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물의 계곡을 넘을 수 있을까

 

위로공단 (Factory Complex, 2015) 

1.
임흥순의 <위로공단>은 한국 현대사의 눈물겨운 흔적, 그 가운데서도 여공애사(女工哀史)를 추적한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애틋하고 치열한 것은 아마 무엇보다 감독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역사적 곡절을 통해 쓰다듬고 위안하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여성 의류 노동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사랑은 또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공경심 가득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70년대의 구로공단과 같은 의류 산업 공단을 대신하는 베트남과 다른 아시아지역의 의류 노동자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그들에게 가해진 착취와 폭력을 응시하려는 의지가 되기도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빼어난 기억의 유사(類似)-다큐멘터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위기의 어떤 면모와 함께 하기도 하면서 또 그를 추월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인 계기를 확보하고자 애쓴다. 무엇보다 그것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2.
역사의 소멸과 기억의 범람이라는 오늘날의 ‘포스트-역사주의적’인 시간 경험의 지평에서 <위로공단>은 자신의 독특한 자리를 마련한다. 이는 의류 공장 여공의 삶을 통해 신산(辛酸)스러운 한국 현대사의 역사 속으로 입장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을 그에 참여하고 연루되었던 개인들의 파란만장한 개인적인 심적 외상과 기억의 서사와 중첩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역사를 잊은 기억의 서사에 참여하길 주저한다. 그리고 기억과 역사라는 대립적인 서사적인 장력 사이에서 뒤척인다. <위로공단>은 역사에 등을 돌린 기억으로 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역사의 편에서 기억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위로공단>의 전작인 <비념>과 제법 다른 몸짓을 취한다. 제주도의 4.3 항쟁을 학살의 트라우마(trauma)로 기억하고자 하는데 전념하는 <비념>은, 역사적 의식에서 기억의 서사로의 전환을 알리는 동시대의 지배적인 다큐멘터리적 경향과 함께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위로공단>은 그러한 기억으로 흡인되길 거부하는 역사를 보전하기 위해 애쓴다. 물론 나는 그것이 감독 자신의 신중한 고려 때문이라고 아부할 생각도 없고 그의 치밀한 반성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할 생각도 없다. 감독이 의류 노동자였던 어머니의 삶을 기억하고자 다른 여성 노동자의 삶을 방문하고자 했을 때, 그는 이미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이들의 시간이라는 시간성의 조직, 즉 역사적 시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낱말 앞에 공적인 기억, 집합적인 기억, 문화적인 기억 등 숱한 개념을 부가해 봤자, 기억은 개인적인 주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거기에서 말하는 기억의 사회성은 개인들의 기억의 공통성이거나 일반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기억될 수 없는 현실, 즉 기억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추상적인 구조적인 힘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러한 구조적인 힘을 드러내기 위해 기억을 불신하고 시간을 경험하고 의식하는 주관성 너머의 대상을 찾아내려는 것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식과 비평은 언제나 기억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러나 <위로공단>은 기꺼이 기억을 향해 손을 내민다.

3.
기억은 역사의 적(賊)일까. 기억을 맹렬하게 옹호하는 이들은 역사가 사실을 숭배함으로써 고통받은 자들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비롯된 지속되는 시련(그를 대표하는 용어가 심적 외상(心的 外傷)이며, 그것을 짐짓 과학적인 것으로 승인하는 용어가 외상 후 증후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일 것이다)을 망각한다고 비난한다. 반면 기억을 지지하면서도 역사라는 것이 기억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기억과 역사가 화해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과 역사가 화해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버린 위안부 문제나 2차대전 기간 동안 박해를 당한 유태인 문제를 보아도 그렇다. 위안부 혹은 전시 성노예라고 불리기도 하는 여성들이나 강제 노역을 겪고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태인들의 고통을 소홀히 여기거나 간과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윤리적인 과실일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나치즘을 그를 겪은 이들의 기억으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경향을 무시하고 근대 국민국가가 저지른 정복과 지배를 망각할 수 있는 탓이다. 나아가 고통을 겪었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파괴당하고만 이들을 향해 감정이입과 공감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충분한 것이 아니다. 분노와 눈물로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먈로 경솔하고 치졸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간단하게 피해자 혹은 희생자(victims)로 환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이 역사적인 힘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것을 판단하고 사고할 부담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

