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의 우울은 내게로 옮겨집니다. – 렌 항 任航에게

Metronomy – The Upsetter

당신이 세상을 떠난 그날, 당신이 살던 기이한 세계, 아마 당신을 알고 지내던 이들이라면 모두 당신을 처음 조우하고 또 그 후에도 당신을 알기 위해 항상 찾던 곳인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나 역시 당신의 부음을 들었답니다. 먼저 페이스북에서 전 당신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제 친구들의 잇단 피드를 보았지요. 일본에서 게이 포르노 배우기도 하고 퀴어 독립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이마이주미 씨(氏)는 당신의 사진집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당신의 영면을 기원했습니다. 지난 해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인 타셴(Taschen)에서 출판한 책이지요. 렌항, 당신의 이름 뒤에 R.I.P(Rest In Peace)이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낱말이 함께 짝을 이뤄,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제 시야에 출몰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다운 장례식과 당신다운 추모였겠지요. 저도 당신을 처음 해후한 것은 핀터레스트(Pinterest)인가 하는 인터넷의 소셜 미디어 채널 가운데 하나였지 싶어요. 당신의 이미지를 위한 아주 적절한 플랫폼이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부터 알게 된 텀블러(Tumblr)의 당신 페이지를 이따금 찾곤 합니다. 이제 그것은 영원히 업데이트되지 않겠지요.

저는 당신의 사진을 아주 사적인 아카이브에서 튀어나온 이미지처럼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진을 빗대어 낸 골딘(Nan Goldin)이나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 그리고 (왜 아니겠습니까!)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 같은 사진가들의 작업에 빗대면서 오늘날의 사진 미학의 카테고리 가운데 어느 하나에 당신의 사진을 분류하고 끼워 넣으려는 주장을 자주 접하곤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진을 중계하는 인터넷의 당신의 팬들은 전연 아랑곳 않는 사진 시장의 악당들의 뻔뻔한 주장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이 그들의 덕을 제법 보았을 것이고, 덕분에 이름난 유럽의 사진 갤러리에 불려 다니는 즐거움을 누렸을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그런 짓이 당신의 사진에 대한 온당한 대접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냅샷(snapshot)의 미학”이든 뭐라든 당신의 사진을 분류가능한 미적 상품으로 지정하고 분류함으로써 수집가들과 사진 잡지, 그리고 그 주변의 사진 비지니스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당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사진작가는 제 눈에는 지미 드 사나(Jimmy De Sana)나 초기의 로버트 매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어떤 사진 정도일 뿐입니다. 지미 드 사나의 <교외 Suburban> 사진집에 실린 아름답고 기괴한 사진들을 다시 보게 될 때면, 전 어김없이 당신의 어떤 사진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의 우울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때 퀴어 멜랑콜리아 같은 대단한 정신분석학적이면서 정치적인 개념이 창궐했던 때가 있었지요. 물론 아시아의 변방에 사는 우리에겐 그 개념을 헤아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개념을 생각할 필요가 있기는 한 건지 또는 그런 개념을 생각하는 주체가 되는 일이 우리에게 가능한지도 역시 잘 모를 일입니다. 당신이 태어날 즈음에 창궐했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라는 질병은 미국의 게이 남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아마 당신도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액트업(ACT UP)이나 그랜 퓨리(Gran Fury)같은 사진가, 그래픽디자이너, 작가, 활동가 들이 모여 만든 예술운동 단체들이 맹렬한 싸움을 벌였지요. 그리고 그것은 이제 역사의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에이즈혐오나 공포가 몰고 온 차별과 박해는 전 시대의 성적인 관용과 자유에 대한 반동이었겠지요. 그 때나 지금이나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공포는 여전하고 오늘도 그것은 기이한 몰골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질병이 게이 남성들에게 미친 효과 가운데 하나를 많은 이들이 멜랑콜리아라는 낱말로 잡아내고자 했습니다. 당신이 겪은 그 우울도 바로 1990년대의 열정적인 퀴어이론가들이 머릿속에 떠올린 그 우울과 같은 종류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죽음을 전하는 뉴스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당신이 시달렸던 우울, 고층빌딩에서 당신의 몸을 밀어낸 그 우울을 접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우울이라는, 성소수자들의 어딘가에 거멀못처럼 박혀있는 욕망의 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퀴어의 우울 혹은 우울한 퀴어는 물론 성소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들에게 더 특별한 문제로 떠오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섹스패닉!(Sex Panic!)”이란 그룹을 만들어 투쟁했던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라는 미국의 미술이론가 겸 운동가가 있습니다. 그는 에이즈를 둘러싼 위기가 진정되면서 등장한 성소수자 내부의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격렬히 저항했던 투사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울증이란 말을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게이들의 시각문화 안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슬픈 청년’이라는 도상적인 이미지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지요. 우울이란 정조가 게이 남성 곁을 항상 배회하는 기조적 정조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살피며 게이 시각문화의 역사를 이해하려 했던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의 글은 제겐 아주 좋은 귀감입니다. 당신이나 나에게나 적잖이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일이겠지만 서구의 게이 남성들이 성 세바스찬 이미지에 끊임없이 매혹된 것도 아마 ‘슬픈 청년(Sad young man)’의 화신이었기 때문이겠지요. Richard Dyer, Coming out as going in: The image of the homosexual as a sad young man, The Culture of Queers, London: Rougledge, 2001.
언젠가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이란 소설을 읽다 아마 미시마의 분신이었을 주인공이 성 세바스찬에 황홀하게 매료당하고 동성애적인 욕망에 눈뜨는 장면을 대하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유럽의 시각예술에 익숙했던 일본의 중간 계급 출신이라, 그가 성 세바스찬에게 끌렸던 것일까, 저는 궁금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결박당한 채 화살에 박힌 벌거벗은 몸을 눈부시게 비추는 성 세바스찬의 그림은 우울증이 게이 남성의 영원한 정조라는 듯한 인상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나 크림프는 이러한 슬픈 청년의 우울과는 다른 어떤 우울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훗날 동성애적 욕망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설명할 때 많은 이들이 참조하게 될 우울함입니다. 우울함이란 퀴어한 자들이 빠져들게 될 기분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게이 자체를 만들어내는 심적 역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멜랑콜리아라는 낱말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며 그 안에 여성이나 남성 게이로서의 삶이 만들지는 원리를 헤아리려는 주장들을 높이 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우울함을 성소수자의 사회심리적 상태로서 묘사하는 주장 따위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외려 우울함이란 자신의 성적 욕망과 쾌락을 다루면서 모든 이들이 겪게 되는 무의식적인 힘과의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소수자라는 사회집단의 심리적 정체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정체성과 상관없이 개인이 자신의 성의 영역에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자리 잡게 만드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짚어내지요. 그런 점에서 그것은 ‘사회화되기’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대하면서 ‘개인화되기’의 과정에서 겪는 행동방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울이란 우울한 어떤 심적 상태라기보다는 더 할 나위 없는 만족과 쾌감에 젖어들면서도 그를 따라다니는 부조리한 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에이즈에 감염될 위험이 있는 줄 알면서도 안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섹스를 하고 충동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것 같은 것을 가리키지요.

