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비)유물론의 매혹 혹은 그것은 충분히 유물론을 쇄신하고 있을까

Leviathan (2012) – Official Trailer

한때 주체가 점유했던 비어있는 왕좌에 객체를 앉히는 것이 비판적 사유의 목적은
아니다
그 자리에 선 객체라면 단지 우상일 따름이다비판적 사유의 목적은 그러한 위계를 폐지하는 것이다.”(Th. W. 아도르노)

철학 생도들의 인터넷 블로그 사이트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서로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코멘트를 남기며 교류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어딘가 공통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초월적 인간주의가 공언하던 지식의 확실성에 의문을 품은 채 자유로운 사고를 실행하고 있으며(그런 점에서 그들은 사변적(speculative)이다), 저 악명 높은 칸트 이후의 비판철학에 의해 선언된 좁디좁은 현상계를 넘어 물-자체(An Sich, Thing-in-itself)란 이름으로 접근 금지된 세계, 불가해한 그 세계의 존재자들을 발견하고자 분투하고 있음을(그런 점에서 그들은 실재론(realism)을 지지한다)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영국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마련된 학술대회에서 한 자리에 모인다. 새로운 유물론의 대표 종(種)이랄 수 있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 탄생한 순간이다. 레이 브레시어 R. Brassier, 이언 해밀튼 그랜트 I. H. Grant, 퀭탱 메이야수 Q. Meillassoux 그리고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그래엄 하먼 G. Harman이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유물론의 탄생을 이렇게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철학적인 운동 혹은 프로그램은 다양한 개념을 낳고 다양한 이론적 프로그램을 생산하며 또 흥미진진한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번성하여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명성이 높은 이는 단연코 그래엄 하먼일 것이다. 그는 사변적 실재론의 대오에서 일찌감치 이탈하여 자신의 전매특허임을 별나게 강조하는 그의 철학적인 프로그램, 즉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을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자신의 동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유물론과 실재론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은 비유물론(immaterialism)이란 입장-물론 이는 관념론과 전연 관계없다-에 속한다고 자처한다. 그는 곧잘 자신은 ‘물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퉁명스레 말하곤 한다. 또는 의식을 통해 얻는 진실은 세계에 대한 접촉에서 얻는 숱한 앎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일부에 불과하다 단언하면서 미적 경험(그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마이클 프리드, 스텐리 카벨 같은 모더니즘 미학의 추기경들에 가까운 미학자들을 열심히 옹호한다)을 비롯한 다양한 접촉의 양태들을 강조함으로써 인식론 중심주의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실재론자들을 힐난한다. 그는 철학 전공자들의 알렉산드리아에 가까울 ‘필페이퍼즈(PhilPapers)’ 사이트에서 ‘사변적 실재론’ 카테고리의 편집자 역할을 맡음은 물론, 여러 출판 프로젝트를 책임지거나 지원하여왔다. 대학에서 그와 관련한 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지난해인 2018년 영국의 세계적 출판사인 펭귄북스의 자회사인 펠리칸 북(A Pelican Book)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을 출간하였다. 어쩌면 운이 좋으면 우리는 그의 책이 공항 서점 진열대의 페이퍼북 소설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4종의 객체는 이 책과 더불어 그의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안내자다. 이 책이 하먼의 사변을 이루는 주요 골격을 상세하게 밝힌다면 후자는 대중적인 입문서에 가깝고, 그가 4종의 객체 이후 새로운 유물론의 다른 입장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결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객체-지향 존재론의 판촉을 위한 팜플렛이기도 하다.

한때 우리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느닷없는 철학적 선언에 어리둥절하는 이상한 상황에 처해야 했다. 우리는 결국 “언어의 감옥” 갇혀있고,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언어/담론/표상/텍스트/이데올로기를 통해서일 뿐이기에, 우리는 세계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매개하는 바로 그것들을 비판하여야 한다고 모두 떠들었다. 사람들은 이를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 전부터 우리는 이와 전연 반대되는 철학적 선언들을 마주하고 다시 또 어안이 벙벙해지고 있다. 이데올로기/스펙터클/시뮬라크르/담론 등을 거론하던 이들은 모두 퇴각하고 이제 그 자리를 새로운 유물론(new materialism), 실재론이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사변적 전환(speculative turn)/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미학적 전환(aesthetical turn)/동물적 전환(animal turn)/포스트 휴먼 혹은 비-인간적 전환(post-huaman/non-human turn) 등 산만하고 잡다한 용어들을 통해 명명하기 시작했다.

