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Curtis Harding – Keep On Shining

경제는 핵심영역이고 전투는 이곳에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주문(呪文)을 깨야 한다.
하지만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 슬라보예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157쪽
자각적인 이성의 실현이라고 하는 개념은 바로 민중의 삶 속에서(In der Leben eines Volkes)
그의 완성된 실재성을 지닌다.
– 헤겔,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 리처드 노먼, 오영진 옮김, 한마당, 88쪽에서 재인용

정치와 경제-불가분한 것과 종합
한동안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입씨름을 벌인 쟁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은 과연 어떤 체제냐는 것이었다. 그 토론이 얻고자 한 결론은 좌파 정치가 자신을 자리매김해야 할 한국 사회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것이었으리라. 알다시피 몇 가지 유력한 주장이 있었다. 1987년 체제론과 1997년 체제론 같은 것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그에 더해 2013년 체제라는 용어를 추가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런 개념들은 비록 막연하기는 해도 한국사회가 처한 맥락을 총체적 재현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일 마땅한 가치가 있다. 1987년 체제론은 말 그대로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전연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역설한다. 이는 대통령 직선제와 대의민주주의의 정착 그리고 뒤이은 광범한 시민사회운동의 활약에 주목하면서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한국사회의 정치 변동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음을 강조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노동이 제대로 대표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으나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일차적인 요인이 민주주의라는 정치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이 주장에서 요점은 정치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재민주화이든 아니면 민주주의의 정상화 혹은 급진화이든, 관건은 민주주의이고, 그것 안에 내장된 가능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개혁, 감시, 통제가 바로 좌파 정치가 할 일이다.
한편 1997년체제론은 경제적 질서의 변화를 우선으로 꼽는다. 한때 유행했던 표현을 빌자면,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인 셈이다. 아니면 삼성반도체의 백혈병 문제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진성반도체란 이름으로 나온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냉소적으로 지껄이는 말처럼,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인 셈인지도 모른다. 1997년체제론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인 텔로스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변신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그것은 돈을 통해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노동자의 마지막 항의 수단인 파업을 시민권으로 인정하기는커녕 경제적 득실에 따라 평가하며 마침내 손해배상가압류라는 사악한 법조항으로 질식시키는 민주주의가 이른바 민주주의란 것의 요체 아니던가. 자유?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마음껏 골라 자신의 재능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일자리를 얻기 위해 가능한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희대의 부자유, 심지어는 얼굴의 표정과 말투, 상상의 방식까지 모두 자본의 요구에 맞추도록 종용하는 부자유, 그것을 가리키는 도착적인 이름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변화는 실은 자본의 고삐 풀린 착취와 자유를 보장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등. 결국 문제는 결국 문제는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를 어떻게 제어하느냐 혹은 대체하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고, 좌파 정치는 그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운운.
