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의 재미와 교훈

Itsuroh Shimoda – Everybody Anyone (1974)


자기-패러디로서의 퍼포먼스

1. 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는 동시대 예술의 동시대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원리를 추궁하고 풍자하는 코미디 퍼포먼스이다. 비록 관객들은 떠들썩하게 웃지 않았지만 말이다.

2. 헤첼은 자신의 렉처 모두에서 노골적으로 동시대성의 으뜸가는 미학적 원리인 <현존 presence>을 비웃으며 시작한다. 설치와 더불어 동시대 예술의 양대 장르로 부상한 퍼포먼스의 인기 뒤에서, 그는 현존(성)에 대한 애착을 발견하고 조롱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재/현(re-presentation)의 비판으로서의 미술, 즉 반미학적 예술과 <동시대> 예술이 자신을 구분하는 결정적 간극이다.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의 냄새를 풍기는 그리고 그의 재현(표상)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진정성, 직접성, 본래성, 고유성, 지금-여기-있음, 현존재, 함께-있음(Mit-Sein) 등등은 퍼포먼스가 애호하는 미학적 긍지이자 격률이다. 헤첼은 그것을 교활하면서도 신랄하게 비웃는다. 그의 작업이 사회사업가를 흉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작업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시큰둥하게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안에서 가득 군침이 돌았다.(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야유는 얼마나 애교스럽던지!)

신자유주의적인 예술로서의 동시대 예술

3. 그는 투자와 사업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자신의 학위 논문 청구 작업을 먼저 소개한다. 그는 자신의 예술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2000유로를 받았고 그는 그것을 다시 자선기관에 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 한 명이 수년간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 작업(?)을 수행하며 그에 몇 배에 달하는 수익을 얻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자선기관에 기부를 하고 인증서를 받은 뒤 꼬박꼬박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로부터 편지와 그림을 받는 일 말고는 그가 한 것이라고는 없다. 그렇지만 그는 투자와 기부, 예술 행위 사이에서 이뤄지는 가치(value)의 변조와 등가화(equivalisation)를 비웃는다. 예술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가치는 이제 각기 다른 항으로 변환되거나 이항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유명한 슬로건인 삶으로서의 예술과 예술로서의 삶이 어떻게 오늘날 매우 더럽고 조잡한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나쁜 방식으로 실현되고 말았는지 신랄하게 고발한다. 당연 그 사례는 자신의 작업 자체이다.

4. 기업의 영리적인 경제 행위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으로 둔갑하고 작가는 그것을 얼마든지 천연덕스럽게 미적인 행위 즉 퍼포밍으로 실행할 수 있다. 그가 곧 보여주게 되듯이 셀프(Self)라는 비만과 고지방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서 지방 적출로 얻은 지방으로 비누를 제작해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사람들 80여명이 1년여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을 소개할 때, 그는 사회적(관계적, 윤리적…) 행위와 경제적 행위 그리고 예술적 행위가 어떻게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전환되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 X – = +

5. 그렇지만 그러한 등가화의 연쇄, 예술 행위가 경제 행위나 윤리적 행위와 교환될 수 있는 동일 가치의 무엇으로 변환되려면 이를 매개하는 어떤 조작(operation)이 필요하다. 헤첼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유머를 발휘한다. 작품 제목인 <베네팩토리Benefactory>를 <선행/공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면, 물질적 이해와 선(善/Good) 그리고 미적인 것이 동등한 가치로 호환하도록 중재하는 것은, 헤첼의 말을 빌자면 죄책감이다. 그는 이 도덕 경제의 룰을 또한 동시대 예술의 주된 형식인 사회참여예술에 노골적으로 빗댄다.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성(the social)은 죄책감을 통해 구성되는 마이너스의 부정적인 값이다. 그것은 진리를 뺀 욕망의 세계에서의 마이너스와 만나고, 절욕(節慾)의 마이너스와 만나며,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부정성이 제거된 예술과 만나며, 등등. 그리하여 오늘날 동시대예술이 만드는 <관계>의 정수가 등장한다. 그것이 관계 미학의 관계이든, 공동체-공공-대화-참여 등등의 범주를 통해 작동하는 관계이든 다르지 않다.

6. 사회라는 것이 너와 나의 구체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힘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잊을 때, 예술은 자신의 타자로서의 사회를 비판하는 위치를 부인한다. 물론 이러한 너무나 모더니즘적인 태도를 헤첼이 적극 고집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그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씩씩하게 덧얹은 소감일 뿐이다. 헤첼은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큰 이야기를 꾸며내기보다는 코미디언과 같은 퍼포머가 되어 TED강연과 유사한 포맷의 사기(?)에 가까운 강연을 하면서 오늘의 예술, 즉 동시대예술이 걸친 남루한 이데올로기적인 의상을 집어 들고 비웃는데 자신을 제한한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이런 예술 비판 코미디는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 야단법석의 코미디는 느끼하고 점잖고 심각하지만 속이 텅 빈 예술을 폭로하는 데 얼마나 애용되어온 몸짓이던가. 카바레에서 펼쳐진 다다의 코미디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런 코미디 조각이라도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