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사 이후의 유토피아적 기억 – <옥토버>의 분투(奮鬪)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유산이 죽은 개 취급을 당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유산 목록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추궁을 당하고 금지당한 관념은 보편사(universal history) 혹은 세계사일 것이다. 근대철학 자체와 같은 것으로 알려진 계몽적인 이성이나 데카르트적 주체를 구원하거나 그것의 죄를 경감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들은 제법 시끌벅적하게 시도된 편이다. 그러나 보편사란 개념만큼은 눈곱만큼도 구제받지 못한 채 새로운 이론적 기소자들을 충원하여 왔다. 얼마 전부터는 탈식민주의적인 저술가들이 그 대열에 합류해 헤겔적 보편사를 심문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하곤 했다. 모두 보편사란 개념을 향한 적의로 똘똘 뭉쳐있는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비록 많은 단서를 단 조건 하에서이지만 수전 벅-모스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을 확장한 신작 헤겔, 아이티, 보편사에서 보편사란 녹슨 개념을 숫돌에서 벼리는 도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직 파문당한 관념인 보편사란 관념이 조만간 귀환할 것인지 여부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옥토버>(2017. 12. 8.-2018. 1. 31. 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실)는 그런 점에서 불가능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옥토버>는 러시아혁명이라는 ‘보편사적인’ 사건을 되짚는 시늉을 한다. 러시아혁명이 구 소련의 어느 지역에서의 지방적인 역사나 특수한 문화적 전통의 효과에 따른 사태로서 바라보게 된다면 러시아혁명은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되기엔 어렵다. 그런 시야에서 볼 때 러시아혁명이란 지방적이며 특수한 맥락에서 벌어진 그들의 사태이다. 아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성행하는 다문화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보자면 러시아혁명은 온전히 러시아 특유의 문화정체성에서 비롯된 사태이다. 혹은 20세기를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에 의한 악의 세기로 보는 이들에게 그것은 전대미문의 강제수용소 굴락(Gulag)을 낳은 또 하나의 악의 기원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 주장이 무엇이든 오늘날 우리의 표준적인 역사적 좌표는 러시아혁명을 인류 전체에게 보편적 가치를 갖는 그리고 인류의 다양한 차이와 특색을 초월한 이성이나 가치의 움직임으로 헤아리는 것을 금지한다. 프랑스혁명을 인류 전체와 상관된 사태로 헤아렸던 칸트의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본 보편사> 같은 글에 등장했던 세계시민은 이제는 무한히 다양한 정체성의 군집들로, 보편사는 그 수많은 정체성-집단의 기억의 서사들로 대체되어 온 탓이다.

그러나 <옥토버>는 그런 세간의 상식에 대해 뻔뻔스레 딴전을 피운다.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우리 인민의 잠재성’이라는, 선뜻 믿기지 않는 도식적이고 심지어 지극히 ‘사회과학적인’ 전시의 분할과 배치는, 더욱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러시아혁명이라 명명되는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내재되어 있던 본성을 끄집어낸 사건이었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서술을 대할 때 우리는 흠칫 놀란다. 누가 이 대목에서 진보를 향한 인류의 보편적 소질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칸트의 형이상학적 역사철학 텍스트를 떠올리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옥토버>는 흥미로운 어쩌면 광적이라 해도 좋을 몸짓을 보여준다. 러시아혁명을 상기한다는 것은 지금은 사멸 직전에 놓인 세계사적, 보편사라는 시점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옥토버> 전시의 의외성은 그러한 시점을 채택하고 강요하는 몸짓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미술은 거칠게 말해 크게 두 개의 시간성을 축으로 구획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는 동시대(성)이라 칭하는 미심쩍은 이름 아래로 모을 수 있을 작업과 전시가 있다. 이들은 설치와 퍼포먼스를 지배적인 형식으로 채택하면서 공간화된 지금 여기에 몰두한다. 이를 미학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등장한 일련의 관념들, 즉 관계, 참여, 협업, 공동체, 대화, 소통, 장소 등은 공간에 의한 시간의 지배를 꾸준히 거들어 왔다. 또 하나는 시간에 몰입하되 기억된 과거로서의 시간을 유일한 시간으로 보전한 작업과 전시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증언, 목격, 공포, 트라우마(trauma), 애도, 공감, 아카이브 등의 미학적 관념을 다듬으며 몇 년 간 주요한 전시를 압도하여 왔다. 그러므로 공간화된 현재의 반복에 고착된 동시대미술과 희생자나 지배당한 자의 주관적인 기억으로 전도된 과거에 전념하는 기억의 미술을 제외하면 해방, 변혁, 전환, 단절 등의 시간성을 둘러싼 역사적 시간은 나날이 희박해져왔다. 그렇다면 <옥토버>가 얼마나 예외적인 선택을 한 것인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옥토버>의 전시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시 자체에 달려있지 않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시간 경험과 의식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2017년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서 개최된 러시아혁명 기념 전시들이 그것을 마치 문화유산처럼 대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모두의 역사적인 사태로서 의식하고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오늘의 시간 경험과 의식을 전환하는 충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 속에서 <옥토버>는 분투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전시가 그런 자장에 견인당할 것을 충분히 의식한 듯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현재성을 역설한다. 과거의 문화유산이 되어버린 러시아혁명처럼 그것은 현재성은 여전히 반복되는 지배라는 평범한 사회학적인 사실 이상을 가리키지 못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형식적인 전형을 오마주하는 몇몇 작품들이나 그것의 미적 실천의 역사를 두고 세심한 대화를 주고받는 편지글이나 아카이브적인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결국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모방하는 작품들은 이 전시가 시간적 경험과 의식을 둘러싼 싸움에서 얼마나 휘청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어떤 결함과 맹점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를 깎아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억에 맞서 역사를, 수다한 정체성에 맞서 보편사를 내세우는 개입을 감히 시도하기 때문이다.

_<월간미술>에 기고했던, 깜빡 잊고 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