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의 집으로서의 자본주의: 집요한 내재적 유물론의 난관


Grace Jones – La Vie en Rose

자본의 존재론을 향하여?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 삼부작 가운데 마지막 권인 ‘공통체’가 마침내 출간되었다. 그런데 조금 인색하게 말해 이 세권의 저작을 삼부작이라고 부르기엔 어려움이 있다. ‘제국’과 나머지 두 권인 ‘다중’ 그리고 ‘공통체’가 상이한 주제나 대상을 놓고 분리되어 있는 저작들이라고 볼 수 없는 탓이다. 외려 ‘제국’이라는 문제적인 저작이 출간되고 난 이후 이 저작의 불명료하고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는 일련의 저작을 내놓으며 저자들이 꾸준히 증보판을 출간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런 탓에 삼부작이라는 연속적 기획이라는 시점에서 근작인 ‘공통체’에 접근하기는 곤란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저작의 가치를 쉽게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어쨌든 ‘제국’ 이후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연원하고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존재론의 구성에 통합하고자 했던 두 공동 저자의 완고하고 영웅적인 탐색의 자취는 이 저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제국’의 출간이 던진 충격은, 어느새 지난 일처럼 추억거리가 되었지만, 일종의 사건이었다. 그 저작이 품고 있는 야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레닌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단절을 꾀할 만한 이론적, 정치적 기획이 부재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람시, 알튀세르, 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의 마르크스주의의 현대화를 위한 기획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레닌주의에 필적할만한 반자본주의적 정치의 기획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반자본주의적 기획 전체를 의문시하고 또한 마르크스주의 역시 지난 시대에 명멸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의 종(種)으로 취급되며 이를 안락사 시키려는 시도가 난무했음을 떠올릴 때, ‘제국’의 출현은 반란과 저항의 사유가 소생하고 쇄신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낙천적이고 대담하였다. ‘공통체’에서 더욱 주의 깊게 확인하고자 하듯이 그들은 “자본의 코뮤니즘”, 즉 요원하거나 불가능한 미래로서의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편재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그것을 인정하고 장악하지 못한, 이미 도래한 코뮤니즘의 존재를 역설한다. 그들이 자본이 더 이상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고 조직하는 권력으로서 작용하지 못한 채 흡혈귀처럼 가치를 탈취하는 외적 형식적 명령으로서의 자본이라고 강변할 때, 많은 이들은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전미래(前未來)적인 시점을 통해 현실을 사유하려는 가장 강한 사례란 점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은 지구화 과정을 통하여 지구 전체를 그 명령 아래 둘 뿐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를 창조하고 그것에 스며들어가서 착취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에 경제적 가치의 위계에 따른 질서를 부여한다. 정보‧코드‧지식‧이미지‧정동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지배적 생산형태에서는 생산자들이 공통적인 것-특히 그 사회적 형태인 소통네트워크들, 정보은행들, 문화적 회로들-에의 자유로운 접근과 함께 더욱 많은 자유를 점점 더 필요로 한다. ……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탈중심화된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모든 형태는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수반하든 아니든) 자유와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생산되는 것-아이디어, 이미지, 정동 등-의 내용은 쉽게 재생산(복제)되기 때문에 이를 사유화하거나 공적 통제 아래 두려는 모든 법적‧경제적 노력에 강하게 저항하는 경향, 공통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행移行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 19쪽.
‘공통체’ 안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빈번히 출현하는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론으로서는 물론 네그리와 하트가 가정하는 해방적 주체의 윤리학을 응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행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거나 “착취는 오늘날 더 이상 생산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지배의 도구로서만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앞의 글, 98쪽.
는 그들의 주장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간단히 현재의 현실에 대한 판단이나 서술로서 간주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다. ‘공통체’에 이르는 세 권의 저작을 통해 두 저자가 서로 다른 역사적 시점에 대응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세 권의 저작을 통해 서로 다른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격변의 혼란스러운 정세들을 분별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동어반복에 가까운 주장만을 들을 수 있다고 푸념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실은 이러한 두 가지의 ‘제국’ 3부작을 읽는 시점은 그 저작들이 집요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인 기획을 간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저작을 현실의 표상으로서의 적합성이라는 눈금에 따라 읽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저작을 연례보고서나 정세보고서로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 짧은 서평에서는 이제 세 권의 저작을 통해 윤곽이 다듬어지고 그것의 이론적인 프로그램이라 할 만한 것이 견고해진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내재적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기획의 난점과 그로부터 그들이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제안하는 정치경제학 비판 혹은 반경제학적 접근이다. 물론 이 둘은 분리되어있다기보다는 서로를 규정한다고 볼 수 있다.
