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5.

어느 매체로부터 더 이상 글을 싣고 싶지 않다는 통화를 나누었다. 다음에 쓸 글의 주제를 뭐로 하면 좋을지 의논하려 말을 꺼냈다 말문이 막혔다. 망원사회과학연구실 멤버시죠? 누군가 외압을 넣었을 것이라는 참담한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이미 다른 이는 문제를 제기해 자신이 활동하던 곳에서 물러난 바 있다. 유령계정을 만들어 익명으로 험구와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 넣고 공유하기를 하는 짓도 우습다. 솔직히 모든 짓이 웃긴다.

마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사과를 하면 할수록 마치 복리로 불어나는 이자처럼 갚아야 할 죄의 빚이 늘어났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겪게 했던 것에 대한 사과와 반성인데 듣는 이는 잘못을 아직도 모르느냐고 차마 눈을 믿기 어려운 비난을 퍼부었다. 기만? 거짓? 꼬리자르기? 규탄? 다 무슨 말일까. 이 말은 무슨 암호일까. 여러 차례 글을 읽고 다른 이와 의논을 해도 모든 말들이 수수께끼 같았다.

사태는 간단하다. 미지의 X의 피해를 겪은 익명의 피해자가 있고 역시 미지의 X의 위해를 가한 가해자가 있다. 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구체적 신원을 아는 이는 가해자일 뿐이다. 물론 나는 그와 친밀하다. 나는 그의 논문을 지도했고 그의 요청으로 여러 차례 강의를 했다. 게다가 나는 사안에 대해 더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겨우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고 마침내 가해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그렇게 책임을 지게 된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미지의 X라는 죄에 대해 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피해자는 피해사실이 주변에 알려져 고통을 겪는다고 들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자청했다. 나는 무언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피해자의 상처를 깊게 하고 있다고 믿었다. 상당히 화가 나있었다. 가해자에게 선처나 면죄를 요청하러 간 자리는 아니었다. 거꾸로 가해자가 자신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반성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냥 그에게 곁에서 떠나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할게 아니라 그를 불러 피해 사실을 확인케 하고 반성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내가 아는 한 성폭력 사태의 해결에서의 원칙이었다. 내가 가해자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윽박지르며 묻고 너는 더러우므로 우리와 같이 공부할 수 없다고 말해야 했을까. 나는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가 누추한 고백을 했을 때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제 박사학위를 받고 세상에 나온 풋내기 연구자이다. 그는 씨가 마른 진보적 학계에서 이제 갓 입문한 이다. 당연히 나는 그를 아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폭력의 가해자임을 알고도 그를 계속 아껴주는 일이, 내 삶에는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 가해자를 추방하지 않았냐고? 미지의 X라는 잘못을 두고 그를 벌할 수 없기는 때문이다. 망사연이라는 단체는 이 사안과 관련이 없다는 말도 어디선가 전해 들었다. 게다가 그는 피해자 측에서 요구한 절차를 따르고 있다고 했고 상담교육을 이수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그 과정을 종료하면 반성문을 작성할 테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제 마침내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반성문이 수용되었는지 어쨌는지 알지 못한다.

