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몇 가지 질문


Mac DeMarco – Dreamin

이성은 사랑과 함께 사는 날이 거의 없다지. (W. 세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중에서)
사랑에 대한 가능한 정의 가운데 하나는
바로 ‘최소한의 코뮤니즘’일 것이다. (A. 바디우, ‘사랑예찬’, 중에서)

사랑의 과학에서 사랑의 윤리학으로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믿고 싶어 하는 것, 스스로 내밀하게 믿고 있으면서 더 이상 믿을 가치가 없다 체념적으로 부인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불신의 대상이며 신뢰할 만한 유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역설적 대상으로서의 사랑, 그것에 관하여 말하도록 하자. 사랑은 우리 시대에 가지고 있는 중요한 신화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그저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신화라는 낱말을 남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당연시된 믿음이 신화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사랑은 더 이상 신화에 속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끈덕진 냉소주의적 이성의 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 그다지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사랑에 관한 법칙을 역설하는 과학자들이 있고, 그들은 사랑의 일반성에 관한 과학적 가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감정에 빠졌을 때 남성, 여성 호르몬과 더불어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르토닌, 옥시토신, 바소프레신을 분비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보고 매력을 느끼면 우리는 엄청난 양의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을 뇌에서 분비한다. 누군가에게 애착을 보이는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세르토닌의 왕성한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혹은 뇌 안에 화학물질인 페닐에틸아민이 분비될 때 그것은 사랑에 빠진 감정이나 극도의 행복한 기분 그리고 흥분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몇 알의 알약을 먹고 연인의 변심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환심을 얻기 위한 복잡하고 거추장스런 노력 없이 사랑에 이르는 세계로 입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은 그런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풍경의 주조음이 되었다고 역설하는 이들도 많다. 흔히 듣는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의 세계, 어떤 위험도 제거된 안전한 쾌락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실질이 제거된 욕망의 세계 속에 잠긴 채 살아가는 것 말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사랑을 얻으려는 자들의 흔한 전략이 되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어떤 혼란과 의존적인 상태도 없이 자기의 욕망을 빈틈없이 통제하며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손에 얻는 것.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은 어떻게든 우리를 휘젓는다. 이를테면 젊고 건강하고 능력 있는 젊은 미국인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흔히 보아왔으므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는 그의 집 벽장을 채우고 있는 약병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엑스터시, 코카인, 비아그라, 엠비엔(수면유도제인 졸피뎀의 상품명) 따위의 약들. 그리고 그는 여자를 꾀러 가기 전에 엑스터시를 먹을 것이고 그 덕에 좀 더 적극적으로 여자를 유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꾄 여자에게 코카인을 주어 흥분시킬 것이고 자신은 비아그라를 먹은 후 격렬하게 섹스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일을 마친 후 엠비엔을 입 안으로 털어 넣고 아늑한 잠을 청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머잖아 그가 결국 우울함에 빠지게 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아마 슬슬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인생이 형편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
우리는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스티브 맥퀸의 영화 <셰임>에 등장하는 주인공 브랜든의 최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감독은 순진하게도 24시간 성적인 집착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자기파괴적인 섹스란 것이 실은 그가 진정으로 얻고자 한 것 즉 사랑에 대한 갈망과 회피의 수단이었다는 듯이 말한다. 이 영화의 터무니없이 장황한 신파적인 엔딩 씬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오랜 울음 속에서 사랑이 자리를 메우게 될 공허한 심연을 바라보도록 강요받는다. 그렇지만 그가 사랑을 향해 회심(回心)하는 윤리적인 영웅이라고 말하려는 듯 보이는 감독의 주문이 뜨악하게 여겨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실은 우리는 또 하나의 시나리오가 있으며 그것이 더 유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도저한 우울을 견디기 어려워 의사를 찾았을 때 필시 이런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군요.”