그렇다면 우리는 1987년체제론과 1997년체제론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를 두고 따지면서 다시 한 번 정치란 무엇인가란 물음으로 되돌아 온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정치란 본연의 정치로서의 정치, 즉 민주주의로서의 정치를 두고 다투는 일인가 아니면 정치의 진정한 핵심이자 숨겨진 비밀로서의 정치, 즉 경제적 사회관계의 변화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인가. 다시 말하자면 ‘해방의 정치’로서의 정치인가 아니면 정치의 진정한 실질인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실천으로서의 ‘변혁의 정치’인가. 이런 물음은 물론 어제 오늘 등장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운동권 출신 세대라면 걸핏하면 벌이곤 했던 허황된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정세분석이니 전술이니 하는 것을 두고 격한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곧잘 상대를 경제주의나 정치주의, 우익 기회주의나 좌익 소아병 따위의 레테르를 갖다 붙이며 힐난하는 입씨름에 골몰하곤 했다. 물론 그런 딱지붙이기로 도모하려 했던 바는 간단하다. ‘당신은 경제적인 상태로부터 정치적 행위의 조건을 찾으려고 함으로써 급진적인 변화를 제지하는 기회주의적 핑계를 찾을 뿐이야. 당신의 진화주의는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고!’이거나, ‘당신은 충분히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데도 모험적인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패배를 자초하는 셈일 뿐이야. 문제는 과연 우리가 하려는 일이 충분히 객관적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운동권 세대의 어쩌면 어처구니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언쟁을 치기 가득한 말장난으로 경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나름 유치한 방식으로 정치의 자리 혹은 정치의 존재론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늠하고자 하는 몸짓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정치란 경제의 이면이거나 거울에 불과한가, 아니면 토대이든 실체이든 그 어떤 경제적 사회관계로 환원할 수 없는 자율적인 영역인가란 물음을 두고 다투고 있다. 물론 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인 틈새를 가지고 있다. 시민은 계급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자유는 평등으로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난문(難文)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이를테면 정치와 경제를 ‘종합’할 수 있는 묘책은 없을까. 그러나 종합이라는 유혹은 정치와 경제 모두를 손으로 움켜쥐는 일이기는커녕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리는 일이 될 위험만 초래할 공산이 클지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경제 문제를 직접적인 정치투쟁으로 옮겨놓는 순간 우리는 경제를 더 이상 자본주의로 보지 않게 된다. 그것은 주어진 사태의 집합,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경제적 사실들의 꾸러미로서의 경제만을 가지게 된다. 유행하는 하이데거적인 어법을 빌자면 우리는 존재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평범한 객관적 사실들의 세계, 즉 존재자로서의 경제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정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게 되는 행위로서의 정치 대신에 단순히 이미 주어진 경제적 이해를 각기 대표하는 사회 집단 간의 경쟁과 합의를 다루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의 유일한 형태로 인정하는 일로 귀결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결국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둘을 종합할 수도 없다. 그럼 이러한 불가분성과 종합 불가능함의 모순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쟁점을 해결하여야 하는 일이 자본에 반하는 정치를 구축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그 쟁점을 풀어보기 위한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하려 애써 볼 작정이다.
정치의 역설을 넘어
사회주의 정치를 겨냥한 자유주의적 비판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자면 당연 폴 리쾨르의 『정치의 역설』이란 글일 것이다. 폴 리쾨르, 정치의 역설, ‘역사와 진리’, 박건택 옮김, 솔로몬, 2002.
이 글이 프랑스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좌파 지식인들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그닥 크게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최근 들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란 입장에 근거하여 좌파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장들이 부쩍 관심을 끌면서 그의 글을 다시 들먹이는 일이 자주 눈에 띈다. 그 가운데, 프랑스 정치철학 전통 안에서 이 글의 영향을 상세하게 논하는 글로는 일단 다음을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 Oliver Marchart, Post-foundational political thought: political difference in Nancy, Lefort, Badiou and Laclau,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2장.
정치철학자들은 이 글을 되새김질하면서 이미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 정치를 향한 환멸과 이탈이 등장하기도 전에 선구적으로 사회주의 정치의 급소를 찌른 것으로 이 글의 가치를 추켜올리기도 한다. 그 글에서 리쾨르는 정치를 경제의 표출로서 간주하는 것, 정치의 자율적인 차원을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을 던진다. 헝가리 사태 이후, 그리고 무엇보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주의적 개인숭배 비판의 비밀 연설이 있은 연후, 리쾨르의 논변은 불가피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질문을 요약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박상철 옮김, 책세상 2006.