폭발적이라 불러도 좋을 새로운 사변적 이론들의 프로그램은 몇 가지 점에서 수렴한다. 그들은 언어, 담론, 지식, 문화, 그 무엇이든 주체성의 권역 안에 있던 대상을 해방시키고 대상(객체) 자체, 즉 (사)물(thing)의 자율성과 그것의 능동적 작인으로서 역능/생기론적인 힘 등을 강변한다. 그들은 그것을 근대성의 죄과, 즉 칸트주의적 비판 철학(메이야수의 기소장에는 그것이 ‘상관주의(correlationalism)’란 죄명으로 기재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이를 ‘인간 예외주의’라고 규탄할 것이다)을 폐지할 것을 강변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주체라는 개념에 씌워진 혐의를 고발하고 그것을 청산하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의 다른 이름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하며, 주체/객체의 위계는 타도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 사이의 수직적 관계는 평탄화되어야 한다!(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유물론을 위한 이름으로 ‘평탄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란 이름을 수여한다. 인간은 객체의 세계 바깥에서 독립하여 그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객체들 가운데 하나로서 자신의 위치를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은 하먼 특유의 비판 공정이라고 할 ‘이중환원(duomining)’ 즉 이 책에서 옮긴이가 실재환원(undermining)과 성질환원(overmining)이라고 각각 번역한 두 가지의 환원에 대한 비판이다. 실재 환원이란 어떤 객체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구성하는 최종의 궁극적 원인이나 기체(基體)를 상정하려는 접근이라면 성질환원이란 사회구성론이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담론적, 수행적 규정의 접근처럼 객체란 어떤 행위나 작용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접근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유물론은 크게 생기(生氣)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제인 베넷 J. Benette), 존재자론Onticology(레비 브라이언트 L. Bryant), 존재학ontography(이언 보고스트 I. Bogost),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퀭탱 메이야수 Q. Meilassoux),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그래엄 하먼 G. Harman), 사물 이론Thing theory(빌 브라운 B. Brown), 다형적인 유물론적 존재론 plastic materialist ontology(카트린느 말라부 C. Malabou)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을 내건다. 아울러 여기에 정동(affect) 혹은 분위기(mood/atmosphere)와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른바 정동적 전환, 비-인간적 전환(non-human turn) 역시 이에 추가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추세의 핵심은 주체-객체의 근대적 형이상학의 이분법-메이야수의 표현을 빌자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효과-을 넘어 인식, 이성, 무의식 등의 개념을 통해 식별된 주체의 개념을 거부하고 다양한 물질적 대상과 힘, 관계 등을 역시 행위와 실천을 구성하는 행위자(agency/actant)로서 승인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주체는 객체의 일부일 뿐이며 소여성(givenness)과 객체 자체는 다른 것이 된다. 그리하여 주체와 객체는 횡단 불가능한 거대한 간극을 통해 분리된 항이 아니라 이제 동일한 평면에 속한 것들로 여겨진다. 이제 새로운 유물론은 주체/객체의 대립 혹은 구분을 거부하거나 철회하면서 주체의 대립 항으로서의 객체(object) 또는 대상을 대신해 사물(thing), 실체(substance), 내재적 힘의 평면, 아상블라주(assmeblage), 혹은 주체 없는 객체(subjectless object) 등 새로운 존재의 이름들을 내세운다.

