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주의자인 척 한다는 것: 스펙타클의 사회 출간 50주년을 자축하며

GANG OF FOUR At Home He’s a Tourist

이룩할 공동체는 없다. 단지 파괴할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가하기로 하자. 우리는 상품과 화폐가 매개하고 군림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거룩한 자본주의라는 상품-화폐-자본 공동체(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이윤, 임금 지대의 성삼위일체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상품과 화폐는 지금껏 역사상 존재했던 초월성 가운데 그 무엇도 넘볼 수 없는 초월성을 자랑한다. 우리는 화폐라는 끈을 통해 서로와 마주한다. 우리는 각자의 돈이며 돈인 한 우리는 서로를 친절히 상대한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과 미움과 분노로 엮여있기 전에, 의식할 수 없는 화폐 + 자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내게 돈이 되기 때문이라면 모든 것은 자본에 의해 매개된다는 뜻이다. 그런 것을 부인한 채 온기 가득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개똥이다. 개똥 더미 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은, 입을 닥쳐야 한다. 그리고 상황주의자들의 글과 구호와 저주와 악담과 축복과 놀이를 조회해야 한다.

국제상황주의자 한국 지부의 유일한 당원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그렇게 나쁜 상상은 아니라는 생각에 내가 꾼 환상의 주인공이 되기로 작정했다. 나는 갑자기 한 번도 꿈 꾼 적이 없는 국제상황주의자의 맹원이라는 서툰 꿈의 포로가 되었다. 이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라고 다들 비웃길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들의 냉소주의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관념이 움직이고 지배하는 절대 세계이다. 돈이라는 관념이 현실을 좌우하는 한, 관념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관념론자들이다. 물질적 세계를 주무르는 것이 상품, 화폐, 이윤이라는 관념이라는 것을 꿰뚫어보는 이들, 물신주의적 세계를 겨냥하는 이야말로 진정으로 유물론자이다. 그런 유물론자 무리 가운데 하나가 상황주의자였다. 그에 견주면 오늘날의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차라리 옹졸하고 시시하다. 그들은 인식된 객체(object) 이상의 사물을 원하지만, 그들은 사물이 된 주체까지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낡은 유물론으로 치부된 것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상황주의자들이 탐험한 곳은 이미지, 여가, 극장, 문학, 도시, 여행, 식사, 섹스 등이었다. 꽤 멋진 일이다. 나는 기 드보르 Guy Debord를, 라울 바네겜 Raoul Vaneigem을, T. J. 클라크 Clark를, 안셀름 야프 Anselm Jappe를, 맥켄지 워크 Mckenzie Wark를, 피터 월렌 Peter Wollen을, 조르주 페렉 Georges Perec을, 울리포 그룹 OuLiPo Group을, 조너선 크래리 Jonathan Crary를 매우 열심히 읽지도 않았다. 그들을 마음 깊이 좋아했다고 고백할 수도 없다. 그들은 모두 상황주의자였거나 그들을 흠모했고 또 승계했다. 그리고 나는 걸핏하면 그들 곁을 기웃거렸다. 그들의 글을 읽었고, 간혹 어떤 글을 읽곤 왠지 기쁘고 슬프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약간 놀라기도 했다. 어차피 번쩍 새로운 세상이 들이닥칠 일은 없으니 적당히 자본주의와 타협하며 살자는 이들의 뻔뻔한 회의주의에 양보하지 않는 그들의 강인한 태도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다른 세계를 향한 꿈을 접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 이름붙이지 않고 그것을 성취할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장점이고 한계이다. 그들은 부정의 달인들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 기획 앞에서는 뒷걸음질을 친다.

나는 20세기 식민지 자본주의의 청년이었기에 반쯤은 선망하며 반쯤은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적중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으며 그들의 생각을 주워 모았다. 그 사이 컬러TV가 등장했고, 멀티플렉스 극장이 스멀스멀 독버섯처럼 세상을 뒤덮었으며, 해외여행객이 폭주했고, K-POP의 성가에 콧노래를 불렀고, 스타와 명사들은 몰래카메라 앞에서 24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상품으로 생산했다. 고양, 광명, 이천, 하남, 여주의 아울렛이 쇼핑 도시의 금자탑을 세우는 동안 지식인들은 근대 서울의 도시 풍경을 집적한 사진더미와 신문기사를 읽으며 키득거리곤 했다. 과거의 역사는 스펙타클이 되었고, 그 스펙타클을 소비하는 일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미학적 용어는 아카이브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태도가 되어버린 아카이브를 불신한다. 그리하여 나는 양심껏 유사(pseudo)-아카이브를 제출할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아카이브는 다시 역사의 아카이브가 되어야 한다.