그 질문이란 짐작할 수 있듯이 해방의 기획으로 출발한 혁명이 왜 전체주의적인 질서로 변질하였냐는 것이었다. 따라서 리쾨르는 만약 혁명의 변질을 어느 개인이나 정치적 당파의 우연한 역사적 실수로 변명하지 않으려면 기꺼이 그것을 깊은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혁명이 전제(專制)로 퇴락하게 된 이유를 우연한 역사적 사정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그 필연성 혹은 적어도 가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리쾨르는 이 과제에 부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훗날 우리가 마주치게 될 허무주의자들만큼 리쾨르는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는다. 자코뱅주의에서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전체주의의 계보를 추적하며 해방적 유토피아를 희구하는 모든 정치적인 기획 안에는 음산한 전체주의가 잠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집요하게 규탄하는 것이 유행이 된지는 제법 오래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합창과 달리 리쾨르는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근대 정치 내부에 ‘정치의 역설(paradox)’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검출하고 이를 해결할 방편을 고심한다. 그는 근대 정치에 깃든 기원적인 역설 때문에 정치의 악이 초래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역설이란 근대 국가의 이율배반 그 자체이다. 그의 생각은 짐작보다 단순하다. 국가를 경제적 사실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치적 실존은 경제적 기초를 갖는 변증법으로 축소될 수 없는 특수한 형태의 합리성을 발전시킨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그 합리성으로부터 “정치적 악, 정치권력의 악”이라는 특수한 악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정치적인 것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기발함”이라고 말한다. 리쾨르, 앞의 글, 318쪽.

그가 말하는 (근대) 정치의 이중성 혹은 모순이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근대 세계에서 정치의 근본 문제인 국가 자체로부터 추적한다. 리쾨르는 근대 정치에서 국가는 이성 그 자체와 등치된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국가는 ‘관념적인 실재’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먼저 모두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상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는 관념적이다. 그리고 국가를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은 말 그대로 국가라는 형태로 물질화되어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의 국가란 베버 식으로 말해 합법적인 폭력으로서 다양한 강제와 폭력의 장치를 거느린 기구의 총체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군대, 경찰, 관료제 등을 거느린 거대한 장치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리쾨르는 정치의 특수한 악이 초래될 가능성을 찾는다. 물질적 힘으로서 군림하는 관념, 즉 이성이라고 자처하는 폭력의 횡포라는 악 말이다.
국가가 이성이 되어버린 근대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정치가 경제적인 현실의 기만적 표현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에서 리쾨르는 정치의 악을 찾지 않는다. 외려 리쾨르는 정치 자체의 내적 역설 혹은 모순이 더 근본적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이를 “헌법과 군주, 법과 전횡의 분할은 모든 정치권력에 내부적인 모순”이라고 표현한다. 앞의 글, 332쪽.
정치와 정치 외적인 것 사이의 모순에 앞서, 정치 자체에 이미 기원적으로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스스로 이성 혹은 공동체의 진리를 떠맡고 그것을 국가라는 형태로 현실화하는 한, 이성적인 힘으로서의 국가의 성격과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의 성격 사이의 모순은 제거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국가는 보편성을 자처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현실의 특수성과 언제나 대립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정치는 언제나 악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구 동구권의 전체주의일 것이다. 얼추 말해 이런 논변이 리쾨르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를 “정치 ‘악(惡)’은 본래의 의미에서 위대성의 광기, 다시 말해서 위대한 것의 광기이다.-권력의 위대성과 유죄성!”이라는 매력적인 문장으로 요약한다.
리쾨르는, 요즈막 흔히 듣게 되는 주장, 즉 이성 혹은 진리로서의 정치(정치의 자율성)를 사회의 관리로서의 정치를 구분하는 주장처럼, 정치를 이성과 진리의 차원에 놓는다. 그리고 이성-진리로서의 정치가 스스로를 배반하면서 초래하는 악, 이성-진리를 자임하면서 국가가 저지르게 되는 탈선을 고발한다. 그럼 국가가 물질적인 힘으로 전환함으로써 나타나는 잘못, 즉 전제의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리쾨르의 결론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자가 폭군이 될 수 있다면, 여우가 사자로 돌변할 수 있다면, 진리가 교만하게 자신의 힘을 믿고 비-진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은 단 한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유이다. 이때의 자유란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는 진리의 여부를 논쟁할 수 있는 자유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하여 리쾨르는 “정치의 핵심문제가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국가가 그 합리성을 통해 자유를 확립하든지, 아니면 자유가 그 저항을 통해 그 권력의 열정을 제한하든지 말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앞의 글, 346쪽(강조는 원문).