4.
<위로공단>이 기억의 유혹에 저항하며 여성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을 드러내는 데 이를 수 있던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를 가족사적인 삶 속에 가두길 거부한 감독의 의지에서 전적으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감독은 어머니를 한 명의 수난 받은 삶으로 기록하길 거부한다. 그리고 이를 어머니가 살았던 시대의 여성들의 삶으로 기꺼이 확대하려 한다. 그리고 그는 한진중공업의 투사이면서 민주노총 지도위원인 불굴의 여성 노동운동가 김진숙으로 이어지는 여성 노동자의 삶을 종단한다. 그러나 이에 더해 감독은 그것을 여기 너머의 세계로 확장된 구조적인 지배와 착취를 드러낸다. 베트남 여성 의류 노동자들과 그들의 저항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잔인한 폭력을 보며 그는 과거를 현재의 시간에 연결한다. 그것은 과거 이후의 현재가 아니라 여전히 반복되는 현재라는 점에서, 시간을 모르는 구조적인 폭력을 들춰낸다.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를 강하게 기록하는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동일성을 잊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인식은 구조를 상기시키며 기억으로 모두 담아내기 어려운 시간 없는 지배를 들춘다. 나의 기억 속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들의 고통이 등록될 자리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기억 너머의 현실을 인식하는 일은 소중하다. 그녀들의 삶은 우리가 어제 살았던 삶의 모습이고 역사로서 총체화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겪었던 고통과 비참에 같은 원인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이르는 일을 역사적인 비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5.
<위로공단>은 유별나게 눈물과 울음으로 가득하다. 삭제되거나 억제되는 것이 일반적일 울음의 장면은 상습적으로 반복된다. 비판적인 다큐멘터리의 관습적인 규칙 가운데 하나는 진실성이나 사실성을 해치는 주관적인 공감(empathy)의 장면을 제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원흉으로서 거리를 두어야 할 ‘우는 자의 낯’으로 가득한 <위로공단>의 모습에 적잖은 이들이 유감스레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불편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는 텔레비전에서 매일 마주하게 되는 <다큐 공감>이나 <인간 극장> 따위의 인기 높은 다큐멘터리, 한국에서 흔하게 ‘휴먼다큐“라고 부르는, 다큐멘터리 이후의 다큐멘터리의 철면피함에 진력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울음은 고통이 누구에게나 흔한 일이라고 떠벌이는 것은 고통이란 것이 얼마나 사회적인 것인지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값싼 감상주의에 휘둘려선 곤란하다는 식의 상투적인 주장을 편드는 일이어선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구조적인 폭력에 대하여 거의 장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실직, 파산, 빈곤, 이주, 이혼 등의 비참한 처지에 이른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외환위기는 나와 너의 기억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기억을 넘어선, 의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반성하고 의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역시 기억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기억을 얕잡아 보는 것은 불철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억을 다그쳐 역사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6.
<위로공단>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이례적인, 그러나 감독 임흥순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 퍼포먼스를 외삽(外揷)한다. 그가 자주 활용하는 낯을 가린 소녀들의 움직임은 다큐멘터리의 건조함을 중화시킬 서정적인 몽타주일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것은 관객의 느슨한 태도에 충고를 던지는 몸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감독은 관객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당신은 그것이 어제의 일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오늘에도 지속된다.” 그러므로 그가 작위적으로 삽입한 소녀들의 퍼포먼스 시퀀스는 일종의 연결사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이거나 ‘그러나’와 같은 서사적인 접근을 요청한다. 이는 기억의 서사에서 중요한 캐릭터를 이루는 유령의 역할이기도 하다. 유령은 완강한 동일성을 상징화하는 주체의 형상이다. 그런 점에서 유령은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여전히 반복되는 구조의 반복적인 지배를 암시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어떤 객관적인 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고통의 기억에 파묻힌 자폐적인 주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로공단>의 소녀 유령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을까. 임흥순은 구조적, 역사적 인식의 능력을 잃고 직접적인 경험의 충격, 목격, 고통의 순간성에 넋을 잃은 오늘의 모습을 좋는다. 그러면서 그에 저항하는 역사적인 짐을 역시 응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아니 그러한 긴장 혹은 모순을 기록한다. 이 점이 오늘날 한국의 다큐멘터리가 처한 곤경에 반응하면서 또 참여하는 <위로공단>의 솔직하면서도 치열한 질문일 것이다.

_<위로공단> booklet을 위해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