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말들 그리고 억류된 말들

Gang of Four – At Home He’s A Tourist (Peel Session)

말이 마음을 드러내고 밝힌다고 우리는 믿는 편이다. 그러나 이제 말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다그치는 데 더욱 이바지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터무니없이 낡은 용어라고 정색하겠지만, 오늘날 언어는 세상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알바 천국’이라는 어느 회사의 이름은 어떨까. 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말의 등뼈가 부러졌는지 목격하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알바 지옥은 그럭저럭 말이 된다. 그러나 알바라는 불안정하고, 보상도 형편없으며,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에겐 더욱 끔찍한 하루살이 노동을, 천국이란 말과 천연덕스럽게 이어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못해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도 용감한 알바천국 광고는 알바의 권리를 주장하며 너스레를 떤다. 알바천국이라는 말은 노예나리란 말처럼 속수무책의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용인한다.

그 못잖게 어이없는 말들은 무수히 많다. 제빵노동자를 파티세라는 기이한 이름으로 호명하거나 미용사를 헤어스타일리스타라고 부르거나 패스트푸드 배달원을 라이더라고 지칭하는 말장난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노동을 사회적 활동이 아니라 개인이 지닌 끼와 잠재성을 실현하는 활동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그래서 고통은 갑절이 된다. 낮은 보수를 받는데 더하여 나는 재능과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모욕까지 덤으로 얻는다. 그것은 모두 말이 부리는 조화에서 비롯된다. 장사의 시인들이 문학의 시인들을 능가하고, 결국엔 문학의 시인들조차 단박에 귓가를 맴돌 말들을 찾는데 애쓰게 된 형국도 이 때문일지 모를 일이다. 말의 허튼 쓰임새를 거부하며 말이 자리해야 하는 곳을 따지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경험하는지 밝혀줄 말들을 찾던 시인은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시집은 가방 속에 쏙 들어가는 여느 소지품처럼 되었고, 주인의 세련된 취향을 보여주는 장신구의 일종이 된 듯 보인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인터뷰가 문학잡지보다 패션잡지에 더욱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지방의 사회운동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나이 지긋한 지역 운동의 1세대들로부터 듣는 푸념이 있다. 그것은 협치라는(거버넌스라고도 부르는) 말의 음흉함에 대한 반감이다. 협치는 신자유주의 정치의 노른자위이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관료제의 폐해를 줄이며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통치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것이 협치란 말이 내거는 가치이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알다시피 그것은 통치의 아웃소싱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행정기구와 공무원 대신 해마다 계약을 따내려 전전긍긍하며 행정기관이 할 일을 싼 값에 대행하도록 하는 술수이다. 그렇지만 지역운동을 계속할 활동가들이 생계비를 마련하고 사무실의 임대료를 내자면 협치를 마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참여란 말에 부착된 가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참여란 말에 가슴이 설렐 사람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말이 세상을 은폐하는 무기가 되어버렸다면, 이보다 더 큰일은 없을 것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맞서야 하는 이들이 가진 것은 말이다. 주장과 선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문과 유언비어, 속담과 은어를 통해서든 말을 지키려는 노력은 끈질겼다. 그러나 우리는 고작해야 오늘의 인기검색어 정도를 가지고 있다. 말의 사막에서 사는 것도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을까.

_한겨레신문 크리틱 칼럼을 위해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