리쾨르의 논변에서 경제를 참조하지 않은 채 정치의 기하학을 구성하는 나무랄 데 없는 시도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결론처럼 정치의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자유일 뿐일까. 자유를 선택한 이후 동유럽이 직면한 빈곤과 착취의 자유를 들먹이며 리쾨르의 반응을 구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까. 전체주의적 폭정보다 결코 덜하지 않을 오늘날의 자유의 폭정을 고발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역사적 시험을 거친 자리에 선 자들의 특권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손쉽게 리쾨르의 주장을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경험적인 사실을 들어 그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비판이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온전한 비판을 위해 우리는 리쾨르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가 제기했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럴라치면 사정은 훨씬 복잡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우리는 리쾨르의 질문 자체를 무효화해버리는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정치를 관념적인 행위, 혹은 바디우같은 철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이념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그는 정치는 진리/비진리를 가늠하는 행위이고 그런 점에서 진리의 이름으로 어떤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기에 근대 정치에 특유한 정치의 악이 초래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런 식의 주장을 들어줄지 의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겸손한 실용주의는 진리로서의 정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에 어떤 진실을 부과하는 시도도 부정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정치란 것이 떠맡아야할 보편적 이상은 없으며 오직 주어진 사실의 세계 위에서 이해를 조정하는 협상의 게임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정치를 비판하는 일은 정권 교체로 한정되어야 하며 정치가 따라야 할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부패하지 않고 청렴하며 공정한 통치가 이뤄지는가 여부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청렴함과 책무성(accountability)의 윤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정치를 정치 이후의 정치, 즉 포스트-정치(post-polit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리쾨르의 질문은 아예 제기될 가치조차 없는, 유효기한이 지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리쾨르의 질문을 기각해야 할까. 그 질문을 계속 유지하면서 그에 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우리는 기꺼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리쾨르의 주장이 시대착오적인 것이기는커녕 공리적 현실주의에 정치를 내맡겨야 한다고 분주히 떠들어대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더욱 현실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리쾨르의 주장을 보충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가 말한 정치의 역설은 정치의 밝혀진 비밀이기는커녕 또 하나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실은 그가 발견하고 고발한 정치의 역설에는 한 겹 더 역설이 숨겨 있었다는 것이다. 리쾨르의 한계는 정치를 이성과 진리라는 관념적 실재의 차원으로 환원한데 있지 않다. 실은 그런 논리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 다만 그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은 바로 어떻게 하여 정치가 그런 이성-진리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이 정치를 사유하기 위해 ‘두 제곱된’ 사유를 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해야 한다.
두 제곱된 사고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사유를 가리키기 위해 제시한 유명한 표현이다. 그는 “변증법적 사유란 두 제곱된 사고, 즉 사유 자체에 대한 사고로서, 정신은 대상이 되는 자료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과정도” 사유의 대상으로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맑스주의와 형식’, 여홍상, 김영희 옮김, 창비, 2014, 68쪽.
이를 리쾨르에게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리쾨르가 생각한 것처럼 정치는 완전히 자율적이다. 정치는 어떤 외적 규정 없이 스스로의 장 안에서 이성과 진리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경제를 번역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식으로 정치를 반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라면 어떨까. 경제는 정치의 내용도 아니고 정치의 실체도 아니다. 정치 내부에서 경제의 흔적을 찾는 것은 경제를 전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경제는 정치가 자신의 대상을 가지고 자율적인 원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규정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정치를 규정한다.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 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가 정치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서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 비밀은 정치 자체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치의 비밀이 되도록 하는 또 하나의 숨겨진 비밀을 풀어야 한다.
그런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정치란 순전한 형식에 속하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은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아둔한 경제주의에 빠지지 않고 동시의 자율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생각 역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을 상기한다면 경제와 정치를 종합할 수 있는 제3의 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으면서, 즉 둘 사이의 불가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양자의 전치(轉置)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길, 그것을 찾아내야는 것이다.
