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경제로서의 금융화된 경제: 자선, 교환, 공공성


M83 – Un nouveau soleil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자들, 선물경제의 부르주아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이들 사이에서 폴라니의 인기는 각별하다. 한국의 어떤 신문은 숫제 21세기는 폴라니의 세기가 될 것이라 대서특필하면서 법석을 피우기도 하였다. 아마 사정이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폴라니는 주저인 ‘거대한 전환’에서 부의 생산과 교환을 에워싼 역사적 체제로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비판하였다. 어쨌거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이들이 득세하는 세계에서 시장의 악을 집요하게 비판한 그의 주장은 매력적일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신화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폴라니 역시 역설하듯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는 신화이지만 또한 현실을 생산하는 구체이고 물질적인 힘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토지, 노동, 화폐와 같은 비상품인 물질적, 비물질적 대상을 상품으로 구성하고 시장에서 가격을 가진 대상으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조정적 시장경제가 “거대한 전환”과 더불어 등장한 것이라면 전환 이전에 우리의 물질적 부의 생산과 전유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여기에서 폴라니는 (경제)인류학자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는 거대한 전환이 파괴하거나 대체한 부의 인간학을, 호혜성의 경제라 할 수 있을 선물(gift)과 국가나 왕권과 같은 주권적 권력에 의한 재분배에서 발견한다.

증여의 경제, 선물의 경제라고 알려진 경제적 삶의 형식과 그 인간학은 인류학의 핵심적인 공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도덕경제를 비판하거나 상대화하는데 있어 선물 혹은 나눔보다 더 중요한 관념도 없을 것이다. 세계화, 금융화라는 추세 속에서 지구적 사회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하며 삶의 곤궁과 비참을 증대시키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에 대해, 물론 대답은 반쯤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논법은 단순하다. 시장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을 쫓을 때 자본주의를 규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시장에 재갈을 물리고 그것을 규율하면 된다는 입장과 결국 시장의 실패는 다시 시장을 통해 해결하여야 한다는 입장 사이의 대립으로 환원된다. 폴라니를 지지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논리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의 독특함은 시장의 대립항으로서 국가가 아니라 사회를 도입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 혹은 생산물을 “교환”하는 보편적인 형식이 시장이라 전제한다는 점에서 국가를 지지하는 케인즈주의자나 사회주의자 그리고 시장을 편드는 자유주의자 모두를 비난한다. 그들은 모두 시장을 경제의 근원적 원리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 폴라니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한쪽은 시장을 맹신하고 다른 한쪽은 시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 시장의 근본적 역할을 수긍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의 자본주의 비판 기획이 시장 비판의 기획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은 적잖이 억지스럽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시장을 적대시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부인하기도 어렵다는 점도 역시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인가 국가인가라는 이분법은 시장이야말로 부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식으로 이를 보편화하고 있다면 이러한 허구는 어떤 연유로 그렇게 정착될 수 있었을까. 폴라니는 사회 속에 묻어있던(embedded) 시장이 자율화되고 나아가 거꾸로 사회를 통제하는 원리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장이 전일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는 시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는 갈등을 자기조정적 시장경제가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란 바로 그런 사회로부터의 저항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자본주의의 내재적 비판의 조건 자체도 이에 달려있다는 것에서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의 기획은 출발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언뜻 미셀 푸코의 후기 작업을 생각나게 한다.