미국의 1차진료의가 가장 많이 환자에게 들려준다는 말. 평균 8분 이내에 내려지는 진단. 그리고 그는 웰부트린 같은 약물을 처방받게 될 것이다. 이 항우울제의 도움으로 그는 다시 활기를 되찾고 전과 같은 광적인 섹스에 빠진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언급한 약들을 가리켜 전문가들은 “정신작용약물(psychotropic drugs)”이라고 부른다. 신경전달물질이라는 희한한 물질을 통해 우리의 심적인 삶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적 지식이 자리를 잡은 이후, 우리는 약물요법을 비롯한 다양한 치료법을 통해 우리의 감정적 불행을 처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랑을 정복하거나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친한 벗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상습적으로 범하는 못난 버릇을 하나 가지고 있다. 취기가 오르고, 사랑과 인접한 무엇이 대화 근처를 배회할 때, 사랑과 혁명에 관한 뚱딴지같은 가설을 늘어놓고 목에 힘을 주는 버릇이, 그것이다. 요지는 간단하다. 나는 사랑과 혁명이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라는 것이고, 사랑과 혁명은 서로 호환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울하게 나는 당분간 혁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시대에 더 참담한 것은 혁명이 요원하거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불가능성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것, 사랑이 빈사(瀕死) 상태에 있다면 그야말로 더 슬프다는 것이다. 혁명은 아주 희귀하게 나타나는 사태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부재하다고 해서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평생 만나보지 못한 채 죽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비루한 삶을 살았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랑이 희박해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그것은 황량하고 공허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랑과 혁명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나는 그것을 시간이라는 계기 속에서 확인한다. 문제의 시간은 바로 내일이다. 사랑과 혁명은 똑같은 내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혁명과 사랑에 빠진 날을 기억하곤 한다. 사랑과 혁명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은 마치 “오늘”이란 듯이 말이다. 오늘, 바로 이 날, 사랑이 찾아오고, 그 날, 오늘 혁명이 찾아온 날. 우리는 소설과 영화를 비롯한 문화적 표상 속에서 바로 오늘을 찬미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더 결정적인 날은 다음 날인 날, 내일이다. 그 내일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이 일어난 날의 다음 날. “우리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아.” 그리고 사랑에 빠진 다음 날. “나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내가 아니야.”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사랑의 고백이 있던 다음 날, 우리는 더 이상 내가 전과 같지 않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닌 셈이다.
이러한 느닷없는 단절, 예고 없이 찾아온 이러한 전환 앞에서 우리는 허둥대고 그것에서 새로운 하나의 질서를 싹틔우기 위해 진력한다. 혁명 이후 우리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거나 위원회를 창설할지 모른다. 사랑에 빠진 이후 우리는 함께 살 집을 상상하거나 결혼을 기약할지 모른다. 아무튼 나는 사랑과 혁명에서 동일한 차원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것은 더 이상 어제의 나, 우리가 아니게 되는, 윤리적인 격변이, 이 둘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형편없이 이상적인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헛소리라는 핀잔을 들을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눈치를 살피다 경계가 느슨해진 술자리에서 고작 이렇게 피식 말을 건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무모하고 인기 없는 주장을 고집하며, 그리고 사랑의 보편성과 사랑의 윤리적 차원을 사유하는 것이 여전히 근본적이라는 점을 강변하면서, 사랑에 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집어든 주제는 사랑과 언어 그리고 원인, 진실이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세 편의 영화를 골랐다. 이 영화들은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면서 사랑에 관한 나의 생각을 흔들어놓았던 영화들이자 사랑의 윤리학을 이야기하기에 손색없는 텍스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근년 많은 사회학자들이 사랑에 관한 글을 써왔다. 