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적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음모 다큐멘터리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의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오늘보다>가 있다. 나는 그 잡지의 정기구독자이다. 배달된 지난 5월호를 보다 적잖이 놀랐다. 그 달치에 이례적이라 할 “여는 글”이 실렸던 탓이다. 편집자 노트쯤에 해당될 글에서 편집실장은 마침 개봉해 관심을 모은 어느 한 다큐멘터리를 상대한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털어놓으며 그 작품이 의지하고 있는 음모론에 대한 이의를 적는다. 글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고의침몰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있다. 아직도 이 사건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과 구조 실패, 이후의 국가 탄압까지. 2014년 4월 16일 하루가 아니라 전후(前後) 몇 년에 걸친 이 참사의 과정을 우리는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침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 의도를 감추기 위해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했다는 답은 너무나 쉬운 답이다.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답을 쉽게 찾으려는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도 있다. 이를 잊어서도 안 된다.” 박상은, 세월호에 대한 어떤 쉬운 답 <그날, 바다>, 오늘보다, 2018년 5월호, 1쪽.
어느 다큐멘터리 작품이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된다. 이는 흥미로운 사태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형세를 생각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음모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없다. 그러나 음모론적 플롯을 지닌 다큐멘터리가 최근 부쩍 등장하고 있다. 방금 언급한 <그날, 바다>(김지영 감독, 2018)가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두드러진다면, <더 플랜>(최진성 감독, 2017)이나 <김광석>(이상호 감독, 2017)도 그에 속하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세 편의 다큐멘터리의 경우 극장에서 개봉을 하였고, 제법 많은 소문을 몰고 다닌 만큼 눈에 쉽게 띄는 편이었다. 심지어 이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해당 다큐멘터리의 러닝타임에 가까운 길이의 반박 영상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뉴스타파’리는 뉴스 채널이 <더 플랜>의 주장에 반박하는 뉴스 영상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 뉴스 영상은 ‘뉴스타파’의 웹사이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https://newstapa.org/40558
어쩌면 이 다큐멘터리 작업들을 빼고도, 내가 미처 찾지 못한 음모라는 플롯을 내건 다큐멘터리가 많을지 모른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은 지난 수십 년간 끝없이 소비되어온 내러티브이다. 음모론이라는 이름을 단 만큼 그것에는 어떤 ‘이론’이나 ‘추론’의 요소가 있는 듯싶지만, 그것은 편집증적인 주체(paranoid subject)의 환상을 가리킬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어떤 정신병리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짓은 곤란할 것이다. 어떤 근본적인 원인을 가정하고 그것을 캐내려 발버둥치는 것은 전연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음모론의 요소는 다양한 사태를 연관시키고 그것에서 어떤 궁극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애쓰는 이론 속에 모두 숨어있다(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총체성을 밝히려 애쓰는 거의 유일한 ‘이론’인 마르크스주의를 두고 많은 이들이 걸핏하면 음모론적 서사라고 핀잔하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칭찬일지 모른다).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와 제프 킨클(Jeff Kinkle)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작업이 음모론과 비슷해지지 않은 채 이론을 만들어내고 연구를 행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할 때, 그들은 정곡을 찌른다. Alberto Toscano & Jeff Kinkle, Cartographies of the Absolute, Winchester, England: Zero Books, 2005, p. 72.
모든 이론적 사고와 추론에 깔려있는 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음모론인 셈이다.
그런데 정작 서글픈 일은 그러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인과성을 찾는 이론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거나 맥을 못 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 이후의 자리에는 경험, 느낌(정동), 자기-의식 같은 것을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것이 대신 자리를 차지한다. 에밀리 엡터(Emily Apter)의 말을 빌자면 음모론에 몰두하는 편집증적인 주체는 “착란적인 체계성의 미학(a delirious aesthetics of systematicity)”을 고수한다. E. Apter, On Oneworldedness: Or Paranoia as a World System, American Literary History, Vol. 18 No. 2, 2003, p. 366.

그것은 음모론에 관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저 유명한 언급과 상통한다. 음모론을 두고 “포스트모던한 시대에서 가난한 자들의 인지적 지도그리기”라고 칭할 때, 그는 음모론을 둘러싼 불명예를 걷어낸다.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Basingstoke, Hampshire: Macmillan, 1988, p. 356.
