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하고 진부한 마이클, 그렇지만….



Crosby Stills Nash and Young Live at Fillmore East 1970

1.

다큐테인먼트(docutainment)의 기린아, 마이클 무어가 다시 방문했다. 팝콘을 우물거리면서, 가끔은 킬킬 웃다가 또 가끔은 어이없어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 그를 능가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따분하고 진지하다고 알려졌던 다큐멘터리를 매우 재미난 오락거리로 만들어 내는 비상한 재주로 다큐멘터리의 지형을 바꾼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가 선사하는 재미는 그저 그런 심심풀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심드렁하게 화면을 보던 자세를 냉큼 고쳐 앉도록 만드는 무어의 정교하면서도 신랄한 도발과 적극적인 개입의 퍼포먼스를 통해 생산되는 특별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큐멘터리의 절대적 공준이었던 재현의 객관성을 위반하면서 진실(truth)을 생산하고자 했던 그의 값진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다. 포스트-진실의 시대에 그는 집요하게 진실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점이 무어를 둘러싼 숱한 시비의 쟁점일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신작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은 제목부터가 어떤 속내가 따로 숨겨진 것은 아닌지 하는 짐작을 불러일으킨다. ‘화씨 11/9’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날, 2006년 11월 9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는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고, 다큐멘터리 역사상 박스오피스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전작, <화씨 9/11Fahrenheit 9/11>(2004)의 제목을 살짝 비틀고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최대 성공작의 영광을 반복하고 싶단 의지가 제목에서 언뜻 비친다고 해서 그리 틀린 일만도 아닐 것이다. 과거의 영예를 반복하고 싶은 것은 흔한 욕심이기 때문이다. 블록버스터 다큐멘터리로 미국 전역의 쇼핑몰 극장에서 개봉하고 마침내 박스 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유명한 상도 석권하고 말겠다는 마이클 무어의 야망이 바로 전작의 제목을 반복할 때 숨겨진 야망 아니었을까, 하는 서두른 짐작.

그러나 그런 억측은 스타 감독의 시시콜콜한 욕망을 넘겨짚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신작 다큐멘터리가 과거의 명성 높았던 작품의 제목을 반복하는 몸짓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마이클 무어의 반복을 일종의 미학적-정치적인 전략이라 보면 어떨까. 반복은 구태를 되풀이하는 유치한 몸짓이다. 참신함과 새로운 형식의 탐색이 좋은 미학적 기준으로 통용되는 세계에서 자신을 반복하는 감독은 좋은 감독일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번 작품에서도 자신의 케케묵은 클리셰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투덜거림이 필경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들릴 듯 말 듯 “지겨워, 이제 그만”이란 투의 배음이 깔린 리뷰들 역시 적잖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영화 비평 웹사이트인 로튼토마토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리뷰 중 이 영화를 싫어한 이들의 리뷰는 대개 그런 푸념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들은 빗나간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나 다이렉트 시네마의 걸작에서 다큐멘터리의 절대적 황금률을 찾는 이들에게 마이클 무어는 불편하고 언짢은 인물일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지녀야 할 지배적 권위에 대한 거부, 통속적 오락의 값싼 재미에 저항하는 진지함, 현실에 대한 간단한 재현을 거부하는 집요한 현실의 발견 같은 조항들이 다큐멘터리의 덕목이라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흔하다. 그리어슨Grierson 식 다큐멘터리의 객관성의 공준은 주관적 개입을 능사로 하는 마이클 무어에게서 타락과 일탈을 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에 마이클 무어는 아랑곳 않는다. 어떤 경우엔 자의적인 짜깁기와 왜곡을 통해 사실을 호도하는 선정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비난을 받으리만치, 그는 널리 알려진 다큐멘터리의 ABC를 위반한다.

