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경제 시대의 스펙터클 – 시각예술의 관객/소비자

Guy Debord – 분리 비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

아마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참조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잊지 않고 새기는 구절들이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테제 34)라거나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테제 1) 등. 그런데 이제 슬슬 그의 비범한 주장에 의심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이런 물음을 던져보면 어떨까.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제 값을 하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것을 지켜보아야 또 그것에 얼마나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미 포스트-스펙터클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 혹은 관심 경제란 새로운 경제학이나 마케팅 용어는, 오늘날 이미지가 처한 희한한 운명을 약삭빠르게 설명한다. 말 그대로 주목이 오늘날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펙터클이 스펙터클로서 구실하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목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얼마나 오랜 동안 보는 이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쉬이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융단폭격에 시달린다. 관람자가 다가서기도 전에 그것을 응시하고 헤아려보기도 전에 이미지는 시야를 급습한다. 혹은 꽁무니를 뺀다. 관람객은 미처 몇 초도 견디지 못한 채 다른 이미지로 이동한다. 과연 누가 스펙터클의 영예를 차지할 것인가. 이제 스펙터클은 자신들끼리 서로의 적이 되어 더 선동적인 스펙터클이 되겠다고 잔인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스펙터클의 적은 그를 응시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다른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제 더욱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목경제가 회자되는 시대라는 말이 옳다면 이는 동시대 미술이나 영화 관람의 습속에 어떤 효과를 미치고 있을까. 그를 짐작해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같은 ‘화이트큐브’이든 극장과 같은 ‘다크큐브’이든 사태는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관객의 시각적 지각이 산만함과 표류를 억압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스펙터클의 또 다른 이름일 충격(shock)으로서의 이미지를 오늘날의 이미지의 주종이 되게끔 만든다(19세기 후반에 출현한 유럽 대도시의 시청각적 파노라마를 분석하며 경험과 지각의 형태를 산만함과 충격의 변증법으로 분석했던 짐멜이나 벤야민의 주장은, 오늘날 더 없이 적중한다). 충격으로서의 이미지는, 더 이상 서사와 상관없이 그 자체 시선을 낚아채는 이미지의 연속을 제공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주류 영화들의 낡고도 새로운 관습을 통해 매 초마다 목격하는 것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미학적 공준을 찾자면 그것은 끊임없이 충격을 제공하라 일 것이다. 시청각적 충격을 온전히 혹은 갖은 증폭된 방식으로 지각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극장 형태는 유행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는 TV의 등장 이후 영화관이 자구책을 찾기 위해 도입했다던 다양한 기술적 곡예를 능가한다. 거의 모든 멀티플렉스는 아이맥스(IMAX) 상영장을 구비하고 있다. 그곳은 3D, 4D영화는 물론 전무후무한 스크린과 음향장치를 동원하여 시선을 포획하고, ‘나를 완전히 감싸는’ 시간, 공간적 몰입감을 제공하는 장치들을 자랑한다.

미술 평론가인 스벤 뤼트켄(Sven Lütticken)의 말마따나 오늘날 우리는 영화에서 더 이상 전과 같은 서스펜스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극단적인 심리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서사적인 흐름을 뒤엎거나 혹은 불길한 예감대로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충격과는 전연 다른 충격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스펜스와 짝을 이룬 서사적인 요소로서의 충격은 사라지고 또 서사적 충격과 시각적 충격을 함께 조직하는 이미지의 대가들(이를테면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감독)의 솜씨는 이제 특수효과와 음향디자이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망막의 예술’을 규탄하던 마르셀 뒤샹의 호기에 찬 조롱은, 오늘날 전연 다른 운명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안구의 운동’을 지배하는 자가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되리라는 선언은, 유치하고 뻔뻔하게 들리지만, 그렇다고 전연 허튼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충격의 연속과 주목을 약탈하기 위한 전쟁과도 같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범람 속에서 비판적 이미지니 변증법적 이미지니 하는 이미지를 떠들어대는 것은 호사의 극치일 것이다.