크림프가 멜랑콜리아란 말에 대립하여 쾌적함이나 기쁨 대신에 도덕주의(moralism)를 내세운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Douglas Crimp, Melancholia and Moralism, Loss: The Politics of Mourning, D. L. Eng and D. Kazanjian ed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크림프는 이른바 ‘나쁜’ 게이, HIV 양성 게이, 여전히 에이즈 위기 이전 시대의 문란하고 위험한 섹스 문화에 빠진 게이 등을 비난하며 버젓이 미국적 이성애주의의 가족, 이웃관계에 마찰 없이 동화될 수 있는 게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보수적 게이 선전가들에게 성난 분노를 쏟아냅니다. 이름난 매체와 손을 잡은 보수적인 게이 명사들의 눈에는 사우나나 클럽, 공중화장실에서 섹스를 나누거나, ‘잭디’나 ‘그라인더’같은 데이팅 앱을 이용해 일회적이면서도 위험한 섹스를 나누는 이들은 비정상적인 게이들로 비치겠지요. 렌항 당신의 사진에서 등장하는 거리와 숲, 아늑하며 어둡고 은밀한 침실과는 거리가 먼 당신의 뻔뻔하게 밝은 실내에서의 벌거벗은 젊은이들의 몸들 역시 그들에겐 불편하고 성가신 것이겠지요. 그들은 이성애자들에게 당당한 이웃으로서 살아가는 다른 정상 게이들의 도덕적 평판을 떨어뜨리고 게이 사회의 가치를 타락시키는 나쁜 게이들, 무엇보다 위험하고 모험적이며 열광적인 섹스를 즐기려 수상한 장소들을 기웃거리고 마약에 탐닉하며 섹스 파티를 즐기다 경찰에 단속을 받는 게이들을 역겹고 수치스러운 사람들로서 여깁니다. 당신도 중국에서 게이들의 커뮤니티 웹사이트 게시판에 쉴 새 없이 등장하는 그런 혐오와 개탄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들은 감정적인 헌신에 바탕을 둔 정상적인 친밀관계로서 결혼을 옹호하고 에이즈 위기 이후 게이사회가 갈 길이라고 열정적으로 주장을 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주류 게이 정치의 핵심적인 의제가 되었고, 국제 인권의 척도인 것처럼 게이 인권 담론이 세계화되면서 인권의 표준적 요구 사항 가운데 하나인양 간주되고 있습니다.