생산력주의와 고집스러운 내재적 유물론
네그리와 하트의 존재론적 사유를 이끄는 내재성의 관점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두 저자는 자신들의 존재론적인 관점을 “내재성-형이상학적 초재성transcendence에 대립될 뿐 아니라 인식론적 초월론 transcendentalism에도 대립되는 내재성-이 철학의 유일한 지평”이란 것으로 요약한다.” 앞의 글, 65쪽.
그리고 “근대성을 규정하는 정체성-소유-주권이라는 세 주요 요소가 대안근대성에서는 특이성-공통적인 것-혁명에 의해 대체된다.”고 규정하며, 앞의 글, 471쪽.
이번 저작을 통해 더욱 정교해진 근대성의 변증법, 즉 근대성과 대안근대성(alter-modernity)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성의 자기운동을 위협하는 대안근대성의 힘이라는 외재적 대립의 변증법이 네그리와 하트의 사유를 제약하는 근본적인 난점의 주요한 원인을 이룬다는 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결국 자본의 자기 극복의 필연성이라는 목적론에 근거한 역사적인 전망을 이끌어낸다. 이 때 그들은 그들의 명민함을 생각할 때 어이없으리만치 소박하고 조야한 생산력주의를 고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관점은 흔히 알려진 생각,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 자신을 진전시켜나가지만 특정 시점에 이르면 생산관계는 오히려 그런 생산력의 발전을 제약하게 되고 결국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다른 것으로 전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산력이란 그들이 주류 경제학의 다양한 가설들(예컨대 외부성의 경제 운운)을 참조하면서 언급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직접적인 사회적 협력 그 자체의 역량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치이다. 그들은 이제 생산이 협소한 공장 내부에서 이뤄지는 활동과 그것의 노동생산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네그리가 자신의 초기 저작에서 노동의 사회적 구성의 역사란 관점에서 제시한 바 있듯이 더 이상 사회노동자도 아니다. 포드주의적 산업노동자의 형상으로서의 대중노동자들이 벌인 투쟁과 반항은 자본을 위기로 몰아넣고 새로운 지배의 전략을 취하며 대중노동자는 사회노동자로 변신하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사회노동자는 여전히 생산적 노동이란 관점에 머무르며 노동자들이라는 제한된 특수한 집단과 그들의 생활에 머물러 있었다면 네그리와 하트는 이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고 누누이 역설하였다. 물론 그 형상의 이름은 다중이다. 다중이란 그들의 직접적인 사회적 협력과 소통을 통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삶정치적 자본주의의 주체이다. 그러나 어느 자리에서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그들은 “노동의 점진적 사회화의 텔로스로 보는 군더더기 없는 서사” 에티엔 발리바르, “공통적인 것, 보편성, 코뮤니즘에 대하여”,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연구공간 L 엮음, 난장, 2012, 100쪽
를 통해 자본주의를 표상하고 생산력주의의 논리로 뒷걸음질 친다.
네그리와 하트는 노동과 가치의 역사적 변양(變樣)이라는 서사를 통해 생산력의 발전의 역사로서의 자본주의의 역사 서사를 제시한다. 그리고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제약하고 자신을 궁극적으로 위기에 몰아넣는 생산관계와의 대립을 발견한다. 물론 역사적인 서사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주의적 목적론에 빠지지 않고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때 첫째도 둘째도 역사화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프레드릭 제임슨의 독특한 입장을 떠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이 때 제임슨이 상상하는 역사의 표상은 네그리와 하트가 생각하는 역사의 표상과는 전연 다른 전략이다. 알다시피 제임슨은 라캉과 알튀세르의 생각을 참조하면서 자본주의의 실재(the Real)은 재현불가능한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렇지만 조잡한 라캉주의적 사고와 다른 점은 제임슨이 그것이 역사란 상징적인 허구에 불과하므로 역사는 오직 헛된 이미지일 뿐이라고 취급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Fredric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London: Routledge, 2002.

