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몸으로 쓸 수 있을까?

Four Tet – New Energy (201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역사를 몸으로 쓰다> 전시에 관한 간단한 비평적인 메모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2017년의 전시 프로그램 <역사를 몸으로 쓰다>(2017. 9. 22 ~ 2018. 1. 21)는 지난 수십 년간 몸을 매개로 한 다양한 예술적 실천의 사례들을 한데 모은다. 그것이 한자리에 묶이기기 위해서는 일종의 조작적인 몸짓이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동일한 종류의 예술적 실천으로 환원되도록 이끄는 등가성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그래서 부르는 당시에 그것을 지칭하는 개념도 각이했을(신체예술, 행위예술, 전위예술, 반예술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동일한 것으로 호환(互換)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퍼포먼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퍼포먼스라는 동시대 미술의 독특한 개념이 그 이전의 역사적인 시대의 작품들까지 모두 퍼포먼스로 환원할 수 있는지 물어볼 법 하다.

그러나 미술사 쓰기란 것이 흔히 소급적인 환원을 통해 이뤄지기 마련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말하자면 과거의 비예술적인 실천이나 대상을 현재의 미술사적인 프리즘을 통해 예술로서 등록하고 전시, 해석, 비평을 행하곤 했음을 감안한다면, 그것을 퍼포먼스의 전사(前史)로서 규정하는 것 역시 퍼포먼스라는 담론/실천의 권한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백남준의 <머리를 위한 선>이나 오노 요코ONO Yoko의 <컷 피스Cut Piece>에서 시작해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의 <10명의 노동자 등에 뿌려진 폴리우레탄Polyurethane Sprayed on the Backs of 10 Workers>과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경호원들Guards>에 이르는 광범위한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환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에 더해 하나의 부가적인 개입이 전시엔 깃들어 있다. 이 전시는, “역사를 몸으로 쓰다”는 전시의 표제가 알려주듯, 이중적인 구조를 취한다. 먼저 그것은 역사적으로 상이한 시기에 생산된 다종다양한 작품들을 비교 가능한 동질적인 대상으로 환원하는 손질을 가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을 유사한 주제로 수렴할 수 있는 대상들로 또한 소집하는 대담한 재단을 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는 흥미로운 것이 된다.

이는 전시를 위해 선별된 광범위한 역사적 시기의 작품들이, 퍼포먼스라는 환영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동종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매체로서의 신체라는 점에서 퍼포먼스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를 추가한다. 요약하자면 신체를 매체로 삼은 예술적 실천을 퍼포먼스라고 간주하면서도 동시에 퍼포먼스의 역사를 관통하는 (유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주된 주제로서 역사를 꼽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의구를 품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미술이라는 미심쩍은 개념으로 시대구분(peridization)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구구한 입씨름이 벌어진다. 그것은 미적 실천과 역사적인 것, 시간(성)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지배적인 매체와 형식에 대한 토론이기도 하다. 후자만을 놓고 보자면 동시대미술이란 설치와 퍼포먼스라는 매체와 형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자리 잡은 예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퍼포먼스는 시간성의 소멸과 공간의 부상이라는 경향을 입증한다. 전시 노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퍼포먼스에서의 몸은 “만남의 장소”이자, “기억의 저장고”이며, “권력․자본․지식 등 현실의 생명 정치가 작동하는 사회적 장소”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시간에서 공간으로의 이행이라는 동시대미술로의 전환을 상징화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는 동시대 미술의 지배적인 매체이자 장르로 자리잡는다.

그런 전제를 따른다면 시간성의 소멸이란 역사적 의식과 비판의 표류나 침체를 가리키며 동시에 역사를 대신한 기억의 부상과 일치한다. 시간은 이제 현재라는 유일한 시간성을 통해 개인이나 정체성의 집단들(여성, 소수자, 유태인, 인종적 타자 등)이 기억하는 서사, 이야기, 문화적 표상으로 환원된다. 역사적인 과거는 기억의 단편과 잔해들이 축적된 아카이브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역사적인 매체로서의 퍼포먼스는 역사적 시간과 무관하거나 제법 거리가 먼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몸으로 쓴다는 것은, 전시기획자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이자 난센스에 가깝다. 그것은 역사 이후의 시대, 동구권의 붕괴와 유토피아적인 정치의 쇠락 이후의 예술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재연(re-enactment)를 둘러싼 논란에서 재연을 문제삼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재연과 그것을 더욱 밀고나간 형태인 퍼포먼스의 시각적 제시는 시간성의 경험을 전시될 수 있는 대상으로 공간화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퍼포먼스가 한국 동시대 미술의 제도 내부로 아주 뒤늦게 시대착오적으로 도착한 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연착이라는 점은 놀랍게도 퍼포먼스 작업들이 모두 영상과 자료, 기록 등의 전시란 형태로 제시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퍼포먼스가 시각적인 전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전연 이상하고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는 그래야 할 이유에 대한 어떤 상세한 소개 없이 그것을 연행이 아닌 전시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는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는 부지불식간에 재연과 제시라는 초기의 신체적인 매체를 이용한 예술적 실천들을 오늘의 미학적 규범 속에서 소화하고 정제하는 일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주의와 당혹스러운 전시 형태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쨌든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기억될 것이다. 이는 처음으로 퍼포먼스의 공식 미술제도로의 입성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거니와 몸을 매개로한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조준하고 인식할 수 있는 해석과 비평을 도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_무용비평지 <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