당신도 어쩌면 보았을지 모를 <브로크백마운틴>같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게이 멜로 영화보다 저는 여전히 초기 퀴어 영화들의 악당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연쇄살인마이기도 하고, 범죄자이기도 하며, 또 뱀파이어이기도 하지요. 그런 나쁜 게이들은 게이들의 자존감을 해치는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내면화한 자들은 아니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삶의 운명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극화합니다.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은 성소수자라는 슬로건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퀴어한 욕망을 품은 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수긍하고 부인하며 다루는 과정에서 겪게 마련일 다양한 싸움과 고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성의 대상이 누구이냐는 문제로 간단히 해결되고 나머지는 이성애적인 기준에 따라 헌신적인 사랑과 결혼이라는 부부관계 속에서 처리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글러스가 어느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적인 욕망이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운전수가 마음대로 핸들을 쥐고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에겐 그런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왜 성병을 비롯해 에이즈에 감염될 위험이 있는 안전하지 않은 섹스에 글들은 골몰할까. 왜 많은 에이즈 음성 게이들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이 이미 그것에 걸려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공상에 빠져들까. 왜 그들은 자학적일 수도 있을 섹스에 탐닉할까. 왜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인 위신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을 성행동에 탐닉할까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가 엄청난 환상이 실현되는 욕망의 쟁투의 무대로서 좌절, 위반, 공격, 죄책감 등을 동원하며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애쓰는 근본적 곤경이란 것을 모른 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자들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당신을 사랑하던 팬들이 앞 다투어 자신들을 찍도록 요구했던 충동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카메라 앞에서 발기한 성기를 발로 짓누르고, 젖가슴 위로 뱀을 늘어뜨리고, 질에 커다란 공작 깃털을 꽂고 있는 당신의 모델들은 오늘날 자긍심 퍼레이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근육질의 훤칠한 청년 게이의 모습 같은 것과는 전연 다른 모습이지요. 동성애자들에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자기-존중감 따위의 싸구려 심리학 용어들을 주워섬기는 데 분주한 이들은 당신이 겪을 우울에 대해서도 그저 병원에서 항우울제를 처방받으면 해결될 일이라고 조언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퀴어 멜랑콜리아를 납득하려면, 역시 성 세바스찬(St. Sebastian)에 관해 아주 해박했을 레오 버사니(Leo Bersani)의 도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90년대에 미국의 젊은 학자들의 손을 거쳐 때 마침 인터넷 같은 매체 덕택에 제법 손쉽게 접할 수 있었던 퀴어 이론이라는 학문적 실천이 있었지요. 그 흐름 속에서 버사니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그를 세상에 알린 글의 제목부터가 그렇지요. “항문은 무덤인가(Is rectum a grave?)”란 글이 그것입니다. 그는 에이즈 위기를 둘러싼 도덕적 패닉에 아랑곳하지 않고 게이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악명 높은 주장을 던졌지요. Leo Bersani, Is the Rectum a Grave?, Is the Rectum a Grave? and Other Essay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정신분석학이나 섹슈얼리티에 관한 학술적인 토론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던 이라면 그리 놀랄 만한 주장도 아니었을 그 글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그가 성욕의 대상이 동성인가 이성인가를 넘어선 문제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내세운 것은 바로 성적인 욕망을 관통하는 마조히즘을 역설했던 것에 있었습니다. 항문섹스에서 항문은 신체기관이기에 앞서 그것을 성적 쾌락과 애착의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어떤 무대를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전연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적 대상을 혐오하고 끔찍하게 여기는 것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환상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전혀 다른 성감대와 성적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특별한 대상에 애착을 보이는 이들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합니다.