제임슨은 외려 바로 그 점에서 역사적 서사-물론 그에게 그것은 문학적인 서사와 그것에서 표상되는 역사를 가리키지만-의 의의를 강조한다. 그는 적대를 직접적으로 표상할 수 없지만 역사를 서사화할 때 적대는 그 안에 자신을 각인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적 서사의 내용 자체의 차원에서 적대를 발견하고자 애쓰는 조야한 사실주의를 제임슨은 거부한다. 이는 제임슨이 그러하듯이 프로이트주의에서의 비유를 든다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무의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잠재몽과 현재몽의 관계를 말하면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위치는 잠재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꿈 작업” 자체라는 형식적 차원에서 발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적대를 분별하기 위한 논리로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적대는 다른 무대(another scene)에서 최종적으로 모든 역사적 사태를 결정한다. 프로이트주의가 성의 결정론인 것은 맞지만 성의 본질론이 아니고 그리하여 정신분석이 성애학(erotics)이 아니듯이, 마르크스주의 역시 경제라는 자본주의적 적대의 결정은 맞지만 모든 현실적 사태에서 노동이나 생산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관점은 아닐 것이다. 그 적대는 계급투쟁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형성한다. 즉 적대는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형식화한다. 이를테면 파시즘이나 페론주의같은 코포라티즘은 노동자계급을 자신에게 적대하는 자본주의적 정치의 무대 위에 세운다. 그러므로 이런 정치적 계급투쟁의 형식을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표현으로 읽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클리나멘으로서의 정치를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되풀이되는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통과 협력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한 생각․이미지․코드․언어․지식․정동 등의 생산은 경향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자율적 생산, 다시 말해 삶형태의 생산과 재생산을 향한다. 그리고 삶형태의 생산과 재생산이야말로 정치적 행위의 엄밀한 정의이다.” ‘공통체’, 498쪽.
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정치는 생산(과 재생산)의 존재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발현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정치라는 “형식” 즉 정치의 우연성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의 문제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들이 상정하는 존재론적 틀에 의해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는 곳에서 정치적 행위의 우연성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정치는 존재의 문제를 초과한다는 계기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산의 보편적 존재론으로부터 정치를 연역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 생산의 보편적 존재론 속에 예약되어 있는 탓에 그들은 기꺼이 자본의 코뮤니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회의하는 이들에겐 자본주의로부터의 단절(두 저자의 트레이드마크인 엑서더스가 아닌)을 고지하는 사건이 중요할 것이다. 나아가 노동과 생산의 내재적 존재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적대와 차이의 형태인 민족, 인종, 성적 차이의 문제들이 자본주의적 적대를 전치하는 과정을 분석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이런 정치의 부재 혹은 정치의 우연성의 거부는 내재적 생산 대 초재적 주권이라는 존재론적인 이분법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분법은 물론 (적잖은 네그리 식의 가공을 거친) 푸코의 주권적 권력 대 삶정치적 권력의 차이를 참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연작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연대기적 역사(chronology)를 규정하기 위한 결정적인 그리고 중심적인 원리로서 “초재성(혹은 초월성) 대 내재성”이라는 이분법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의외로 투박한 생산력주의적인 목적론을 사변적 어휘로 혼란스레 제시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통체’란 저작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네그리와 하트는 그러한 존재론적인 공리를 숫제 20세기 철학적 사유의 경향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두 저자는 흥미롭게도 지난 세기의 철학적 투쟁을 초월성(초재성)의 철학과 그에 대한 “다양한 개입과 비판의 결과는 비판의 ‘현상학화(phenomenoligization)’”이라고 요약한다. 앞의 글, 57쪽.
물론 이는 퐁티와 하이데거, 나아가 현상학의 가장 강력한 비판가였던 일군의 철학자들을 그 계보에 집어넣는, 적잖이 억지스럽게 보이는 드라마이다. “신체들 그리고 신체들이 가진 힘의 관점만이 소유공화국이 휘두르는 규율과 통제에 도전할 수 있다.” 앞의 글, 61쪽.
는 그들의 생각을 좇자면, 소유공화국을 옹호하고 세례하는 철학적 사유의 경향과 그에 대립하는 사유의 경향을 대조하는 어법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적 변화를 위한 인간학적인 토대로서 생산력에 결정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두 저자의 입장은 “소유 공화국은 이제 더 이상 자본을 위해 봉사하지 못하며 오히려 생산에 족쇄가 되었다. …… 삶정치적 시대에는 경제적 과정과 정치적 과정이 점점 더 긴밀하게 서로 맞물려서 때로는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주장으로 하염없이 되풀이된다. 앞의 글, 416쪽.
그렇지만 이런 입장은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윤색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그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독특한 가치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기존에 자본주의 분석을 위하여 원용된 가치법칙에 대한 이해를 정정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가치법칙을 자본주의 체제의 균형보다는 근본적인 불균형의 발동기로 간주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가치법칙은 균형의 근본적 위기를 규정하는 한에서 실로 잉여가치 법칙의 일부이다. 가치법칙은 자본주의 발전 전체에 적용될 때 위기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유통과 불비례의 위기(즉 체계적 균형의 모델로 환원될 수 있는 현상들)일 뿐 아니라 투쟁이 그리고 주체와 연관된 주기적 불균형이 야기하는 위기이기도 하다. 후자의 위기는 수요의 성장을, 바꾸어 말해서 생산하는 주체들의 욕구와 욕망의 성장을 봉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구도에서 가치/잉여가치 법칙은 자본주의 발전의 주기가 계속해서 탈구조화되고 재구조화되는 법칙인 동시에 다중이 변형의 힘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법칙으로서 나타난다. 이처럼 고전 정치경제학이 정의하는 노동가치론은 자본이 탈산업 시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생산함에 따라 자본주의 발전의 과정에서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앞의 글, 432쪽.
