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둥의 밤-대본 초고

BING SLAMET – Genjer Genjer

 

#1
암전된 채 겐제르-겐제르 재생(Bing Selamet)
반둥의 밤 제목만 프로젝션

#2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오늘 나임 모하이멘의 <두 번의 회의와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작업에 대한 주석이자 또한 그를 보충할만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눠볼까 합니다. 그럼 오늘의 강연을 시작하기 위해 어쩌면 진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발터 벤야민의 저 유명한 역사철학테제 가운데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출발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비동맹운동과 제3세계주의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이 될 시간의 변증법을 벤야민이 마침 매우 능숙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른 문장은 이런 것입니다.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만이 매 순간 자신들의 과거가 인용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류가 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그날, 즉 최후의 심판일이 될 날의 의사일정에 인용 대상이 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테제3 중에서

이 짧은 단락에서 벤야민은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흔한 상식을 바로잡겠다는 듯이 숨 가쁘게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놀랍고 흥미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나간 시간에 벌어지고 기록된 객관적인 사태들”로서의 과거만이 과거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하게 주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여기에서 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와 불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가 있으며 이를 분간할 필요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 즉 역사적인 한 단계가 종료하고 다른 단계가 열리는 순간,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인류의 전사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 그것은 물론 혁명적 단절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류가 구원되지 못했을 때 과거는 불완전하게 주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구원을 원한다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잘못을 바로잡는 위대한 실천을 하고자 한다면, 과거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3
물론 우리는 신학적인 냄새가 물씬나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말에 큰 관심과 호의를 보이기는 어려울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류의 구원이란 말 속에 등장하는 인류란 누구일까요. 아마 짐작컨대 인간 가운데 가장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가난한 자들, 그 가운데서도 말라리아나 수인성 전염병에 걸려 신음하고 기아에 몸이 비틀어지는 어린 흑인 아기들을 보여주고 인류애를 호소하는 국제구호기구의 뻔뻔한 광고 속의 인류가 우리에게 인류란 말이 가리키는 이미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인류의 한 켠, 흔히 남부의 문제로 알려진 무력하고 절망적인 영원한 현 상태 속의 그 곳의 예전 이름은 제3세계, 비동맹국가였을지도 모릅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인류는 덕을 품고 있는 자들의 도덕적 선행을 위해 진열되어 있는 누군가의 윤리를 위해 볼모가 된 제물들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인류는 자신의 과거를 발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는 사명을 실천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일 것입니다. 한 때 그 이름은 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때의 민족은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다른 민족을 얼마든지 업신여기고 공격해도 좋다고 부추기는 오늘날의 문화적 민족주의가 말하는 민족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우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륙에서 식민주의에서 벗어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의 운명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대표하고 투쟁했을 때의 유토피아적인 민족을 상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제 민족주의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은 한국 사회의 현대사 속엔 민족이란 낱말에 뜨겁고 벅찬 기운이 많이 가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다시 복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민족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의 인류를 꿈꾼 비동맹운동과 제3세계의 프로젝트처럼 새로운 프로젝트를 우리가 시작할 수 있으며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벤야민의 아포리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일 낱말은 바로 과거입니다. 그리고 그 과거를 겨냥해 말을 건네는 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한 이는 과거에 대한 것이지만 역사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과거와 구원의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벤야민의 지혜를 참조하겠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통해 과거는 완전해진다는 것과 과거를 통해서만 구원은 가능하다는 벤야민의 통찰은 쉽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두 가지 흔한 생각, 첫 번째 오늘의 비참을 위로하기 위해 상상된 좋았던 날들의 신기루로서의 과거, 즉 보수주의자의 과거와 두 번째 과거-현재-미래의 시제 사이에 굳건한 필연성을 둘러씌우며 지금을 낳지 않은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는 승자의 과거, 모두와 갈라선다면 생각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벤야민은 어쩌면 미래로서의 과거를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과거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봉쇄되어 버린 미래, 그 미래를 소생시키기 위해 우리는 다시 과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를 잇는 시간이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봉쇄되었던 시간의 잠재성을 찾아 그것의 봉인을 끄르는 일이 미래를 개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이 예정하고 있는 미래가 꼭 유일한 미래가 아닐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에 저지당했던 미래를 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5

지난여름 저는 다시 반둥을 찾았습니다. 두 번째이자 반년만의 반둥 여행이었습니다. 이미 지난겨울 음력 설 연휴에 저는 부랴부랴 반둥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서부 자바의 고지대에 자리 잡은 반둥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대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낯선 곳을 찾은 이유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 1955년 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플렌테이션 지주들이 사교 모임을 위해 건설한 작은 도읍이 해방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순간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6 – #14
그것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그러나 그냥 간단히 반둥회의로 더 잘 알려진 회의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이제는 역사의 뒤꼍에서 얕은 신음을 토하며 사라지는 중에 있는 비동맹운동이 마침내 탄생하게 됩니다. 반둥 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의 작은 도시이자 비동맹운동의 산실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조바심을 치며 반둥을 찾아간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반둥회의란 낱말을 검색하다 반둥회의가 열린 장소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는 것과 놀랍게도 그 박물관이 위치한 곳의 거리 이름이 아시아․아프리카 거리라는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저는 그만 마치 심장 한 켠에 잠자고 있던 보일러룸이 갑자기 기지개라도 켠 것처럼 심장의 열기가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멜랑콜리한 감격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심지어 나의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한 반둥 회의, 비동맹운동의 기원적인 장소, 제3세계의 역사적 진원지인 반둥이 아직 그곳에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지키고 기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아무튼 저는 반둥엘 가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 15