전경(前景)과 배경(背景)
[그림 생략]
위의 그림은 우리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눈속임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보인다. 그림의 흰색에 유의하여 보면, 이 그림은 영락없이 꽃병 그림이다. 그렇지만 검은색을 주목하면 이 그림은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된다. 그런데 얄궂은 것은 꽃병과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꽃병을 보거나 아니면 사람의 얼굴, 두 가지 가운데 하나 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형태심리학에서는 형상(figure)과 배경(background)이라고 부른다. 이는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지각할 때 어떤 부분을 반드시 분리해서 보며 이를 통해 어떤 부분은 형상이 되고 다른 부분은 배경으로 물러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니엘 챈들러, ‘미디어기호학’, 강인규 옮김, 소명출판, 2006, 248쪽.
그런데 이 그림은 자본주의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지각하는데 따르는 배리(背理)를 잘 요약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젝 같은 이는 자본주의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곧잘 이 그림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꽃병의 두 측면을 보거나 한 사람의 얼굴을 볼 뿐 두 가지를 다 보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선택해야 한다. 동일한 방식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에 집중하여 경제적인 영역을 경험적인 ‘상품의 공급’으로 축소하거나 혹은 경제에 집중하여 정치를 상황의 무대, 스쳐지나가는 현상으로 축소한다. 그리하여 후자의 경우 정치는 ‘인민의 통치’가 ‘사물의 통치’ 속으로 사라져버린다고 이미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발전된 공산주의(혹은 전문 관리자) 사회가 도래하며 사라져 버린다.” 슬라보예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이서원 옮김, 길, 2006, 153-4쪽.
여기에서 지젝은 방금 본대로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없는 곤란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빠져들 수 있는 유혹, 즉 그림에서 얼굴만을 보거나 꽃병만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경제로부터 정치를 도출하거나 아니면 정치로부터 경제를 제거하거나 하는 것과 같은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와 정치를 동시에 시야에 놓을 수는 없을까. 결국 경제 아니면 정치라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통해서만 자본주의와 관련한 정치를 생각할 수 있다면,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투쟁과 정치 고유의 영역에서의 투쟁 사이의 구분을 순순히 인정하고 어느 하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때 비롯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를테면 경제 자체로부터 정치의 모든 원인을 발견하려 함으로써 착취적인 경제질서를 폐지하면 곧 더 이상 정치는 불필요해지고 마침내 국가는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피해야 한다. 혹은 반대로 오직 정치는 법적 평등과 권리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그런 발상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작동시키는 조건을 이룬다는 것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둘을 함께 사고하면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정치를 생각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 지젝 스스로로부터 답을 찾자면 이럴 것이다.
“만약 라캉에게 성적 연관이 없다면, 엄격한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에는 경제와 정치의 연관성이 없다. 어떠한 ‘메타언어’로도 동일한 중립적 시점에서 두 수준을 파악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때문에 이 수준은 풀 수 없이 얽혀있다. ‘정치적’ 계급투쟁은 경제의 한 가운데(‘자본론’ 제3권의 마지막 구절을 상기하라. 그곳에서 갑자기 텍스트가 중단된 뒤 계급투쟁이 다루어진다)에서 일어난다. 반면 동시에 경제 영역은 정치 투쟁을 풀어내는 열쇠가 된다. 이 불가능한 연관 구조가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것은 놀랍지 않다. 첫 번째로 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 경제적 하부구조로 전진하여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는 경제의 심장부에서 되돌릴 수 없는 정치 투쟁의 차원에 직면해야 한다.” 앞의 글, 155-6쪽(강조는 원문).
이 때 지젝의 결론은 기대와 달리 적잖이 싱겁고 단순하다. 즉 둘을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지만, 그 둘의 연관을 잊지 않고, 두 영역 모두에서의 싸움을 감행하자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곧 하나의 영역이 다른 영역과 교차하는 지점에 운 좋게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은 채, 두 곳의 전선에서 모두 투쟁하여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싱거운 답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경과 배경을 동시에 볼 수 없다. 어느 하나를 보기 위해 다른 것은 배경으로 물러나야만 한다. 그런 시점(視點)의 한계는 정치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영역에서 어떻게 동시에 싸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지젝의 생각을 보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임슨의 생각을 참조해도 좋을 듯싶다.