앤서니 기든스나 울리히 벡, 니클라스 루만, 에바 일루즈, 지그문트 바우만 등의 사회학자들은 우리 시대의 사회학의 핵심적인 주제가 사랑인 양, 각자 사랑에 관한 묵직한 저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들은 근대적인 삶의 세계의 출현이 낭만적인 사랑의 출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후기 근대에 접어든 지금 사랑이라는 친밀관계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개인적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이 눈부신 신자유주의시대에 사랑이란 것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었는지 탐색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습속의 사회학의 분석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그런 작업이 부적절하거나 무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 “진정성, 자율, 평등, 자유, 책무, 자아실현 등의 규범”이 뒤얽힌 삶의 무대라는 주장을 십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자유인가 구속인가, 사랑은 평등인가 계급 관계의 새로운 매개자인가 등의 쟁점을 식별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랑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랑의 과학, 사랑의 사회학 등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의 윤리란 자리에서 말을 건네는 것이 무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랑은 두 연인 사이의 감정적인 교류이며 그것을 조정하고 규제하는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코드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사랑을 익히고 평가하며 대화 속에서 거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와 재편을 거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보편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빈정거림을 들을 만한 주장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역사화하라, 새로운 것에 주목하라,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라는 주장들이 대개 불변하는 어떤 보편성을 고지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침내 인플레이션과 불황이라는 고질적인 병리에서 벗어난 완벽한 시장경제가 등장했다는 주장, 굴뚝 산업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지식과 정보, 감정에서 가치를 뽑아내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도래했다는 예언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런 새로움의 시간을 역설하는 요란한 변화의 복음은 파국적 금융위기를 겪으며 여전히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는 각성에 이르렀다.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찬미와 호소, 자본주의의 끈덕진 동일성을 회피하는 것, 이런 몸짓은 실은 진정한 변화,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로 향하는 변화를 부인하고 회피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반응일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의 현 주소에 대하여 부지런히 묻는다. 새로운 사랑 혹은 새로운 시대의 사랑에 관한 수다스러운 담론들. 그렇지만 그것이 실은 변화한 사랑의 초상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사랑의 유행에 부응하려는 것이기는커녕 사랑의 지속적 보편성, 사랑의 진실이 고집스럽게 지속한다는 것을 회피하려는 것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과 그 선언 – 사랑과 언어
영화 <파이란>은 사랑은 물론 말에 관한 놀라운 주장을 전한다. 그것이 놀라운 것은 전례 없던 낯섦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실은 우리는 이에 관해 얼마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은 기적처럼 발발하고 나의 삶을 휘저어놓는다는 것이다. <파이란>은 그것을 온전히 반복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리만치 생생하게 재연한다. 사랑이 선언되었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일 수 없다, 나에게 선언된 그 사랑이란 말을 떠맡기 위하여 나는 모든 공리적인 욕구를 포기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내게 약속된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호구고 내일도 호구고 국가대표호구”였던 강재의 놀라운 전환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자신과 함께 가출하여 조폭의 두목이 된 친구로부터 “생각 좀 하고 살자”고 늘상 욕을 먹고, “넌 사람 새끼”도 아닌 “짐승의 새끼”란 말을 듣고도 비실비실 웃으며 비굴함을 마치 자신의 천성인 듯 받아들이다. 타인이 생각해 왔듯이 나 역시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버러지 같은 인생이다. 그러나 그에게 어느 날 난데없는 선언이 도착한다. “강재씨.. 당신에게 줄수 없는것..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 보다 사랑하는…강재씨 안녕…”이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는 어떤 말, 어떤 언표에 붙잡혀버린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쯤 겪은 또 겪게 될 충격이기도 하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망하고 미심쩍다면 충격이란 표현도 좋다. <파이란>을 떠올리며 우리는 응당 사랑과 언어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파이란이 강재에게 전한 말은 언어학에서 수행적 발화라고 말하는 것의 전형일 것이다. 수행적 발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선언은 수행적 발화의 대표 사례 가운데 하나인 선언이다. 수행적 발화는 진술문 혹은 진위문이라 부르는 것, 즉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말과 달리 그 자체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효력을 생산하는 말을 가리킨다. “이 배를 한바다호로 명명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당신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언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수행적 발화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수행적인 발화의 으뜸은 바로 “당신을 사랑해”일 것이다.
