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 모순, 역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또 다른 가설

Stalin

그로이스라는 광인(狂人)

그로이스를 세상에 알린 것은 뭐니 해도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란 저작이었다. 그는 기절초풍할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구 소련의 혁명적 아방가르드에서 스탈린 체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둘러싼 세간의 일치된 의견을 거부하였다. 둘 사이에 단절, 타락, 억압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 상식을 부인한다는 것은 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것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조잡하고 진부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타락하고야 말았다는 생각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예술을 망치는지 여봐란 듯이 증명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서구 좌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타락 이전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아방가르드와 타락 이후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대비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사회주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준적 또는 지배적인 가설을 그로이스는 여봐란 듯이 고발하였다.


혁명적 아방가르드는 쿨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구리다고? 천만의 말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적인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상속자이며 그것의 자기 발전의 결과이자 완성일 뿐이다. “스탈린의 시학은 구성주의적 예술의 상속자”로서 “스탈린 시대는 예술은 삶의 단순한 서술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미적, 정치적 계획의 테두리 내에서 삶을 재형성하는 것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아방가르드의 주된 요청을 실행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스 그로이스,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최문규 옮김, 문예마당, 1997.
이 미치광이 같은 가설은, 오늘날에도 수긍하기 어렵고 또 께름칙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전무후무한 해석이었고 또 어딘지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저작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산주의 후기가 도착했다. 미술비평가로서의 그로이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잊고 있던 불길한 책 아방가르드와 현대성의 저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 책의 벼르던 후속작인 것처럼 그는 거기에서 도발적으로 제기했던 기상천외한 주장을 다시 동원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단순히 예술적 실천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붕괴 이전의 소련 공산주의가 몰락하게 된 연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밝히면서 또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종차를 식별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가설을 도입한다. 이 때 그가 참조하는 결정적인 준거는 화폐와 언어이다. 그리고 그는 철학과 언어가 지배했던 스탈린주의적 사회야말로, 누구도 수긍하는 데 주저할, 공산주의적 세계였다고 단언한다. 그 때가, 그 세계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그 역시 흔치 않는, 누추한 양보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로이스는 마치 보이지 않게 자리잡고 있던 금지의 선을 뛰어넘는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유태인수용소와 굴락(gulag)을 같은 것의 변종들로 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자유주의적 통념을 통해 바라볼 때, 이는 결코 지지할 수 없는 파멸적이고 광란적인 주장일 것이다.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을 동일시하는 것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스탈린주의에 기재된 유토피아적인 핵심을 구제하려는 바디우조차 스탈린주의의 실패와 착오에 관해 절대 관대하지는 않다. 그리고 아마 바디우의 그런 접근이 오늘날 구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공산주의적 접근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상상할 수도 없고 추론해서도 안 될 일을 감행한다면 어떨까. 그로이스는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떠맡는다. 그리고 그것은 더 없이 대담하고 나아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로이스라고 이러한 자신의 사변이 얼마나 추문일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그런 반응에 대해 할 말이 없지 않다. 특히 이 책의 3장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실현되기는커녕 오히려 배반당했다는” “서구 좌파의 압도적인 다수”의 견해를 상대하며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반한 하이데거? – 언어적 존재론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