오늘 당장 유튜브(YouTube)에, 페이스북(facebook)에, 인스타그램(Instagram)과 핀터레스트(Pinterest)에 몇 건의 동영상과 이미지가 올라왔을지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그 곁에 미술전시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여가산업의 일부로 완벽히 통합된 듯 보이는 오늘날의 미술관 비즈니스 역시 그 전쟁과도 같은 상황에 개입하고 대처한다. 그에 응하는 방식은 당연히 주목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주목경제에 편승하려는 모색이 어떤 전략으로 나타나는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점차 명사(celeb)나 스타와 같은 모습으로 전환되었다거나, 미술관이 점차 방문할 만한 매력적인 장소로서 탈바꿈하고 이를 위해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건축가가 짓고 이름난 레스토랑이나 아트숍을 겸업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거나, 전시와 함께 공연이나 파티 등의 부대행사를 병행한다거나 하는 등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아울러 ‘평판(reputation)의 경제’ 혹은 ‘인기의 경제’를 통해 작동하는 미술시장의 논리 역시 이런 변화를 가속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큐브의 모더니즘적 관객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환영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종속되었다고 툴툴대며 비난하던 제도비평은 오늘날 보기 좋게 앙갚음 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이트큐브는 오늘날 다양한 관람의 경험을 제공하는 쇼핑몰이나 상점처럼 변모하였다. 비판적 지각을 도모하는 관객이란 말은 신기한 헛소리로 들릴 리 만치 오늘의 관객들은 산만한 기분에 이곳저곳 잠시 기웃대며 전시장을 누빈다. 그리곤 가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며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에 사진을 올리곤 한다. 이를 두고 여전히 관객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미술관을 찾는 이유가 데이트를 하거나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 관객들에게 그 어떤 전시도 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점점 더 미술관이 전통적인 의미의 전시보다는 이벤트에 가까운 전시 형태에 몰두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일지 모른다. 전시라기보다는 외려 공연에 더 가까운 전시형태가 유행하는 것은 퍼포먼스와 같은 작품 형태를 선호하도록 하는 유인이 되어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편 흥미로운 점은 이런 전시형태가 대안적이라거나 비판적이라고 자처하는 새로운 전시공간을 통해 더욱 세련된 형태로 복제되고 증폭된다는 점이다. 순식간에 큰 관심을 끌다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시야에서 멀어진 신생공간의 운명은 징후적인 것이다. 신생공간의 관람 경험 자체를 인터넷 게임의 참여와 같은 형태로 제시하며 신생공간을 지하 던전으로 재현하는 작가 강정석의 유사-인류학적인 서사는, 돌이켜 생각하면 자기 패러디에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 그에 더해 신생공간을 망라해 소개했던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 바벨> 전시는 마치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서 이름난 맛집을 소개하는 소규모의 페어처럼 신생공간을 키오스크처럼 진열하여 제시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전시형태가 오늘날 지배적인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관객과 관람행위를 지시하는 방식이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으며 이를 수긍하도록 하라는 은밀한 유혹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한 이들도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블록버스터 전시가 향하는 지각과 경험의 마케팅은 그에 대항하는 전시라고 해서 외면할 일이 없어진다. 진정성을 위조하며 판매하는 데 있어 작은 상점이나 카페, 숙박업자들이 더욱 능란하고 저돌적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런 변화는 딱히 각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분투하는 오늘날의 상품과 서비스의 세계는 미적 경험과 소비의 경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남겨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목경제는 또한 체험경제이기도 하다. 경험이나 체험이 상품생산사회가 초래하는 타성적인 동일성에 맞설 수 있는 무기들이 적재되어 있는 곳으로 보았던 현상학자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은, 오늘날 상품기획자나 광고업자의 주장과 분간하기 어려워 보인다. 경제가 문화화되고 문화가 경제화된 오늘날의 경제는 상품을 효용이 아닌 수집과 서사적 기억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하고 이벤트의 주역으로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비평적인 이론에 반영된다. 경험과 체험, 맥락, 주관적인 기억들이 높은 이론적 가격을 호가하고 그것은 오늘날의 비평적 어휘와 개념으로 윤색되어 판매된다. 사정이 이럴 진대 관람의 경험을 보다 색다르고 독특하게 조직하려는 욕망은 약이자 독이 된다. 그것은 오늘날 더욱더 물신화된 경험의 경제에 깊이 가담하는 것이기에 스스로에게 재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관람의 이벤트를 조직하는데 전전긍긍하고 흥행의 성패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짓은 시각예술의 비판적 정치를 불모로 만들뿐 아니라 시각 예술 자체를 시장의 제물로 만들어 버린다. 비판적인 이미지는 곧 지각과 경험의 체제를 부인하고 그것과 다른 경험을 생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경험의 형식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서는 것이고 이 역시 경험을 상대한다. 지배적인 미적 경험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경험의 매력을 선물로 주는 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이것이 딜레마이다.

_월간미술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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