문화이론이나 철학에서 수행성(performativity)에 대한 관심은 크게 몇 가지 이유에서 말미암는다. 첫 번째 언어적 현상에 앞서 존재하는 대상이나 실재는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말은 바깥의 실재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구성하고 생산한다는 우리 시대의 언어적 전환 이후의 철학은 모두 그런 주장을 수행성에서 찾는다. 다음으로 수행성을 옹호하는 이유는 끊임없는 반복, 인용, 모방이 일차적이며 원본 혹은 기원이 없음을 역설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동일성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소급적으로 사후적으로 어떤 몸짓을 통해 만들어질 뿐이라는 것을 강변한다. 그리하여 모방, 반복, 인용 등은 역사적 변화를 관류하는 동일성 즉 보편적 필연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변화 속에 놓여있는 일시적인 시점(時點)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의 차원이라 역설하면서 동질적이고 보편적인 시간을 의문시한다. 요약하자면 수행성은 재현, 동일성, 시간이라는 문제에 관한 새로운 사유를 촉구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발화를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에 빠진 이가 사랑하는 이에게 가진 태도는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 그녀가 바로 자신이 찾던 그, 그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수십억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 당신이 나의 연인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가끔 묻고는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확률적인 개연성을 통해 셈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은 나에게 필연적인 인연이다. 그것은 어떤 확률적 개연성을 실현하는 사례로 간주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은 나의 몇 억분의 1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속삭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언제나 잊지 않고 오직 당신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문제는 바로 이런 필연성이 어떻게 출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어떤 철학자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자. 바디우(A. Badiou)란 이는 그리 호응을 얻지 못한 그의 어떤 글(‘사랑예찬’)에서 “사건의 구조 안에 등재되는 것이 바로 선언을 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즉 그는 사랑이란 선언이라는 수행적 발화의 효과를 통해 어떤 필연성을 획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쩌면 말장난 같이 표현하자면 필연적인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이란 물론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떤 예약된 프로그램 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왜 필연적인지 사전에 예상할 수 있는 비결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필연성이라고 믿지 않은 채 어떤 사건에 참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1940년대 프랑스의 어느 도시에서 싸우고 있는 레지스탕스, 1980년대의 남아공의 어느 흑인빈민촌에서 투쟁하고 있는 흑백분리반대 혁명가, 혹은 서울의 거리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던 투사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자유, 공화국,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 있을지도 모를 우연을 향해 말을 건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싸우고 있는 대상이 무너질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믿어야 한다. 물론 그런 믿음 속에서 필연성을 증명할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 이런 필연성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나는 그것을 이미 말한 바처럼 선언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연성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선언이다. 그리고 바로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사후에 나타나는 전환 즉 어제와 같은 세계, 어제와 같은 나가 아니라는 발견이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고 그런 힘에 압도된 채 우리는 내일의 세계, 내일의 나를 향해 나아간다. 모든 평등한 인민의 공화국이 선언되었다는 전무후무한 프랑스혁명의 선언이나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설립되었다는 소비에트의 선언과 같은 것을 사랑의 무대에서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 제시한다면 억지일까. 필연성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사건에서 일어난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원자로 가득 찬 우주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면 아주 작은 무엇이 하나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을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는 클리나멘(clinamen), 즉 편위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동시대의 철학이 분분한 해석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 자리에서 중계하고 또 판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 말한다면 클리나멘을 오직 우연만이 있을 뿐이라는 우연의 존재론을 위한 알리바이로 간주할 순 없다는 것이다. 분명 클리나멘은 우연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연인인 사랑의 선언이라는 사건에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이다.”라는 바보 같은 멍청한 자기동일성의 세계로부터 뜯겨져 나와 “내가 왜 이럴까” 묻게 될 때, 우리는 랭보가 말한 “나는 타자이다”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극미한 편위를 통해 새로운 삶을 개시한다. 그리고 그 편위는 사랑의 선언으로 인해 실재하게 된다.