“마이클 무어는 <로저와 나Roger and I>(1989)에서 이전에 볼수없던 불경스러움과 유머, 그리고 잔인함을 결합해 사회적 다큐멘터리의 많은 불문율을 깨뜨렸다.” 아마 이는 마이클 무어의 이후의 이력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평가일 것이다. 더글러스 켈너Douglas Kellner는, 마이클 무어가 그의 데뷔작 <로저와 나>를 만들면서 ‘마이클 무어 영화 Michale Moore film’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적 혹은 당파적인(partisan)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종래의 다큐멘터리적 객관성의 규범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호평이다. 반면 다큐멘터리 감독 존 론슨은 유명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 Sound>의 리뷰에서 자신을 비롯한 새로운 다큐멘터리 흐름을 이끈 감독들을 빗대어 “신생 자아비대증환자Les Nouvelles Egotistes”라고 지칭한다. 마이클 무어가 대표주자일 이들 감독들은 관찰적인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아랑곳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선 감독의 주관적인 현전이 두드러진다. 론슨은 그것이 지나치면 저속한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어 낼 뿐이라며 감독 자신이 우쭐하게 자기 과시적인 개입을 일삼는 경향을 비난한다. 카메라가 직면한 현실이 말하도록 해야지 주제 넘게 나레이션을 덧붙이고 카메라 앞에 시도 때도 없이 나서는 짓은 곤란하단 말일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유례없는 독창성을 지닌 것도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어법과 형태를 전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어쨌든 순식간에 마이클 무어처럼 만들기가 유행하게 되었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다. 그는 진부하고 또 천박하기까지 하다. 그의 영화들은 극장은 물론 TV와 인터넷 등에서 흔히 마주치는 다큐멘터리 혹은 유사다큐멘터리들과 비슷한 권역에 속한 듯 보인다. 이를테면 ‘피해자 다큐멘터리victims documentary’라고 부를 수 있을 다큐멘터리는 늘 제도 권력이나 정부 정책, 기업의 횡포 따위로 인해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을 재현하는데 애써왔다. 이점에서 마이클 무어도 다르지 않다. 또한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어법이 되어버린 목격과 증언의 다큐멘터리라 할 만한 것에 견주어보아도 마이클 무어는 한 치도 뒤지지 않는다. 그의 자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그의 작업을 이끄는 주도적인 장치였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운드는 그의 보이스 오버이다. 그리고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카메라 앞에 선다. 그것은 유튜브나 아프리카TV같은 실시간 유사 다큐의 알파와 오메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같지 않다. 그의 형식적 특장이 지닌 가치를 검토하자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을 것이다.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는 <로저와 나>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장소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Flint로 다시 돌아간다. 그가 그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대통령이 당선된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플린트는 제너럴 모터스의 거대한 공장이 있었던 곳,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더불어 멕시코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2차대전 이후 노동자의 삶의 낙원이었다 이제는 폐허이자 게토가 되어버린 곳이다. 이곳은 <로저와 나>의 무대이기도 했고, <자본주의 러브스토리 Capitalism: A Love Story>(2009)>에서는 금융위기의 충격을 겪고 초토화된 미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비참을 회상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찾은 플린트는 억만장자 출신의 대통령이란 자가 어떤 미국 정치의 모델을 쫓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의 시험 무대로서의 플린트이다. 그것은 기업 관료 출신의 정치인이 기업가들의 이윤을 위해 시민의 어떤 이해도 무소불위로 침해하고 찬탈할 수 있는 모범 마을이 되어 있다. 아무 쓸모없는 하수관 건설을 개시하고 마을 사람들은 기존의 하수관을 통해 배급받던 깨끗한 호수 물 대신 납으로 오염된 물을 어처구니없게도 비싼 값을 치르면서 먹을 신세가 된다. 그것은 시민을 고객으로 여기는 기업가적인 통치를 기본으로 삼고 걸핏하면 사람들을 겁주는 비상사태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타락한 정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정치를 가능케 했을까. 그는 미국의 ‘고장난 시스템’을 들춘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의 현실정치(real politik)과 미국 대중의 열망을 감안하다면 좌파 나라일 것이라고 장담한다. 더 이상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거나 숫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승리 직전에 갔던 민주당은 번번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그들은 대중의 편에 서기 보다는 거대한 기업과 금융, 그리고 언론과 이해를 같이하는 지배계층의 정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화씨 11/9>에서 가장 통렬한 부분이 지금은 납중독에 걸린 채 값 비싼 생수를 사다 마셔야 하는 흑인 게토 플린트를 찾은 오바마의 배신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이자 이웃이 마시는 오염된 물을 안심하고 마시라고 설득하며 자신이 솔선해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한다.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에 살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가장 비싸면서 오염된 물을 마시며 살아야 한다. 실망스럽게도 오바마는 물잔에 입술을 축이는 시늉만 하고는 물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정부를 믿으라는 말만 한 채 꽁무니를 뺀다. 그리고 안심하고 먹으라지만 모두들 병에 걸려 신음케 하는 그 물을 가득 싣고 마이클 무어는 주지사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 물세례를 안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는 얼굴을 바꾼다. 이제 그의 목표는 트럼프와 전면적인 대결을 위한 중간 선거를 향해 있다. 이제 그는 ‘고장난 시스템’을 갈아엎을 투쟁의 주역들을 쫓는다. 전쟁에서 돌아와 마주한 고향 마을의 몰락에 분개하여 정치에 입문한 마초 사내, 뉴욕 퀸즈에서 출마해 사회주의 선풍을 불러일으킨 하원 의원 후보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민주당 주류가 보기엔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인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의 입후보와 당선을 막기 위해 음모적인 협잡을 저지른다. 마이클 무어 말마따나 늘 그래왔듯이. 마이클 무어가 보기에 이것은 민주당의 실패를 낳는 첩경이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공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파업을 감행한 교사들, 총기 규제를 위해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청소년들이 등장한다. 고장난 시스템으로부터 그것이 초래한 문제들을 해결하길 기대했던 미국에 대한 환멸과 그를 거부하고 투쟁하는 미국인들을 보며 마이클 무어는 파시즘의 전조(前兆)를 트럼프 정권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떠들어대는 위대한 미국, 있지도 않고 있다면 비참하고 폭력으로 망가진 나라일 뿐인 허위적인 환영의 미국에 맞서 “가져보지 못한 미국”을 가지고 싶다고 토로한다.