여기에서 그들은, 항용 말해 왔듯이, 전통적인 노동가치론(!)을 기각하면서 가치법칙을 자본주의 발전의 주기의 법칙으로서 규정함과 더불어 다중이라는 변형의 주체가 구성, 재구성되는 법칙으로 정의한다. 그런 점에서 다중이 지배적인 생산의 주체가 된 탈산업화된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노동가치론이라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삶정치적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가치론을 구축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론이 필요하다. …… 삶정치적 맥락에서 가치는 정치‧경제적 통제의 모든 문턱을 넘쳐흐른다. 삶정치적 가치의 척도는 필요노동력 전체를 재생산하는 데 지출되는 시간의 양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고, 시간의 양에 기반을 둔 사회 질서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삶정치적 가치는 협력을 바탕으로 한 공통적인 것에서 근거한다. 가치화에 의해 해석되는 욕구는 주체로부터 나오며, 다시 주체들을 계속적으로 변형시킨다. 공통적인 것의 지형은 주체성의 생산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이다.” 앞의 글, 434-5쪽.
인용한 글에서 요약되듯이 네그리와 하트는 삶정치적 가치라는 측정 불가능한 가치, 노동이라는 실체에서 그 기원이자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가치, 그것을 사유하려면 새로운 가치론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제 가치를 “결정론”(?)에서 벗어나 “장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가치론이 결정론에서 벗어나서 삶의 시공간을 창조적인 관점에서 재정의하는 ‘장치’로서 해석될 수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 앞의 글, 438쪽.
그러나 이런 생산의 시학(詩學)을 과연 새로운 자본주의의 생산의 배치와 역학에 조응하는 가치론으로 승인할 수 있을까. 그를 위해 우리는 네그리와 하트가 변경되거나 철회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론이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가치론이었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이 시대에 뒤처진 가치론으로 고발하고 비판하는 가치론은 리카르도(Ricardo)의 가치론일지 몰라도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의 가치론 비판과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단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Louis Althusser &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Ben Brewster trans. London: Verso, 1979; Michael Heinrich, An introduction to the three volumes of Karl Marx’s Capital, Alexander Locascio tran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12;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 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역설하듯이 정치경제학 비판이 상품, 화폐, 자본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어진 경제적 현실의 불평등을 고발하고 폭로하며 또 그에 저항하는 피착취자의 경제학은 아니며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경제학도 아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을 투쟁의 사후적 효과의 연쇄로 보는 네그리와 하트의 생각은 그런 관념에 근접한다. 그들이 노동자계급의 투명한 이해를 대표하는 가치론을 꿈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 생산의 일의성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의 운동을 파악하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자본이 형이상학적인 선험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투쟁의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보다는 자본의 운동이 구성하는 형이상학적인 초재성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왜 자본의 세계가 그러한 방식으로 표상되고 체험되고 현상하는지에 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품과 화폐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은 단지 사회적 관계가 수량화된 가치의 규정과 증식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점을 고발하기 위해 도입된 수사학적인 표현은 아닌 셈이다. 마르크스에게서 형이상학이란 유령적인 대상성(ghostlike objectivity)으로서 나타나는 경제적인 실재에 대해서나 감각적인 대상을 동시에 초감각적인 초월적인 대상으로 다루는 주체의 편에서의 환상과 의식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신비를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내재적인 존재론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을 자본주의는 초재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대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공통체’에 이르는 ‘제국’ 삼부작이 자본(주의)를 반성하기 위한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기획으로서의 성취와 난점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토의를 조직할 수 있는 결정적 쟁점은 “금융화”라는 자본의 논리, 자본의 형이상학의 극치일지도 모른다. 이 저작에서 소략하게 두 저자는 금융화를 준별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미 살펴본 내재적 생산과 소유의 초재성 사이의 대립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 대한 불만은 자율주의 내부의 분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아마 대표적인 사례는 공개적으로 네그리와 하트의 삶정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라자라토의 ‘부채인간’일 것이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채무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 허경, 양진성 옮김, 메디치, 2012.
더없이 화폐의 형이상학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에 내재적 유물론은 시험에 오른 셈이다. ❐
_포지션에 기고한 [공통체] 서평 원고

2 thoughts on “형이상학의 집으로서의 자본주의: 집요한 내재적 유물론의 난관”

  1. 아무래도 기쁘게 쓸 수 없었던 글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청탁받은 원고 매수가 너무 적어 그랬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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