부재하는 원인에 따른 사랑
“너를 사랑해, 영원히”라고 우리는 늘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지 않고 “사랑해, 약 3년간”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어색한 말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오직 두 가지의 시간만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 길고 짧음과 무관하게 무효가 되어버리는 시간과 아니면 영원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시간 두 가지이다. 이는 내가 생각하기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어느 시골 마을을 찾은 사진기자 로버트의 방문과 그와 함께 한 짧은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는 프란체스카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터무니없이 짧은 사랑, 그러나 거절을 하고 단념한 인연이었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집요하게 버티는 사랑과 조우하게 된다.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짧은 불륜과 그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착을 다룬 것에 불과한 것에 불과한 이 이야기에 커다란 윤리적 충격을 받게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영화는 엄마의 유언을 집어든 자녀들의 경악한 모습에서 시작함으로써 우리가 받게 될 충격을 대신하여 협상하는 자녀들의 모습과 동일시하도록 우리를 유인한다. 자녀들은 엄마의 짧은 그러나 영원히 간직된 사랑을 인정하고 만다. 그렇지만 그것이 손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수치스럽지 않도록 영원히 그 비밀을 함구한 남편의 윤리적인 용기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가족을 버린 채 위험한 삶을 택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단념하는 주인공의 윤리적인 선택에 대해서도 우리는 혼란스럽다.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이후 서로와 함께 하지 않는 그, 그녀의 삶은 결국 황량하고 공허한 것이 될 것이라는 그러므로 그, 그녀의 삶은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우리의 짐작을, 주인공인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에게 대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섬광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분출한 사랑 그리고 이를 단념한 이후, 산송장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에 불과할까. 그러나 이 모든 각자의 선택을 떠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죽음까지 아니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사랑에 관해서이다. 이러한 완고한 사랑의 지속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백년해로와 같은 길고 긴 사랑은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그것은 사랑의 충실함과 그것의 농도를 검증해준다. 그렇지만 불과 몇 시간의 짧은 인연으로도 우리는 사랑에 이르고 그것이 충분히 완전한 사랑이었음을 확인해주는 사례를 가질 수 있다. 프란체스카의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을 보고받을 때 우리가 흔히 냉소적으로 내뱉는 주장은 그것이 착각이며 일시적인 착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 역시 이렇게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짧은 인연을 결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잠시 내가 갱년기적 우울에 빠졌을 때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어떤 유혹에 눈이 멀어 저지른 착각이었을 거야.” 그러나 그녀는 터무니없이 짧은 순간을 확실한 사랑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간직한다. 이것은 그녀의 강박에 불과할 것일까. 우리는 이에 관한 숱한 심리학적인 가설과 해법을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또한 그것이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기도 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를 나는 원인과 이유의 차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이러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느 날 어느 젊은 엄마가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달려오는 차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아이의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아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아리를 친 차이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법칙만으로 즉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의 충격으로 아이는 목숨을 잃었다는 것으로 아이의 죽음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이유에 더한 무엇을 애타게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희귀병을 진단받은 누군가가 그것이 특정한 병균이나 생리적인 병인에 따른 것임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신호로 생각하며 그것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를 친 자동차의 물리적인 운동은 이유이다. 그러나 원인은 그것과 다른 차원에 속한다. 엄마는 아이의 죽음이 자신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직장을 다닌 탓이라거나 하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에 관한 비밀을 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사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우리가 주관적으로도 그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것이라고 하면서, 문제는 전적으로 그런 주관적 의식을 처리하는 것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녀에게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위로하고 “외상후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은 권유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곤혹스러운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유는 객관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문제인 반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관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어떨까. 다시 말해 원인 역시 전적으로 객관적인 것이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전쟁의 원인은 무엇이고, 공황과 같은 경제적인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전쟁은 누군가의 총격에 의해 시작될 수도 있고 어느 건물을 폭격한 것에 의해 시작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객관적인 사태에서도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고자 한다. 역사학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들은 이유를 넘어 또한 객관적인 원인 역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지금과 같은 객관적인 이유들을 낱낱이 파헤지고 규명하는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미신적인 음모론에 휩쓸리는 까닭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모론에 대한 흔한 풀이 방법은 음모론은 일종의 서사(narrative) 혹은 허구로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납득하는데 곤란을 겪는 현실의 문제를 이해할 목적으로 짜낸 대중적인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손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음모론이 왜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국면에 출현하고 또 급격히 쇠락하거나 하는 추세가 나타나는지 그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음모론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그 원인을 보충하기 위해 출현하는 원인의 유령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이라는 스피노자 이래 널리 알려지게 된 철학적인 주장이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원인은 망치로 손가락을 찧어 손가락이 아플 때 우리는 통증을 일으킨 원인은 바로 망치의 힘이라거나 내가 올 한 해 운수가 나쁜 원인은 나의 운세 상으로 올 해에 삼재가 끼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원인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말해준다. 