1968-2018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중국학 연구자인 아리프 딜릭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단언한 바 있다. “1968년은 제3세계의 해였다.” 이런 대담한 주장은 흔한 상식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입니다. 1968년은 프랑스의 파리나 이태리의 로마와 볼로냐, 독일의 베를린, 영국의 런던 아니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일본의 도쿄나 교토에 해당되는 일이다. 그것은 1세계에서 벌어진 일로 상기되기 일쑤였다. 거기에서 베트남 전쟁과 알제리 전쟁,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게릴라 투쟁의 영웅 체 게바라 같은, 제3세계라는 지리적 장소를 상징하는 몇몇의 인물이 조역으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딜릭이 말하는 제3세계는 북미와 유럽, 혹은 발전된 제1세계 나라들에서 상상하고 그려내는 제3세계와는 다른 것이다.

한편 그가 말하는 1968년은 연대기적인 연표 상에 등장하는 어느 한 해로서의 1968년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1968년이란, 지금은 모두가 기피하거나 의심하는 시대(period)라는 개념에 따른 장기 1960년대, 저의 관점에 따른다면 1955년에서 1983년에 이르는 시대입니다. 그ᅟᅥᆫ 독특한 역사적인 기획, 즉 제3세계라는 기획이 발진하고 종료하기까지의 시대로서의 1960년대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표장(標章)(historical marker)’으로서의 1968년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제3세계란 개념은 단순히 어떤 지시적인 용어로서의 의미를 넘어 2차대전 이후 탈식민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발전의 모델을 구축하고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인 선택과 갈등을 가리키기도 할 뿐 아니라 보다 나아가서는 일종의 윤리적, 정치적 에토스로서 민족해방 이후의 문화적 비전이 투여된 사고이자 비전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획으로서의 제3세계가 등장하고 왕성하게 전개되었던 시기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듯이, 종결되었다. 비서구 세계를 가리키는 저널리즘적인 용어로서 혹은 단순한 분류적인 지시어로서 제3세계란 낱말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지만 프로젝트로서의 제3세계는 실패와 좌절에 직면하였고, 그 개념은 이제 전지구적 남반구(global south)란 용어로 대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흔히 세계화(globalization)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칭해지는 새로운 정치적 프로젝트가 지배하는 역사적 시대로의 이행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제3세계라는 과거, 비동맹운동이라는 과거가 잠재하고 있던 미래는 봉쇄되었습니다.

#16-#18

한편 서구 제1세계에서의 68년의 좌절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통해 예시된다면, 제3세계의 실패는 세계화 이후의 빈곤한 전지구적 남반구라는 개념을 통해 지시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68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반성하는 역사적 반성이 온전한 것이 되고자 한다면 제3세계라는 기획의 성공과 실패를 경유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비동맹운동 혹은 비동맹은 무엇이었을까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귓가를 맴도는 굳건한 한미동맹처럼 비동맹이 아닌 동맹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동맹운동의 가장 먼 외부로서의 남한에서 비동맹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한 일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미반공주의국가인 남한은 외교적인 목적을 위해 비동맹운동에 가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분단 이후 냉전의 시대에서 미국의 후견하에서 집권한 군부 집단과 그들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한 매판재벌이라는 독점자본은 비동맹운동과 제3세계라는 기획대신에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통해 후진국에서 벗어나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자는 주문을 욀 뿐이었습니다.

#19-#20

그러나 제3세계와 비동맹운동이 전혀 부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비동맹국가인 인도로의 망명을 택한, 얼마전 안타깝게 타계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1960년대에 몇 년간 출간되어 당시의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잡지의 대명사였던 사상계를 위협했던 청맥의 쟁쟁한 필자들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인도, 그리고 중국에서 벌어지는 유토피아적인 변화의 충동을 보고하고 평가하는 데 진력했던 젊은 지식인들과 기자들은, 서북 출신으로 친미반공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던 사상계와 분명한 대립 노선을 보였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이념적 좌표계를 이룰 사상계와 청맥의 갈등은 냉전 체제의 볼모였던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과 아시아민족주의라는 우회로를 통해 비동맹운동에 귀의하려 했던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갈등이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청맥은 발행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주요한 필진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면서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청맥의 중요한 필진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시인이자 탁월한 산문가인 김수영이 있습니다. 그가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의 독후감 격으로 쓴 어느 에세이의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카리브해협에 있어서나 도버 해협에 있어서나 하바나 대학에서 있어서나 서울운동장에 있어서나 인간의 심장에는 하등에 다를 것이 없고, 오늘날의 전세계의 후진 국가들은 너무나도 유사한 공통적 질곡하에 놓여있으며, 쿠바가 의욕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은 곧 우리들이 의욕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에 틀림없을 것이다. …… 들어라 코리언들아, 평범한 혁명의 진리를 배우라.

