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ronomy – The Look

어제 오랜 만에 다시 본 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에서, 다시 그 나고야 사내의 이야기가 다시 들렸다. 애인과 헤어지고 그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나고야에 사는 그 사내는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고 그는 전자분야의 직장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듬해 봄 자살을 하고 만다. 그는 다른 모든 걸 견딜 수 있었지만 봄이란 낱말 만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커는 유럽인이 수사적인 형용사를 많이 쓰는 반면 일본인은 하이쿠에서 보듯이 낱말 그러니까 명사나 동사 같은 것에서 직접 어떤 정서적인 힘을 느끼고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말의 정동(affect)일 것이다. 봄. 그러나 그 말은 편의점에 붙은 광고에 적힌 <나, 이제 설레나 봄> 따위의 봄이란 낱말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어느 말도 상품을 위한 인질이 되길 피할 수 없는 말들의 폐허.

달구벌대로 옆 방공포병학교 옆을 지나며 빛바랜 듯한 연두 빛 신록이 장황하게 펼쳐진 모습을 문득 바라보았다. 차창에서 바라본 그 녹음의 초엽은 무열대 군 부대를 지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 군부대 담벼락을 따라 듬성듬성 벽을 넘어 내민 히말라야시타의 가지들은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그 때는 초등학교) 뒤편 강릉 영림서에서 보던 그 가지들과는 달리 부스스하다. 어제 밤 숙소 근처의 미군 부대 곁 고깃집 뜰에서 담배를 피다 문득 바라보았던 그 부대 안의 수목들도 형광등 가로등 아래에서 창백해 보이기는 매 일반이었다. 모든 것이 퇴화되어 가는 듯 보이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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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전시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 이 방대한 도큐먼트와 사진, 비디오, 자료들을 하루, 심지어 며칠 동안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전시는 마땅히 전시와 더불어 자료집을 출판하거나 아니면 연계된 충분한 웹사이트를 만들어야 한다. 전시 준비 기간 중에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전시가 끝난 후에 전시에 제시된 자료들을 모두 수록한 아카이브 사이트를 구축해야 한다. 나름 최대한의 의욕과 집중을 발휘해 보았지만 그리고 몇 번 뒷걸음질 쳐 혹시 놓친 것이 있지 않은지 확인해도, 언제나 뒤끝은 많은 걸 놓쳤다는 불안과 후회이다. 하물며 지방의 전시를 다시 찾을 기회는 쉽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마음이 두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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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구한 열차표는 가운데의 가족석. 잠깐 졸다 마주 앉은 자리의 중년이 카랑하고 힘찬 통화 소리에 잠을 깼다. 그는 부산 서면에 누굴 만나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며 상대에게 이번 가을에 지금 짓고 있는 부여의 집에 고향 동문들을 모두 초대해 추어탕을 대접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는 아마 한 때 공장을 운영했던 모양이고 그의 말을 빌자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쓸 돈을 벌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후배인 듯한 사내에게 이제 그만 일을 관두고 쉬라고 쾌활하게 다그친다. 그는 서울에 집이 있고 이제 고향인 듯 싶은 부여 어딘가에 이른바 전원주택을 짓고 있다. 졸린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았다. 감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환공어묵 상자를 발치에 놓은 그 사내는 아직 주름이 많지 않은, 예순을 갓 넘어 보이는, 선량한 행색의 아저씨이다. 그가 문득 부러웠다. 서글픈 기분에 눈길을 돌렸더니 기차는 한강을 지나고 있고, 63빌딩은 저문 저녁인데도 먼 곳의 태양빛으로 번쩍번쩍 했다.

역에서 내리곤 애매한 시간을 탓하며 근처 마트에 들려 술을 한아름 샀다. 일전 선물로 받은 와인이 있었지만 그건 쉽게 탐하면 안 될 듯 싶었다. 이 마트는 무슨 재주인지 제법 괜찮은 와인들이 5천원 남짓부터 시작한다. 서너병을 냉큼 사고 판촉 영업 사원이 강권하는 조니워커 판매대에서 시음을 하곤 머쓱한 기분에 그만 작은 병 하나를 샀다. 민망한 내 기분을 알았는지 그녀는 토닉워터 두 캔을 공짜로 주었다. 술병과 술잔을 하나로 포장한 금박 상자 뒤에 하이볼 레시피가 적혀있어 곧이곧대로 만들어 먹었더니, 끝내준다. 전갱이 구이만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없어, 술로 술을 안주삼아 마시다, 벌써 6잔째이다. 밀린 원고를 쓰고, 전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보겠다는 생각은 일단 포기. 그렇담, 무슨 영화를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