그러나 부재하는 원인은 그런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관한 생각과는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런 원인에 관한 주장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마르크스의 인과론일 것이다. 알다시피 마르크스의 인과론은 경제결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단적으로 말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은 경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대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것을 단 한 번도 특정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를 사회의 체계상의 어떤 하나의 영역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라는 영역이 정치나 문화라는 영역을 결정한다고 하는 식의 생각은 마르크스의 생각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쓴 대표적인 저작인 ‘자본’이라는 책이 “경제학 비판”이라는 이름의 부제를 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란 무엇일까.
경제학자들이라면 경제란 생산, 소비, 금융 따위의 어떤 무엇이며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책에서 마르크스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도 역시 자본주의 인구법칙이니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니 하는 법칙에 관하여 말하지만 조금만 유의하여 살펴보면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법칙과는 전연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인구법칙이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실업과 과잉인구를 만들어냄으로써 많은 이들을 생존 위기로 몰아넣고 궁극에는 자본 그 자체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윤율 저하의 법칙도 그런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개별 자본은 자신들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며 다른 자본을 죽음에 몰아넣고 또 이런 경쟁을 극복하기 위해 독점을 형성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결국에는 이윤율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존 자체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질서의 법칙과는 전연 다른 의미에서의 법칙, 즉 비-질서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질서를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미친 역동성, 항상 자신의 모순에 의해 시달리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을 좇을 때 역사의 원인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그것을 부재하는 원인, 즉 어떤 하나의 실재나 지점,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무엇에서 찾는다.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조금 어려운 철학적인 용어로 적대(antagonism)라고 부른다. 갈등이나 대립은 이미 주어져있는 두 개의 항, 두 개의 힘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적대가 두 개의 힘, 흔히 말하는 두 개의 계급 즉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사이의 관계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전연 다른 계급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날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표현되는 형태로서의 계급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으로서의 모순 혹은 적대이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같은 유명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들이 계급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계급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원인과 이유를 명백하게 구분한 최초의 학자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이성을 믿는 합리주의자로서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인까지 찾아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꺼이 정치가 경제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생각하기에 따라 모두 옳을 수 있다. 혹은 창조경제론이 말하는 것처럼 문화가 경제를 결정한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도 있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유의 차원에서만 옳을 뿐이다. 그것은 역사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실증적으로 관찰하고 지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이라는 차원에서 원인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원인은 부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될 수밖에 없고 또 결과를 통해 자신의 효과를 물질화한다. 모순은 사실의 차원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객관적이다. 주관적인 허구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을 둘러싼 터무니없는 질문이 바로 “왜 날 사랑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 목소리, 태도, 몸매, 헌신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열거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이유의 차원에 머문다. 그것은 절대 사랑에 빠진 원인을 밝혀줄 수 없다. 우리는 그 미지의 X를 밝히고자 애쓴다. 그리고 대개 사랑하므로 사랑한다는 동어반복적인 언표에 이르고 당황해하기 일쑤이다. 그리고 그런 물음을 던지는 이에게 “몰라, 사랑하니까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곤 한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사랑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그것을 부인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부재하는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 물질적 상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이 가지고 있는 숱한 사회적이고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속성이나 자질로부터 내가 사랑에 빠진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어떤 최선의 연산시스템을 갖춘 계산기를 가지고서도 우리가 나의 이상적인 연인을 찾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최선의 인공지능을 갖춘 예보 시스템으로 혁명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연히 도래한다. 프란체스카에게 우연히 사랑이 도래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그녀에게서 감동받는 것도 그녀가 그것이 어떤 이유로 옳은 것이고 믿을 만한 것인지 따지지 않으며 사랑에는 부재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온전히 고집했던 것 때문 아닐까.