“확실한 것은, 마치 성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특징짓기에 만족스러운 용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학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기에 만족스러운 용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은 성애학 erotics이 아니며 성적 치료의 형식도 아니다. 정신분석이 성적인 측면을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심급으로 삼는 것으로 묘사된다면, 그것은 사실 단순한 인상만으로 뭉뚱그려 일반화한 정신분석일 뿐이다. 프로이트 제자들이 정신분석을 순전히 성에 관한 경험적 추문으로 격하하고 리비도를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형이상학적 영역이나 실존적 영역의 힘 또는 정신성으로 일반화하는 정식을 향해 나가려는 것을 감지했을 때마다-예를 들어 잘 알려졌다시피 아들러, 융, 랑크의 경우가 그러했는데-프로이트는 자신이 원래 구성했던 대상에 대해 날카롭고 거의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초점과 경계를 고수하며 이론적으로 물러났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프로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존경스러우며 영웅적인 계기들인데, 이는 또한 그가 자신의 발견과 관점에 대해 가장 고집스럽게 믿음을 고수했던 계기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성이 프로이트주의의 중심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성이라는 사실로부터 후퇴하는 것은 일종의 수정주의를 열어젖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언제나 재빠르고 기민하게 비판하고 비난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외, 이현우,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 115쪽.
『레닌과 수정주의』란 제목이 붙은 글에서 제임슨은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동일한 구조를 가진 지식으로 비교한다. 이 때 그가 둘을 동일한 종류의 지식으로 보는 이유는 정신분석학과 성애학(erotics)의 관계가 역사유물론(혹은 정치경제학비판)이 경제학과 맺는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프로이트주의에 늘 따라다니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변절한 프로이트의 제자들과 프로이트를 대조한다. 인간의 심리적 삶 전체를 성이라는 보편적인 원인으로 환원하는 범성주의라는 추문을 피하려 이탈했던 프로이트의 제자와 달리 프로이트는 꿋꿋이 성에 따른 결정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결국 문명의 모든 현상을 성으로 환원하는 범성주의를 고수했다는 것일까. 제임슨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성을 경험적인 사실들로서 이해하는 한 그것은 그저 성애학에 불과하다. 상품을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심미적, 정신적 가치를 거론하는 것은 상품학이거나 마케팅 담론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데이비드 하비, ‘맑스 자본 강의’, 강신준 옮김, 창비, 2011.
마르크스에게 상품은 그것이 화폐로 나아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한에서의 상품, 즉 가치로서의 상품이자 사회적 관계로서의 상품이다. 그것은 물론 상품의 생김새, 쓸모,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따위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비판이란 이름으로 이러한 종류의 담론이 성행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정신분석학도 역시 그럴 것이다. 만족스러운 성 생활을 위한 실용적 해법을 전달하는 객관적 지식이라면 정신분석학은 기껏해야 만족스런 성생활을 위해 조언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심리요법 가운데 하나에 머물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요가나 기체조, 단전호흡만도 못한 효용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에서의 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잉여가치 혹은 계급투쟁이란 무엇인가란 물음과 같을 것이다. 잉여가치는 이윤과 다른 것이라고 말 할 때,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잉여가치가 이윤이라면 생산된 상품의 전체 가치 가운데 노동자의 지불되지 않은 노동력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는 상품의 크기라고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끈질기게 그와 같은 생각을 비판한다. 잉여가치는 사물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계급적인 착취, 혹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는 어떤 추가적인 크기의 양이 아니다. 그것은 공장 안팎에서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전반적인 생활양식을 조정한다. 이는 성이란 것이 이러저러한 신체의 생리적인 활동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노동이 자본제적 임금노동이란 형태로만 존재하게 되듯이 성 역시 그럴 것이다.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구분선 가운데 하나가 자연적인 운명의 몸짓으로서의 교미와 달리 독특한 성적인 욕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섹스로 분리되었다는 점을 생각하기만 해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섹스 안에 깃든 우리의 모든 성적 환상과 행위는 바로 그런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매개된 것일 뿐이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이윤 분석을 잉여가치 분석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989, 194쪽.
