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赵亮-上訪 Petition

踏遍靑山, 問計人民
청산을 다니며 인민에게 계책을 묻는다.

계시와도 같은 영화들

얼마 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사회참여적 독립 다큐멘터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의 저자인 댄 에드워즈(Dan Edwards)는, 서두에서 자신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예기치 않은 계기를 술회한다. 그는 홍콩국제영화제의 프레스룸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자오량(赵亮, Zhao Liang)의 다큐멘터리 작품 <고소(上访 Petition)>을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을 한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 역시 마주했던 순간을 전한다. 그가 보았던 장면은 어느 노구의 고소인들이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차에 치여 온 몸이 산산조각 난 후의 모습이다. 그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의 고소인들은 철로를 누비고, 철로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그의 살점, 머리 조각을 찾아내다 결국 바닥에 뒹굴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주워든다. 몇 년간 중국 정부가 소유했던 월간 잡지에서 일하던 댄 에드워즈는 자신이 매일 북경의 거리를 오가며 감지했던 불편하고 음산한 느낌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한 영화와 마주쳤다. 개혁과 개방 이후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그것도 수도인 북경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곧잘 맞닥뜨려야 했던 남루한 행색의 겉도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는 마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소>는 번영하고 있는 표면의 현상 뒤앙에 놓인 중국 동시대적 상황의 숨겨진 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중국 다큐멘터리 세계에 대한 열광과 몰두는 그 첫 상영을 통해 굳어졌다.” Dan Edwards,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Alternative Visions, Alternative Publ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

자신을 에워싼 낯선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의구, 불명료한 정체에 대한 혼란을 순식간에 해결해주는 듯 보이는 어떤 계시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나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낯선 나라의 세계에서의 경험을 반성하면서 내뱉는 이방인의 말이라면, 그런 의심은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험이 중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에게서도 되풀이하여 등장한다면 어떨까. 만약 그렇다면 다큐멘터리가 안겨준 충격의 경험은 낯선 세계에서 온 어느 누군가의 영화적 경험으로 축소하기 어렵게 된다.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New Documentary Movement, xin jilu yundong, 新记录运动)의 역사를 기록하고 비평하는 글들을 읽다보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충격의 경험을 회상하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1993년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된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 Ogawa Shinsuke), 프레드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의 영화를 처음 접하고 느꼈던 충격, 문화대혁명 당시 유일하게 그 역사적 격랑을 기록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Michelangelo Antonioni)의 저주받은 작품 <중국 中國>(1972)을 훗날 다시 보게 되었던 젊은 세대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충격(그에 더해 중국을 찾아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바 있는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가 중국 방송 관계자들과 가진 워크숍에서 가르쳐준 동시녹음과 현장에서의 촬영의 중요성을 접했을 때의 충격), 캐나다의 영화평론가 베레니스 레이노(Reynaud, Bérénice)가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대부로 알려진 우웬광(吴文光, Wu Wenguang)의 <유랑북경(流浪北京, Bumming in Beijing: The Last Dreamers>(1990)을 밴쿠버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본 순간, 중국의 영화사에서 새로운 시간이 개시되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증언 …. 그리고 이 모두는 충격 혹은 그에 가까운 경험을 말해준다.