음모론은 세계의 연관을 이해하고 그러한 관계의 원인을 인식하려는 발버둥질이다. 따라서 음모론은 이론을 대체하는 대중적 서사이자 아울러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소치의 이론인지도 모른다. “글로벌한 경제 체제를 꿈꾸는 모호한 프로그램과 마주할 때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칼 크라우스 Karl Kraus) 집단적 혹은 사회적 상상력의 광범위한 마비 현상 속에서, 음모라는 다소 낡은 모티브는 기본적인 최소구성 요소를 재결합할 수 있는 서사 구조로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 최소요소란 비가시성을 그럴 듯이 설명하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연결망, 달리 말하자면 집단적인 그리고 인식론적인 최소요소를 가리킨다.”, 프레드릭 제임슨, 음모로서의 총체성, 지정학적 미학, 34쪽. (번역은 부분 수정)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의 국가안보국 폭로를 통해서든,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창립자 가운데 한 명인 줄리언 어산지(Julian Assange)의 폭로를 통해서든, 아니면 최근의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의 덕을 빌려 당선되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 관련 폭로 기사를 통해서든, 우리는 미국 정부가 얼마나 음모적으로 활동하는지 거듭 확인한다. 심지어 어느 과학잡지는 ‘오큐파이’ 시위가 한창이던 즈음 어느 과학잡지는 복잡계 이론의 과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소수의 초국적기업(대개는 금융자본)이 거의 모든 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기사를 발표한 바 있다.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의 논리는 그러한 집중을 불가피하게 한다는 점잖은 과학적 주장을 보태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자본가계급의에 의해 전지구적 경제가 좌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Andy Coghlan and Debora MacKenzie, Revealed –the capitalist network that runs the world, New Scientist, 19 October 2011.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mg21228354-500-revealed-the-capitalist-network-that-runs-the-world/
그러나 음모론은 여전히 불신 받는 서사이자 주장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음모론에서 주목할 점은 그것의 진위 여부에 있다기보다는 바로 그것이 알려주는 효과에 있을 것이다. 제임슨의 말인 ‘음모로서의 총체성’이라는 표현을 빌자면, 음모론이란 우리가 그간 간직하고 사용했던 ‘지각 범주들(categories of the perception)’이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를 만회하면서 서로 다른 사실들 사이의 연관을 밝히려는 절망적인 몸짓을 가리킨다. 음모는 무관한 듯 보이는 우연한 단편들에 유의하면서 그것들 사이에 놓인 관계를 파헤치고 그것들 사이에 어떤 질서를 발견하고자 애쓴다. 그런 점에서 음모론은 가난한 자들의 인지적 지도그리기로서 우리가 처한 세계의 문제를 판별하고 그것의 원인을 무언가에 정박시키려는 시도로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충격적인 사태를 초래한 원인을 추적하고 그것의 원인을 애타게 규정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인과성의 내러티브를 축조하고자 하는 것이 음모론의 목표라면,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를 거칠게 비난하고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친 김에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국내의 음모론적 플롯의 다큐멘터리들에서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충분히 음모론적이지 못하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이들 다큐멘터리는 음모론적 플롯을 구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짐작과 달리 비(非) 음모론적이며 나아가 음모론에 반하기까지 하다. 음모 다큐멘터리의 모범적인 사례일 두 편의 작업의 서사를 볼 때, 그는 매우 두드러진다.

