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레트로 미니멀리즘의 쓸쓸한 재미

BEACH HOUSE – DARK SPRING

– 아트선재센터의 <포인트카운터포인트> 전시에 대한 간단한 메모

&lt;포인트카운터포인트>는 저 먼 나라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을 흉내내는데 열심인 동시대 포스트-조각에 익숙한 이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재미난 전시였을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조각 이후의 조각을 실행했던 미니멀리즘 혹은 그것의 원리에 동승한다. 미니멀리즘은 거의 모든 것이 조각과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칼 앙드레이든 로버트 모리스이든 리처드 세라이든 그들은 모두 조각 이후의 조각을 위해 애썼다. 미술사의 표준적인 서사는 형태나 오브제로서의 조각으로부터 순수한 공간적 지각의 경험이 미니멀리즘의 모두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표준적인 서술이 허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엔 더욱 새삼스럽다.

<포인트카운터포인트>는 그런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주술에 너무나 충실하다. 가는 선과 와이어, 추로 축조된 미세한 공간은 공간 안에서 보일 듯 말듯한 공간적 생성을 지각하도록 이끈다. 사분원 형태의 미술관의 공간적 체적을 재구성하겠다며 로버트 모리스의 L-Beams을 연상시키는 듯한 합판으로 제작된 사분원 형태의 설치 역시 미니멀리즘의 교과서적인 원칙에 충실하다. 미술관의 천장에 설치되어있던 창을 내부로 끌어내려 수평적으로 설치하며 공간을 자기반영적인 이중 공간으로 구축하는 설치 또한 공간적 지각의 증식에 나름 기여한다. 강건너 롯데미술관에서 몸부림치는 댄 플래빈의 미니멀리즘적인 형광등 설치 작업을 복제하는 듯이 미술관의 바닥에 설치된 형광등의 행렬과 그 반대편의 천정에 평행적으로 설치된 형광등의 행렬을 통해 공간을 이중화하는 솜씨가 선보인다. 그것은 바닥과 천정, 아래와 위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공간적 지각의 경험으로 만든다. 아마 전시에 참여한 작업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것은 낡고 버려진 에어컨과 냉장고의 금속 표면을 절단해 전시한 최고은의 작업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미니멀리즘의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솔직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은 형태를 삭제하거나 재료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최고은의 작업은 그것이 냉장고나 에어컨에서 비롯된 객체라는 것임을 고지한다. 그것은 공간적 지각의 경험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특수한 객체로서의 완고함이 있음을 중얼거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절단된 표면과 가장자리, 직사각의 객체들의 불연속 등을 제시하면서 미니멀해질 수 없는 잔여에 대하여 말하는 듯 보인다.

 

아무튼 나는 이 전시가 불편하고 어색하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미니멀리즘의 출현은 둔중하고 집요한 공간적 타성을 전제한다. 새로운 공간적 지각의 경험이 충격이 되려면 따분할 만큼 따분한, 지루할 만큼 지루한 공간적 지각의 자동성(inert)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공간적 배치나 배율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시하는 좌대 위의 조각, 시선을 사로잡는 조각의 초월적 형상을 위해 없는 것처럼 간주되곤 하던 그 사이의 빽빽한 밀도의 비어있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현존하는 공간, 관람자의 시선 만 고려한 채 관람자의 신체적인 위치, 몸짓, 움직임은 고려하지 않는 시각적 대상으로 환원된 조각 등은 미니멀리즘이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것은 1960-70년대 북미와 서유럽의 미술관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때엔 그렇게 미니멀리즘은 유효했을 것이다.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거듭해 역설하듯이 모든 미니멀리스트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읽거나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경험의 현상학은 오늘날 대중문화의 가장 큰 상품이다. 영화를 보며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기보다는 이미지를 경험한다는 감각을 생산하기 위해 아이맥스와 3D/4D 영화는 날뛴다. 증강현실을 경험하는 VR카메라는 미술관 곳곳에서 출현하고 놀이공원이나 테마파크에도 역시 즐비하다. 그렇기에 <옥토버> 저널의 대표 평론가들이 현대 미술사 안에서 가장 성공을 거두면서 동시에 가장 몰락한 흐름으로서 미니멀리즘을 꼽는 것도 의외일 수 없다. 로절린드는 <후기 자본주의와 미술관의 문화적 논리>인가 하는 글에서 미니멀리즘이 어떻게 미술관 자체를 경험하는 일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미술로 연장되며 성공을 거두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미니멀리즘이 거부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물론 시각적 모더니즘이 첫 번째 대상일 것이다)을 악몽처럼 공고하게 했는지 말한 바 있다. 할 포스터는 시체 해부학자처럼 미국의 미니멀리즘에 대하여 신랄하게 떠들어댄 적이 있다.

 

그렇기에 미니멀리즘적인 동시대 조각의 제스처는 안타깝다. 공간적 지각의 경험은 오늘날 건축과 인테리어의 모토이다. 미니멀리즘의 건축적 실현으로 애호되었던 안도 다다오는 오늘날 상업적 건축의 모듈이 되었다. 2018년 연초 일본에서 개최된 안도 다다오의 회고전은 보는 이를 부끄럽게 할만큼 외설스러웠다. 공간적 지각의 경험의 특정한 장소에서 유래하는 본래성 혹은 진정성을 가볍게 조롱하며, 미술관 뒤뜰엔 <빛의 교회>의 복제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 유명한 태양의 위치 변동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의 길이와 두께, 그리고 뚫린 십자가 형상의 틈새로 스며드는 뜨겁거나 차가운 공기는 이제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기는 공간적 경험은 오늘날 공간을 무한 복제하는 능력을 자랑하는 쇼핑몰의 현기증 나는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이다. 순수한 공간적 지각의 경험은 오늘날 자본주의적 공간 생산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것을 반성하지 않은 채 계속하여 미니멀리즘의 수호자이자 계승자로서 자처하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