마이클 무어는 아슬아슬하리만치 오늘날의 포퓰리즘적 선동의 정치에 기꺼이 반응하고 가담한다. 그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지만 기꺼이 민주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제조자이길 자처한다. 부자에 대한 과세나 공공교육의 강화, 보편적 의료보장, 성소수자 권리 옹호 등이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 사탄의, 자유주의 엘리트, 유태인의 음모라고 개탄하고 저주하는 보수 우익의 주장을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에 맞설 작정으로 그러한 허무맹랑한 편집증적 환상을 ‘팩트-체크’를 통해 반증하는데 별 관심이 없다. 편집증적 환상은 그 어떤 반증도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의 기지와 음모 탓으로 돌린다. 슬라보예 지젝이 한 때 자주 들먹였듯이 나치주의자의 눈에는 수십 년 동안 이웃으로 살았던 무고하고 선량한 유태인의 모습은 유태인 음모의 반증이기는커녕 유태인이 얼마나 교활하게 자신을 숨기며 자신의 음모를 실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우익이 사실에 눈을 감는다고 말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떤 사실도 반증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확신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으로 채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상이 현실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인 틀 짜기라면 환상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데 있어 필연적이다. 따라서 무어는 기꺼이 당파적인 입장에 서서 그러한 대항적인 환상을 생산하는데 진력한다. 따라서 마이클 무어가 프로파간다라고 힐난하며 주관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데 지나치게 혈안이라는 비판은 공평무사한 진실에 맞서 ‘당파적 진실partisan truth’을 제조하는 그를 간과한다.