그는 (정치)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 혹은 역사적 유물론을 구분하면서, 전자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화에 관한 이론, 즉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에 관한 비전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윤의 전화의 결과와 그 표상의 역사(특히 개별자본의 재생산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차원으로서의 자본제적 회계의 적응이 제기하는 기술적, 이론적 문제의 역사)밖에 갖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앞의 글, 195쪽.
여기에서 발리바르가 이윤과 잉여가치, 경제학과 경제학 비판을 구별하는 것은 성을 생리적인 본능과 인간의 심적 생활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갈등으로 보는 성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차이와 다르지 않다. 정치경제학은 오직 이윤의 관점에서 바라본 회계학만을 가질 뿐이고, 자본-토지-노동으로부터 각기 이윤(이자), 지대, 임금이 나온다는 성삼위일체의 조화로운 영구적인 질서만을 응시한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바로 물신주의 비판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를 사물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식하는 것, 이러한 전도된 표상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관계[즉 부의 소재적 요소들이 생산담당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관계]를 이들 물적 존재 자체의 속성으로 전화시켜버리는 (화폐) 바로 그 신비화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K. 마르크스, ‘자본 III-2’, 강신준 옮김, 길, 2010. 1103쪽.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관점에서는 오직 회계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이 있을 뿐인 셈이다. 자본에게 경제란 곧 재무제표에 나오는 이윤의 문제이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지출과 소비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품학이나 회계학의 오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해방의 경제학자일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경제적 분석을 통해 정치의 열쇠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보다 강하게 말하자면 왜 그럴 수 없는지에 관하여 말한다. 어떤 이들이 자본주의의 한계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말하곤 한다. 자본의 한계는 노동(의 저항)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자본주의가 잉여가치의 착취를 통해 조직되는 사회적 관계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본은 잉여가치의 생산, 실현, 분배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물론 그 변화는 노동과 맺는 관계를 폭력적으로 혹은 평화적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위에서 우리는 항상 복잡하고 예상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에서 빠져나온 적대적 모순이 정치라는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쟁점을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이한 정치적인 경향과 마주하게 된다.
방금 인용한 글에서 제임슨은 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정치에 있어 혁명적 정치와 수정주의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난데없이 정신분석학을 참조한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수정주의란 무엇인가. 그는 그것이 성의 일차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좌파 정치에서의 수정주의란 무엇일까. 당연히 경제의 일차성을 부인하는 것에 해당될 것이다. 그것은 심적 갈등과 좌절의 기원을 성에서 찾으려는 스승의 거북한 주장에서 벗어나 심적 현상의 기원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정신주의적인 것에서 찾으려 뒷걸음질 친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자’처럼, 좌파정치에서의 수정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을 자유에 대한 논쟁으로, 경제적 착취에 대한 논쟁을 정치적 대표에 대한 논쟁으로 뒤바꾸는” 것이다. 제임슨, 앞의 글,

그러면서 제임슨은 거의 동시대의 개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경악할만한 주장을 태연스레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의 자율성에 관한 이론, 나아가 정치 자체에 관한 이론이 없었다는 점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힘이자 독창성”이며, “권력의 수사학”이야말로 “수정주의의 근본적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분석은 권력에 관한 분석이어야 한다는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의 주장(푸코의 지식/권력, 규율권력, 생명관리권력에서부터 들뢰즈의 통제사회, 아감벤의 예외상태론에 이르기까지 숱한 급진 정치이론은 되풀이해서 권력을 말하지 않는가)에 대해 수정주의자라는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 제임슨의 몸짓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의 무모함은 그가 외려 가장 강인하게 사유한다는 점을 반증해준다.