충격이란 낱말은, 남용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잠시 후 언급하겠지만 다큐멘터리 영화의 어떤 면모를 존재론화하고자 하는 미학적 비평의 충동에 손을 들어주는 구실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 낱말을 간단한 심리적인 묘사로 깎아내리는 것 역시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충격이란 낱말 속에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낱말인 경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격은 경험과 예술의 관계를 반성하고자 할 때 조우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충격과 경험이란 개념은 언제나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여 왔다. 크라카우어와 벤야민의 영화 비평에서 핵심적인 개념들을 찾으려 한다면 그 개념들의 목록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차지할 말은 단연코 경험과 충격일 것이다. “경험을 기만당한 사람, 근대인”이라는 그의 사유를 압축하는 어느 묘사는, 경험의 소멸, 위조, 대체 등을 추궁하는데 몰두했던 벤야민의 생각이 단숨에 망라되어 표현된다. 충격과 주목(attention)은 영화적 지각을 둘러싼 논의에서 제법 오랜 연원을 갖는다. 조너선 크레리는 이미 영화의 역사를 경험과 지각이란 관점에서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Jonathan Crary, Suspensions of perception: attention, spectacle, and modern culture, Cambridge, MA: MIT Press, 1999. 또 몇 해 전 출간한 저작에서 정보통신혁명과 세계화 이후의 후기자본주의에서 지각과 경험의 가속화와 파편화를 분석하며 다시 주의와 충격이란 쟁점을 오늘의 시각문화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 끌어들인다.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그의 분석에서 예시되듯이 주의, 충격, 경험은 시각문화는 물론 오늘날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를 이해나는 데 있어 관건적인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에서 “영화에 이르러서는 충격의 형식을 띤 지각이 일종의 형식적 원리가 되었다.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생산의 리듬을 규정하는 것이 영화에서는 수용 리듬의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화와 컨베이어시스템을 통해 작동하는 공장의 노동 사이에 동일한 경험의 모델이 전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산업화된 도시에서의 삶이 겪어야 하는 경험의 마비 혹은 조정(措定)에 사로잡힌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영화가 지속적으로 충격을 투입하여야 함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영화가 끊임없이 충격을 보급하고 쇄신하여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영화적 지각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시도는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지각 양식의 변화, 나아가 자본주의에서 일상적 삶의 현상학 자체를 파헤치는 물음이기도 했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산만함(distraction)과 주의집중(attention, attentiveness) 사이의 관계,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산만함 속의 지각’이라는 것을 통해 기술적 복제 시대의 지각의 현상학을 사유한다.
오늘날 새로운 영상 매체의 폭증,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을 위한 기술적 수단들의 전환, 영화 소비와 수용의 공간적, 시간적 조건의 변화(극장에서 DVD 플레이어, 홈시어터, 랩톱, 휴대전화 등으로의 전환), 접근 가능한 영화적 대상(object)의 거의 무한한 확장과 그와 관련된 경험의 변화 등(예를 들어 필름 릴의 운반과 영사에서 다운로드와 플레이로의 변화)을 헤아리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서정시를 두고 한 다음의 서술을 우리의 체험과 지각의 공시태에 적용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충격체험이 규범이 되어버린 경험 속에서 어떻게 서정시가 자리 잡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러한 서정시엔 고도의 의식성이 기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그러한 시는 그것이 창작될 때 작용했을 어떤 계획을 상상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보들레르의 시에 전적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W.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외, 김영옥, 황현산 옮김, 길, 2015, 190-1쪽.
벤야민은 훗날 독일의 서정 시인들을 두고 「서정시와 사회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글에서 아도르노가 개진하게 될 주장을 앞서 말한다. 서정시가 덧없는 찰나의 개인적인 주관적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라는 흔한 생각과 달리,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시를 언급하며 그것이 “고도의 의식성”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성이란 감성적인 것의 반대편에 서있는 지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려 그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겪게 되는 일상적인 경험을 반성하고, 즉 의식하고, 그것을 밝히며 조명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지 모른다.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자장과 <고소>