마이클 무어의 전형적인 몸짓인 “어떻게 이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란 물음은 <화씨 11/9>에서도 반복된다. 마이클 무어의 말을 빌자면 보통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미국인의 압도적 다수는 사회정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보편적 평등을 실현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미국은 유례없는 사회주의 나라이다. 그런데 사정은 딴판이다. 대관절 미국이 돈 많은 자본가들이 세상에 군림하는 나라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을 마이클 무어 못잖게, 아니 앞서 던진 이가 있다. 토마스 프랭크가 그일 것이다. 그는 보수 우익의 포퓰리즘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를 파헤친 책, 왜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란 책을 썼다. 그 책의 서문은 “미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이다. 그것은 마이클 무어가 되풀이해서 그의 영화를 개시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마이클 무어의 고향이 자동차 제조 노동자의 마을인 플린트라면 토마스 프랭크의 고향은 하느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세상인 캔자스시티이다. 그리고 언제나 민주당이 우세하던 이 동네가 마침내 공화당 의원을 밀어주는 동네가 된다. 그리고 토마스 프랭크 역시 “어떻게 이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란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가 찾아낸 규칙은 바로 ‘플랜-티-플레인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보수 우익-인용자) 이러한 혐오감을 기록하고 목록을 작성한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아주 하찮고 서로 연관이 없는 세상에 대한 불평거리들을 기묘하게 모아놓은 이른바 플랜-티-플레인트(plent-T-plaint는 ‘많은’ 불평을 뜻하는 plenty plaint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신조엄임-옮긴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의 목적은 우리 주변의 혐오스런 자유주의 문화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플렌-티-플레인트는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비판방식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가족의 가치를 공격하고 점점 음란해지고 부모를 경시하고 혁명을 조장하는 여러 가지 소소한 방식의 수십, 수백, 수천 가지 이야기들로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는 가지각색의 사실을 모두 하나의 원인으로 수렴시키는 ‘수평적 접합’의 이데올로기가 오늘날 보수-우익의 이데올로기라고 간파한다. 토마스 프랭크의 말을 빌자면 “보수 우파와 그의 친구 노동자계급이 서로 맥주를 마시면서 문화적 유대를 공고히하는 동안 노동자 계급이 보수 우파에게서 받은 것은 경제 침체뿐” 인데도 그들은 자신의 적을 지지한다.

5.

그렇다면 항상 자신의 이해에 반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노동자 계급에게 어떻게 ‘현실적인 현실’을 되돌려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위한 효과적인 해법 가운데 하나를 마이클 무어의 다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이클 무어는 산만한 점프로 일관한다. 그는 아무런 일관성도 없이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이동하며 숱한 사람들을 카메라 앞에 내세운다. 그렇게 그의 카메라 앞에 선 인물은 유력 정치인이든 양심적인 말단 공무원이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폐가(廢家)에서 기숙하는 홈리스이든 이라크 전에서 돌아와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 눈이 뒤집혀 정치에 진입한 풋내기 싸움꾼이든 종잡을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연유로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하나의 선에 나란히 놓인다. 이는 마이클 무어의 주관적 짜깁기이자 시간적 공간적 객관성에 육박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지켜야 할 원리를 위반한 주관적인 드라마의 작위라고 걸핏하면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산만한 점프와 시간을 마음대로 앞뒤로 오가며 다른 장소에 선 이들을 동일한 이미지의 장소 속에 배열하는 그의 무모한 자의적인 폭력을 달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이 처한 경험의 진실에 육박하기 위해 ‘벽 위의 파리’처럼 집요한 카메라의 시선에 높은 가치를 두는 ‘현상학적인 현실성(actuality)’의 미적-정치적 전략에 대해 달리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많은 이들을 하나의 주체-위치인 ‘우리(Us)’에 접합시키고자 하는 마이클 무어의 선택을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위해 불가피한 총체화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토마스 프랭크가 보수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이라고 갈파한 ‘플랜-티-플레인트’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응수한다. 그는 보수 우익을 지지하게 된 착취당하는 자들의 원망과 비탄을 깔보지 않는다. 자신의 등을 휘게 할 뿐일 적대 계급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계급의 자기배반적 행태를 그는 손쉽게 조롱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행동을 가능케 한 ‘환상’(물론 이는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을 폭로하기보다는 숱한 사람들을 한데 묶어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고안하는데 더 열중한다.