푸코는 정치적 근대성을 생명관리정치의 형성과 동일시하며 자유주의적 통치성(governmentality)이 등장하고 변형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그 때 그는 생명관리권력의 분석을 예고하는 그의 강의의 제목으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976,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를 내건 바 있었다. 물론 미셀 푸코의 시점은 폴라니와 다르다. 폴라니에게 있어 사회란 단지 시장의 타자로서 구성되는 부정적인 규정일 뿐이다. 즉 시장이 아닌 것 혹은 시장에 의해 부정되는 것으로서의 사회일 뿐이다. 그러나 내재적인 유물론자인 푸코에게 그런 식의 생각은 불가능하다. 그에게 있어 사회란 시장의 존재론적인 모태이기는커녕 특정한 지식과 권력, 테크놀로지, 윤리가 결합되면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따라서 시장에 의해 전취되고 지배되는 역사적인 선험으로서의 사회란 생각보다 푸코에게 낯선 것은 없을 것이다. 사회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는 군주권적 권력(혹은 주권적 권력)으로부터 생명관리권력으로의 전환을 추적하며 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자신의 권력이 행사되는 대상으로서의 인구와 그리고 그것을 인구라는 생명을 지니고 안녕을 추구하는 집합적인 신체로서 마름질하는 과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미셀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이 때 푸코는 사회국가, 사회보장, 사회주의, 사회과학 등 20세기에 일종의 초월적 이상처럼 기능했던 “사회(the Society)”의 발생을 포착하고 그것의 정치적인 합리성(rationality)을 분별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푸코는 생명관리권력을 사회란 개념과 대조하며 분석하지 않는다. 외려 이는 그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프랑수아 에발드나 자크 동즐로 같은 이들의 작업을 통해서이다. François Ewald, L’etat providence, Paris: Bernard Grasset, 1986.; 자크 동즐로, ‘사회보장의 발명: 정치적 열정의 쇠퇴에 대한 시론’, 주형일 옮김, 동문선, 2005.
이 가운데 특히 동즐로는 ‘사회의 발명’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의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럴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되는 불가피한 결과, 무엇보다 빈곤과 실업 등-이는 훗날 ‘사회문제(social question)’란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과 프랑스혁명 이후 불가역적으로 긍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인민주권 담론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아포리아를 초래했다고 역설한다. 전자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인민의 주권을 선언하는 투쟁으로 나타난다면 세계는 항상적인 소요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아포리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사회였다.
푸코에게 사회란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를 통해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이루는 인구들의 삶”을 가리킨다. 미셸 푸코, 2011, 86쪽.
그리고 그가 보기에 국가는 그 사회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고 그를 위해 인구들의 움직임이라는 자연스러움, 혹은 현실들의 추세에 따라 권력을 조직하고 전개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통계학(statistics)으로 시작하여 훗날 사회과학(social sciences)과 같은, 사회에 관한 과학이 제공하게 되는 지식에 힘입는다. 사회는 신민(subject)나 인민(people), 시민(citizen)이 아니라 인구로 구성된다. 당연히 사회는 인민이라는 정치적 주체의 공동체만을 기억하는 ‘공화국’과 구분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란 것이 사회학 교과서에 전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집합체라는 가정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하이데거 식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개인들 사이의 관개인적인(trans-individual) 네트워크 일반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겠고 사회(the Society)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의 시기-많은 이들이 사회국가, 복지국가, 케인즈주의의 시기라고 부르는 역사적 시대-에 서유럽과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해, 2차 대전 이후에는 탈식민화 과정을 통해 바야흐로 국민국가의 형태로 비서구세계를 통해 확장된, 사회적인 것의 특수한 역사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특수한 역사적 형식을 통해 출현하고 변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 세계의 사회는 시장의 타자로서의 사회라기보다는 시장의 내재적 계기로서의 사회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푸코의 주장에 유의하자면 사회란 시장의 타자인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기조정의 논리 자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푸코의 주장을 연장하는 현재적 형태의 시장을 오늘날의 자선자본주의(philanthropic capitalism)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눔과 돌봄의 경제를 역설하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시장과 사회를 대립시키기는커녕 둘의 합성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극복할 수 없는 영구적인 기계로서 시장의 결함을 교정하고 나아가 시장의 윤리적 가치에 세례를 베푼다. 사회는 시장을 더욱 효율화하고 시장의 자기조정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셈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이른바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윤리적인 기획에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선자본주의라는 전망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자선사업 및 사회적 기업의 활약 그리고 그것이 동원하는 ‘공공성의 재구성’을 검토한다. 자선과 기부는 유례없는 빈부격차와 실업, 불완전 고용, 기초적인 삶의 질의 붕괴라는 동시대의 비극을 극복할 유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나눔과 자선의 실천은 특유한 역사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실행하는 기관, 장치, 에토스 등의 새로운 결합체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현재 나눔과 기부를 조직하고 실천하는 행위자는 공공성을 독점하던 국가의 영역을 대신하며 “사회적 소명과 기업의 영리적 활동을 접목한 다양하고 자발적인 시민활동”을 강변한다. 유병선, ‘보노보혁명’, 부키, 2007, 188쪽.