많은 아시아의 나라들 속에서 1960년대는 지속되었습니다. 1960년 한국의 4.19혁명은 미국의 후원을 통해 장기집권을 꿈꾸던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는 정치혁명이었지만 동시에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사회를 건립하려는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쏟아져 나온 제3세계적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1968년 유럽의 나라들과 미국, 그리고 세계 전역을 휩쓸었던 68운동의 도미노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23

1983년 델리

그러므로 우리는 1968년이 아니라 비동맹운동의 시대였던 1960년대, 그 장기 1960년대의 시말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비동맹운동의 시대, 제3세계의 시대가 목숨을 거두는 순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인디라 간디의 카스트로 영접 영상

제7차 비동맹운동 정상회의가 인도의 델리에서 개최됩니다. 이 자리에서 비동맹운동의 종말이자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의 최종적인 소멸을 알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10여년전 국가적인 추도 열기 속에서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세상을 떠난 언론인이자 리콴유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시장자유주의적인 성장 모델을 열렬히 지지했던 언론인 출신의 정치가 신나탐비 라자라트남(Sinnathamby Rajaratnam)이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와 함께 인민행동당을 결성해 싱가포르의 정치를 이끈 탁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고 <국가에 대한 맹세>라는 싱가포르인이면 누구나 암송하는 유명한 문서를 작성한 문필가 겸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27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서서히 납치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비동맹이라는 배와 그 배에 탄 모두는 어느 날 소련 항구에 정박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 신나탐비 라자트남

#28-#29
그리고 라자라트남은 제7차 비동맹회의에서 국가개입을 축소하고 시장의 자율적 결정을 옹호하는 입장을 열정적으로 펼쳤습니다.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해 부상한 비동맹국가들의 신흥 자본가계급들은 이제 국가의 보호를 더 이상 원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민족이나 국민의 이해를 내세우며 부를 쌓아오던 이 계급은 이제 그런 거추장스런 휘장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계급으로서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라자라트남은 그러한 비동맹국가들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민의 요구라는 입장에서 국가개입을 더욱 확대할 것을 주창하는 카스트로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됩니다.

라자라트남은 국가개입을 축소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며 국가는 인플레이션을 막고 통화공급을 조정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는데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수십 년간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게 될 경제의 복음이 됩니다.

카스트로는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후광과 명성만으로 좌중을 압도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허약하고 늙은 이빨빠진 호랑이였을 뿐입니다. 수많은 비동맹국가들이 외채 위기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신국제분업체제에 진입하여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저임금 노동을 통해 성장을 이룩한 아시아의 몇몇 나라들은 그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난 듯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한 나라들은 10여년 후면 들이닥칠 외환 위기로 붕괴될 것을 미쳐 깨닫지 못한 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세상은 앞 다투어 제3세계의 대열에서 이탈한, 제3세계에 반한 아시아의 나라들을 축복하는 말잔치에 빠져듭니다. 아시아의 용, 아시아의 호랑이 등 멋대로 이름이 붙여진 이 아시아의 나라들 속엔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나라들은 곧 신흥공업국(NICs)이란 명예로운 작위를 얻기도 합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이제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도약했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그토록 선전했던 성장의 모델을 확인시켜주는 나라들이었습니다. 발전된 나라, 발전 중에 있는 나라, 즉 개발도상국, 저발전된 나라라는 진화의 단계를 만들고 저발전된 나라들이 발전된 나라로 나아가는 성장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정치의 몫이라고 정의했던 이 담론은 “디벨롭먼트” 즉 발전이라는 낱말을 20세기에 가장 인기있고 영향력 있는 개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발전은 비동맹운동이라는 개념을 삼켜버리기에 이릅니다.

비동맹회의는 지속되지만 훗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제3세계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1976년 방콕

태국은 친미반공노선을 택한 비동맹운동의 먼 곳에 자리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꼭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1973년 10월 14일, 태국의 수도 방콕의 민주주의 기념탑 앞에 50만명의 시민들이 운집한다. 그 해 6월 람캄행대학교 총장은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팜플렛을 작성한 학생을 퇴학시키려다 저항에 부딪쳐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몇 달 뒤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돌렸단 이유로 11명의 학자와 대학생이 체포된다. 그리고 이에 맞서 수십만 명이 거리에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대개 젊은 대학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랜 군사독재정권이 물러나도록 요구했다. 또한 인접한 인도차이나 지역에서의 잇단 반제국주의적 투쟁과 사회주의혁명에 고무되어 미국과 일본의 태국에 대한 지배에 손을 뗄 것을 요구했다. 절대군주제를 타도하고 근대적인 국가를 세웠지만 태국은 1957년의 군사쿠데타로 싸릿(Sarit)의 군사 정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 사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특수로 태국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였고 노동자들의 수 역시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렸다. 그들에게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보장되었을리 만무했다. 단지 혹독한 노동통제만이 있었다. 그러나 1973년 이러한 사정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3년 한 해에만 40여건이 넘는 파업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태국제철(Thai Steel Company)의 파업은 한 달여 동안 계속되었고 다른 노동자들 역시 굳건히 연대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태국의 청년층이었다. 1969년 지금은 람캄행(Ramkamhaeng) 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람캄행 개방대학교는 태국의 197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전문기술직에 대한 수요가 늘고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람캄행대학은 1960년의 서울, 1968년의 도쿄와 파리에서처럼 민주주의와 평등, 자주를 위한 투쟁의 기지가 되었다. 특히 이 대학교의 중추였단 공학부의 학생들은 “옐로우 타이거”라는 이름의 가장 전투적인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학생들의 비무장시위를 군대가 진압하기 시작하자 방콕의 일반 시민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옐로우 타이거는 빤파교의 경찰서를 향해 군인들에게서 탈취한 화기를 개조한 분사기를 쏘아대며 격렬히 저항했다.