음모론적 플롯을 가장한 반-음모론적 다큐멘터리로서, 단연코 압권은 여러 통계학자들의 실험과 가설을 동원하여 1.5라는 통계적인 비율을 확인하며 지난 대선의 조작 가능성을 폭로하는 <더 플랜>일 것이다. 이 영화는 두 명의 대통령 후보, 박근혜와 문재인이 맞붙었던 지난 18대 대통령선거에서, 선거 후반 문재인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당선된 것에 대한 정당한 의구를 제기한다. 무언가 의심스럽고 미심쩍은 힘이 개입하여 선거 결과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의심은,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았고 또 당선될 리도 없다고 믿었던 이가 당선되었을 때, 끓어올랐을 것이다. 이런 반문(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찍었는데 왜 다른 사람인 그가 당선된 거지?)은 마침내 선거 결과를 둘러싼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집요한 추리로 이어진다. 시간을 역진시키면서 선거표의 추이를 가늠하거나 개표가 종료되지 않았는데도 개표결과가 중계된다거나 하는 많은 사례들을 폭로하던 다큐멘터리는, 그런데 어느 하나의 지표 앞에서 멈춰 선다. 그것은 무효표의 비율이 올바르게 집계되었다면 반드시 나와야 할 정상적인 값인 1:1이 아닌 1:1.5의 비정상적인 값이 나왔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스스로 K값이라 명명한 이 수치는 분류표에서의 후보간 득표율과 미분류표에서의 후보간 득표율이 같아야 한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전문 학자들은 이러한 무효표의 미스터리를 회귀분석을 비롯한 다양한 통계 기법을 통해 분석한다. 그리고 마침내 “통계에서는 이것은 디자인이고 플랜이예요”라는 통계학자의 인터뷰가 나온다. 물론 뒤이어 김어준 총수(그는 흥미롭게도 <더플랜>과 <그날, 바다>의 제작자로 모든 곳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가 바로 등장한다. 그는 “이게 증거”라고 말한다. 마침내 음모를 밝힐 최종적인 단서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통계적인 확률의 서사는 흥미롭게도 <그날, 바다>에서 되풀이된다. 역시 빠진 퍼즐을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감독은 아르키메데스가 마침내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고는 유레카를 외치는 것처럼 환호성을 지른다. 심지어 다큐멘터리에는 감독과 그를 후원한 김어준 총수가 그것을 발견한 기쁨을 자축하는 하이파이브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고의침몰설’이라는 괴담이 마침내 확증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날, 바다>는 선박이 항해하면서 자동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자동 발신하는 장치인 AIS 자료를 분석한 결과와 정부가 발표한 불완전하며 단속적으로 제시한 항적 자료를 대조한다. 그리고 그 궁금하기 짝이 없는 차이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추리에 추리를 거듭한 결과로서, 간격의 비밀을 풀 결정적인 단서를 제시한다. 700미터 간격의 항적. 우리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린다. 그리고 확률적 개연성을 추적하는 인물은 음모론의 해결사로서 자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음모론적 플롯이 비음모적인 서사 장치를 통해 기괴하게 전개되는 역설과 맞닥뜨린다.
스킵 윌먼(Skip Willman)의 주장을 쫓자면 음모론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플롯은 ‘우연론(contingency theory)’이다. Skip Willman, Spinning paranoia: the ideologies of conspiracy and contingency in postmodern culture, Conspiracy nation: the politics of paranoia in postwar America, Peter Knight ed.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2.
우연론은 자유주의적 냉소주의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총기 난사 사건이든, 금융위기이든, 범죄 사건이든 모두 그것은 우연한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우연론이다. 우연론에 따른다면, 모든 사건은 무작위적인 혼돈, 우연, 운(運) 등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보다 과학적인 언어로 각색한다면 확률이나 개연성이 될 것이다. 확률은 음모론적 환상 속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것은 그런 점에서 두 다큐멘터리의 음모론적 환상이 고발하는 대상이 음모론적 플롯이 흔히 가정하곤 하는 인격화된 음모의 주체나 작인(作因)이 아니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배후 조정하는 은밀한 주인의 자리에는 애꿎게 정부가 들어서 있다. 미셀 푸코는 자유주의적 통치성(governmentality)의 다른 이름인 생명정치(bio-politics)가 등장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국정(國政) 과학으로서 통계학이 수행한 역할을 세심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에게 확률과 개연성은 국가가 통치하게 될 대상으로서의 사회 즉 인구라는 대상의 특성을 객체화하고 또 인식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핵심 지식이자 테크닉이었다. 자유주의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올바른 통치를 하고자 애쓴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환상 속에는 사회의 내적 모순이라는 생각이 자리할 곳이 없다. 절대군주처럼 통치하는 주체가 사회의 외부에 따로 놓인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지닌 어떤 법칙과 정규성을 면밀히 파악하는 전문가들의 통치가 자유주의의 핵심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통치는 정치의 실패를 정치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정확하지 못한 현상에 대한 지식에서 찾으려 한다. 자유주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 (정치)경제학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계급적인 적대를 통해 구성되는 사회관계를 자연법칙과 같은 것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로 만들어 낸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연론은 음모론과 다르거나 음모론보다 못하다. 음모론은 아주 비뚤어진 방식이긴 하지만 사회적 모순을 가리키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내는 사회의 내적 모순은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사회와 그를 위협하는 나쁜 외부의 적이라는 대립의 형식으로 자리바꿈된다. 음모의 주체는 사회의 적이고, 그것은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협하는 ‘그(들)’이다. 그런 점에서 음모론은 반정부적이라기보다는 반-유태인적이거나 반-아랍적이거나 반-정치가적이거나 반공주의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질서와 행복을 찬탈하고 위협하는 그들은 음모의 주인공으로서 저 뒤에 있다.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음모의 주인공들일 ‘일루미나티나’나 ‘프리메이슨단’이나 ‘외계인’이나 모두 ‘그들’의 분신일 것이다. 그들의 음산한 편집증적 환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치된 방식으로나마 사회의 적대를 상징화하고자 애쓴다.