7.

그렇기에 그는 좌파 포퓰리즘의 희생양이 되길 자처한다. 다시 더글라스 켈너를 인용하자면 “마이클 무어는 존 에프 케네디 풍의 자유주의의 운동적인 이상주의에 좌파적인 반-기업 포퓰리즘을, 이피족the Yippies의 우스꽝스런 몸짓에 반기업 세계화나 오큐파이 운동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는 보다 퍼포먼스 지향적인 좌파를 섞어내는 진짜배기 미국인이다.” 그러나 그의 잇단 작품들을 간단히 좌파 버전의 포퓰리즘에 속하는 것으로 처박는 것은 주의할 일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오늘날 거의 기사(幾死) 상태에 처한 정치적 상상, 즉 ‘우리’라는 집합적 정치적 주체를 구축하는데 나름 기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는 데 매우 큰 이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작동하는 주체화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쪽이 남아있다. 그것은 주체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 즉 객체이다. 주체는 객체 즉 자신이 대면한 세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대 우리의 변증법이 실은 감추고 있는 것은 그것이 현실을 경험하고 의식하는 효과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떻게 개인이 주체로서 주체화되는가를 묻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현실이 객체로서 객체화되는가 역시 물어야 한다.

그런 점에 비춰 볼 때, 점점 더 현실이 사라지는 듯 보이는 세계에서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만회하거나 상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 마이클 무어의 능력일지 모른다. <화씨 9/11>에 관해 언급하면서 <뉴욕 데일리 뉴스New York Daily News>의 칼럼니스트 데니스 해밀Denis Hamill은 이렇게 감격스레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아무튼 어떤 인화성 강한 블록버스터물은 아니다. 아니 이 영화에서 진짜 인화성 강한 것은 현실이다. 이 영화 속에서 죽은 사람들은 현실이다. 대화도 현실이다. 현실의 군인들, 현실의 피해자들, 현실의 엄마들, 현실의 죽은 아이들. 감독 마이클 무어가 묘사하듯이 저 나쁜 놈들도 너무나 현실적이다((all too real).”

그러나 이런 서술은 실은 너무나 반어적이다. 객관적인 사실처럼 보이는 것들은 허위이며 어떤 매개를 통해서만 현실은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현실은 허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가 <화씨 9/11>로 아카데미상을 타게 되었을 때 그는 함께 수상 후보에 오른 후보들을 무대로 불러 함께 한 자리에서 이런 수상 소감을 밝혔다.

