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동아시아 역사의 정신분석_로이스 응의 <쇼와의 유령>에 관하여

오시마 나기사 – 감각의 제국

로이스 응은 한동안 동아시아 역사의 음란한 뒤꼍을 해부하는 일을 즐겨왔다. <쇼와의 유령>은 메이지(明治)시대보다 일본인들에게 더 사랑받는 쇼와(昭和)시대의 찬란함 뒤에 깃든 어둡고 음란한 배후를 살핀다. 이는 물론 양차대전과 전후의 부흥기 동안의 단기 20세기의 시대와 일치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냉전 체제의 형성과 소멸에 이르는 시대와 겹치기도 한다. 그런데 로이스 응은 이번 작업에서 동북아시아라는 어떤 역사적인 지정학적 권역의 기원을 향한 탐색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한동안 역사학자들이 쾌재를 부르며 달려들었던 일본 군국주의의 기원적인 인물인 기시 노부시케(岸信介)와 그의 동반자이자 후계자이며 어쩌면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박정희라는 인물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를 아시아 파시즘의 정신분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이스 응이 강변하듯이 박정희는 만주의 부활이자 만주의 (재)탄생일 남한 근대화의 주역이고 그는 기시 노부스케의 분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만주의 죽음은 전후 아시아가 탄생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기시 노부스케라는 한 명의 비범하고 괴물 같은 인물이 있었다고 능청스레 말하며 인격의 해부학에서 역사의 고고학으로 비약하는 것은 지지할만한 생각일까.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은 냉전 체제를 유지하고 또 그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미학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란 지리적 표상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역사적인 정치-미학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로이스 응이 겨냥하는 것도 이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적 모더니티의 독특한 형세를 로이스 응은 주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모더니티를 탐색하고자 기시 노부스케를 소환하는 것이 적절한 출발일 수 있을까. 로이스 응이 기시 노부스케에게 매료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A급 전범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적 산업 발전을 이끈 테크노크라트였으며, 군벌이 지배하던 만주국에서 미국식 리버럴리즘을 혐오하며 독특하게 조성된 산업화 모형을 실험했던 인물, 그러나 전후 자민당의 창립자 가운데 한 명으로서 성공적으로 부활한 불굴의 일본 보수주의자. 현 일본 수상이자 자민당의 당수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외할아버지로서 일본의 세습 보수 정치 가문의 기원적인 인물. 아마 기시에게 매료될 이유를 찾자면 수두룩할 것이다. 우리 주변엔 이미 이 괴이한 일본 보수주의자의 초상을 그리는 많은 자료들이 쌓여가고 있다. 한 명의 개인적 인물에게서 역사의 비밀을 검출하려는 욕구는 흔하고 또 일리있는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모종의 생물학적 환유(metonymy)나 개인의 심리적 욕동을 통해 사회 속의 갈등이 개인적인 것 내부의 갈등으로 치환됨을 역설하는 정신분석학적인 서사 모두 개인적 인물에 주의한다. 그것은 개인을 역사적 세계의 비밀이 상연되는 무대로 끌어올린다. 로이스 응의 작업 역시 기시와 그와 연루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미지의 인물들을 유령처럼 등장시킨다. 그들은 귀환한 유령이 되어 오싹하면서도 퇴폐적이고 구역질나면서도 황홀한 동아시아 모더니티의 기원적인 장면이라는 음화(陰畫)를 보여준다. 그리고 로이스 응은 음란한 3D애니메이션이 프로젝션되는 외설스러운 미장센과 그 위를 떠도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 음화의 관객이 되도록 우리를 불러들인다.

 

동아시아 모더니티에 깃든 욕망을 구현하는 인격적인 주체로서 기시를 지목하는 로이스 응의 손짓은 에로그로라는 일본의 근대 대중문화를 분석할 때 자주 등장하는 낱말과 결부되어 있다. 로이스 응에게 에로그로는 기시가 구현하는 동아시아 모더니티의 퇴폐와 부패, 잔혹성 등을 가리키는 암호와도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해 에로그로는 아시아 모더니티가 스스로를 미학화하는 형태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로이스 응의 작업이 직면하게 된 모호한 미적 정치의 입장에 대면하게 된다. 에로그로는 에로틱과 그로테스크란 서구의 낱말을 혼합한 일본식 조어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미 일종의 문화적 번역의 과정이 끼어들어 있다. 그 탓에 번역 대상인 에로틱과 그로테스트는 그 말을 번역하려 애쓰는 주체가 투사하고 외삽한 욕동에 휘감겨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우 쇼와 시대의 문화적 양상을 관찰하며 “에로티시즘과 넌센스와 스피드와 시사만화식의 유머와 재즈송과 여자의 다리”를 기록한다. 그것은 외래 문화와의 접촉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이식이지만 동시에 변환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에로그로는 근대적 삶의 세계 속으로 느닷없이 진입하면서 겪게 될 혼란과 단절에 대한 대응이며 반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에로그로는 일본과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 모더니티의 지층 가운데 어디에 위치하는가. 많은 문화사가들은 그것을 모더니티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 몸짓에서 찾는다. 반면 로이스 응은 그것을 모더니티를 기획하고 추진한 권력의 편에서 찾는다. 그런 연유로 로이스 응은 불안한 가설 위에 서있다. 아편과 매음, 성적 방종과 타락이라는 퇴폐를 규탄하는 것은 도덕주의적인 비판이 될 위험이 다분하다. 악인(惡人)이라는 인격적 모델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이 역사적 비판을 대체할 확률 역시 높아진다. 이를테면 지금은 가소롭단 듯이 벙긋 웃으며 조롱할지 모를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감각의 제국> 류의 에로그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국 유곽과 아편굴의 에로그로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전자의 부정적, 초월적 에로그로가 후자의 억압적, 착취적 에로그로와 대립한다면 파시즘의 미학을 에로그로에서 발견하려는 로이스 응의 비평은 의외로 순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제도적인 유한성도 초월할 수 있다는 욕망의 무한함을 믿는 광적인 섹스와 음란은 파시즘의 저 편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이해하려는 로이스 응의 정치경제학적 질문이 욕망의 경제라는 물음과 어색하게 외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어떤 특색을 지니고 있길래 한 인물의 전기적인 생애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재현될 수 있는지 추궁하여야 한다. 그런 노력을 소홀히 할 때 우리는 한 인물의 음란한 기행을 묘사하는 포르노그래피를 통해 그가 대표했던 체제를 읽을 수 있다는 막연한 유사성을 암시받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점은 한편으로는 작가의 야심을 돋보이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시적인 일상과 개인적 경험에 넋을 잃은 오늘날의 편향을 생각하면, 동아시아 역사, 그 가운데서도 경제적 현실의 역사를 살피려는 그의 의지를 절대 가볍게 여겨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