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8.

Sufjan Stevens – Visions of Gideon

계속된 몸살로 옴짝달싹 못한 채 누워있다, 바람이라도 쐴 겸 영화를 보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멜로라면 가장 거리가 멀 듯 뵈는 제자가 강추한 멜로란 것도 이 영화를 볼 의지를 북돋웠다. 오프닝 크레딧에 각본 제임스 아이보리를 확인했을 때, 나는 얼추 무엇을 볼지 예상할 듯한 확신이 들었다.(확인해보니 그는 이 영화의 각본으로 오스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보리 형제의 <모리스 Maurice>를 이미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에서 그것의 흔적을 뻑뻑하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의 윤리에 천착하는 근년의 멜로 영화 가운데 제법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장점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1980년대 초엽의 이탈리아 북부의 별장을 배경으로 한 소년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복한 사랑을 불안스레 인정하고, 아울러 그 사랑이 응답될 수 있는 것인지를 애타게 묻는다. 6주가 조금 넘는, 그러니까 한 달 반여의 짧은 시기,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은 청년은 이제 떠나고 소년은 남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유태인들의 명절인 하누카의 밤, 소년은 약혼을 하게 되었다는 청년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그것이 아무리 자주 보던 엔딩 장면일지라도, 역시 잊지 못할 장면과 마주한다. 슬픈 낯. 이제 혼자로 남게 된 이의 고통스러움을 전면적으로 상연하는 이 기나긴 클로즈업은 아마 당분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얼마든지 조작하고 관리될 수 있으며 쾌적한 행복(?)을 위한 삶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이 영화는 사랑의 근본적인 폭력성과 타인이란 얼마나 모호한 주체인가를 알리는 데 진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와 자신을 괴롭히고 파괴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자신과 다른 자신 사이의 틈을 만들고 벌리며 나의 동일성을 뒤흔든다. 복숭아를 후벼 파고 그것으로 수음을 하고 잠든 엘리오가 그것을 알고 장난치는 올리버와 대립하다 그의 품속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소년 엘리오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충동적인 욕망에 시달리고 그것에 응하며 또 그것에 기운 자신을 수치스러워 한다. 그러나 소년이 울음을 터뜨린 것은 아마 그것이 자신에게 모두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에게도 식별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자의 혼돈을 가리키기 위해 동원되는 풍경 몽타주일 것이다. 둘은 자신들을 휘젓는 난폭한 그러나 보여질 수 없는 충격에 휘둘리며 무언가를 행한다. 헤엄을 치거나, 여자 친구와 허겁지겁 서두른 섹스를 하거나, 무엇을 하든, 곧 그 장면은 풍경 장면으로 이행한다. 그런 사랑의 압도할 만한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랑의 장면에서 카메라가 풍경으로 이전하는 시퀀스나 풍경으로 달아나는 몽타주는 자주 보는 것이다(나는 테렌스 멜릭의 초기 영화들이나 샹탈 애커만의 몇몇 영화가 생각난다. 혹은 아주 기계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몽타주를 구사하는 파스빈더의 많은 영화들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랑과 에로스에서 무언가 반자본주의적, 반문명적인 묘약을 찾고자 하는 유혹은 20세기에 되풀이 되었던 유혹이었다. 자유연애에서 바로 50년전의 2차 성혁명, 성해방 운동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사랑과 관능은 오늘날 가장 초라하게 몰락한 이상이자 비밀이 되었을 것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소박하고 조촐한 멜로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나는 폐허와도 같은 세계에서 어떤 유적 아니면 잔해와 해후한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바다 속에서 들어 올린 낡고 부식된 조각상이라는 고고학적인 유적과 같이.

그리고 나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위로 울려 퍼지는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 마침내,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어요. 그것은 비디오인가요? 그것은 비디오인가요? 마침내 당신을 만지게 되었어요. 그것은 비디오인가요? 그것은 비디오 인가요? 사랑을 위해, 웃음을 위해, 당신의 품으로 달려갔어요 그것은 비디오인가요? 그것은 비디오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