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의 존재론적 전환이란 게 가능할까

RAT FILM (Theo Anthony dir.)

지난 십여 년간 동시대 철학을 급습하여 성가를 높이고 있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은, 다큐멘터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런 물음은 너무 성급한 것일까. 혹은 비평이나 이론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나 즐겁게 곱씹을 주변적인 질문일까. 그것을 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라 치부하기엔 이미 주요 미술 전시를 석권한 작업들, 무엇보다 영상 작품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몇 해 전부터 영상 전시를 찾을 때면, 혹시 알아보지 못할 관람자들에게 충고라도 하듯이 자신이 존재론적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는 작품과 마주칠 일이 잦아졌다. 이를테면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마주하게 된 영상작품 가운데 하나는 작품설명에서 작가 자신이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tned Ontology)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버젓이 역설한다. 마리에 쾰백 이워슨(Marie Kølbæk Iversen)의 거울 치료(Mirror Therapy)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이다.

한편 최근 미술 비평을 이끌고 있는 미술비평 웹 저널 e-flux와 그를 이끌고 있는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 역시 광주비엔날레에 유사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를 비롯한 주변의 작가들은 느닷없이 부활한 우주론(cosmism)에 열광하며, 20세기 초 러시아혁명을 전후하여 활약했던 그 신비한 유물론적 사유를 재조명하는데 여념이 없다. 안톤 비도클은 자신의 우주론적 영상 작업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인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이 일으켰다 The Communist Revolution Was Caused By The Sun>를 출품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우주론적 과학자인 알렉산더 치체브스키(Alexander Chizhevsky)의 태양생물학(hellio-biology)에서 비롯된 가설을 참조하며 완신세(完新世, holocene)가 끝나고 인류세가 도래했다는, 오늘날의 급진적인 지리학자나 생태주의자의 주장에 공명하기로도 하듯이 새로운 우주론적 상상력을 추적하고 재연한다. 우주론은 사회주의와 신비주의, 과학 등이 뒤섞인 기묘하고 매력적인 러시아의 사상적 흐름이다. 니콜라이 페도로프(Nikolai Fedorov)라는 거의 한 세기 전의 러시아 사상가와 그 주변의 철학자들, 괴짜 과학자들, 혁명가들에 의해 발전된 이 유사철학적인 존재론은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것은 생산양식의 전환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대신에 존재론적인 돌파를 통한 새로운 문명으로의 탈출을 모색한다.

거기에 가세해 상황주의적(situationist) 미학에 대한 새로운 비평적 주석으로 이름을 날린 맥켄지 워크(Mackenzie Wark)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마흐주의적 철학자 알렉산더 보그다노프보(Alexander Bogdanov)의 주요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 소개하면서, 급진적 존재론의 망각된 수원(水源)을 재발견하도록 촉구했다. 보그다노프는 마흐주의의 철학과 마르크스주의를 합성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유물론적인 존재론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이단적인 철학자였다. 그리고 레닌은 저 악명 높은 철학 저작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혹독하게 그가 쓴 경험일원론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레닌보다는 보그다노프가 훨씬 매력적이고, 마르크스보다는 자연변증법에 열광하였던 그의 동료 엥겔스가 훨씬 더 근사해보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엥겔스의 기계론적 유물론으로부터 마르크스의 비판적 유물론을 떼어놓으려 시도했던 이들에겐 어안이 벙벙해질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랫 필름 Rat film>이란 이색적인 다큐멘터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감독 스스로 다큐멘터리라고 주장하고 영화제의 작품 카탈로그의 크레디트에서도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렇지만 근년의 영화적 추세에 익숙한 이들은 어쩌면 이 영화를 에세이 영화(essay film)로 간주하는 데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극영화인가 다큐멘터리인가, 혹은 허구영화인가 비허구영화인가라는 구분을 못마땅해 하며 등장한 에세이 영화의 도발을 생각할 때, 이 영화는 여러모로 관습적 다큐멘터리로부터 벗어나 있다. 겉보기에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 인류학적인 리서치, 역사적 아카이브를 참조하기, 과학적 실험의 참조, 현장에서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기록 등을 두루 이용하며, 감독인 테오 앤서니(Theo Anthony)는 다큐멘터리적인 장르에 온전히 속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영화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분류하는 데는 주저함이 따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영화를 소개하는 글에서 프로그래머 장병원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영화는 볼티모어 시를 괴롭혀왔던 쥐에 의한 감염 기록을 찾아내고, 그 위에 계급의 문제를 얹어가면서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이어가는 태도를 보인다. 단조로운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베르너 헤르조크의 방법론을 상기하는 측면이 있지만 다종다양한 기술 대상의 활용이라는 면에서는 하룬 파로키, 크리스 마케르의 에세이에 가깝다.”(2017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카탈로그, 214면)

