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1.

BEACH HOUSE – LEMON GLOW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폭력으로 경험되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대신해 인격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폭력의 전부로 환원하는 발상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적대적인 구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모든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되고 비난받는 것은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필요하며 또 불가피할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을 차별화할 필요 때문이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등등.

로베스피에르가 주동한 자코뱅의 폭력(자유주의자들이 프랑스혁명을 부정하고자 동원하는 최고의 알리바이인 악으로서의 폭력), 사회주의 혁명에서의 적색 테러(레닌의 악명 높은 처형의 옹호, 문화혁명의 적색 테러에 대한 끈질긴 비난), 민족해방운동의 폭력성을 둘러싼 논쟁(프란츠 파농과 장 폴 사르트르의 섬뜩한 주장에 대한 혼란스러운 반응들), 68운동이 좌절된 이후 유럽의 학생운동과 급진운동을 휩쓴 테러주의적 전환에 대한 증오와 성급한 비난(독일의 바더마인호프그룹이나 일본의 적군파에 대한 일사불란한 비난), 테러리즘으로 환원된 저항의 가능성이 제기된 현실에서의 폭력의 분출(알카에다? 두테르테? 심지어 나아가 트럼프 지지자들의 폭력적인 열정의 분출, 더 말해 무엇하랴) 등은 모두 반-폭력이란 점에서 수렴한다. 난데없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정치철학의 테마로서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 에티엔느 발리바르의 제법 오랜 시간 동안의 사색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 그는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자본주의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이들엑 가장 중대한 질문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려 할까. 왜 지금 대치시키고 토론해야 할 인물은 레닌과 간디일까?

해방적인 열정으로서의 폭력과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반동적인 폭력을 엄격히 나눌 수는 없을까. 예수의 폭력성과 나치즘의 폭력성을 분할할 기준은 없을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해방을 위한 과정에서의 피할 수 없는 폭력의 실행으로 간주하는 어떤 뜬금없는 주장은 무지의 소산이지만, 그럼에도 폭력을 이행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쟁점으로 사고하려는 시도로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뮈와 사르트르, 퐁티, 아롱 사이에 벌어진 끈질긴 논쟁을 폭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쟁점으로 모아볼 수 있다고 하는 세간의 해석에 대하여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폭력을 무시한 채 어떤 변화 혹은 변혁의 기획을 거론할 수 없음을 제기했다는 것에는 수긍할 수 있다.

폭력을 모든 정치적 행위의 기저에 놓인 본질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정치철학적인 존재론에 절대 동의하지 않더라도 폭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사고할 방법은 없을까. 모든 정치적 갈등과 분쟁, 대립을 폭력이냐 평화냐란 쟁점으로 호도하는 자유주의적 사고에 대적할 효과적인 방편은 없을까. 해방적인 폭력을 지자하되 폭력을 옹호한다는 누명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할 가능성은 없을까. 하루 종일 그 문제로 뒤척인다.

그러나 나는 해방적, 변혁적 폭력을 끈질기게 지지해 왔던 나로서도 끔찍한 폭력 앞에선 “그만!”이라고 외치고자 하는 충동을 피할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지난겨울,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800만 명, 보다 넓게 잡자면 2천만 명의 공산주의자, 그의 인척, 그에 호의적인 이들을 살해한 인도네시아의 수하트로 정권이 저지른 폭력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한 동안 악몽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 어떤 대의를 위해서라도 폭력은 견딜 수 없는 것이라는 본능적인 자각이 나를 동요시키고 두렵게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죽음을 그리고 그 죽음을 초래한 폭력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형제가, 아들과 딸이 혹은 거꾸로 아버지와 삼촌이 가족을 살해하고, 그로부터 몇 년뒤 모두 그런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모두 자살을 택하는 그 끔찍한 풍경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른 채, 울먹이거나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미투운동에서 폭력성은 결정적인 쟁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미투운동에서 쟁점은 성폭력이란 점을 간과하고 그것을 폭력으로 호도한 채 성적 지배를 막연하게 나쁜 짓으로서의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그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은 그가 성폭력을 저지른 점을 무시하고 용서하는 나쁜 짓이라는 게 나는 한결같이 생각한다. 아무튼 가해자, 그를 은밀하게 혹은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온당하고 또 지지할 수 있다. 아니 폭력성 자체가 쟁점도 아닐 것이다. 미투운동에서의 폭력성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이들이, 그들에게 연대하고 공감해야 하는 이들이 보이는 어떤 단호한 태도와 의지에서 비롯된 허풍스러운 몸짓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상식에 양보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는 폭력이라는 절망적인 주장에 기울어진 채 그 폭력의 해방적인 윤리를 보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고를 감행하기 위해 나는 너무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변덕스레 폭력의 편에 섰다 폭력의 광기 앞에서 불에 댄 듯 뒷걸음질을 치며 폭력 일반을 부정하려는 충동 사이에서 동요한다. 이 동요를 제압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