이는 시장의 타자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시장과 사회를 합성하는 새로운 전략이 출현하고 전개되는 과정을 만들어내려는 윤리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겉보기에 이는 폴라니 식의 아이디어를 따른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를 지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시장을 사회 속에 다시 파묻는다(re-embedding)는 전망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폴라니 식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증여라는 형태의 호혜성의 경제, 나눔의 경제를 동원함으로써 시장의 부정적인 결과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자선자본주의는 폴라니의 주문을 기꺼이 따른다고 보일 정도이다. 물론 이때의 증여와 나눔은 자기조정적인 시장경제와 대립하는 교환의 실천이 아니라 시장의 자기조정의 회로 속으로 통합된 것이다.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거대한 부자들(대개 정보통신사업의 최대 주주로서 거대한 부를 이룩한 기업가들이나 펀드매니저를 비롯한 금융업자들) 역시 시장과 사회를 조화시킨다는 점을 내세운다.
주주, 투자자, 소유자 그리고 민주주의
제3세계의 식수난을 해결하거나 유아 기아를 해결하는데 “여러분의 작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비정부기구의 TV 광고를, 우리는 이제 흔하게 마주한다.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억만장자들의 약속과 그들의 활약을 소개하는 기사 역시 쉼 없이 듣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뿐 아니라 재능이나 정보를 통해서도 나눔의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윤리적인 캠페인은 기업은 물론 학교에서나 지역사회에서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한 나눔과 기부의 에토스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규제적인 이상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새삼스런 일이다.
언제나 경제적인 실천은 특정한 윤리적 이상과 함께 한다. 예컨대 어려운 전문용어로 개인의 재무 설계와 관리, 시쳇말로 재테크라 불리는 일상적인 경제적 실천은, 단지 개인이 어떻게 부를 형성하고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는 경제적인 기회와 위험을 해결할 것인가로 국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재테크하는 주체를 공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인간으로 동일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재테크란 적극적으로 자신의 위험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능동적인 시민으로서의 자세를 장려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시민이란 우리 시대의 윤리적 이상으로 자리 잡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시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자유의 기획으로 생각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주체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한편 시민교육으로서 금융리터러시의 함양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행복한 돈쓰기”의 실천을 통해 도모하고자하는 다양한 시민운동의 경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제윤경,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 행복한 돈 이야기’, 티비 2007.; 제윤경, ‘돈에 밝은 아이: 시험성적보다 더 중요한 우리 아이 경제교육’, 한겨레출판, 2010.; 제윤경, 이헌욱, ‘약탈적 금융 사회: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부키, 2012.; 김주원, ‘금융복지상담과 사회적인 것의 (재)형성 : 사회적 기업 E의 금융복지상담사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4.

한편 이러한 윤리적인 모델이 상상하는 소유자라는 주체는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기획의 변형과 결합한다. 이른바 ‘소유자 민주주의(ownership democracy)’라고 불리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대중 투자자, 개미 투자자들이 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부를 창출한다거나 창의적인 자영업자가 되어 어떻게 사회를 혁신함은 물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떠들어대는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의 민주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소액주주운동으로 대표되는 기업의 비민주적인 지배구조와 반사회적인 경영을 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야 한다는 기획은 분명 소유자라는 주체를 시민의 형상과 겹쳐놓으며 전통적인 노동자운동과 계급 정당에 의해 조직되었던 사회민주주의나 코포라티즘적인 통치형태를 대체한다.