눈길 닿는 곳, 발걸음 닿는 곳, 손길이 뻗는 곳, 모두가 물신(物神)인 세계. 그런 세계에 사는 한 상황주의자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이른 일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70년대에 이르는, 황홀한 자본주의 황금기에 그들은 살았다. 그들은 소비와 일상, 걷기와 영화관람 따위를 샅샅이 검토하고 경험을 사물처럼 객체화하고 포섭하는 즉 죄르지 루카치 György Lukács의 표현을 빌자면, 물화(物化)하는, 세계에 반항했다. 이제 지구의 모든 곳은 그러한 세계에 도달했고, 경험은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었다. 나이키-스펙타클, 애플-스펙타클, 도요다-스펙타클, Zara-스펙타클 따위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 북반구의 모든 여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광고와 함께 시작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의 영도(zero degree).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경험의 백치(白癡)이다. 따뜻한 것은 무엇인가.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슬픈 것은 무엇인가. 쓰라린 것은 무엇인가. 전에 없던 곳은 어디인가. 멈춰진 시간은 또 무엇인가.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경험은 이제 처방된다. 맛난 음식은 내가 먹고 느낀 맛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혀만 갖다 대면 진짜 맛나 죽을 거라고 까불어대는 음식이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게 될 충격은 당신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주겠다고 보증하는 여행사의 맞춤된 일정으로 대체되었다. 일순간 시간이 멎은 듯한 충격은 이제 너는 우리와 함께라면 시간을 잊게 될 것이라고 설레발치는 홍보회사의 카피에 맥을 추지 못하게 되었다. 드보르가 저주하던 미친 세계는, 오늘의 세계에 견주면 견줄게 못 된다. 그가 오늘의 세계에 살았다면 분석을 하기도 전에 피를 토하며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순결한 비위에 미달한 속물인지라 그럭저럭 견디며 살고 있다.

미지의 곳에서 진짜 경험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이 발견한 곳이 몇 년 안에 유력한 관광개발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할 것이다. 태국의 피피섬에 도착했던 히피와 보헤미안은 인터콘티넨탈호텔과 힐튼호텔의 개척자가 되었다. 만세!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은 유럽에서는 금세 무효가 되었다. 왜냐고? 그들이 그것을 시작하자마자 도시는 교외화되었고 공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구멍 나고 비어버린 도시에서 도시의 부정을 암시하는 장소를 찾고 기록하며 반-도시적 삶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은 가짜이다. 쇼이고 착각이며 망상이고 거짓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론에 투영하고 그 이론을 숭배하는 도시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건축가들의 교본이 되었다. 그들은 죽은 도시의 파편을 붙잡고 도시를 살릴 수 있다고 기원한다. 슬럼에서 도시의 창조적 에너지를 보는 이들의 눈에 박힌 대들보를 빼줄 안과는 어디에 있을까. 판자촌에서 새로운 삶의 리듬을 발견하는 이들의 건방진 심보를 고쳐줄 사제는 어디에 있을까. 스포츠카를 몰며 질주하는 들뜬 부잣집 아들에게서 과밀집상태의 도시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게릴라를 발견하는 얼빠진 문화학자에게 재갈을 물릴 야쿠자는 어디에 있을까.

<스펙타클의 사회>는 50년 전에 출간되었다. 1967년. 나는 그 해에 불운하게 태나어났. 나는 그 책과 나이테가 같다. 나의 삶의 나이테엔 그 책과 같은 시간의 무늬가 새겨져있다. 나는 그 책을 부인하고 조롱하지만, 그 책은 나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국제상황주의자의 가짜 당원인 듯한 착각에 시달린다. 식은땀이 난다.

_일민미술관 전시에 참여하며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