자오량의 <고소>는 1996년부터 2006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북경 남역(北京南站) 부근의 고소촌에 몰려들어 자신들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사정을 해결해주도록 요청하는 고소인들의 삶을 집요하게 기록한다. 이 영화의 제목으로 채택된 고소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상방인(上访人)들의 모습을 제대로 전하는 데는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상방이란 사법적인 절차임에도 흔히 검찰이나 재판을 통해 진행되는 고소나 소송이라기보다는 직접적인 중앙 권력을 향하여 자신의 항의를 전하는 상소나 청원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오량의 다큐멘터리가 시작된 해인 1996년, 중국은 1월 1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신방조례 中華人民共和國信訪條例)를 시행하였다. 이는 중국 공민이 법률적이나 행정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그 사람은 해당기관에 전화로, 편지로, 혹은 직접 방문하여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전하고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 법이다. 그 법에 따르자면 관원(공무원)의 잘못, 독직, 개인의 다양한 권리침해에 대해 상방(上訪) 행위를 할 수 있게 한다. 법 규정에는 이런 상방인에 대해서 보복이나 압박, 박해를 일절 금하고 있다. 상방인의 의견 제출 권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게 된 <고소>에서는 그러한 법이 규정한 원칙들은 모두 신기루임을 보여준다. <고소>에서 자오량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기록하는 어느 모녀의 사연이 그것을 역력히 보여준다.

그 모녀는 치(Qi)라는 이름의 중년 여인과 쥐엔(Juan)이라는 당시 12살이었던 소녀이다. 두 사람은 고소촌의 거리에서 기숙한다. 치씨의 남편은 건강검진을 받다 목숨을 잃었고 관계자들은 그의 시신을 급히 화장하였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려는 치씨는 딸과 함께 북경으로 올라와 청원을 제기하고 버틴다. 그 와중에 치씨는 국무원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 석방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정신병원에 구금되고 정체불명의 약을 강제로 투약당하기도 한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될 어린 딸 쥐엔을 걱정하면서도 엄마인 치씨는 문제를 법적으로 정당하게 해결하기 전까지는 딸과 함께 북경남역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자오량은 그들을 수년간 기록하게 된다. 그러던 중 고소인들의 삶을 먼발치에서 기록하는 데 진력하던 영화를 비트는 순간에 이르게 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엄마를 견디지 못한 딸은 감독에게 자신이 엄마의 곁을 떠나 달아날 것이라고 말하고 엄마를 위해 쓴 편지를 전해주길 부탁한다. 그리고 감독은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한다. 그는 한번도 현존하지 않던 자신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마침내 편지를 전하는 순간 치씨는 편지를 읽지 않겠다고 대꾸하고 감독은 애원하듯 편지를 읽도록 설듯하지만, 혼자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처지에 반발이라도 하듯이 치씨는 가방을 거머쥐고 자리를 뜬다. 당황한 감독은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다그치며 계속 따라오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엄마를 향해 그는 자기 입장에서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 딸의 이야기를 재차 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거부하고 황급히 뛰어 달아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다시 더없이 초췌하게 늙은 모습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그녀는 화면에서 사라진다.
감독은 고소촌을 배회하며 만난 이 모녀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며 배치한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 작품을 읽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에서 나타난 변화를 압축하는 징후처럼 간주되곤 하였다. 중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읽는 이들은 흔한 연대기적인 구분을 도입하곤 한다. 흔히 관찰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되곤 하는 1990년대의 독립 다큐멘터리와 달리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잇단 다큐멘터리들은 성찰적이거나 수행적인 다큐멘터리로 전환했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다. 이는 빌 니콜스의 고전적인 다큐멘터리의 분류를 모두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이를테면, 어떤 평론가는 자오량의 <고소>를 두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자신의 현존을 가급적 감추거나 제거하면서 눈앞의 실제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기록하는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다른 접근을 취하고 감독은 물론 관객 모두에게 윤리적인 성찰을 적극 유도하고 촉구하는 성찰적 다큐멘터리의 전범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Dan Edwards, Petitions, addictions and dire situations: The ethics of personal interaction in Zhao Liang’s Paper Airplane and Petition, Journal of Chinese Cinemas, Vol. 7, No. 1, 2013.
앞서 언급한 쥐엔의 편지를 전하려 치씨를 찾아간 장면에서 감독은 화면의 바깥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interpersonal) 관계에 연루된 주변의 인물인 양, 딸의 처지를 대변하며 엄마를 향해 말을 건넨다. 감독 스스로도 그런 비평을 뒷받침하는 말을 털어놓기도 한다. 훗날 감독은 자신이 삭제한 장면들에서 자신이 엄마와의 대화에 너무 몰두하느라 제대로 촬영을 못해 그녀의 얼굴이 화면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풋티지가 바닥이나 자신의 발을 찍고 있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이 부분을 잘라내지 않고 포함시켰다면 훗날 자신이 잔인하다는 비난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Every Official Knows What the Problems Are”: Interview with Chinese Documentarian Zhao Liang, Senses of Cinema,
http://sensesofcinema.com/2012/miff2012/every-official-knows-what-the-problems-are-interview-with-chinese-documentarian-zhao-liang/(2017년 6월 7일 접속)