아무르, 둘 되기로서의 사랑
미하엘 하네케의 윤리적인 드라마 가운데 압권일 <아무르>의 놀라운 충격은 사랑을 과학에 온전히 내맡겨 버린 듯한 세계를 떠올린다면 추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 우리는 사랑하므로 사랑하는 이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기이한 사랑을 목격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제 정신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사랑이란 어떻게든 연인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발버둥치는 것이 분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의 관계는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착란에 빠진 어느 늙은 사내의 광기로서 그의 살인을 인식해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혼란스럽지만 조르주의 안느를 향한 사랑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인정한다.
푸코라는 철학자는 1970년대 후반 근대 세계의 권력 모델을 탐색하면서 악명 높은 생명관리권력(biopower)란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때 그는 생명관리권력의 근대성을 차별화하는 핵심적인 특성으로 기존의 군주권 사회의 특성인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과 달리 이 권력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둔다”고 말한 바 있다. 군주권 사회의 특성은 사형 집행을 통해 희미하게 남아있기는 하다. 우리는 사형 집행을 위해 최종적으로 주권자 중의 주권자 즉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지고한 주권자는 어쨌거나 군주의 모습을 본 딴 어떤 인격에게 집중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를 제외한다면 정치권력이 떠맡아야할 핵심적인 역할은 국민이라는 집합적인 신체의 안녕과 건강이다. 잘 먹고 잘 살고 건겅하게 살 수 있도록, 한마디로 요약하면 살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근대 정치 권력의 규범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가장 불길한 것은 죽음이다. 우리는 생명의학(bio-medicine)이 질병을 죽음과의 관련 속에서 분류하고 처리하는 것을 알고 있다. 암 말기라는 것은 죽음에 가깝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의미를 전한다. 모든 질병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양 극 사이에 펼쳐진 연속적인 띠 위에 배치되고 분류된다. 질병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결말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고 죽음과 가까운 위치로부터 생명과 가까운 위치로 이동시키는 것이 바로 의학적인 치료이다.