그리고 1975년 1월 첫 민주적인 총선이 실시되기 전까지 태국은 점차 급진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자, 농민, 소농들의 연대 기구인 삼자연합(A Triple Alliance)을 결성하였고 도시지역의 청년층 사이에서 불법이었던 탸태국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의 선거에서 신세력당(New Force Party), 태국사회주의당, 사회주의전선당 등의 좌파 정당이 전체 269석 중 37석을 얻는다. 그러나 다수 정당으로 정권을 이끌게 된 민주당과 사회농업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펼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고조된 사회적 긴장을 감당하기에 이들 정권은 허약하기만 했다.

1973년 태국 봉기는 또한 반제국주적인 제3세계 투쟁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투쟁에 참여한 학생들은 미 제국주의와 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태국의 군사독재는 전후 냉전 체제에서 미국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1973년만해도 태국 내에 12개의 미군 기지가 있었고 이 안에는 550대의 전투기 그리고 수천명의 미군 병사들이 주둔했다. 마오주의 노선을 견지하던 태국공산당은 태국이 반-식민지 상태에 있다고 주장해 왔고,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을 점차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군 기지를 몰아내자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미군 군사기지 반대 투쟁은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직후 꿀끄릿(Kulkit) 수상은 미군 군사기지 철수를 요구했다.

1976년 10월 6일 방콕의 탐마삿대학교에서 발포가 시작되었다. 캠퍼스 안에 머물던 학생들과 지지자들은 극우 비공식 집단인 ‘빌리지 스카웃’, ‘끄라띵-댕(Krating-Daeng)’, ‘나와폰(Nawapon)’ 등의 무리들로부터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학교에서 끌려나온 학생들은 사남루앙(Sanam Luang) 근처의 나무들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다른 학생들은 법무부 건물 앞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 사이에 무리들은 불길 주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1975년 마침내 태국에 인접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은 사회주의적인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태국에서 공산당의 힘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태국의 국왕은 라오스의 군주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였다. 그리고 그간 학생들에게 온정적이던 입장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지난 3년간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얻은 모든 성과들은 파괴되었다. 노동자, 학생들의 모든 단체들이 활동을 금지 당했으며 비판적인 언론들은 판금되었다. 수많은 책들 역시 금서가 되었다. 대학도서관의 서가를 뒤져 책을 찾아내고 공개적으로 소각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피의 대학살이 일어나자 태국의 대학생들은 하나둘씩 무장투쟁을 위해 태국공산당이 활동하는 시골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마오주의적 태국 공산당은 도시의 노동자계급과 청년 세대들보다 농민들에 의지한 혁명을 꿈꾸었다. 그 결과 시골로 탈출한 새로운 청년 세대들과 태국 공산당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태국이 이미 상당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농촌의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시한 태국공산당의 입장은 태국을 새로운 사회로 변혁시키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1988년에 이르렀을 무렵 태국공산당에 가담했던 많은 학생 출신의 혁명가들은 도시로 돌아온다. 그렇게 귀환한 옛 학생운동가 가운데 한명이 수라짜이이다.

#48
Man and Buffalo (Kon Gap Kwai)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저항 음악의 한 갈래일 “삶의 노래- 쁠렝 쁘와 찌윗Phleng phuea chiwit, Songs for life”을 개척한 캐러반의 리더, 수라짜이 응아 잔띠마똔(Surachai “Nga” Jantimathawn)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태국의 풍부하고 다양한 근대 대중음악의 갈래 가운데 세계에 널리 알려진 흐름 가운데 하나일 삶의 노래는 태국 공산당의 창설자였던 시인이자 문헌학자, 역사하자였던 찟 푸미삭(Chit Pumisak)이 이끌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적 예술운동이던 “삶을 위한 예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푸미삭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경모의 감정은 그들의 첫 번째 앨범의 7번째 곡이 “짓 푸미삭”인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람캄행대학교의 열정적 학생운동가였던 수라짜이는 동급생 위라삭 순타운시 Wirasak Sunthawnsi와 함께 태국의 전통적인 포크 발라드(태국 북동부지역의 룩뚱 같은)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포크록으로부터 차용한 요소들을 섞어 쁠렝 쁘와 찌윗의 발판을 닦았다. 그러나 1979년 사면을 받고 방콕으로 돌아와 다시 밴드를 결성한 캐러반의 멤버들은 얄궂게도 보수적인 왕당파, 옐로셔츠파를 지지하며 그들의 정치집회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캐러반의 첫 번째 앨범에 실린 <삶을 위한 노래>를 상징하는 사람과 소, 꼰 갑 끄와이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과 소(Man and Buffalo, Kon Gap Kwai) 트랙 재생

1975년, 호치민시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이 함락됩니다. 북베트남군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은 해방되고 베트남전쟁, 미국의 표현을 빌자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알려지게 될 이 전쟁에서 자신의 독립을 지키고 스스로 선택한 사회를 결정할 수 있는 제3세계 민중의 위대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1974년,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으로 군부독재 몰락. 그리고 과거의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독립을 이룹니다.