장 루쉬(Jean Rouch)가 초연한 관찰적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촉매(catalyst)로서의 감독의 역할을 강조한 것처럼 다큐멘터리 감독이 자신이 촬영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는 다큐멘터리 작품의 윤리-정치적 쟁점을 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앞선 화면에서 보던 감독의 부재와 달리 갑자기 자신이 기록하는 인물의 사적인 삶에 적극 연루되고, 나아가 그 속에서 자신의 깊은 윤리적 동요를 드러내는 장면은 관심을 끌지 않을 수밖에 없다.
댄 에드워즈는 자오량의 <고소>에 세 가지의 다큐멘터리적 양식이 공존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빌 니콜스의 다큐멘터리 분류법을 참조한 듯이, <고소>에는 관찰적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관음적인 양식(voyeuristic mode)’과 ‘운동가적 폭로 양식(activist-exposé mode)’ 그리고 ‘감정이입적 촬영 양식(empathetic mode of filming)’이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Dan Edwards, op. cit. pp. 71-2
중국 판 다이렉트 시네마와 유사한 것으로 초기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전환의 특성으로 정의되곤 하던 관찰적 양식의 다큐멘터리는, 이제는 흥미롭게도 관음적인 양식으로 격하된다. 그리고 방금 말했던 장면들을 인용하면서 댄 에드워즈는 감독이 목격하게 된 현실을 단지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그러나 고통스러운 윤리적 개입을 무릅쓰며 말을 건네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고소>에서 정의를 찾겠다고 몸부림치는 엄마와 자신의 삶을 부인당한 딸 사이의 갈등에 자신을 직접 자리하게 함으로써 감독은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윤리적 곤경을 드러낸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윤리적 곤경은 다시 관객들에게 옮겨지고, 관객들 역시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고수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부과한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안녕을 위해 결국 타협을 해야 할 지를 두고 번민하게끔 된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이 겪는 윤리적 딜레마는 다시 관객에게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참여해야하는 세계의 윤리적 알레고리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오량의 <고소>를 분석하면서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꼽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는 감정이입적 촬영 양식을 기꺼이 선택한 자오량의 시도를 극구 지지하면서 그것이 종래의 독립 다큐멘터리의 관습인 관찰적 다큐멘터리로부터 벗어나 성찰적 다큐멘터리로 이행하는 전환적인 계기를 발견한다. 이는 비단 댄 에드워즈의 각별한 시각은 아닐 것이다.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를 역사화하는 서사에서 이러한 어법은 심심찮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치 왕(Qi Wang)은 「수행적인 기록」이란 글에서 중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서사화하면서 관찰적 다큐멘터리에서 수행적 다큐멘터리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장한다. Qi Wang, Performing Documentation: Wu Wenguang and the Performative Turn of New Chinese Documentary, A Companion to Chinese Cinema, Yingjin Zhang ed. Malden : Wiley-Blackwell, 2012.
심지어 그는 독립 다큐멘터리의 기원으로 알려진 우웬강의 <유랑북경> 역시 이미 수행적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리고 장잉진(Zhang Yingjin) 역시 잉 웨이웨이(英未未)의 <상자(盒子, The box)>를 분석하면서 레즈비언 커플의 삶에 밀착해 촬영한 이 영화가 수행성과 정동을 제시하는 유례없는 작품임을 강조한다. Yingjin Zhang, Thinking outside the box: mediation of imaging and information in contemporary Chinese independent documentary, Screen, Vol. 48 No. 2, 2007.