그러나 이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은 액수로라도 자신의 쌈짓돈을 마련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사업가로서 자신의 삶을 돌보게 함으로써 대물림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미소금융(microfinance)의 반-빈곤 담론, 제3세계 도시빈곤의 해결은 국가주도의 개발이 아니라 빈민들이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게 됨으로써 적극적으로 삶을 개선하는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에 달려있다는 데 소토 식의 신개발담론 등은 시장의 원리를 통해 시장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연 다르지 않다. 이는 성적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여성주의적 경제 시민권 담론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관철된다(이를테면 1970년대에 여성의 권리를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권리, 여성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권리로 제기했던 미국의 여성주의적 시민권 캠페인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Jayson Harsin, The Lost Histories of American Economic Rights, Cultural studies and finance capitalism: the economic crisis and after, Mark Hayward ed.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2
이런 점에서 최근 부쩍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기업보다 더 경제적인 것의 윤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로서 두드러진 것이 없을 것이다. 2007년 1월 정부는 『사회적기업육성법』을 제정하면서 사회적 기업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취약계층에게 사회적 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여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재화 및 서비스를 생산, 판매하는 등의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업.” 그리고 사회적 기업은 노동부 장관의 인증을 받는 경우에 한해 그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이는 양극화와 실업이라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이른바 일자리 확대에 ‘공익적 영리활동’을 강조하는 도덕경제의 담론을 채용한다.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고자 하는 정부의 전략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부의 개입 정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나눔의 경제라는 윤리적 기획의 하나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혁신을 실험하는 사회적 벤처(social venture)” 유병선, 앞의 글, 188쪽.
라고 말할 때,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서비스를 시장화함고 더불어 이를 통해 그 서비스를 혁신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장의 대극이었던 사회는 이제 시장을 통해 더욱 살아날 수 있는 대상으로 재현된다. 한편 이와 더불어 유의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사회적 기업의 형성과 운용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자본, 보다 구체적으로는 펀드가 형성되는 모습일 것이다. 아마 이를 극적으로 예시하는 것을 꼽자면 “장하성 펀드”로 더 유명한 “라자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Lazaard Korea Corporate Governance Fund)”와 그로부터 얻은 개인적 수익을 통해 운용되는 장하성 재단일지도 모를 것이다. 장하성 펀드와 재단이 가진 비중과 효과란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장과 사회의 합성을 경유하여 선물경제로서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낸다는 윤리적 기획을 적극적으로 대표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본의 윤리적 서사로서 손색없는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참여연대라는 시민사회운동단체에서 소액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장하성은 재벌개혁을 위해 앞장 선 사회운동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장하성 펀드로도 불리는 라자드 기업지뱌구조개선 펀드는 2006년 4월 미국의 자산운용사인 라자드자산운용(Lazard Asset Management)이 한국에 설정하고 운용하는 사모펀드로서 현재 약 1200억 원에 이르고 향후 6천억 원에 가까운 펀드를 조성할 것으로 알려진 바 있었다. 이 펀드의 목적은 잘못된 지배구조로 인해 시장에서 주가가 저평가된 기업을 선정하여 주식을 사들인 후 사외이사와 감사를 파견하고 배당을 늘리라고 요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소액주주들이 기업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기업지배구조를 개선시킴으로써 기업가치를 높이고 투자수익을 얻는 것이다. 이는 잘 알려져 있듯 재벌이 5%도 안 되는 지분으로 그룹의 계열사를 쥘락펼락하고 이윤을 재벌가의 소유로 빼돌리거나 순환출자와 같은 형태로 계열사들을 지원하는 행태를 비판하며 소액주주의 이익을 적극 옹호하는 시늉을 한다. 즉 펀드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에 부정적인 이들이 많음은 물론이다. 이 펀드가 조성한 약 1200억 원의 자금원이 대부분 미국 버지니아대학과 조지타운대학 재단 등 미국자본이라는 점, 그리고 세금회피를 위해 조세피난처인 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으며 자산운용은 소버린의 투자자문을 맡았던 미국 라자드 에셋 매니지먼트사이고 장하성은 공식적으로 투자고문으로 역할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기업가치를 제고한다는 명목으로 해고와 감원을 비롯한 반노동적 조치나 하청 단가 인하와 같은 방법을 통한 중소기업에 대한 부정한 지배 등에 대해서는 전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 등은 줄곧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조세피난처에 마련된 페이퍼컴퍼니의 거대 규모의 펀드가 선물의 경제를 조직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서 자처한다면 어떨까. 장하성 펀드를 투자자 행동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비판하며 소유자 계급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지배구조의 형성의 한 계기로서 비판하는 것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김덕민, “‘장하성 펀드’, 신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사회운동’, 69호, 2006.
