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현상학을 넘어, 갑의 폐절을 위하여: 민주주의에 머물지 말자

Oneohtrix Point Never – The Station

 

“괴로움(Leiden)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이란 주체에 짐 지어진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주체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73쪽.

“경제는 핵심영역이고 전투는 이곳에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주문(呪文)을 깨야 한다. 하지만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S.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이서원 옮김, 길, 157쪽

1. 을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적 프로젝트

프랑스와 유럽의 급진 정치철학의 충실한 번역자이자 주해자인 진태원은 <을의 민주주의>에서 그간의 자신의 작업을 한데 결집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한국에서의 급진 정치의 조건을 위한 사색으로 발전시킨다. 문재인 정권의 집권과 더불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더욱 중요한 토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한국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과 민주주의 사이의 착종은 민주주의란 언표를 둘러싼 희구와 애착의 정념을 휘발시킨 듯 보인다(적어도 우리는 김지하가 자신의 시의 선율, “신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읊을 때의 민주주의를 향한 정념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권력의 게임에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라면 누구든 제 입맛대로 가용할 수 있는 타락한 기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동요의 상황에 개입하고자하는 시도로서 매우 큰 가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재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둘러싼 회의와 냉소적 체념을 극복하는 데 요청되는 사고의 주춧돌을 마련하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여기에서 나는 <을의 민주주의>에서 그가 참조하고 주해하는 ‘포스트-포스트주의적’인 정치철학에 대한 농밀한 대화에 주의하기보다는 그를 통해 그가 수확한 일종의 정치적 프로그램, 즉 을의 민주주의론에 스민 사고에 대하여 간략한 비평을 하고자 한다.

2. 을이라는 주체와 정치적 주체화의 현상학

<을의 민주주의>의 3부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기 위한 사색을 집약하는 부분이다. 왜 정치적 주체를 명명하는 이름으로서 그는 을을 선택할까.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적 언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용어가 을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적 호소를 더할 수 있으리라는 수사적인 고려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418) 나아가 을이라는 용어를 동원한 오늘날 한국의 갈등적인 사회 상황을 정치적인 실천과 제도의 자원으로서 변형하고자 할 때, 그 낱말이 발휘하는 위력에 주목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을이라는 이름에서 그동안 정치적 주체를 지시하는데 사용되어온 숱한 개념들의 한계를 돌파하는 어떤 장점을 찾고, 또한 소개하고 참조했던 정치철학적인 논변들을 관통하는 정치적 주체화란 쟁점을 구체화하는데 이 낱말에서 어떤 이점을 발견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을의 민주주의’는 정치철학자로서의 진태원의 사고 실험이 전개되는 무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진태원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요약한다. 이는 뒤잇는 글인 <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획의 전제로서 정치적 주체화가 어떻게 현실적인 프로그램으로서 고안될 수 있는지 그 밑그림을 그려보려는 저자의 끈질긴 모색이 드러난다. 이 부분은 첫 번째 글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자신이 사숙하고 참조했던 여러 정치철학적 사유를 녹여낸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정치에 관한 사색의 결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나는 3부에서 제안된 ‘을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적 사고를 상대하며 그와의 비판적인 대화를 마련해볼 작정이다.

그는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해방의 정치를 실현할 주체를 정립할 것인가와 관련해 그 새로운 주체를 위한 이름, 그리고 그 주체의 방향을 가리키는 ‘실마리’로서 을이라는 주체(?)를 경유함을 확인하여준다.(352) 아래에서 숫자만 표기한 것은 을의 민주주의의 쪽수이다.
첫 번째 글에서 그는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을의 민주주의로 제시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터레그넘’이란 개념을 경유한 역사적 시대 구분이다. 물론 그것이 시대구분(periodization)으로서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레그넘은 단적으로 정치의 시간성을 특권화하기 때문이다(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단계는 시간의 좌표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그가 자주 참조하는 발리바르의 주장인 정치의 자율성과 타율성, 타율성의 타율성이라는 정치의 세 가지 형태 가운데, 그는 정치의 자율성과 타율성의 타율성, 즉 해방의 정치와 시민성의 정치를 특권화한다. 이는 후자의 둘을 각각 정치의 개조 혹은 재발명을 위한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하다.