이 점에서 하먼은 특기할 만한 자신의 ‘철학적’ 사변을 구축한다. 하먼은 새로운 유물론을 철학사 안에 잠재하거나 부주의하게 간과되었음에도 시도된 바 있던 다양한 이론적 사색 등을 조회(照會)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객체의 다이어그램을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4종의 객체라는 그의 사변적 존재론의 윤곽이다. 그러나 그는 존재 혹은 객체에 관한 일의적인 논변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무한히 다양한 객체들을 모두 객체란 그물로 포획하기에는 객체 내의 차이, 하먼이 사용하는 개념을 빌자면 ‘긴장(tension)’ 혹은 객체/성질 사이의 ‘균열(rift)’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평탄한 존재론’을 거부한다. 그는 이러한 긴장의 종류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객체들의 파노라마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유물론의 최저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곤 하는 최종적인 물질 따위의 관념에서 갈라선다. 그는 현상학의 계승자로서 감각 객체, 감각 성질 같은 개념을 통해 객체가 서로에게 현상하고 접촉하고 관계 맺는 방식들이 다기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즉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인식과 경험에 포착되는 객체가 있지만 그로부터 ‘물러나는’ 객체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객체들끼리의 관계 혹은 객체들이 그 자신, 즉 자신의 성질들이나 구성부분들, 현상들과 맺는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따라 객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겹쳐져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객체-지향 존재론이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친절하게도 객체의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제법 정연한 지도를 마련해 준다. 이것이 이 책의 9장인 ‘존재학’을 가득 채운 도해들이다. 그리고 이 그림들은 실재 객체, 실재 성질, 감각 성질, 감각 객체라는 4개의 개체의 양태와 그 사이에 가능한 10가지의 연결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또한 하먼의 철학사 주해이기도 하다. 그는 하이데거의 저 유명한 ‘눈-앞에-있음(Vorhandenheit)’과 ‘손-안에-있음(Zuhandenheit)’을 원용하면서 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에 대한 자신의 긴장을 선취한 이론을 발견하고,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서 실재 객체와 실재 성질의 긴장에 관한 서술이 예기되었음을 발견하며, 후설의 형상적 직관 같은 사고 실험을 감각 객체와 감각 성질 간의 그리고 감각 객체와 실재 성질 간의 긴장을 설명하는 요소로 지목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간극 사이의 긴장에서 놀랍게도 시간, 공간, 본질, 형상이라는 범주들을 도출한다. 또한 우리의 인식과 경험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객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는 대담한 가설을 동원하기도 한다. 객체가 취할 수 있는 양태에 따라 4가지 객체를 구별하고 그것들이 맺는 연결을 통해 10가지 순열을 얻어낸 하먼은 그의 어떤 책의 제목처럼 만물(everything)의 이론일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에 대한 의구를 이 글의 마지막에서 간략히 개진할 것이다.

새로운 유물론의 주된 노선 가운데 하나는 주체-객체의 분할을 폐지함으로써 체험, 변용(affection) 등의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전-주체적인 차원을 역설하면서 주체 없는 주체성의 모델을 생산하는데 진력한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새로운 유물론의 공격은 이중적인 전선에서 펼쳐진다. 먼저 그것은 주관적 인식의 상대항으로 가정된(또 그렇다고 그들이 추정하는) 대상 혹은 객체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주체란 개념에 적재되어 있다고 믿는 가치와 위엄을 파산시키고자 한다. 물론 이는 당연히 나름의 정치적인 효과를 수반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비판’이란 모델에 쏟아 부어진 격렬한 고발일 것이다. 독일 관념론의 다른 이름일 ‘비판’철학이든 아니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든 비판은 이제 새로운 유물론의 공적이 된다. 하먼 식의 표현을 빌자면 수조개가 넘는 존재자들로 이뤄진 세계에서 인간이 절반의 몫을 차지하고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나머지 절반 속에 욱여넣는 폭력적 조처이다. 자신을 제외한 수조개의 존재자들을 나머지 절반의 칸에 감금하는 또한 인간-주체와 전연 상관없이 자신들끼리 관계를 주고받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정치에서 배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주체에게만 배타적으로 ‘공적인 것’을 구성하는 자격을 부여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하며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인간-주체만 배정하는 폐악을 중단해야 한다. 레비 브라이언트의 말을 빌자면 ‘객체들의 민주주의democracy of objects’를 도입해야 하며, 라투르의 구호를 빌자면 ‘객체들의 총회(assembly)’를 소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온전히 객체의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을 통해 알려진 객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 없는 객체, 주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객체, 의식과 언어를 통해 알려지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 있다고 역설하는 사변은, 철학의 역사에서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엄 하먼이 참조하고 의지하는 하이데거는 특히 그러하다. 물론 하먼의 하이데거는 여러 얼굴을 한 하이데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기초존재론을 극단화된 주관주의 철학으로 보는 한 편의 주장이 있다면 인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사물의 실재성을 옹호한 유물론자로 간주하는 한 편의 주장이 있을 것이다. 하먼은 물론 후자의 하이데거를 채택한다. 하이데거가 후기에 전개했던 시적인 사유와 암시로 가득찬 객체에 대한 사유-물론 객체라기보다는 그가 그를 위해 배정한 개념들은 사물일 테지만- 또한 훗날 하먼에 의해 ‘4종의 객체’라는 존재의 일반적 도식으로 탈바꿈하는 ‘사방대상’(das Geviert, 四方対象)이란 수수께끼같은 모델은 모두 하먼의 존재론의 초석이 된다. 하먼은 포스트-하이데거적인 현상학을 통해 유물론을 급진화한다. 아무튼 오늘날 부상하는 새로운 유물론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윌리엄스의 실용주의 심리학, 톰킨스(Tomkins)의 정동적 심리학 등이 복원되는 것도 유의할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반복되는 철학적 보수화의 변주라고 치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유물론의 이론적, 정치적 효력은 이미 현실에서 확대되고 있고 그것은 무력한 비판적 유물론(특히 역사유물론)을 대신할 수 있는 듯이 지지받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최신의 과학기술의 성과나 사회분석의 지지를 받으며 오늘날의 상식으로 군림하고 있다. 게다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불길한 진단은 사유의 충격을 야기하는 주장에 머물지 않고 숫제 존재의 지평 전체를 재고하도록 하는 분기점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쇄도하여왔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유물론이 다시 돌아온 멍청한 이데올로기라고 얕잡아보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 관념으로 작동한다.