 

2.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이어가지만 에세이에 가까운 영화. 여기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와 에세이를 구분하면서도 수렴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설명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큐멘터리이지만 에세이에 가까운”이란 서술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딱히 머릿속에 명쾌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일단 그것은 에세이 영화란 것이 어쩐지 다큐멘터리가 성이 차지 않아서 생겨난 조짐이란 듯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린다. 다큐멘터리 내부의 어떤 양식, 즉 에세이적 형태의 다큐멘터리가 있는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어떤 자율적인 영화의 형태와 에세이라는 그에 준하는 영화 형태가 있고 그 사이를 진동하는 영화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그런 짐작에는, 이미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사이에 부정적인 거리가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에세이는 다큐멘터리와 다르지만 그것이 사과와 배가 다른 것처럼 다른 것이 아니라 무언가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 속에서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세이로 나아가려는 이러한 몸짓에는 어떤 배경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를 여러 가지로 풀이해 볼 수 있겠지만 문득 짐작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난해인 2016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서 올 해의 낱말로 우리말로 흔히 ‘탈-진실’로 번역되는 ‘post-truth’를 선정한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인즉슨 사람들은 무엇인 진실인지에 관해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진실이라기보다는 입맛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해 소비하는 끔찍한 세계가 당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허구/비허구, 구성된 서사와 객관적 사실 사이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이젠 그다지 관심사가 될 게 못된다. 그런 논쟁은 모두 진실이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이란 것의 눈치를 보며 영화적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입씨름을 벌이는 일이 왕왕 있었던, 좋았던 먼 시절의 사정이었던 듯이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제 더 이상 태환할 수 없는 어음이 되어버린 듯 전락해 버린 진실은, 편집증적인 광기에 물든 이들이나 목 놓아 외치는 관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얼마 전 국내의 한 종편 채널의 뉴스는 ‘팩트 체크’라는 메타비평에 가까운 코너를 만들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스에 대한 뉴스, 즉 페이크 뉴스(fake news), 가짜 뉴스에 대한 비평을 하는 뉴스를 내보낸다. 뉴스에 관한 뉴스라는 이 희한한 포맷은 뉴스란 있었던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화를 따돌리며 뉴스 자체가 끝없는 진위 판정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풍자한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성에 대한 관심은, 사실을 숭배하는 실증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해악을 둘러싸고 맹렬한 논쟁을 벌였던 과거의 토론을 까마득한 옛날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의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이 아니라는 실증주의자의 주장은 객체이든 사실이든 그 어느 것도 자명하지 못하다는 비판에 직면하며 숱한 흥미로운 논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이란 개념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사실이나 진실이란 것의 가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개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보도를 둘러싼 대중매체의 설전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이를 중계하는 한국의 한 신문의 칼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면 이렇다.