아무튼 인터레그넘은 어떤 ‘하나의 통치(또는 정치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정치의 주체 등)’이 ‘다른 통치(또는 정치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정치의 주체 등)’로 이행하는 시기의 공백과 혼란을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현실에서 과거의 국민국가적 정치의 모델의 제약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정치의 구성이 직면한 난관을 넘어, 그는 또 다른 의미의 인터레그넘을 추가한다. 그것은 ‘세월호 이후’라는 인터레그넘이다. 이는 그가 보기에 세월호 사건에 함축된 세 가지 측면이 그것이 한국에서 정치의 개조를 위한 상징적 지표로서 구실하기에 충분한 무엇으로 구실한다는 그의 분석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는 그가 ‘불행의 현상학’이란 관점에서 제기하는 정치적 주체화의 주요한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첫 번째 세월호 사건이 인터레그넘인 것은, 국가가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이었다’는 경악이며 국가란 것이 그들의 편에 선 치안기계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 사건이 “과소-주체성(under-subjectivity)”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이는 단적으로 자신을 유효한 정치적 주체로서 구성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상징적 주체성을 힘 있는 이들과의 상상적 동일시로 대체한 이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부정의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지 못하는 주체성의 상태를 알려준다. 세 번째 그것은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국가 또는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다시)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인터레그넘으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강조는 원저자, 아래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을 때, 이는 원저자의 것이다.

이 때 그는 랑시에르의 치안 공동체라는 개념을 참조해 우리에겐 진정한 정치공동체란 없이 치안공동체만이 주어졌을 뿐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을이라는 개념이 정치적 주체의 다른 형상들, 즉 국민, 시민, 민중, 계급, 소수자, 서발턴, 프레카리아트, 다중 등에 비해 어떤 장점을 지니고 있을까. 먼저 그는 흔한 상식과 달리, 비록 헌법적인 규정에서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국민이 정치적 주체의 자격을 갖는 개념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 개념이 “정치적 예속과 피지배의 표현으로 간주하지 정치적 주체의 표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다음 민중이라는 용어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민중이 피지배층으로서 사회의 부분을 가리키는 사회학적인 실재이며 비록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변혁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갖는다는 민중운동을 비롯한 급진 정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늘날 전과 같은 효력을 갖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364)