생명관리권력의 세계에서 죽음이 얼마나 기피되고 부정되어야 하는 사태인 것인지 우리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하므로 죽음을 선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선태일 것이다. 최근 섬뜩한 증오 속에서 전개되는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에 대한 논란은 바로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나 죽음에 대한 우리 모두의 혐오에서 비롯된다. 요지는 간단하다. “사랑으로 대해야 할 이를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르주의 살인은 무엇일까. 그것을 기꺼이 윤리적 추문으로 인정하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난 후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그를 인정하게 되었던 까닭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지체 없이 조르주의 살인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조르주는 안느가 원하던 바로 그것, 즉 수치스럽게 변신한 자신의 몰골,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늙고 비참한 짐승의 모습을 변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했기에 그녀가 진정 원하던 것, 자신을 제거하는 것, 그것을 선물로 제공하였을까. 그러나 우리는 타인이 원하는 것을 그렇게 쉽게 선물하지 않는다. 하물며 죽음이라는 것을 선물한다는 일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감이라는 주제와 직면하게 된다. 조르주는 안느의 욕망, 그녀가 품고 있는 생각에 진정으로 공감하였기에 그녀에게 죽음을 마련해주었을까. 그러한 감상적인 독해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그런 읽기를 기꺼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르주가 안느에게 주었던 선물은 그녀가 원하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사랑이 완벽한 합일, 틈새 없는 공감이라는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 영화의 윤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네케 감독이 생각한 것은 평생을 함께 한 둘의 궁극적인 소통이나 공감이 아니라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확인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때 사랑은 둘 되기인가 하나 되기인가라는 물음에 마주하게 된다. 하네케 감독은 그에 관해 우리가 흔히 믿는 바와 달리 사랑은 둘 되기라는 것에 내기를 거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세상에서 완벽히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타인, 나와 다르지 않은 타인으로서 사랑하는 연인을 대우한다. 그렇지만 사정은 정반대에 가깝지 않을 것이다. 나와 다르지 않는 혹은 나의 상상적인 이미지로서의 타인은 타인이 아닌 타인, 나에게 어떤 거북하고 불편한 모든 것이 제거된 타인일 것이다. 최근 기독교 신학을 타자성에 관한 윤리에 관한 주장으로 새겨 읽으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에 주의하는 방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던지는 이들은 나와 다르지 않은 동료-인간은 이웃이라는 타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 강변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웃이란 타자성에 대한 이해를 요약하는 배려와 존중이라는 우리 시대의 윤리적 계명이 상정하는 타자와는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역설하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말을 건네는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 섹스 파트너만 따를 뿐, 신체적 능력에 있어서만 다를 뿐, 우리와 다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은 곧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는 내게 요령부득인 괴물로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타자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란 생각으로부터 물러나 우리는 둘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이웃은 불편함이 처리된 이웃, 자신의 특별한 습속과 생활양식에 파묻힌 이웃, 한 마디로 내게 “잘 알려진” 이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주가정을 다룬 휴먼 다큐에서 우리가 보는 타자는 우리와 똑같이 같은 문제로 울고 웃는 인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그녀가 살던 세계의 전통의상을 입어보고 어색하지만 즐거운 기분으로 전통적인 의례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와 다르지 않은 감상적이고 평범한 인물로 전환함으로써 용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 누군가의 말처럼 타자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 이웃으로서의 타자라는 이미지를 조르주와 안느의 관계 속으로 끌고 들어오면 어떨까. 조르주는 안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우리는 그가 안느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바램을 이해하기 위해 번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유를 찾아내어 그녀가 죽음을 욕망하게 된 것을 납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록에 그녀에 대한 연민에 휩싸여 그녀를 살리고 보살펴야 한다는 의지를 고수하게 될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온전히 조르주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역시 분명하지 않을까. 조르주 역시 안느를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의 욕망을 존중하기로 결심했다고. 불가해한 욕망이자 우리 시대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인 죽음을 향한 욕망을 그는 인정하기로 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은 하나 되기가 아니라 둘 되기란 것을 실행하는 윤리적인 선택을 목격했을 것이다.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은 그리고 그, 그녀와 나의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기꺼이 승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전연 다른 존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창립하는 행위이다. 지금까지 나는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보편적인 공리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사랑에 관하여 물을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심각하게 동요하고 변덕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에 좌절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사랑에 관한 진실들을 거부하고 팽개치며 심술을 부리고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사랑이란 것이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곳이라는 점을 증언해줄 뿐이다. 믿음이 처한 위기란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면 그것은 막연하게 냉소적인 회의주의와 상대주의가 만연한 시대의 풍경을 언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게 불신의 시대란 생각보다 명료하다. 그것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는 시대란 뜻이다. 믿어야 할 것의 두 후보로서 혁명과 사랑을 제외하면 무엇이 더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사랑을 믿어야 할 이유에 대해, 우리가 자신을 급진화할 수 있는 윤리적인 행위가 믿음이라면 바로 사랑은 어떻게 믿음과 상관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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