 

“로이터통신이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트럼프 취임식 인파를 비교하는 사진 2장을 공개한 것이 발단이었다. 오바마의 취임식장은 관중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지만 트럼프의 취임식장은 듬성듬성해 큰 차이를 보였다. 언론들은 이를 근거로 역대 최저 지지율로 출범한 인기 없는 정권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이튿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파가 운집했다’는 브리핑을 했다. 언론들은 거짓말 브리핑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거짓말 브리핑에 대한 백악관 측 해명이 더 큰 논란을 불러왔다.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NBC 방송에 출연,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진행자가 왜 거짓말 브리핑을 했느냐고 다그치자 ‘대안적 팩트(facts)’라는 괴상한 용어를 들이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진영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분노의 불을 지펴 사실을 덮어버리는 전략’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와 일맥상통한다고 분석했다. 포스트 트루스는 ‘감정이나 주관적 신념이 사실보다 더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말한다.”(파이낸셜뉴스, 2017년 01월 25일자 31면)

 

이런 식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다큐멘터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전달한다는 소명을 으뜸가는 윤리적, 미학적 소신으로 삼는 다큐멘터리에 있어 치명적인 위협이 도래했다고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일 뿐이다.

 

 

<랫 필름>은 볼티모어 시를 배경으로 쥐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것은 설치류 동물인 쥐가 끼칠 수 있는 해악에 대한 공포(저 유명한 페스트의 공포)를 인용하거나 암시하면서 볼티모어라는 도시에서 행해진 인종적, 계급적 격리의 역사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그렇게 요약하는 것은 어딘지 영화가 진행되는 방식 가운데 중요한 무엇을 빠트린 것 같은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그것을 이야기할 작정이었다면 이 영화는 구역화(zoning)라는 지리적 정치적 배제의 책략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백인계층들로부터 배척받은 흑인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중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계급갈등을 대신하는 흑백갈등을 전하기 위해 쥐라는 역겨운 기생적인 동물을 흑인 하층계급에 대한 은유로 내세우는 손쉬운 구성을 피한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보이스오버는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비인격적인 대상들에게 인간에 못지않은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수많은 것들을 발언의 ‘주체’로 내세운다. 그것은 쥐이기도 하고 설계도이기도 하고 과학실험이기도 하며 시에 고용된 방제노동자이기도 하고 또한 쥐와 노는 게 인생의 큰 낙인 취미생활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철두철미한 관습, 즉 모든 것은 인간과 세계라는 분할 속에 전개되며 여기에서 세계에 대한 경험을 전하는 유일한 주체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부터 탈출하는 영화를 마주하게 된다. 인간-주체만 말할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객체에게도 말할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것, 세상은 인간이라는 주체와 인간이 대한 사실이라는 객체 사이의 관계로 짜여 있는 게 아니라 무한한 객체들끼리 서로 섞이고 교호하며 움직인다는 것. 이런 이야기를 영화는 은밀히 전한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는 정확히 새로운 존재론적 전환 이후의 철학이 실현하고자 했던 관념적 욕망을 실현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랫필름> 역시 암시하고 있듯이 가상적적인 미디어를 통해 현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인간적 주체로서 세계를 경험한다기보다는 어떤 기술적 장치에 의해 매개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보완하거나 확장한다. 이를 테면 도시에서의 이동의 경험은 이제 나와 공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도로, 자동차, GPS, 모니터 등의 기술적, 시각적 미디어가 결합해 만들어지는 가상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하며 이러한 가상적 경험은 비단 오늘날의 첨단 3D 시뮬레이션 모니터나 안경을 통해 외부 현실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실행되어 왔던 것을 반복하고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오랜 역사적 과거에 수행된 도시화와 도시계획, 그리고 그것을 구상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보조했던 과학적 계측, 조사, 실험 등은 이미 공간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가상화하는 것이었다. 사물인터넷이니 빅데이터니 하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들은 인구학과 통계학, 생물학 등에서 비롯된 기술들과 장치들과 다르지 않으며 이를 반복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경험의 가성성을 추적하여 보자면, 인간은 지각과 경험의 장치들이 부착되고 적용되는 객체였고 거꾸로 말하면 이러한 객체들은 항상 이미 인간과 대등한 주체였던 셈이 된다. 