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리 괴르제 & 앙투완 드푸르의 <제르미날>에 관하여

무대란 소우주

<제르미날>은 에밀 졸라의 전설적인 소설, <제르미날>을 제목으로 삼는다. <제르미날>은 광부들의 척박하고 고단한 삶에 관한 소설이다. 알로리와 앙투완은 자신의 작업이 소설 <제르미날>과 무관하다고 능청을 부리지만 그것은 그저 시치미 떼기에 불과할 것이다. 무대의 표면을 채굴하는 퍼포먼스의 주된 동작들은 분명 광부의 몸짓을 빌린다는 점에서나, 자연주의적 역사소설이 기대했던 것처럼 역사의 재현을 기대하고자(기대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나 두루 이 작업은 <제르미날>로부터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자 한다.

<제르미날>은 현실의 세계와 무대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묻는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무대 바깥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모든 예술적 실천의 공리이다. 예술 내의 세계에서 온전히 예술 바깥의 세계가 드러나는 행복한 시대는 사라졌을 때, 예술이 저 너머의 현실을 여전히 가리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은 기계적 사실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루카치 말마따나) 부르주아적 사실주의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자연주의로 퇴행할 수밖에 없었듯이, 오늘날 현실의 재현이라는 리얼리즘의 불가능성은 자신의 나름의 해결책을 찾게 마련일 것이다. 그 첫 번째 해결책 후보는 현실을 곧이곧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공장, 사무실, 시위현장, 과학 실험실, 가정의 내부, 정치가의 오피스 등을 정밀하게 재현/재연함으로써 현실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으스대는 것은, 실은 현실의 재현의 불가능성을 기계적 미메시스를 통해 극복하고 있는 척, 기만하는 것이다. 현실을 사실들로 환원하고 그것을 복제함으로써 예술이 세계의 현실성을 재현하고 있다고 뽐내는 것은, 실은 현실을 재현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해결책으로 무엇이 남아있을까. 알로리와 앙투완이 찾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세계의 현실성을 재현할 수 없을 때, 무대라는 소우주 안에서의 세계만이 남아있다고 솔직하게 실토하는 것, 연극적인 무대의 자족적/자폐적인 세계 안에 집요하게 머물면서 그 바깥에 어떤 현실이 있다고 암시하는 신호를 관객들에게 타전하는 것. 그런 점에서 무대의 자기완결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연극적인 원리들, 이를테면 시공간 일치의 법칙 같은 연극의 법칙을 원용하는 것. 그를 통해 무대 바깥의 세계의 법칙과 무대 내부의 법칙 사이에 어떤 상응을 언급하는 척하면서 무대 바깥의 세계의 법칙(마르크스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생산양식의 법칙? 계급투쟁의 법칙? 토대와 상부구조 일치의 법칙? 등등)을 생각하도록 촉구하는 것. 알로리와 앙투완은 애타게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의 나름의 원리와 질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원리와 질서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다른 세계가 가능해진다는 것, 이를 언급하고자 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르미날>이 불어로 생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지나가며 말할 때, 즉 제르미날이 영어의 <제너레이션>에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을 때, 즉 생성이나 발생 같은 것일 수 있을 때, 이는 그들이 가장 두렵고 무서운 낱말로 내내 매달리는 두 낱말, 즉 <유한성>과 <현재>가 등장하게 되는 이유를 조금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다음엔 끝

알로리와 앙투완의 서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현재> 이후에 <끝>이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현재 다음에 미래가 온다는 시제의 원리를 그들은 모른 척한다. 물론 이는 매우 정직한 자세일 것이다. 모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오늘 다음의 세계, 현재 다음의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다음엔 무엇? 자본주의 이후는 없다고 모두들 말하는 세계에서 현재 다음엔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그것은 끝일 것이다. 내일이 없으면 오늘 다음엔 끝 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유한성>은 어떨까. 유한성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유한하므로 곧 그것의 다음이 도래할 수 밖에 없다는 발견과 주장이 유한적인 것을 말하는 자들의 인식론이다. 알로리와 앙투완은 그런 점에서 유한성을 원하고 유한성을 갑갑하게 여기는 듯 보인다. 유한한 세계에 갇힌 듯한 갑갑함. 영원히 여기, 지금에서 악순환하며 진동하는 움직임의 지겨움. 여기에서 나는 알로리와 앙투완이 재미있어 졌다. 알다시피 프랑스의 가장 인기있는 철학적인 테마는 흐름, 생명, 생성 따위의 생기론적(vitalist) 주제이다(들뢰즈? 라투르? 등등). 그것은 모든 것은 무한하며 어떤 유한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무한변전(無限變轉)의 세계에 관한 시를 쓴다. 너무나 산문적인 너무나 산문적인 세계에 살면서 세계의 시를 쓰는 허무맹랑한 기만 선전. 그 탓에 세계의 유한성과 현재에 갇힌 자들의 비운을 말하는, 그리고 탈출구를 찾으려는 몸짓을 찾으려는 태도는,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알로리와 앙투완이 선택한 유머의 자기비판성을 말해주는 듯 싶다.

 

비극이 될 수 없어 코미디

1.

20세기의 예술은 어쩔 수 없이 비극의 예술일지 모른다. 적어도 1989년까지의 예술은 비극의 예술이지 않을까. 비극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을 서사화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알다시피 삶은 처참하고 힘들다. 그런 삶을 극복하고 변혁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의 현실이 계속 힘을 발휘하는 한 이룩될 수 없다. 그래서 꿈은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극은 그 잔꾀를 통해 현실을 총체화하는 마법을 발휘한다. 비극은 20세기에 절정을 이룬, 유토피아적 상상의 필수품이었다. 비극을 통해 현실을 총체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하는 다그침, 그리고 비극을 통해 비극적 현실을 넘어설 기회를 창립하라는 강요. 그것이 비극의 원리일지 모른다. 그런데 알로리와 앙투완은 코미디를 만든다.

 

알로리와 앙투완의 코미디가 재미난 점은 오염된 코미디란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 될 수 없어 코미디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대하여 말한다. 비극은 말하자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극은 언제나 미래에 몰두한다. 비극은 미래라는 시간을 상상하기 위해 필연적인 서사의 틀이다. 그러나 코미디는 언제나 현재의 주변을 맴돈다. 오늘이 슬프다면 내일은 나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 실컷 웃고 있다면 계속 현재에 머무는 게 당연지사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머물 수밖에 없으니 코미디이다. 그런데 코미디가 되어버린 연유가 비극이 제 힘을 못해서 결국 코미디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예술이론이 마련해준 뻔뻔한 이름은 비희극(tragicomedy)일 것이다. <제르미날>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그런 비희극 가운데 가장 빼어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퍼포먼스일 것이다. <제르미날>이 너무 웃겼다는 관객, 그/그녀는 알로리와 앙투완의 순정을 욕보였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