그를 생각하면 당신의 사진들을 매우 독특하게 퀴어한 무엇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드러납니다. 당신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차를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당신의 사진 속에서 나란히 동등하게 나타납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육체가 당신의 카메라 앞에서 드러나고 조직되는 방식입니다. 엉덩이를 치켜 든 어느 사내아이의 고환을 이로 물고 길게 늘이는 모습이나 동물의 사체처럼 혹은 거적더미처럼 나뭇가지에 자신의 음부를 노출시키고 누운 여성의 모습이나 젖가슴을 붉게 칠한 손톱으로 원반처럼 나란히 잡아당기는 모습이나, 당신의 많은 사진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당신은 다시 뻔뻔스레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차이에 못을 박으며, 겉으로는 짐짓 차별과 폭력 따위를 내세우며 비판적인 채 하지만 결혼과 가족이 만들어내는 ‘섹슈얼리티의 경제’를 자연스런 것으로 만회하려 발버둥치는, 오늘날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뻔하고 얄팍한 주장들로부터 달아납니다. 프로노그래피적인 강렬함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당신의 사진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사진들을 소비하는 서구 관객들이 당신의 사진에 매료되는 일이나 당신의 사진을 중계하는 수많은 이들이 인터넷에 장사진을 치는 것 역시 당신의 사진에 깃듯 ‘뜻밖의 외설스러움’에 있다고 볼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당신의 사진은 대개 그림자가 자리할 여지가 없는 눈부시게 밝고 환한 평면의 세계입니다. 마치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것처럼 골고루 밝은 빛 속에 당신은 무고한 것인 양 카메라 앞의 대상을 제시합니다. 이는 당신의 카메라 앞에 선 성적으로 흥분하였거나 성적 충동 근처를 배회하는 육체에 더 할 나위없는 아이러니를 부과합니다. 당신 사진 속의 인물들은 각기 하나의 순간, 하나의 육체, 하나의 만남마다, 각기 발생하고 또 그것에만 온전히 속한 듯한 불안과 충동질, 슬픔을 지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만 당신의 우울함을 헤아리려는 물음을 좇다 그만 당신이 남기고 간 사진들에 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당신의 언어에 서툽니다. 그래서 시인이기도 한 당신이 남긴 시들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곧잘 인용되곤 하는, 당신의 죽음을 예고했다고들 말하는 어떤 싯구가 제게 왜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는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썼다고 하지요. “삶은 진정 소중한 선물이지. 그러나 때때로 난 그것은 잘못된 이에게 주어졌다고 느끼곤 한다.” 그런 것이지요. 자신이 잘못 주어진 운명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의 우울함, 처음부터 자신의 성적 욕망을 좇으면 좇을수록 따라다니는, 만족을 마련해주는 욕망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욕망이기도 한 것에 포박되어 있다는 자들의 삶, 그러한 자들의 삶의 지하도에 흘러다니는 슬픔과 뻔뻔한 기쁨, 그것이 우울함이고 우리는 그 우울을 통해 무언가를 다시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서 왜 많은 이들이 즐거움이란 뜻을 지닌 게이란 말에 정색하며 멜랑콜리아, 우울이란 말로 퀴어의 정체성을 다시 규명하고자 했는지 짐작해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정체성이란 단지 왼손잡이 같은 분류 개념일 뿐이라고 설득하며 성정체성에 따라 차별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을 들으면 당신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 듯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떠들어대는 것은 성정체성에서 성적 욕망을 둘러싼 분투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그토록 열심히 자신의 욕망과 분투하는 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당신은 성정체성이란 성적인 욕망을 다루면서 그 욕망에 대처하는 개인들의 반응 양식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 부인되거나 금지된 대상을 욕망하는 자들은 위반이나 좌절로서의 충동과 욕정에 더 감염된다는 것, 섹스에서 지복의 만족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둑하거나 밝거나 다감하거나 잔인한 이율배반적인 흐름들이 뒤엉켜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정동이 바로 우울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또 그 우울함에 깃든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당신은 명석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어떤 위험도 감수하게 만드는 터무니없는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는 것을, 당신은 직접 베이징에서 듣고 보고 알았겠지요. 그래서 당신의 사진은 더욱 신랄하고 당신의 우울함은 나에게로 옮겨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우울함에 전이되며 공동체를 이루어 왔으니, 그런 우울함을 인계받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일이지요. 이따금 당신의 눈부시게 밝은 우울한 욕망의 나체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숱한 이들로부터 들었을 속삭임을 저도 전합니다. 잘 가요.

_<Read My Lips> 전시 사후도록을 위해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