초연결사회의 사물인터넷 운운의 담론에서 우리는 이미 사물을 기꺼이 의인화하는 새로운 애니미즘적인 어법에 사로잡힌다. 자연 다큐멘터리나 동물 다큐멘터리는 대개 그 객체들이 인간에 ‘대한’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 주체라는 듯이 보이스오버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의인화 한다. 동시대 예술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설치 작품들은 모두 수다한 객체들이 어떻게 놀라운 경험을 불러일으키는지 느끼고 감응하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유물론은 전문 철학의 고매한 영역 속에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생적인 의식 속에서 이미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다. 사물의 시학(詩學)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만치 객체들의 무한한 면모를 헤아리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유물론은 이러한 느낌과 경험을 자신의 철학적 사변을 위한 서사에 항용 동원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유물론은 자생적인 철학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시대의 ‘분위기’에 감금된 우리에게 새로운 유물론은 더 없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의 터무니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야심, 즉 그의 신작 저서의 제목처럼 ‘만물’에 관한 이론이 정말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을까. 그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존재의 총체적 도식을 만들어낼 때 그가 누락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아마 그는 하나를 추가하는 것을 잊은 듯하다. 그것은 바로 무(無)이다. 물론 무라는 개념은 다른 개념들로 번역될 수 있다. 그 가운데 일급의 후보는 적대, 모순 또는 데리다적인 어법을 빌자면 차연(différance) 같은 것,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기꺼이 계급투쟁이라고 이름붙일 것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무는 존재가 채우는 어떤 실정적인 공백이나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서의 무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잔이 비어 있을 때의 그 공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무와 같은 것은 아니다. 무란 안정적인 객체를 가능케 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존재에 불가결하다. 지젝의 말을 빌자면 “올바른 유물론자의 입장은 ‘전체로서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전체로 보면 세상은 무(無, nothing)이다. 그 안의 모든 것은 이 무 내부에 존재한다”가 될 것이다. 이는 세계는 존재하며 그것은 수조개의 존재로 이뤄져있다는 하먼의 주장과 다른 것이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세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구성적인’ 적대를 제한하고 그 적대에 의해 규정된 각 요소들이 작용하는 관계의 체계로 표상하는 한에서만 그 세계는 존재하는 것으로 현상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주체를 객체의 외부에 놓인 자율적인 실체로 둘 것이 아니라 그 역시 객체의 한 요소로 환원하여야 한다는 주문에 대해 따져볼 수도 있다. 주체도 객체라고 말하며 다른 객체만큼의 지분을 갖는데 만족하여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만으로 주체에 대한 유물론적 처리를 충실히 완수한 것일까. 주체와 객체, 객체와 객체 간의 관계로 구성된 다양한 객체 간의 접촉이란 지평을 견지하면서 오성과 이성에게 약간의 몫을 배당해주는 하먼의 접근은 실망스럽다. 그는 외려 주체를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주체를 객체로 개명(改名)하고 그것을 다른 객체와 동등한 객체의 도식 속에 배치하는 것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주의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구체적인 효용과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물에 덧 씌워진 주관적인 환영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현상함으로써만 실재하는, 즉 자신을 특정한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나타냄으로써만 끊임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객체 자체의 편에 속하는가. 상품은 주체인가 객체인가. 이런 물음 자체가 바로 상품물신주의의 요점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을 ‘객체화된 사유형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체인 주체라는 언급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모순어법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런 모순을 통해서만 주체와 객체가 자신을 정립할 수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주체를 객체화할 때 그것은 주체도 객체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외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근본적으로 위기를 통해서만 자신을 조정하는 ‘불가능한’ 세계가 가능하려면 이미 그 주체가 객체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지배적인 의식은 지배계급의 의식이란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존재론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란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주체에게 객체를 현상하게 하는 틀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은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상관할까. 현명한 독자라면 아마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_그래엄 하먼의 <4종의 객체> 국역본에 해제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