장하성 펀드는 상당한 수익률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장하성 역시 그에 대한 인센티브로 그의 스스로의 표현이라면 “두둑한” 액수를 받아 그를 재원으로 2020재단을 설립하였다. 『머니투데이』, 2007년 9월 3일,
(http://news.mt.co.kr/mtview.php?no=2007090118174316561&vgb=column&code=column131), 2014년 5월 3일 마지막 접속.
2020재단이란 이름은 “우리 사회의 상위 20%가 하위 20%를 돕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2.0, 2.0의 시력으로 사회를 똑바로 바라 본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두둑한 인센티브를 받는 부자인 장하성의 재단의 실제 활동은 짐작과 달리 초라하다. 공식 홈페이지에 고시된 2013년 사업 내역을 보면 총 3,250만원을 목적사업에 사용하였다고 하면서, 한국희망재단: 아시아 지역 아동 교육사업으로 1,150만원 지원, 글로벌비전: 방글라데시 구초그람 아동교육지원 사업으로 1,000만원 지원, 나눔문화: 운영비 500만원 지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운영비 500만원 지원, 참여연대: 운영비 100만원 지원 등을 밝히고 있다. 2020재단, “2013년도 2020재단 기부금 모금액 및 지원사업”,
(http://www.2020vision.or.kr/sub/sub03_1_read.html?idx=1&b_idx=6134661925334d1), 2014년 5월 3일 마지막 접속.
여기에서 그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시민사회운동단체에 대한 지원을 제외하면 이 재단은 자선사업재단 혹은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하성재단(2020재단)의 활동 성과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외려 이 재단이 주목을 끌게 딘 이유였던 그의 신조, “자본으로 자본주의를 바꾼다.”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중요할 것이다. “장 교수는 ‘자본으로 자본주의를 바꾼다’는 신념으로 경영학자로서 자신의 지혜와 경륜을 소액주주운동에 ‘기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했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장이다. 이미숙, ‘자선으로 리드하라’, 김영사, 2012.
이런 평가들 속에서 재현되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재단으로 자선활동을 통해 나눔, 기부, 자선을 결합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펀드매니저임과 동시에 자선사업가라는 이질적인 주체를 결합한다는 것이다. “부의 매점을 일삼는 주체와 자선사업 주체는 보통 동일한 행위자이며, 역으로 시민적‧자선적 주도권도 축적된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라 귀요,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을 도울까’, 김태수 옮김, 마티, 2014. 96쪽.
또한 이는 펀드라는 투기적인 이윤 착취와 자선사업이라는 두 가지 대조적인 행위가 동일한 윤리적인 행위를 축조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이는 위선도 아니고 도덕적 비난을 모면하려는 몸짓도 아니다. 벤처자선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신자선의 도덕경제는 자선사업을 금융투자와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신 자선사업 전략’은 금융자본의 사회적 미덕을 자부하는 만큼이나 자선의 금융자본적 태생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리스크의 채택, 프로젝트의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한 결과의 계량화에 부여된 중요성, 종합금융 머천트뱅킹 모델과 인수 기업의 경영 참여 모델에 근거한 자금 지원 이니셔티브의 직접적 개입, 단기간 동원되는 대량의 자금지원, 이익산출적 철수 가능성 타진(기업 인수/매도에 사용되는 ‘출구전략’도 자선사업의 모델로 제시된다.), 자기자본 수익성 계산 모델에 입각한 ‘투자의 사회적 수익성’social return on investment rosua(주로 금융 애널리스트들이 고안한다) 등. 자선사업은 금융투자와 다를 바 없다.” 니콜라 귀요, 앞의 글, 103쪽.