그로이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조건 하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벙어리 상태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운명이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말을 거는 운명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역시 운명에 응답할 수 없다. 경제적 과정들은 무인칭이라는 말을 통해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들과는 논쟁에 돌입할 수 없다. 그것들을 설득시키는 일, 말로써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내 행동을 맞추는 것뿐이다. … 언어 그 자체의 힘은, 그렇게 소멸된다.”(본서, 8쪽: 뒤에서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숫자는 모두 본서의 쪽수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즉 자본주의로부터의 단절로서의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로이스에게“공산주의 혁명은 돈의 매개로부터 언어의 매개로 사회를 번역transcription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실천의 차원에서 언어로의 전회linguistic turn이다.”(7) 그렇지만 “오직 공산주의만이 총체적 비판을 위한 공간을 열어줄 수 있는, 인간 운명의 총체적 언어화를 수행할 수 있다”(10)는 그로이스의 선언은,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울려 퍼지는 불길한 어느 철학자의 음성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그 철학자는 이 책에서 공산주의의 비전을 철학화한 기원으로서의 플라톤(그로이스는 대담하게 “플라톤은 서양 철학 전통 최초로 언어를 총체적 권력과 사회 변형을 위한 매개(체)로 격상시킨 인물이다”라고 쓴다.(19))도, 또는 그가 마침내 비뚤어진 현실 정치가의 초상에서 구출해낸 언어철학자로서의 스탈린(역시 그로이스는 “결국 최종적으로 스탈린 식의 공산주의는 오직 언어만을 수단으로 작동되는 철인의 왕국이라는 플라톤의 꿈을 실현시킨 것으로 판명된다”고 말한다(86))도 아닐 것이다. 그는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나 탈구축의 철학에 귀기울여본 일이들은 그의 언어론에 관해서도 익숙할 것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저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의 지배는 사물을 사물로서 존재케 하는 작용으로서의 섬광을 말한다. 언어는 집약(Versammulung)으로서 빛나기 시작하여, 그것은 현존하고 있는 것을 그 현존 가운데로 가져온다. 이러한 언어의 지배, 즉 말함을 의미하는 가장 오래된 단어가 로고스이다.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을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es ist) 가운데 드러내 줌을 의미하는 가장 오래된 단어가 말 자체(die Sage)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고스라는 하나의 단어는 말함(Sagen)을 의미하는 단어임과 동시에 존재(Sein)를 의미하는 단어, 즉 현존하고 있는 것의 현존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말과 존재, 언어와 사물은 베일에 싸인 채 거의 고찰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끝까지는 사색될 수 없는 방식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있다.” M. 하이데거, “언어”, 예술작품의 근원, 오병남, 민형원 옮김, 예전사, 1996, 130-1쪽.(강조는 인용자)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언어 등, 하이데거는 그간 언어를 다루어온 철학적 사유의 공리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이는 스피트스트의 언어, 역설의 언어를 중재하는 자본의 언어, 즉 상품이 된 언어를 고발하는 그로이스의 생각과 아주 닮아 있다. 나아가 언어가 사물의 바깥에 머물지 않고 사상(事象)이 되어야 한다는 것, 존재를 드러내주는 것으로서의 말이 되어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구호는, 그로이스의 다음과 같은 재치 있는 서술과 공명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로이스가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은 영락없이 하이데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소비에트 시민의 경우 오늘, 그리고 내일을 버텨내기 위해서 매일같이 언어 전체의 온도를 감지할 수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소련 내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관계들이 어떻게 전개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감수성뿐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전 지구를 아우르는 감수성을 포함하는 것이다.”(91)
그러나 하이데거 혹은 이 글에서 역시 거칠게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역설의 논리 즉 변증법적 유물론의 참된 논리에 참여하지 못한 채 함량미달의 “역설의 언어”를 추구하였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바타유, 푸코, 라캉, 들뢰즈 혹은 데리다 등)은 그로이스로서는 환대할 수 없다. 그로이스는 하이데거적이지만 하이데거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논변을 전개한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과 그 이후의 형이상학 비판이나 이성의 비일관성을 드러내고 이성의 근거에 구성적으로 포함된 오점(폭력, 오염, 지방성 등)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의 타자와 조우”하고자 했던 “저주받은 철학자들”(물론 그들 가운데 다수는 공인된 혹은 은폐된 하이데거의 후계자들이다)이나, 그로이스에게는 역설의 철학자로서의 자질에 크게 미달한다.(40) 그로이스가 보건대, 시(詩)로부터 혹은 소수의 회화(繪畵)나 아니면 유유자적한 산책과 같은 몸짓으로부터 존재와 언어의 만남을 상상하고 이성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하이데거나 그보다는 보다 사회적 세계 속으로 들어와 이성의 타자를 발견하고 축복하려 했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이나, 모두 아류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처럼 “이성의 모호한 타자를 추구하는 담론”을 통해서는 “어떤 식으로도 자본주의와 대립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탓이다. 그들은 고작해야 다른 소피스트들의 언어, 역설과 모순의 논리를 모른 채, 형식논리적 정합성을 좇는 다른 언어들에 상처를 낼 뿐이다.