그러나 보다 큰 맹점은 저항의 주체와 정치의 주체를 구별하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논거이다. “저항 자체에 머물러 있는 주체, 따라서 자신을 구성과 통치의 위치에 놓지 못하는 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의 주체에 미달”하기 때문이다.(365) 그렇기에 그는 “한국어에서는 놀랍게도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도 대중도 아니면 국민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365) 아울러 그는 민중을 저항의 주체로서 사고하는 방식은 반동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부인하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경고한다. 그런 연유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다. “아마도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이고, 을의 민주주의는 민중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민중은, 우리가 상상해 온 민중보다 훨씬 더 이질적이고 다양한, 더욱이 훨씬 더 분할되고 갈등적인 집합체일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로서 민중민주주의는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명칭일 것이다.”(433)
그렇다면 계급이란 개념과 대조해 을은 어떤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을이 “‘국민’(nation)이라는 개념이 담지 못하는 계급적 함의,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불평등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43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을이란 개념이 계급이란 개념보다 나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을이라는 용어가 표현하는 것은 계급(들) 없는 계급투쟁의 현상,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계급표상/재현양식으로는 적절히 설명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경합하는 다른 개념들에 비해 을은 정치적 주체로서 어떤 장점을 가지는 것일까. 그는 정치적 주체의 후보로서 ‘을(乙)’을 적극적으로 규정한다기보다는 그것이 다른 주체의 개념들의 제약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규정하려 시도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을의 민주주의”란 구상(혹은 “화두”)를 통해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쟁점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어떤 정치적 주체가 요청되는지 숙고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 을의 민주주의는 어떤 함의를 지닐까.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성을 알려준다는 점, (억압과 주변화, 소외에도 불구하고) 과소주체적 존재자들로 실존하고 행위하며 이들이 과연 어떻게 지배자나 주인, 주권자가 아닌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묻게 한다는 점,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서 민은 정치적 주체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점 등이다. 따라서 저자가 정치적 주체가 없었다거나 과소주체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격적인 개인이 정치적인 활동(투표, 시위, 공적인 발언 등)을 않는다거나, 정치권력이 행사되는 혹은 통치가 집행되는 대상으로서 조차 정립되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정치적 주체라고 일컬을 때의 주체란 “국가가 기본적으로 주체적인 것(the subjective Thing)”이라고 말할 때의 그 주체이다. 즉 국가로서의 주체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는 사물인가 객체인가 장치인가 도구인가 등의 복잡한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또는 발리바르를 경유한 그의 헤겔적인 주체-객체 사고의 동요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그는 세월호 사건이 지닌 외상적 성격과 ‘인터레그넘’적인 이행의 변곡점으로서의 의의를 발견한다. 세월호 사건은 정치 주체로서의 국가의 진면목이 드러난 추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것,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주체성이 부재하다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일종의 검은 구멍이라는 것이 아닐까?”라고 서술하는 것은 이해할만 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을에 대한 규정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라는 ‘사물(Thing)’의 주체성을 확언하면서 국가가 검은 구멍에 불과했다고 통렬하게 고발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글의 여러 곳에서 정치적 주체를 경험과 인식의 주관으로 환원하는 듯한 서술을 이어간다. 비록 불행의 현상학과 불의의 현상학의 접합을 호소한다고 해도 그가 말하는 ‘불행의 현상학’은 을이라는 것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로서 분절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 또는 그에 상당하는 존재자의 경험의 조건과 형식 및 양태에 관한 탐구를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불행의 현상학이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들이 불행을 겪는 조건과 형식 그 형태들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410) 한편 그는 또한 이렇게 부연하기도 한다.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사람들, 2등 시민, 2등 국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내적인 배제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배제는 단순히 빈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를 뜻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 바깥에 놓이도록 강제되는 상황을 가리킨다.”(414) 여기에서 을은 사회적 상황에서의 지위로 언급된다. 불행의 현상학에서 그것은 모욕, 혐오, 차별, 수치, 배제 등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이에 더해 그는 발리바르를 참조하면서 반인간적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주체 이하의 주체 “극단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폭력이다”(319)
를 가리키고자 반인간적 폭력에 시달리는 주체-이하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을은 불행을 경험하는 주체, 자신이 겪는 사태를 경험하지도 못하는 주체, 경험에 선행하는 외적인 현실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3. 정치의 타자를 생각하며 – 고통의 현상학을 뛰어넘자

을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치적 변형과 민주주의의 재발명 앞에 놓인 곤경을 헤쳐 나가려는 사색의 시도일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자리가 그와의 대화와 토론이라는 점을 감안해 을의 민주주의의 독자로서 그의 글일 읽으며 떠올린 나의 의구, 요약하자면 내가 을의 민주주의의 이론적 난점이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두서없이 언급해 보고자 한다.