그러나 이는 단순히 기부금을 수익성이라는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 신 자선사업이 구시대의 자선사업을 대체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종래의 자선사업을 비판적으로 규정하며 자선사업의 새로운 정체성을 표상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조지 소로스와 워렌 버핏을 비롯한 거대 금융자본가와 닷컴 기업의 창업자들은 모두 주식 소유와 배당금을 비롯한 금융적 수익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민주주의의 현신(現身)으로 표상하는데 부지런하다. 미국의 신자선사업의 정치를 분석하는 글에서 프랑스이 사회학자 귀요는, 신흥 자본가들이 유대계의 유서 깊은 가문이 지배하는 금융계와 록펠러, 카네기, 포드 같은 자본가들로 대표되는 산업자본가들과 스스로를 차별화하고자 분투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대기업의 적대적 공개 매수에 나서면서 자신을 소액주주 권리를 옹호하는 “민중주의적 반역자”라고 자처하기, 의심스런 돈으로 의심을 사면서 경멸받던 정크본드의 자본시장 진입을 추진하면서 거대 기업 중심의 기업 평가 기준이 소수민족 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역설하며 마치 시민권 운동의 투사인 것처럼 제시하기, 부자들에 맞서 투자하고 자선재단을 통해 그 수익을 빈자에게 되돌려준다는 로빈 후드의 캐릭터로 분장하기(조지 소로스가 대표적일 것이다) 등은 모두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실천으로 투자를 표상한다. 앞의 글, 69-71쪽.
공공성을 재구성하다-투자로서의 나눔
금융 자본의 이런 자기 표상의 전략은 그들이 앞 다투어 뛰어든 자선사업으로 연장된다. 이 때 그들이 관여하고 추진하는 신자선사업은 부정하게 벌어들인 돈을 향한 항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위선적인 책략이라 평가 절하할 수 없다. 그것은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이끄는 새로운 자본가 집단이 자신을 민주주의의 정치적인 대표자로 구성하는 전반적인 과정의 계기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은 전지구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중이고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2004년 초 2백만 명의 투자자를 끌어모았던 미래에셋이 출시한 “적립형 3억 만들기 펀드”를 상기하여보자. 이 펀드는 이른바 ‘적립식 펀드’ 열풍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펀드는 이후 대형 펀드에서 조달한 자금을 합쳐 국내의 상장사 가운데 57개 이상의 기업의 5%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소액 투자자를 통해 형성된 펀드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적 실천으로 표상될 수 있을까.당연 그것은 경제민주화라는 담론과 손쉽게 결합할 수 있고 투자자 행동주의로 확장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책임 투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투자자(주주)들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시대,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사회책임투자에서 시작된다.”는 식의 언표가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내거는 민주주의적 상상의 일부를 이룬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는 바이다. 사회적 책임투자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역설한다. 주주의 권리 보호, 소수민족과 외국인을 포함한 모두 주주의 공정한 대우, 이해관계자의 권리에 대한 존중, 일자리와 지역사회, 공급업체, 환경 등의 사안에 대한 기업과 주주의 협력, 투명한 정보공개, 경영진 감시하는 이사회의 책임 명시 등. 이런 원리는 투자를 사회적 책임과 결합하며 시장과 사회를 결합하는 경제민주화 프로그램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 담론과 결합된 ‘펀드 자본주의’는 신자선사업과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기획을 보다 완결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영주 외, “‘펀드자본주의’의 明과 暗”, 삼성경제연구소 CEO 인포메이션 제 571호, 2006.
삼성경제연구소, 『펀드자본주의 명암』,
이미 언급했듯 펀드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투자자의 적극적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 자본주의의 기획의 주체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데 적극적이다. 나아가 자신이 거둬들인 수익을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고 이를 금융적 실천의 규범에 따라 규율하며 나눔이라는 선물경제 자체를 투자와 수익이라는 금융화된 격자 속에 포획한다. 이러한 형태의 선물경제는 물론 공공성의 재구성이라는 기획과 분리될 수 없다.
일각에서 이러한 자선사업의 범람을 두고 국가와 복지서비스를 시장에 외주화하는 것이라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자선사업, 즉 나눔과 기부의 실천은 일종의 대중적인 문화로서 환영받으며 그런 비판적 시선을 손쉽게 따돌린다. 나눔과 기부는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억만장자의 소일거리가 더 이상 아니라 경제민주화를 위한 대중적인 실천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자선운동가로 변신한 미국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이 말하듯이 “우리 각자의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에서 말하듯이 모두가 그 주체로서 동원될 수 있다. 빌 클린턴, 기빙: 우리 각자의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 김태훈 옮김, 물푸레, 2007.