역설을 철학화하는 체제, 공산주의

그런데 이러한 언어적 사색이 공산주의와 어떤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로이스는 화폐에 의한 가짜 총체성을 대신한 언어를 통한 총체화하는 사회관계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를 제출한 바 있다. 다시 그의 말을 빌자면 “변증법적-유물론적 공산주의의 담론은 홀로 전체Whole를 자신의 대상으로 채택”한다. 그럼으로써 공산주의는 언어의 시장 속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처럼) 어설프게 타협하지 않는다. “소비에트 권력은 스스로를 공공연하게 변증법적이고 역설적인 이성의 법칙으로 정의했다. 즉 스스로를 마르크스가 묘사했던 자본과 상품의 역설적 성격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슬아슬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선하고자 했던 명민한 철학자들을 괴롭혔던 질문이면서 변증법의 ABC를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던지기 마련인 흔한 의혹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그렇다면 공산주의에는 모순이나 대립이 소멸되는가, 그것은 갈등이 종결된 역사 이후의 세계란 말인가, 그것은 오직 영원한 동일성의 반복만이 펼쳐지는 세계일뿐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위한 사변적 논증의 공정은 이미 그로이스에게 마련되어 있다. 그가 굳이 보다 익숙한 대립이나 적대, 모순같은 개념을 뒤로 하고 역설이라는 개념에 매달렸던 이유가 바로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하기 위해 정밀하게 고안된 사전 포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 대목에서 대단한 일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방가르드의 완성으로서의 스탈린주의를 역설했던 앞서의 저작의 후속작으로서 공산주의 후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스탈린이라는 결코 사면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악한 음모적 정치가를 진정한 공산주의 철학자로서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가 모순이나 적대가 아닌 ‘역설’이란 개념을 동원하고 그 개념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식별하는 차이로 삼았을 때, 이는 역설의 철학자로서의 스탈린의 언어철학을 위한 예비적 조처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그로이스의 이 책이 얼마나 철학적, 정치적 추문일 수 있을지 대충 밝혀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공산주의에 대한 사고의 불가능성을 진단하는데 썩 중요한 지침을 마련해 준다. 그것은 전체를 바꾸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지금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전하면서 무한한 점근선에 이르는 타협적인 대화를 통해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포스트 공산주의적 좌파의 합의를 제거하려 한다. 개종이나 전향이란 낱말에 가까울 메타노이아란 개념을 통해 유토피아적 기획과 투쟁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4장은 바로 그에 관해 말한다. “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 관점으로부터 보편적 관점으로, 즉 메타적인 위치로 이행하는 것을 묘사”(132)하는 것이라 소개하는 메타노이아는, 오늘날 거의 금기어에 가까운 보편적, 메타적이란 낱말을 동원한다. 차이, 정체성, 다양성, 혼종성, 윤리적 상대주의 등이 사유의 율법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그로이스는 유토피아란 그런 사유들을 거부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그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길들여졌던 사고가 미친 것일까.
그러나 그로이스의 무시무시한 사고실험을 지지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기꺼이 한 가지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늘날 만연한 사고금지Denkverbot를 위반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향한 노스탤지어 혹은 기대 어디에나 스며있는 스탈린주의 없는 공산주의를 조롱한다. 절대적 악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된 스탈린주의를 구원하려는 그의 악마적인 시도를 손쉽게 품평해서는 곤란하다.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고를 감행함으로써 그는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수고를 마다 않는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인 올 해 마침 그의 책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_보이스 그로이스의 <공산주의 후기>를 위한 해제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