근년 음모론적 플롯의 다큐멘터리가 부쩍 자주 출몰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다큐멘터리가 심각하고 지루한 비허구 영화의 대명사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코미디보다 더 재밌고 액션 영화보다 더 짜릿하며 멜로영화보다 더 눈물겨운 대중적인 오락의 장르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는 다큐멘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사회 관계의 진실을 재현하고 식별하려는 욕망에 가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거리에서의 저항보다는 실내에서 폭로를 관람하면서 불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대신하는 우리의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내에서의 폐소공포증적이면서도 나르시시즘적인 위반의 욕망과 굳세게 손을 잡는다. 그런데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는 그런 욕망을 악용한다. 이는 아무래도 탈-진실(post-truth) 시대에 살고 있는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뉴스 매체를 대표하는 TV뉴스나 신문은 뉴스를 전달하기보다는, 모두가 뉴스의 생산자가 되어버린 시대를 반영이라도 하듯 수없이 떠돌아다니는 뉴스에 대한 ‘팩트 체크(fact check)’를 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가장 신뢰할만한 뉴스 프로그램으로 등극한 종편 채널 JTBC의 뉴스가 그를 대표할 것이다. 그 뉴스 프로그램은 숫제 ‘팩트-체크’란 코너를 만들어 뉴스에 대한 메타뉴스라고 할 만한 것을 제공한다.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소식통들에 휩싸이며 자신이 속한 정치적 당파나 성향에 가까운 소식을 알고리즘적인 매개를 통해 접한다. 그래서 소셜 미디어를 분석하는 이들이 자주 지적하고는 하듯이 일종의 ‘반향실(chamber room)’ 효과가 만들어진다. 자기의 목소리가 반향 되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인지되는 반향실의 효과는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티파티(tea party) 지지자들은 티파티 지지자들의 뉴스만을 접하고 ‘문빠’는 문빠의 뉴스만을 접하는 식이다. 그 때 자신이 거듭 듣고 확인한 세계의 재현과 어긋나는 무엇을 접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할 소식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자기반영적인 정보를 제공하도록 설계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들을 진실로서 자리 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근의 음모론적 플롯의 다큐멘터리는 절대적인 진실을 찾으려는 욕망에 다가서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들 사이의 내전(內戰) 상황에서 허우적댄다. 한국의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확언할 음모를 찾으려는 몸짓을 택하기 보다는 모두가 사실을 주장하는 음모 아닌 음모들의 아수라장 속에서 자신의 몫을 마련한다. 음모론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윤곽을 재현하려는 욕망을 가리키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모론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각자의 사실들이 있을 것이라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기운 채, 확률적인 통계를 통해 자신이 훨씬 더 충분히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주장은, 음모론적 플롯이 아닌 우연론에 가깝다. 그것은 음모론조차 맥을 못추는, 다시 말해 당신의 진실은 나에게는 거짓이라는 진리의 갈등이라는 입장을 지지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고 나는 내 입장을 말하고 싶다는 의지를 토로하는데 분주할 뿐이다.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윤리학이라고 할 ‘진리의 윤리학’이, 최근 등장한 사이비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를 통해 부인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진실로서의 음모는 확률적인 사실로서의 음모로 대체된다. 진실로 확인된 음모는 분노와 거부의 멘털리티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적 사실로서의 음모는 사실 확인에 만족한다. “봐, 내가 뭐랬어. 그건 거짓이라니깐” 이라고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우리는 음모적인 사실을 검증한 것에 만족하면 그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한 음모론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음모론일 것이다.

 

_Docking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