그리고 <랫필름>은 더 이상 인간적인 주체의 세계를 엄호하던 다큐멘터리, 다시 말해 객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죽어있는 대상처럼 뻣뻣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사물화된 인간을 표상하는 다큐멘터리는 한 물 갔다는 듯이 말을 건넨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사물화된 인간, 객체가 되어버린 인간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한 인간, 즉 자본주의적 세계가 초래한 사물화된 삶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주관적 진실을 들춰내는, ‘비판(critique)’으로서의 다큐멘터리라는 노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에세이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관계 역시 이런 점에서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에세이란 개념을 둘러싼 흔한 통념 가운데 하나는 사적인 주관성을 오롯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글쓰기라는 것이다. 자신을 에세이스트로 부르기를 좋아하는 고다르는 <영화사>에서 영화란 “사유하는 형식이자 형식화하는 사유”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어쩌면 진부해보이기까지 하는 이 언급은, 의외로 그의 영화에 대한 유물론적인 신조를 시사하는 것으로 새겨볼 수도 있다. 그는 영화가 곧 주체임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념이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 사유이며 그 사유를 형식화화여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생각을 따르자면 영화에는 달리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제외하고는 영화 바깥에 선 다른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화면 속의 인물도 화면 바깥에서 이미지를 설명하고 규정하는 인물도 불필요한 것이다. 영화 자체가 비인격적인 주체가 되어 말을 건네고, 이로써 우리는 영화라는 객체가 실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견주어 손색없는 주체임을 온전히 승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다르 식의 영화의 유물론은 에세이 영화의 원리와 거리가 먼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에세이 영화의 특징을 둘러싼 분분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가장 널리 선호되는 정의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인 작가-저자의 목소리이다. 이는 가장 잘 알려진 형태로는 보이스오버가 있을 것이며 부가적으로 화면에 삽입된 글로 된 텍스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언어적 개입과 참여는 에세이 영화의 본보기처럼 여겨지는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의 영화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적인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을 으뜸가는 장점으로 삼는 에세이 영화의 주관적 충동은 집합적 주체라는 관객을 가정하고 그 관객에게 화면을 통해 제시되고 가공된 현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던 비판적인 다큐멘터리와 다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이지게 된 데에는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유토피아적 정치가 맥을 못 추면서 과거의 사회주의 운동이나 민족해방운동같은 집합적인 해방의 주체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처지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타나는 사적인 주관성은 다른 세계는 불가능하다는 패배감을 가리키는 표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가, 다른 경험과 재현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저항적 인간 주체, 그것이 계급이든 성별이든 민족이든 상관없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것을 겨냥하였다면, 에세이 영화는 그런 주체가 쇠잔해졌거나 사라진 세계에서 다시금 주체를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의심을 품어볼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전과 같은 종류의 주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대립하여 있는 것으로서의 주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 주체처럼 여겨지는 세계에서 초라하게 그 숱한 주체 가운데 하나로 강등당한 주체일 것이다. 최근 흔히 보게 되는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더빙된 목소리로 동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사물의 역사를 해부하는 자연사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듯이 얼음과자나 위생도기, 연필 같은 것 역시 인간 못잖게 자신의 인생 역정을 가진 것처럼 너스레를 떤다. 마치 모든 것이 주체인 듯 여겨지는 세계에 우리는 큰 저항감 없이 도착해 있다.

그렇다면 에세이 영화에 대한 흔한 가정을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에세이영화란 사적인 주관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영화적 접근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항시 전제할 수밖에 없던 개인적, 사회적 인간-주체로부터 떠나려는 충동을 승인하는 포스트-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은 아닐까. 이에 대해 우리는 섣부르게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변혁과 저항의 주체로서의 사회적 인간에 쏠린 기대가 저물며 나타난 전환, 인간만이 아니라 기계, 정보, 동물, 자연적 사물 등에 주체로서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전환 – 철학에서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존재론적 전환일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피해갈 것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랫필름>은 그러한 추세를 예시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분기점에 서있고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역사에 어떤 충격을 자아낼지 초조히 그리고 호기심어린 눈길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_DMZ다큐영화제를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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