“우리가 갖고 있는 돈과 시간, 물건, 기술, 아이디어 등을 내놓을 때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언표는 나눔과 기부라는 기획을 “누구나 즐기는 세계인의 생활 스타일”이라 강변한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치가 강조되는 글로벌 시대에 자선은 소셜 네트워크와 인터넷을 통해서 액수에 구애받지 않고 즐겁게 전개되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숙, 46쪽.
한편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게 된 나눔과 기부라는 문화 혹은 에토스는 선물의 경제를 새롭게 구성하는 윤리와 짝을 이룬다. 그러나 나눔의 경제는 공공성을 재구성하는 기획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선을 통해 형성된 펀드의 지원을 통해 운영되는 사회적 기업은 의료, 교육, 위생, 공공사업 등을 비롯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사회국가에서 국가의 영역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눔의 경제를 실현하는 자선사업과 그를 실현하는 사회적 기업, 공동체 기업(community corporate) 등은 “기업가적 전략과 방식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하이브리드’ 조직이라 할 수 있으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재편하는 형태라고 정의되곤 한다. 흔히 ‘제4섹터’라고 불리는 이러한 잡종적인 영역은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라는 부문에 이어 시장과 시민사회가 결합된 새로운 영역으로서 스스로를 제시한다. 1990년대 민중운동으로 대표되는 계급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이 급격히 쇠퇴한 후 그를 대신한다고 자처한 시민사회운동 역시 위기를 맞이한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제4섹터에 대한 관심은 비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포스트-시민사회운동이라고 부를 만큼 단절적인 전환이 나타난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장하성의 사례에서 보듯 기존의 시민사회운동과 제4섹터를 분간하는 것이 어려우리만치 시민사회 스스로 재원의 조직과 운동 프로그램 실행에 이르는 전체적 범위에서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제3섹터와 제4섹터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선사업을 통해 확보된 펀드를 통해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고 그런 기업을 통해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눔의 실천을 조직한다는, 즉 벤처 자본을 통해 사회적 벤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나눔의 사회적 경제를 창출하겠다는 전례 없는 경제적 텔로스는, 구체적 사례의 편차와 지역적인 특성과 국가 및 다른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떠나, 공공성을 에워싼 상상에 전환을 이루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국가와 시장의 양극적인 대칭 속에서 항상 국가의 편에 놓여있던 시장이 공공성을 통합하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공공성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윤리적, 정치적 규범과 그를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 관행, 기준 역시 광범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자선자본주의의 윤리적 전환의 기획과 공공성의 관계를 치밀하게 사유하고 경험적으로 반성하는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운 듯하다. 이를테면 하승우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성이 공공재를 사유재화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결국 민주사회를 ‘기업사회’로 바꿀 뿐이라고 생각하며 기업(enterprise)과 민주주의를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기업사회란 것이 새로운 민주사회의 텔로스를 생산하려는 기획으로 출범하였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이니셔티브, 제도, 법률, 관행, 규준, 평가, 척도 등을 생산하였음을 생각한다면, 이런 비판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승우, ‘공공성’, 책세상, 2014, 49-54쪽.

금융화의 도덕경제 – 윈시적 축적 기(期)의 도적 남작
“새로운 자선사업을 이끄는 자금원은 제조업 생산기반을 해체하고 외환 및 증권 투기의 방식으로 포드주의의 폐허 위에 쌓은 재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융자본은 국가 위기의 산물인 동시에 국가의 위기를 조장하고 가속화하는 주범이다. 시장의 자유화와 탈규제의 국면은 자선의 본질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경향을 고조시킬 뿐이다. 그것은 자선에 사용된 재산에 대한 세금공제이다.… 현대적 자선사업은 ‘개인 후원자들(메세나)이 돈을 대는 일부 공공재와 관련된 결정이 국가의 주권영역을 벗어났던’ 고대 희랍 명망가들의 자선적 기부와 동일한 성격을 갖게 된다.” 니콜라 귀요, 110쪽.