“동료 다큐멘터리 후보들을 우리와 함께 하자고 무대에 불렀습니다. … 우리는 넌-픽션(non-fiction)을 좋아하지만 우리는 허구적 시대(fictional times)에 살고 있습니다. 허구적 대통령을 뽑은 허구적인 선거 결과가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게 접착테이프이든 오렌지 경보이든 여하한 허구적 이유로 우리를 전쟁에 내보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며 다큐멘터리가 이례적으로 성가를 높여 왔다는 지적은 미국에서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나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토론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주제였다. 마이클 무어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지난 세기에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가 세운 흥행 성적을 모두 갈아치우며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에 우리는 낯설지 않다. 게다가 케이블 TV나 넷플릭스Netflix같은 영상 서비스, 아프리카TV, 유튜브YouTube같은 SNS 아울렛에서 쏟아지는 다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의 민주화’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후광을 제거하기도 했다. 디지털 미디어 기술이 지닌 휴대성이나 유연성, 가소성 같은 다양한 성질들을 들어 누구나 미디어 제작자가 되었다는 흔한 말은 기록(documenting)으로서의 다큐멘터리가 가장 먼저 급습받았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정형화된된 혹은 이데올로기화된 현실적 재현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거나 극복하는 데 기여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지자면, 그에 대한 답은 매우 거리가 멀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둘러싸고 끈질기게 유지되어 온 우리의 비판적인 무의식, 즉 모름지기 다큐멘터티란 현실은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진실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실천이라는 눈 먼 믿음은, 다큐멘터리의 편에서 먼저 거부된 편이었다. 그것은 현실의 객관성이란 공준을 거부하는 구성적, 관점주의적인 입장이 세련된 태도로 지지받아왔다. 시네마 베리테나 다이렉트 시네마가 품었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기록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늘날 가장 끈질기게 배반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뉴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흐름은 자신의 냉소적인 지혜를 뽐내며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한다.

에리카 발솜은 어느 글에서 오늘날 주관적으로 구성된 현실이라는 뉴 다큐멘터리의 오만한 지혜를 반박하며 죽은 개 취급을 겪고 있는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테의 관찰적 다큐멘터리의 위엄을 되찾으려 애쓴다. 그것은 포스트-진실 시대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각자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무한한 다양한 현실, 수다한 진리가 있다고 역설하는 다큐멘터리의 일탈에 대한 준렬한 항의이다. 그러나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진실의 다큐멘터리 시학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다. 시네마 베리테나 다이렉트 시네마가 진실의 작법을 여전히 옹호하기 위해 그녀가 그것의 현재적 버전으로 옹호하는 작품들이 이를 넌지시 알려준다. 그녀는 스니아데키 J. P. Sniadecki의 <인민공원 People’s Park>(2012)이나 <철도 The Iron Ministry>(2014), 루시앙 캐스팅-테일러와 파라벨 Lucien Castaing-Taylor & Véréna Paravel의 <리바이어던 Leviathan>(2012), 스프레이와 벨레즈 Stephanie Spray and Pacho Velez의 <마나카마나 Manakamana>(2013) 그리고 그녀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보들레르Eric Baudelaire의 <지하디로 알려진 Also Known As Jihadi> 등이다. 여기에 우리는 벤 러셀 Ben Russel(특히 그의 <굿럭 Good Luck)(2017))이나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의 다수의 작품들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역시 이러한 작품들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작품들을 편드는 발솜에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작품들에서 발솜이 보고 싶어하는 ‘진실’은 현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진정성(authenticity)있게 경험하는 현실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이들 다큐멘터리들을 진실의 이미지로 상찬할 때 그것은 실은 그것에서 진정한 현실을 보고자 오랜 동안 머물고 응시하는 카메라와 동일시된 제작자의 주관적 욕망과 관객의 그것과의 동일시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의 진실에 마련된 미학/철학적 용어는 현실성(actuality)일 것이다. 이는 현실의 진실이 계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애타는 정념-애타게 현실을 찾는?-에 의해 현실로부터 잘려 나온, 그리하여 진실이 현상하는 것처럼 경험하게끔 하는 이미지의 효험을 통해 구축될 것이다. 그리고 적잖이 어깃장을 부리자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무어의 천박하고 진부한 것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저 편(세계의 편)에서 상실한 진실을 이 편(경험하고 지각하는 주관의 편)에서의 현실성으로 만회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이클 무어의 통속적인 코미디 풍의 다큐멘터리가 기특한 것은 바로 저 편의 세계의 진실을 생산하기 위해 총체적인 이미지(비록 그것이 진짜 미국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세계일지라도)를 그리고자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민중이라는 당파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