크리스 마케르, 태양없이 중에서 발췌

아밀카르 카브랄이 1972년 인민궁전에서 정보주간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아밀카르 카브랄은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고 불러도 좋을 범아시아주의적인 제3세계 민중투쟁의 전사였지만 또한 비동맹운동의 가장 눈부신 문화혁명의 실천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카브랄은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민족해방투쟁 기간 동안 자신의 나라의 젊은 이들을 쿠바로 파견하여 영화를 공부하고 오도록 한다. 그들은 사나 나 느하다 Sana Na N’Hada, 플로라 고메스 Flora Gomes, 호세 볼라마 코붐바 José Bolama Cobumba, 그리고 호세피나 크라토 Josefina Crato 였다. 크리스 마커의 영화 <태양 없이>에 불쑥 등장하는 기니-비사우의 장면들 가운데 카니발 장면은 바로 사나 나 느하다가 촬영한 것을 마커가 삽입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기니-비사우의 장면들은 대부분 마커 자신이 촬영한 것이 아니다. 마커는 잠시 기니-비사우의 혁명정부의 초대로 영화 제작을 가르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장에서의 기니-비사우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은 마커가 실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한 지시에 따라 학생들이 촬영한 것을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커가 타인의 풋티지를 도용했다는 것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역사 이후에 도래한 시간의 정체를 구슬프게 물으며 기억과 시간, 역사의 관계를 집요하게 사색하는 <태양 없이>에서 기니-비사우의 풍경은 1968년을 전후한 급진 지식인과 흑인 제3세계예술운동이 접촉하는 희귀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봄, 저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뜻하지 않게 아밀카르 카브랄과 크리스 마커를 함께 조우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영화제에선 마침 포르투갈 출신의 여성 감독 필리파 세자르 Filipa César의 <스펠 릴>이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그 영화에서 우리는 느하다 감독이 아카이브에서 빼돌린 필름 조각들을 독일로 가져가 디지털로 복원한 후 마케르 식의 전술을 활용해 천막 이동 극장을 열어 청년들과 농촌지역 주민들에게 상영회를 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영화 상영회에서 그들은 바로 장기 60년대, 기니-비사우에게는 포르투갈 제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혁명적인 역사의 시대를 방문하게 됩니다. 포스트-제3세계의 제3세계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 가냘픈 저항은, 나임이 말하는 망각에 대항한 투쟁이자 비동맹운동의 세대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세대 사이에 놓인 간극을 좁히려는 투쟁에의 요구에 응답하는 가장 멋진 사례일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카브랄은 혁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의식을 급진적으로 고양시키는 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한 비동맹운동의 지도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브라질의 혁명적인 교육가 파울로 프레이리를 기니-비사우로 초대합니다.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억압당한 자들의 교육>이라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혁명적인 교육 이론의 주창자이자 탈식민지 민중의 교육학자이며 동시에 연극과 퍼포먼스를 비롯한 예술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를 대표하는 책인 <페다고지>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가 <진행형의 페다고지-기니-비사우에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카브랄은 기니-비사우의 문화행동연구소로 하여금 프레이리를 초대해 혁명적인 제3세계 국가에서 그의 문해교육 방법을 실행하도록 요청했습니다. 프레이리가 직접 활동했던 칠레의 경험은 문맹률을 크게 감소시키지 못했다. 나아가 1970년 이래 변화하는 사회구조와 억압조건으로 인해 프레이리의 의식화(conscientization) 이론은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70년대 중반 프레이리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교육체계는 현존하는 억압구조를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개혁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며, 기니-비사우야말로 자신의 문해교육론이 국가 재건에 이바지할 수 있는 혁명적, 제3세계적인 맥락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기니-비사우에서의 자신의 작업을 통해 프레이리는 자신의 문해교육 방법이 제3세계에 보편적인 타당성과 적실성을 지닐 것이라는 포부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티아고, 알제 1973

알제리의 알제에서 제4차 비동맹운동 정상회담 개최, 알제리 대통령인 사회주의자 우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은 신국제경제질서(NIEO: 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 구축을 촉구. UN 총회에서 신국제경제질서(NIEO: 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 채택하고 그 해 말, 국가의 경제적 권리의무헌장(the Charter of Economic Rights and Duties of States) 선언.

그러나 부메디엔의 선언은 또 하나의 그림자에 의해 그늘져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출신의 장교로서 군부에 의지하는 제3세계의 발전의 노선을 닦은 인물이었습니다. 부메디엔은 앞선 벤 벨라 정권이 더딘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행하고 있다고 반발하는 알제리 공산당과 노동조합, 여성운동 등의 반발이 거세지며 정권의 영향이 기울어지자 군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는 벤 벨라를 뒤이어 국유화를 비롯한 경제 정책을 유지하지만 아래로부터 인민들 자신의 힘과 의지를 통해 나아가는 변화를 포기합니다. 그 자리에 그는 국가적 민족주의를 채워넣으며 국가에 의한 사회의 지배를 강화합니다. 부메디엔은 수도인 알제에 화려한 건물을 짓고, 행진과 열병식을 성대하게 진행하며, 과거의 지도자들의 어마어마한 동상들을 건립하고, 아직도 미완인 투쟁들을 기리는 기념물들을 도처에 짓습니다. 민족해방투쟁의 정당함과 위대함을 대변하는 과거의 지도자와 투사들의 이미지는 현재의 정치세력의 도덕적 권력을 뒷받침하지만 동시에 투쟁을 배신하는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국민들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3세계 버전의 정치의 미학화는 결국 알제리로 하여금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꿈을 접고 기생하는 자본가계급과 강한 군부에 의해 움직이는 제3세계 형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도록 만들고 맙니다.