니콜라 귀요는자본 재생산양식의 변동과 자선사업이 도약하거나 쇄신했던 역사적 시기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며 자선사업의 혁신은 “원시적 자본축적의 국면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다. 숫제 그는 이것이 자신의 가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하나의 “모델”로서 구실한다고 힘주어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마르크스의 ‘원시적 축적’이란 개념을 자선사업의 역사적 단절을 분석하는 지표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원시적 축적이란 개념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둔 논의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은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이들이 원시적 축적을 자본주의의 발생사란 시점에서 본 시기구분의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 구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인정하는데 합의하는 듯 보인다. 원시적 축적이란 자본주의 형성의 맹아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대로 마감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적 운동 속에서 불가역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형성을 말할 때 많은 이들은 공통의 정보, 토지, 자원 등을 사유화함으로써 새로운 지배 자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폭로한다. 대표적인 주장으로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 외 옮김, 사월의책, 2014;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 2012 등을 참조하라.

그 때 그것은 단순히 이윤의 재투자를 통한 ‘평화적이고 정상저인’ 가치증식이 아니라, 데이비드 하비의 말처럼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이는 원시적 축적의 현재적 형태라 말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식민지를 확보하고 그로부터 거대한 규모의 노동력과 천연자원을 탈취하여 새로운 형태의 원시적 축적을 실행하는 것으로 제국주의를 이해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고전적 주장은 원시적 축적을 자본주의의 본질적 구조 가운데 하나로 생각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본의 축적 I-II’, 황선길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그렇지만 중요한 점은 원시적 축적이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시점에 이뤄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항상적으로 동원하는 전략이라는 것만은 아니다. 귀요의 발상을 따르자면 이러한 원시적 축적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하고 그 과정에서 비롯되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을 옹호하기 위해 그러한 역사적 국면마다 자선사업이 등장하고 또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경영자본주의가 등장하며 거대한 독점자본이 출현하게 되었을 때, 이런 독점자본을 대표하는 기업가들, 예컨대 록펠러, 카네기, 포드 등은 자선사업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모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문학적인 거액의 연봉과 배당으로 부를 쌓아온 억만장자들을 낳은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어떨까.
귀요는 자선사업의 사회사라고 여길만한 저작인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에서 새로운 억만장자, 즉 새로운 원시적 축적의 승자들일 신흥 자본가계급과 그들이 실행하는 자선사업을 분석한다. 요컨대 새로운 원시적 축적은 어떤 모습의 새로운 자선사업을 낳았는지를 추적하며, 그는 원시적 축적기의 자본의 운동을 자선이라는 윤리적 기획의 부침과 관련짓는다. 그의 주장을 참조할 때 자선사업의 역사적 변모는 단지 자선사업 내의 역사적인 자기변형의 논리로 환원할 수 없는 자본의 운동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신 자선사업은 신흥 자본가계급의 도덕적 위기에 대한 대응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많은 부를 수취하는 자본 분파라고 할 ‘이자 낳는 자본(interest-bearing capital)’은 자신이 초래한 극단적 불평등으로부터 비롯된 저항을 피하기 위하여 선인(善人)의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자선사업의 윤리를 경제적인 것에서 비롯된 재난과 부정을 만회하고자 “경제 외적”으로 도입된 의식이거나 규범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하였듯 경제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외재적이지 않다. 경제적인 것 자체가 언제나 특정한 윤리적 에토스와 평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면모는 그것의 윤리적 잠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실물적인 혹은 생산적인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이윤 수취 계층, 금융업자의 탐욕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적 이상을 산출하는 기획임에 주목하게 한다.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윤리적으로 실패했다는 저간의 비판이 무력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눔과 기부의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를 행복한 삶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표상하는 것, 공리주의적인 사적 이해의 세계와 대립하는 사회적인 것의 공공성을 시장의 윤리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공공성을 시장의 연장으로 전유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선과 사회적 기업이 개입하는 대상으로서 특수한 사회 문제를 담지한 공동체를 상정함으로써 보편적 정치 공동체를 제거하는 것. 이런 점들에 유의할 때 우리는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기획이 불평등의 자명한 사실적 삶의 세게에 대한 비판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_연세대 [공공성의 위기와 사회인문학의 과제]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 원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