현장(Xianchang)의 미학?:목격-경험의 다큐멘터리

그러나 관찰적 다큐멘터리에서 성찰적 다큐멘터리로 혹은 수행적 다큐멘터리로의 이행이라는 도식으로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적 이행을 제시하는 서사에는 어쩐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오늘날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현재를 대표하게 된 왕빙(王兵, Wang Bing)의 <철서구(铁西区, Tie Xi Qu: West of the Tracks)>와 그것의 영향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견디기 어려우리만치 적요한 롱테이크와 트랙킹 숏으로 사라지는 산업단지의 사람과 사물들을 비춘다. 더없이 침울하고 스산한 풍경 속에서 인적이 드문 공장과 거리와 그를 채우고 있는 사람과 녹슬어가거나 허물어져가고 있는, 조금 억지스럽지만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세계의 개시(disclosure)를 떠올리게까지 하는, 이 작품은, 중국의 초기 독립다큐멘터리로의 귀환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큐멘터리의 일반적인 역사적 발전의 궤적이란 것이 있는 듯 전제하고, 초기적 혹은 원시적인 단계로서 관찰적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수행적이거나 성찰적 다큐멘터리로 이행하는 것이 발전의 증거인 듯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 분류의 개념은 발전의 개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비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역사적 간격과 변천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런 양식적 변화로 환원할 수 없는 변화의 동력을 밝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경험이란 개념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개관하고자 시도하는 대표적인 저작인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저자인 루크 로빈슨은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사적 흐름을 관류하는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한다. Luke Robinson,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from the studio to the street, London &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3.
이는 앞서 보았던 역사적 차이와 분류를 강조하는 견해들과 사뭇 다른 것이란 점에서 흥미 있는 분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 더해 역사적, 사회적 경험의 재현과 주제화란 점에서 이들 영화를 아우르고자 진력한다는 점에서 루크의 분석은 더욱 유의할 가치가 있다. 특히 그는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의 지형을 개관하는 서술에서 다음의 특징들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주된 면모로 정의한다. a) 다큐멘터리의 양식적, 주제적 다양화, b)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특히 DV로 대표되는 제작방식의 전환, c) 스튜디오에서 거리로라는 책의 부제가 암시하듯 중국 관영 TV의 관례적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난 현장 기록 중심의 다큐멘터리로의 전환, 그리고 이에 더해 그는 d) xianchang과 생생함(liveness), 우발성(contingency)을 새로운 다큐멘터리 운동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가 달리 영어로 번역하지 않은 채 인용하는 xianchang(시엔창)은 중국어로 “现场(현장)”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장이란 쉽게 연상될 수 있는 ‘현장(on-site)’의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스튜디오에서 거리로의 이전이란 점에서 꼽은 세 번째 특징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현장이란 그와 함께 연결한 낱말들인 생생함과 우발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전개되는 물리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 있다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데, 이는 그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적 재현의 존재론적 진리(ontological truth of documentary representation)를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를 잘 요약한다. ibid. p. 29.
다시 말해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현장이란 장소나 시간을 동기화하면서 획득되는 사실적 박진감이나 핍진성과는 다른, 혹은, 그를 넘어서는 존재론적인 특징을 가리킨다고 여길 수 있다. 그가 여기에서 참조하는 xianchang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중국 영화평론가인 다이진화(戴锦华, Dai Jinhua)가 1990년대의 중국 문화를 분석하면서 제출한 개념이다. 그리고 루크는 이 용어를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채택한다. 더불어 이 개념에 해당하는 영어로 가장 그에 가까운 낱말로서 생생함을 들이민다. 현상학적인 미학이론에서 빌려온 생생함과 우발성이란 개념으로 다이진화가 지적한 현장이란 개념을 온전히 번역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무엇보다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경험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루크의 주장에는 주의를 기울여 볼 가치가 있다.