한편 칠레 아옌데 정권 합법적 선거로 사회주의 혁명 완수하지만 피노체트 군대에 의해 전복.

국민에게 보내는 마지막 말
(살바도르 아옌데)

나의 벗들이여
분명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말을 건네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공군은 포르탈레스 라디오와 라디오 코포라시옹의 타워를 공습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우리의 땅의 보통의 여성들, 우리를 믿었던 캄펜시나, 보다 많이 일했던 노동자들, 자녀들에 대한 우리의 걱정을 알고 있던 어머니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칠레의 전문가들, 자본주의 사회가 소수에게 부여한 특권을 방어하고자 하는 계급적인 기반의 협회들, 그 전문가 협회들이 지원하는 선동에 맞서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애국적인 전문가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젊은이들, 노래를 부르며 우리에게 투쟁의 기쁨과 정신을 선사했던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칠레의 사람,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에게 말합니다.

인민은 자신을 방어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인민은 총탄에 의해 파괴되고 벌집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또한 인민은 굴욕을 겪어서도 안 됩니다.
나의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저는 칠레와 그것의 운명을 신뢰합니다. 누군가는 배반이 기승을 떨치는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할 것입니다. 곧 자유로운 인간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걸음을 딛을 거대한 거리들이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게 제 마지막 말입니다. 나는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적어도 흉포함과 비겁함 그리고 반역을 처벌할 도덕적인 교훈이 되리란 걸 확신합니다.

칠레 산티아고, 1973년 9월 11일

1968년, 5월 파리

1월 북베트남 구정 공세 개시. 제3세계주의적 민족해방투쟁의 가장 뜨거운 화염이 불타오릅니다.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대학생들의 투쟁이 확산되며 노동자들이 가세합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지로 확산되며 이른바 서유럽의 68혁명 혹은 68운동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1967년, 낙살라이트

5월 낙살라이트(Naxalite) 시위에 경찰이 실탄 발표하며 투쟁이 격화되고 유로코뮤니즘의 모델에 가까운 합법적 의회 활동을 주장하던 인도공산당으로부터 마오주의자들이 분리되어 나옵니다. 정당과 노동조합의 이원적인 조직을 우선시하고, 산업노동자가 변혁의 일차적인 주역을 맡아야 한다고 보았던 인도공산당의 주류, 실은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 머물며 야당의 지위에 크게 만족하고 있던 세력에 맞서, 마오주의자 인도공산당(CPI-ML: Communist Party of India (Marxist–Leninist))이 결성됩니다.

이들은 서벵갈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산업노동자계급과는 다른 피억압 인민들의 자생적이면서도 비의회적인 투쟁을 강조한 흐름에 크게 영향 받은 일군의 학자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훗날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혹은 서발턴 연구라고 불리게 될 이론을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북미 지역이나 호주의 명문대학교에서 스타 학자로서 명예를 누린 서발턴 연구자들은 초기 서발턴 연구자들 중의 다수가 급진적인 마오주의에 영향을 받았음을 은폐합니다. 그러나 이런 학술적인 비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브릭스의 일원으로 급성장한 경제 대국인 인도에서 낙살라이트는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혀 끊없는 탄압을 받지만 인도를 휩쓴 개발과 투자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농민과 하층 계급들이 빈곤과 토지로부터의 축출, 빚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낙살라이트에 지지를 보내며 한때 불가촉 천민으로 불렸던 달라이트의 원망을 대변하는 정치지도자들을 따를 것입니다.

1966년, 아바나

삼대륙회의로 불리기도 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회의 쿠바의 아바나에서 개최.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세 개의 대륙의 민족해방운동 성향이 정부와 운동이 함께 결집합니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은 평화공존이라는 원칙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당장 쟁점은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미군 50만명이 초유의 현대적인 전쟁 기계로 형편없는 무기와 오직 용기만으로 달려드는 베트남 인민과 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화공존의 원칙을 외치는 이들은 베트남과의 연대를 주저했습니다. 민족해방운동의 1세대 지도자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모두 무력해진 상태였습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알제리의 우아리 부메디엔 같은 이들은 베트남과의 연대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베트남해방전선의 대표와 북베트남 대표의 발언을 경청하는 것 말고는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통해 전 세계 민족해방세력이 승리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실망한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콩고로 향합니다. 그리고 삼대륙의 혁명 세력이 베트남과 연대하고자 한다면 “제2의 또는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1965년, 발리

인도네시아 1965년 9월 30일의 밤 사태 개시, 수백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 대학살 시작. 수하르토가 이끄는 신질서(New Order) 체제 시작. 9월30일 운동이라고 알려진 공산당 소속 장교들이 인도네시아의 장군들을 납치해 살인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다음날 군부를 장악한 수하르토의 군부 장악을 통해 광란에 가까운 공산주의자 마녀 사냥으로 이어집니다. 이로써 사회주의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당원을 거느렸으며 집권의 문턱에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궤멸됩니다. 그리고 공산당원은 물론 노동조합활동가나 농민운동가, 급진적인 지식인, 언론인, 학자, 예술인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재판 없이 구금되어 악명높은 부루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오랜 세월 유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단 2년 사이에 130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이 끔찍한 대학살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채 있습니다.