1) 먼저 을의 민주주의는 주체성의 (역사)과학과 주체성의 현상학 가운데 후자의 편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나는 앞의 입장을 역사유물론의 입장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주체를 또한 객체로서 파악하는 접근이라 본다. 이는 정치적 주체화와 객체화를 변증법적으로 함께 사고할 필요를 제안하는 것이도 하다. <을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주체화를 주되게 다룬다. 그런 탓일까. 그것은 정치적 객체화를 삭제하거나 축소한다.(나는 이 점에서 객체의 우선성이라는 아도르노와 그를 잇는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의 편에서 주체(화)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식, 경험(체험), 감각 등을 통해 세계가 주체에게 현상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현상학적인 주체에 관한 사유는 주체에 미치는 역사적인 규정을 괄호 치거나 평범한 사회적 사실로 환원하는 기색을 띠기도 한다. 고통, 차별, 모욕, 수치 등의 ‘주관적 경험’을 통해 판별된 세계가 갑질하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객체라기보다는 현상학적 주체의 경험 속에 반성된 세계의 상(相)이지 않을까. 이렇게 될 때 주체의 대상성 혹은 객체성은 강하게 부인되며 그런 점에서 유사초월적인 주체로서 정치적 주체를 구축하려는 관념적인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부추긴다. 그것이 정치의 세 가지 형태 가운데 해방의 정치와 시민성의 정치를 상대로 한다는 제한을 부과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변혁의 정치와 어떻게 매개되고 접합되는지 말하지 않은 채 둘의 자율성을 확인하는 데 만족하는 것은 석연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을의 민주주의는 그런 점에서 계급투쟁과 무관한 정치투쟁을 특권화한다. 거기에서 계급투쟁이 고려될지라도 그것은 주체화의 규정에 내적으로 매개된 것이 아니라 주체화가 펼쳐지는 ‘배경’으로서 고려될 뿐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내친 김에 부연하자면 생산양식과 주체화양식 사이의 (비)관계라는 관점에서 부재하는 원인이라는 관점을 수정하면서 부재화하는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일의적인 규정의 관계로서의 구조인과성과는 다른 인과성의 원칙을 제안하는 발리바르를 참조하더라도, 그의 주체화양식은 생산양식과의 (비)관계에 대해 소홀하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2) 다음으로 을의 민주주의는 소외와 분열의 주체라기보다는 자기동일적인 주체에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와 분열의 주체가 객체의 모순이 주체의 내적 모순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한편 불행한 경험을 제거하거나 억제하기 위해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여야 한다는 것은, 불행의 경험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주체를 배제한다. 반인간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도 사정이 달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주체화에 이르는 것이 봉쇄된 주체 이전의 준-주체적인 조건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생적인 감각적인 경험을 의식 속으로 반성하여 규정하는 주체의 좌절만을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경험을 주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주체화와 동연적인 그것, 즉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규정적인 경험의 재료로 주어지는 현실을 객체화하는 것 아닐까. 주체화에 저항하는 폭력, 즉 구조적 폭력은 다시 주체화와 객체화의 변증법을 요구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잇단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3) 한편 정치적 주체화의 조건으로서의 부정성과 자유의 정치에 대한 쟁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주체화가 외적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주어진 사회적 위치나 몫에 따라 배분되는 역할이나 행위가 아니라면, 왕의 자리는 비어있다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공리라고 한다면, 그 때의 ‘비어있음’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는 부정성과 적대, 모순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을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급진적 정치철학의 공리라고도 할 ‘비어있음’ 혹은 ‘안-아르케’에 깊이 의지한다. 그리고 이를 서술하는 숱한 양태들, 이를테면 사회적 사실들과 그것의 관리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유사-)초월성을 강조하는 르포르의 사고부터 몫 업는 자의 몫에 준거하여 불화로서 그러한 비어있음을 기재하는 랑시에르, 평등-자유 명제의 불가역적인 보편성을 역설하는 발리바르 등을 참조한다. 을의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비어있음을 통해 정치적 주체화의 자율성을 개척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어있음이 “없음(nothing)”이라는 실정적 대상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이를테면 무의식(unconsciousness)이 의식 없음이거나 비의식(non-consciousness)이 아니라 의식의 자기동일성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의 부정성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듯이 말이다). 비어있음은 아무 것도 없기에 누구나 채울 수 있는 즉 어떤 자질이나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무정부적인(안-아르케적인) 공간으로 섣불리 환원하는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아르케 없음 즉 실체, 대타자, 최종적인 기의, 메타언어, 최고의 주권자, 목적론적 종합 등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자리에 비어있는 자리를 차지하기에 앞서 그 무를 어떻게 발명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을의 민주주의>는 답하지 않는 것 아닐까.

 

_프랑스철학회 주최 <을의 민주주의> 토론회를 위해 작성한 토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