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에 대한 몇 가지 생각

The Field – A Paw in My Face

뒤척이며 고백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기분이 쾌적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모래>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모래>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성장한 여성 감독의 자술서이다. 감독은 반목하거나 아니면 무심했던 아버지의 세계를 헤쳐 보는 딸이다.
그녀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고, 꾀죄죄하게 영락한 아파트에서 얼마라도 더 건지겠다고 버티는 부모님을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진보적인 당파를 지지하고 아버지는 열성 여당 지지자이다. 그러나 그 여당은 정치적 신의를 바치는 정당이라서 지지하는 당이 아니다. 악착같이 살아 마련한 유일한 삶의 자산인 아파트의 값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인 탓에 여당은 아버지의 당파이다. 물론 지배 당파는 항상 그렇게 지지를 동원하지만 말이다. 반면 맏딸인 감독은 배우겠다는 것이라면 두 말 없이 밀어줘 대학원까지 보내놓았더니 취미 생활로나 삼았을 영화를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나쁜 딸이다.
그렇게 살았던 한 가족이 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가족이란 인연으로 흩어지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 말이다. 그리고 그 가족은 대치동을 떠난다.
누구는 부동산 공화국이라고 혀를 차며 개탄하고, 누구는 토건 국가라며 진저리를 치는 이 나라에서, 치부의 가장 안전한 수단은 뭐니 뭐니 해도 강남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글프게도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과 상관없이 안전하게 제 값을 지켜주기에 은행에 맡겨두는 돈보다 안전하고 사업을 하는 것보다 믿음직스럽다. 펀드니 주식이니 설쳐도 그것은 언제나 생각하기도 싫은 리스크란 이름의 유령을 동반하고 다니지만, 그래도 강남의 아파트는 아직은 리스크 제로이다. 강남 아파트는 사회적인 쓸모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가치를 유지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물신이다.
<모래>의 주인공일 아버지는 퇴직 후 옷 공장을 운영하고 어머니는 남대문에서 그 옷을 판다. 아마 사업 수완이 있거나 했다면 덤볐을 리 만무한 사양 산업에, 부모는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것은 매 달 꼬박 갚아야 하는 빚만 안겨준다. 따라서 다시 아파트이다. 어쩌다 목돈이 생겨 욕심을 부려 빚을 좀 더 얹어 장만한 유일한 미래의 보증일 그 아파트 말이다. 해결책은 안전한 생존의 모든 약속인 아파트를 처분하는 것이지만 그러기 어렵다.
어쩌다 목돈을 쥐게 되어 강남으로 건너 간 이들이 모여 사는 곳, 아마 그런 곳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대치동의 은마아파트일 것이다. 중동에서 공사장에서 일을 하였고, 다시 서울에서 답십리에서 아파트를 짓고, 집 장사를 한다는 게 무슨 짓인지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부모님은 강남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국 퇴장한다.
<모래>는 그렇게 은마아파트에 살게 된 그러나 그곳을 떠나게 되어버린 한 가족에 관한 초상을 그린다. 아파트 한 채가 좀 더 나은 형편으로 상승할 수 있는 모든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기만일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사고 팔 수 있는 자산에 불과한 아파트를 소유한 자들과 모든 부는 아파트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은 채 아파트 한 채에 인생을 걸게 된 이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라곤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강남에 입성하였지만 결국 실패를 한 채, 아니 그 물신의 유혹에서 마침내 풀려난 채 강북으로 떠나게 된 가족의 초상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그런데 <모래>를 자전(自傳) 다큐멘터리로 읽는 것은 아무래도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모래>는 아무런 자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자술을 피하려 애쓴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외려 자술하는 것은 은마아파트 그 자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길지 않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시정이 넘치는 부분을 찾는다면, 혹은 감독이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드러내는 주관적인 장면을 찾는다면, 내 생각엔 그것은 쓸쓸하게 부식하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롱 테이크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 얼굴 없는 장면들은 다큐멘터리에서이든 혹은 아니면 극영화에서이든 낯선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는 클리셰(cliché)라고 불러도 좋을 장면들일 것이다. 그런 장면들은 전개되는 이야기를 쪼개고 나눠주는 삽입구일 수도 있고 영화에서 지속되는 정조를 상기하기 위해 수사적인 반복 어구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
<모래>에서도 그런 관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창을 통해서 바라본 아파트 바깥의 풍경이거나 달리는 차창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 혹은 미국 뉴욕의 마천루 혹은 차창에서 바라본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투여된 분주하고 화려한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을 찾을 수 없는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의 풍경, 이런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래>라는 영화 속에 어쩌면 과하다 싶으리만치 자주 등장하는 이 삽입어구에 대하여 마땅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중재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떤 서사적인 매듭일까. 나는 그것이 마치 문장 속의 말줄임표처럼 카메라가 어떤 생략을 표시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이미지를 찾지 못한 채 거기에 시야 속으로 들어온 화면일 것이다.
감독은 차마 말을 다 못하거나 아니면 말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화면은 감독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래>가 아름답다. 그것은 은마아파트에 살았다 떠나게 된 어느 가족의 사회사를 그려내는데 급급하지 않으려 하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화해하고자 다가서는 윤리적인 대상이 가족일 때, 과연 누가 그것에 완벽한 말을 가지고 있을까. 감독은 범람하는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TV 속의 감상적 휴먼 다큐들과 거리를 둔다. 거기에서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황폐하고 불임일 뿐인 수다일 뿐이다.
그러나 <모래>는 ‘차마’ 혹은 ‘미처’ 같은 수사적인 말들을 화면으로 옮긴다. 어떤 이야기에서 진실이란 이런 세부의 수사법에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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