제네바, 1964

국제연합 무역개발협의회(UNCTD)

196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합 무역개발협의회(UNCT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세계에서 120개국이 참가합니다. 그 가운데 77개 나라가 라울 프레비시 주도로 77그룹(G77: Group of 77)을 결성합니다. G-77은 일차 산품의 가격 안정과 가격 개선을 요구하고 제3세계에서 생산한 공산품에 대해 제1세계의 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넣었으며, 제1세계의 재정 지원 흐름을 확대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구가 실제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제3세계주의’ 관점이 자리잡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 그룹의 창설을 주도했던 라울 프레비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당시까지 주류 경제학자들과 미국 및 유럽의 열강들은 식민지 세계의 문제는 빈곤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기술 수준을 위시한 전통주의 때문이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전통 문화는 정치적 안정과 과학 발전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처방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발전이라는 근대화론의 요점이기도 합니다.

비동맹의 사회과학, 제3세계의 경제학, 근대화론과 종속이론의 대결

그러나 이런 주장 어디에도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레비시는 이런 주장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경제학자입니다. 1948년 유엔 산하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 위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식민지가 처한 경제 문제가 바로 발전을 하면 할수록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저발전 상태에 머물게 되는 이유를 해명하고자 했습니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좌익용공사상으로 낙인찍혔던 종속이론이, 바로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전통사회와 근대사회라는 서구 식민주의자의 프레임을 중심 대 주변이라는 프레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대 이래 미국의 학자인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이 사회과학계를 휩쓸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제3세계의 경제학, 비동맹의 사회과학이 어떻게 창설되는지를 엿보게 됩니다. 지난 수십 년간 근대적 지식의 억압과 지배를 낱낱이 해부하는 데 바쁜 철학자들과 얼치기 사회평론가들의 허세스럽고 요란한 글 어느 곳에서도 저는 제3세계의 사회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권력, 담론과 지배에 대하여 엄청나게 수다를 떨어대지만 그러한 질문이 전체 세계의 민중들과 관련하여 숨가쁘게 움직였던 비동맹운동의 시대로 확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사회적인 것의 과학이 유럽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관해 대량의 글을 썼던 저 역시 부끄럽게도 이에 관해서는 최근 몇 년 동안에야 겨우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알제, 1962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프랑스 사이에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알제리는 독립을 이룩합니다.

베오그라드, 마닐라 1961

녹색혁명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발의로 남미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진보를 위한 동맹’ 개시. 남미지역에서의 녹색 혁명 본격화. 미국 국제개발청 총재 윌리엄 가우드(William Gaud), 제3세계에서의 혁명은 폭력 적색 혁명이나 이란식 백색혁명이 아닌 녹색 혁명이어야 한다며 농업생산의 증대의 정치적 의의를 정의한 바 있습니다. 품종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것은 사실 한국 뿐 아니라 1960년대의 개발도상국에서 널리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냉전 체제에서 미국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신생 독립국들이 공산주의로 기울지 않도록 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개발 이론가들은 농업 생산력을 높여 농촌의 절대 빈곤을 해결하면 산업화를 위한 기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이 농민들 사이에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말하자면 미국이 생각했던 “녹색혁명”은 신생독립국의 “적색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록펠러재단이나 포드재단 등은 개발도상국의 농업 발전을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지원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기적의 쌀”로 일컬어진 IR8을 비롯한 여러 가지 난쟁이 벼가 개발되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나라들에 새로운 품종을 보급하시 시작합니다.
박정희 정부 역시 녹색혁명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인이 즐겨 먹는 쌀이 녹색혁명을 이끄는 나라들에서 재배하는 것과 다른 종류였기 때문이다. 쌀알이 짧고 차진 “자포니카” 품종의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 정도로 소수의 나라들입니다. 나머지의 아시아 나라들은 길고 찰기 없는 “인디카”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다. 자포니카 쌀의 경우 이미 일본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빈곤선을 벗어나지 못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생각하면 미국으로서는 인디카 쌀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더욱 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서울대학교 농대 교수였던 허문회 박사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인디카 품종을 한국에 도입하면서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시켜 만든 저 유명한 통일벼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통일벼의 보급과 더불어 미곡 생산은 증대되어 1977년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합니다. 심지어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그러나 녹색혁명은 제3세계의 빈곤을 막고 공산화를 억지하는 효험을 나은 것이 아니라 다수확품종에 의지한데다 병충해를 피하기 위해 숱한 살균제, 살충제 같은 화학적 보호장치에 의지하는 농업을 만들어냈고 농민 자신이 아닌 도시거주민을 위한 농업이 됨으로써 농촌 지역의 생존과는 멀어지는 반농업적인 농업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씩 이같은 녹색혁명의 장기적인 후유증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베오그라드 1차 비동맹회의

구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22개 나라의 정상들이 모입니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비동맹운동의 출범을 알립니다. 비동맹운동의 첫 공식적인 회의 주된 현안은 평화공존이었습니다. 평화공존이란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것은 제국주의와 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탈식민지 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신식민지적 지배 관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습니다. 그 때문에 비동운동은 유엔의 하위기구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전 세계의 핵무장 해제와 유엔의 민주화라는 두 사지 사안에만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동맹운동을 급진화하고자 하는 세력과 이를 억지하고 제한하려는 세력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이 벌어지게 됩니다. 과거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들을 위한 막연한 도덕적인 구호가 되어버릴 비동맹이라는 평화의 이상은 핵전쟁의 공포와 총력전의 충격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얼마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만 효과적인 사회 변혁의 프로그램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뉴욕과 카이로 1957년