“그냥 알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것은 경험해 봐야 해”라는 일상적인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경험은 인지적 지식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대상과의 관계를 가리킨다. 이때의 대상(object)은 인식론적인 의미에서의 대상, 즉 주체가 ‘아는(knowing)’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다시 현상학적 존재론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그 경험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던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를 에워싼 독특한 그러나 반복되는 표현, ‘충격’이라는 경험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충격이란 것이 과도한 감각적인 자극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충격의 경험은 충격에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보았던 다양한 충격의 경험에 대한 고백들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 늘 있던 것이거나 소홀히 여겨지던 것들이 다큐멘터리 속에 들어서면서 만들어내는 충격을 이른다. 현실의 사실적 단편들이 다큐멘터리의 매개를 통해 영화적 지각의 경험으로 나타날 때(혹은 현상할 때), 그것은 충격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한 것, 사실적인 것 등에 갇혀있지 않고 고유하고 특수한 것으로 경험된다.

물론 이러한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분석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작업의 사례는 단연코 왕빙의 <철서구>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일 것이다. 심지어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프레드릭 와이즈먼 식의 영화처럼 여길만한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疯愛>가 와이즈먼의 <티티컷 풍자극 Titicut Follies(1967)>과 거의 닮은 부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가 우리가 가진 현실의 이미지 가운데 누락된, 미처 고려하고 포함시키지 못한 현실의 한 부분을 집요하게 제시하고자 한다면 왕빙의 영화는 우리에게 연쇄적인 충격의 경험을 안겨준다. 그것은 부재한 것처럼 여겼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을 목격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목격이란, 흔한 관람 혹은 보기와는 다른 경험, 이례적인 경험, 충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자오량의 <고소> 역시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고소>는 십 수 년의 시간동안 북경남역 근처에서 집요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의를 바로잡기를 원하는 이들을 기록한다. 그러나 <고소>가 관객에 전하는 윤리적인 효력은 불의가 자행되었고 고통을 겪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얻게 되는 비판적 의식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의 속에 있는 이들을 목격함으로써 비롯되는 충격 그 자체이다. 목격으로서의 경험은 더 할 나위 없는 고통을 무릅쓰며 자신의 정의를 고집하는 이들을 목격하는 데서 비롯되는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런 놀라움에 이름을 붙여준다면 윤리적 충격일 것이다. 그러나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가 경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인가에 대해 물어보는 일은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십 수 년의 시간을 목격-충격의 경험의 연쇄로 구성할 때, 우리는 그것이 역사적 시간을 제거하거나 억압한 채 찰나 혹은 순간의 시간으로 구성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역사적 시간에 대한 경험을 대체하는 찰나의 경험, 사유로서의 경험 대신에 충격으로서의 경험을 특권화하는 사례라는 혐의를 씌워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고소>를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고소>를 보며 역사적 시간에 대한 인지적 지도그리기로서의 다큐멘터리를 대신해 충격-경험의 시학적 에세이에 가까운 목격-경험의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도래한 것은 아닐까를 묻는 와중에, 퍼뜩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다. 근년 한국에서의 독립 다큐멘터리의 사례들 역시 이와 멀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의 어떤 사례들에서 비롯된 의구를 공연히 <고소>에 씌우는 무모한 짓은 삼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고소>를 보며 느꼈던 윤리적 충격과 그에 대한 의심은 오늘 수시로 마주했던 한국의 다큐멘터리의 사례들에 대한 것일지 모른다. 파국, 재난, 참사, 공포, 불안으로 이어지는, 충격의 경험을 위해 심미적으로 재단된 세계와 그 세계를 가리키는 이름들,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한국의 많은 다큐멘터리야 말로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일지 모른다. 여기에서 물어야 할 것을 저기에서 묻고 따지지 않으려면 다시 그 다큐멘터리를 다시 꺼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_다큐멘터리비평웹진 Docking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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