자보가 게시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은 12월16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록자료실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민주화운동 기념 사료로 보존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대자보(大字報)는 손으로 쓴 벽보 혹은 벽신문을 가리킨다. 정치적인 의견과 주장을 밝히는 이 격문이나 신문 형식의 글은 중국 문화대혁명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한국에서는 70∼9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제는 애틋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이 선전-선동(agit-pro)의 시각적 실천은 이제 거의 세상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종이를 접어 선을 만들고 그 위에 물감을 적신 붓이나 두툼한 펜으로 써내려간 대자보는 곧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거나 정치적 투쟁을 독려하는 매체로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주변에서 대자보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쉽지 않은 시각 매체의 역사를 다룬 글이나 책을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대자보를 쓰는 이들이 선택한 명조와 고딕 사이의 어디 쯤 놓인 문자들의 시각 형태를 떠올리게 된다. 벽에 게시되는 순간 그것이 떼어지기 전까지 그 주변을 대항적인 공공영역으로 변화시키는 대자보의 위력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인쇄된 문자와 벌이는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대자보를 유행시킨 중국 문화대혁명의 급진파인 조반(造反)파는 실권파가 장악한 대중매체를 대신할 매체로 대자보를 거머쥐었다.

기계적으로 인쇄 출판된 매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손으로 쓴 글은 매우 사적인 매체의 자리에 갇히거나 밀려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필서명(自筆署名)이란 말이 넌지시 알려주듯이, 손으로 쓴 글은 고유한 개성이나 유일무이한 신원을 알려주는 도상(icon)과 같은 구실을 한다. 말하자면 인쇄, 출판된 복제가능한 문자는 추상적인 일반성을 가리킨다면 손으로 쓴 글은 일기나 서명과 같은 곳에서 찾아보게 되는 사적인 개인의 특수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자보는 새삼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추상적인 정치적인 대의를 위해 결집된 혹은 소집하게 될, 다수의 주체를 대표하는 글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쇄, 출판된 글이 아니다. 그 벽보 형태의 글은 손으로 쓴 문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 문자들은 글을 쓴 저자의 개인적인 신원을 나타내는 징표도 아니고 사적인 견해를 전달하는 고유한 음색과 음정이 충전된 텍스트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자보의 손 글씨는 명조와 고딕 어딘가의 사이에서 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출판된 텍스트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자형 혹은 서체였을 명조와 고딕은 대자보가 흉내고자 했던 무엇이었을지 모른다. 왜냐면 바로 명조와 고딕은 글의 인쇄된 문자임을 알리는 형태이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공적인 텍스트로서 구실하는 글이 취할 시각적인 외양의 모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내 기억 속에 저장된 대자보들이 과연 어떤 서체였는지 혹은 서체와 가까웠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판정은 그것이 명조와 고딕 어딘가에 걸쳐있었던 것 같다는 증빙할 길이 없는 확신이다.(한편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둘러싼 반향이 뜨겁던 즈음 서울대학교의 디자인학부 학생들은 <안녕들하십니까 타이포그래피 대자보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타이포그래피라는 디자인 언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고 주장하며 여러 가지 서체로 디자인된 ‘안녕들 하십니까’를 제작하고 보급하였다.)

 

대자보에 대하여 향수를 품는 것은 위험한 짓일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발휘한 위력은 그것이 대자보라는 형태를 취한 것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주장일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종래의 대자보가 갖는 형식을 페이스북(facebook)과 같은 인터넷 소셜미디어에 가까운 것으로 각색하고 개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친밀하게 말을 건네는 듯한 몸짓은, 이미 사회연결망서비스(SNS: Social Network Service)에서의 그 사회성 아니 사교성에 가까운 것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대자보란 것이 대립된 당파나 진영으로 분열, 상대하는 사회(예컨대 군사독재세력 대 민주세력)와 짝을 이룬다면, 사회연결망서비스는 개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사교적 관계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이미지와 짝을 이룬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두 가지 모두를 겸비한다. 아니 그것이 허술한 생각처럼 보인다면 겸비하였다기보다는 두 가지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자보는 시민, 민중 같은 정치적인 일반성을 담지하는 주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요구한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그런 주체의 형상을 뿌리친다. 그 자리에는 낱낱이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변변히 깊은 이야기도 나누어보지 못한 친구(?) 아닌 친구들을 향해 안부를 건네는 주체가 자리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정치적인 갈등이 상연되는 어느 곳에서나 목격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곧 바로 페이스북 페이지가 되었고 12월 14일 하루 사이에 2만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고 한다. 다음 날엔 15만개, 그 다음 날에 21만개, 그리고 며칠 뒤에는 마침내 26만개…. 대자보를 둘러싼 반응은 곧 한 나절도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이나 인터넷미디어를 통해 중계되고 증폭되는 사건으로 전환되었던 셈이다. 오늘날 많은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 기업들은 자신들의 브랜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사업에 호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서체를 이용하는 일이 잦다. 이제 저 유명한 인쇄 서체를 둘러싼 신화들이 한 결 같이 자랑하던 보편적인 공공성 대신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서체는 오직 개인과 기업만이 있을 뿐이라는 세계를 거드는 수단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인쇄 서체를 둘러싼 환상 가운데 하나였을 공공성이나 시민적 보편성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진 듯 보이기까지 한다.

 

세리프나 산세리프 같은 인쇄 서체가, 근대 민주주의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이었다고 우기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적인 민주주의의 이상과 인쇄 문화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공적인 매체는 모두를 대표할 수 없다. 지배와 불평등이 있는 세계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반듯한 산세리프체라도 자신의 정치적 항의를 전하는 대자보의 손 글씨를 막을 수 없다. 대자보는 손 글씨로 작성된 대항적인 공공성의 문서였다. 그 안에는 저항하는 자의 보편성이 개인적인 육체의 노고가 스며있는 쓰기의 행위의 특수성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거리의 문자는 어떤 서체이면 좋을까. 시위대와 집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든 피켓과 플래카드에 쓴 글자의 모양을 살피는 무의식적인 내 눈길에는 그런 호기심과 궁금증이 끼어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_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비평지 the T를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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