아프리카 그리고 제3세계라는 관념

가나가 독립하면서 수도인 아크라에서 제1차 아프리카 국가회의 개최되고 전아프리카인민회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프리카란 아프리카의 문화와 언어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독립이라는 공통의 이해”입니다. 이는 제3세계라는 개념을 새길 때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나임 모하이멘의 작업에서 나레이터와 인터뷰어로 활약하는 급진적인 제3세계 학자 비자이 프라샤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3세계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프로젝트였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인민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들은 무엇보다 인간적 존엄성을 그리고 삶의 필수재인 토지, 평화, 자유를 염원했다. 그들은 불만과 열망을 다양한 형태의 조직으로 모아냈고 민족지도자들은 이 조직들을 통해 요구사항을 수렴할 발판을 마련했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같은 지도자들은 20세기 중반의 10년간 여러 곳에서 만난 민족지도자들은 인민의 희망을 담아낼 사상과 일련의 기구를 만들어 갔다. ‘제3세계’란 이러한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들을 아우르는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그해 말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회의(Afro-Asian People’s Solidarity Conference)가 개최됩니다. 반둥회의보다 많은 45개의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이 대표를 파견한 이 회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제3세계 여성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61년 레닌 평화상을 받게 되는 인도의 간디주의적 여성 사회개혁가인 라메슈와리 네루가 연설을 합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인물은 아이샤 압둘-라만이었습니다. 이슬람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압둘-라만은 여성들의 교육을 금하는 전통에 저항하며 학업을 계속해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슬람 문학의 이론가로서 카이로의 어느 대학의 아랍이슬람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하는 실천적인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녀가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회의의 기조연설을 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혁명의 성공은 노예 상태에 있는 절반의 인민을 해방하고, 여성을 마비와 실업, 무력함에서 구제하고, 민족의 두 반쪽인 남성과 여성 간에 차이를 없애는 데 달려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
UN은 국제원자력기구를 발족합니다. “모든 대량 살상무기의 생산, 실험, 사용 금지를 비롯해 군사력과 무기를 규제, 제약, 통제, 축소하고 이를 위해 효과적인 국제 통제 기구를 창설하라”는 반둥회의 최종 성명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이 국제원자력기구는 반둥이 낳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만으로 군사적 개입과 침략이 횡행하는 21세기의 암흑 속의 폭력은 반둥 정신의 몰락과 제3세계, 비동맹운동이 패주함에 따른 세계의 풍경을 언뜻 비춥니다.

반둥, 1955년 4월

반둥 회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sian-African Conference).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4월 개최. 반둥 회의(Bandung Conference)라고도 불리며 아시아, 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들이 참여하여 ‘반둥10원칙: 세계 평화와 협력의 추진에 관한 선언)’을 채택. 훗날 제3세계가 탄생한 사건으로 기억되며 제3세계주의(thirdworldism)나 반둥정신(Spirit of Bandung) 역시 이를 통해 출현한다. 제가 지금까지 살펴왔던 제3세계주의와 비동맹운동의 기원이 되는 곳에 마침내 이르렀습니다.

반둥 회의 첫날 연단에 오른 수카르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두 대륙을 휩쓸었습니다. 전 세계의 정신적 영적 정치적 얼굴이 바뀌었고 아직 그 과정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에 새로운 조건,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제, 새로운 이상들이 퍼져나갔습니다. 민족적 각성과 부흥이라는 허리케인이 대지를 휩쓸며 세계를 흔들고 바꿔놓았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세계를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반둥회의가 끝나고 반둥 10원칙이 채택되었습니다. 그것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둥 10원칙

1. 근본적인 인권 그리고 국제연합의 목표와 원칙을 존중한다.
2. 모든 나라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
3. 모든 인종들의 평등 그리고 크던 작던 모든 민족들의 평등을 인정한다.
4.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는다.
5. 국제연합헌장에 따라 개별적으로든 집합적으로든 자신을 지키려는 모든 나라의 권리를 존중한다.
6. 열강의 특정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집합적인 방어 조약을 활용하지 않는다.
7. 한 국가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강제적 행동이나 위협 혹은 무력의 사용을 피하며, 타 국가들에 대하여 어느 나라도 압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8. UN헌장에 따라 당사자들 자신의 선택에 따른 여타 평화적 수단뿐 아니라 협상, 조정, 중재 또는 사법적 해결과 같은 평화적 수단을 통해 일체의 국제 분쟁을 해결한다.
9.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시킨다.
10. 정의와 국제 의무를 존중한다.

이제 오늘 강의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반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 가운데 한 구절로 되돌아가면서 오늘의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3세계와 비동맹운동이라는 과거와 잠시 해후하고 난 이후, 제가 이 문장들을 굳이 주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주석이 필요한 말이라기보다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도록 다그치는 윤리적인 충고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어떤 기억을 제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느닷없이 주어지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드는 것은 역사적 유물론의 과제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테제6 중에서

– 손짓하면 암전

# 수카르노 연설 동영상

_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강연을 위한 대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