피해자 대책위가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매뉴얼을 따르지 않고 가해자를 기피하려고만 했다는 것, 소위 ‘원 사건에 대한 고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한 참 시간이 흐른 뒤에 추가 성폭력 사건(성추행과 성폭행 사건이 사안의 경중이 다르다고 말해 봤자 입만 아플 것이다.)이 터지자 비로소 ‘조직’ 차원의 성폭력 비호 문화를 거론한다는 것, 모두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급히 발표해 꼬리자르기용 조직 살리기 계책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쓴 사과문은 다수의 허위 제보 탓이었다. 나는 비대위 측과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곧 며칠 뒤 허위 제보였음을 알게 될 이야기에 까무러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망사연에서 활동하던 지난 가을 모 대학에서 성폭행 사건으로 해촉을 당했다는 것, 그가 상담교육에서 모든 가해사실을 거부했다는 것, 추가 성폭행 사건이 즐비하다는 것 등을 들었다. 거의 졸도할 만치의 이야기였다. 앞의 두 가지는 며칠 뒤 거짓이라고 알려졌고 나머지는 역시 아직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나는 지금껏 원칙대로 대처했다고 믿은 것은 고작해야 우쭐한 자기만족적인 정의감일 뿐이며 피해자와 그를 도운 이들은 지옥 같은 고통과 실망 속에 있었겠구나, 믿었다. 그래서 무조건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빌었다. 그들을 좌절감과 절망에 빠트린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확인된 사실을 두고 반성과 사과를 철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연구실의 입장을 알렸다. 기획활동단에게 알린 글은 아니었다. 이미 억측과 상상에 의거해 갖은 험담과 모욕, 공격을 행하는 이들로 인해 연구실 사람들은 녹초가 되어 있었고, 어떤 해코지가 있을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정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자 했는지 알리고 이 악몽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두 번째 발표한 글의 내용의 전부이다. 우리가 이해한 바로는 그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한 사과를 그들이 듣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사과하겠다고 했다. 너무나 납득할 수 없는 요구라 답답하고 속 터지는 심정에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이나 여성단체에게 물었다. 그냥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밝히면 될 일이지 조사 같은 것을 할 사안은 절대 아니라고 그들은 답해주었다. 그러나 피해자와 그의 친구들의 마음의 상처에 대한 사과는 잊지 않아야 할 것도 조언했다. 우리는 그것이 또 무슨 잘못이 있어 사과한 것처럼 비쳐질 듯싶어 꺼려졌지만 그러기로 했다. 그들이 고통을 겪었고 아프다고 계속 말하고 있으니 비록 우리가 그것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도리일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들은 망사연이라는 조직을 문제 삼는다. 가해자가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방임하는 조직문화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론하기가 무색한 사정임을 이미 입장에서 알렸다. 과연 무엇이 어쨌기에 가해자를 두둔하고 비호한 체계적 위계적 사악한 성폭력 조장적인 조직 문화가 있다고 탓하는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사태가 해결되길 기다리다 해를 넘기고서야 문을 연다고 널리 알려놓고선 공식적으로 활동을 미룰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연구실을 시작했다. 몇 사람이 모여 한 일이라곤 각자 자기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한 달에 한 번 서평을 쓰고 토론하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나의 이론적인 관심이 큰 주제를 두고 사람들과 세미나를 했다. 단체 대 단체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무슨 공식적 단체라고 지칭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체라고 불러 우리는 단체가 되었고 순식간에 기관이며 학술권력이고 학술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모두 한 번도 동일시해 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다. 그런 동일시를 강요하며 거짓을 자백하라는 속수무책의 막무가내를 더 이상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느 날 도착한 메일에는 회의록과 조사보고서등 모든 문서를 들고 조사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몇 명이 모인 공부방에서 회의록을 쓸 리 만무하고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도무지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끝없이 비난을 퍼부으며 요구만 하고 어제의 선생이었던 이들을 이름으로 호명하며 호통치는 이들에게 경악했다. 또 어떤 공격이 있을지 두려워 무조건 그들의 요구에 따르고 뭐든지 잘못했다고 얘기하면 안 되겠냔 생각을 듣고 나는 연구실을 나가겠다고 했다. 최소한의 인격적인 위엄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연구실을 해체하자고 제안했다. 도피나 무책임, 자해소동 등 온갖 억측과 소문, 괴담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자고 했다. 무엇보다 이 마귀 들린 것과도 같아 보이는 사악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질식할 듯함에서 빠져나올 듯싶었다.

아마 언젠가 이야기를 할 날이 오겠지 기대를 품으며 계속 함구하겠다는 의지를 버리기로 했다. 당신은 더러운 자이므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심판이다. 가해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누명은 쓰겠지만 더러운 자이므로 글을 쓰지 말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나는 결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