그렇다면 제임슨은 정치를 경제로 환원하자는 것일까. 물론 그가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리 만무하다. 그 역시 지젝과 거의 동일한 어조로 자본주의적 경제와 사회계급 및 계급투쟁이라는 것을 종합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그 두 가지가 “어떤 메타언어를 통해서도 상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번역 translation-나는 트랜스코딩 transcoding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데-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앞의 글, 114쪽.
지젝이 전경과 배경으로 분리되어 어느 한 가지밖에 볼 수 없는 그림을 두고 말하는 것처럼 제임슨 역시 경제의 언어와 계급투쟁(정치)의 언어를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메타언어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슨은 여전히 경제의 일차성을 강조한다. 이때 그의 이상한 논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경제가 일차적이며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서슴없이 정치가 경제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그저 상호규정한다고 말하거나 때에 따라 둘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결정한다고 말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경제기 일차적이라고 말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정치를 생각하고자 했던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쟁점일 할 수 있다. 이 쟁점에 답하고자 했던 시도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단연 알튀세르의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은 반쯤 파문당하거나 망각된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으로서의 적대(계급투쟁))라는 수수께끼 같은 주장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알튀세르의 부재하는 원인이라는 관념에 준거하여 문학 텍스트를 독해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학 비평을 개척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Fredric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얼핏 듣기에 부재하는 원인이라는 말은 말장난 같이 들린다. 존재하지 않는 원인을 ‘있다’란 용어로 가리키는 것은 무슨 엉뚱한 말인가. 원인과 결과를 말하면서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당구공을 움직이는 다른 당구공의 충격이 있었다면 당구공의 운동의 원인을 손쉽게 분별할 수 있다(알튀세르가 기계적 인과성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따른 섭리라고 말하거나 세계를 대상화하는 인간 정신에 의해 문명의 기본방향이 예정되었다고 말할 때처럼 모든 것을 하나의 완결된 전체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특정한 기원적 지점을 원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역시 알튀세르가 표현적 인과성이라고 부른 것). 그렇지만 그러한 인과성이 상상하는 원인과 다른 원이 존재할 수 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원인일까.
먼저 우리는 원인이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어떤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원인에 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제임슨이 정신분석학과 성애학의 구분을 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의 구분과 대조한 이유이다. 정신분석학과 역사유물론이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성을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 서로 닮았다는 점에 있다. 효과를 통해서만 알려지고, 그것의 있음을 소급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어떤 요인, 그 가상의 요인을 가리키기 위해 알튀세르는 부재하는 원인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인과성, 즉 구조 인과성(structural causality)이라고 부르는 그 인과성은 경험적이고 직접적으로 주어진 어떤 사태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어떤 원인을 상정한다.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가 우리의 심적 현상에서 성이라는 부재하는 원인을 발견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똑같이 부재하는 원인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성을 특수한 심적 에너지라고 정의하는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을 어떤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무엇으로 규정하려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심리학이나 뇌 과학, 뉴에이지 같은 담론으로 빠져든다. 실은 범성주의라고 할 만한 환원론은 이런 사이비 심리과학의 편에 있지 정신분석학의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모든 심적인 혼란과 좌절(불안, 강박, 분열증 따위)를 성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재하는 원인으로서, 분석을 받는 이가 자신의 모든 문제의 발단이라고 생각한 무대(부모의 첫 성교를 목격하는 무대 등)와는 다른 무대(another scene)에서 은밀하게 그의 심적 질서를 규정하는 원인으로서 작동한다.
그런데 이는 경제라는 원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경제의 일차성이라는 것을 경제라는 사회의 한 영역이 다른 사회 영역들, 이를테면 정치나 문화를 결정하는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제가 자신을 독특한 규칙을 가진 질서로 나타낸다는 것은 경제가 자신을 마치 자율적인 실체인양 나타낸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자본주의의 적대적 사회관계, 즉 노동을 착취함으로만 자신을 자율적인 운동으로써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한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를 경제로서 나타낼 수 있는 조건은 경제를 경제화하는 것, 즉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사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자율적인 법칙으로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경제가 경제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 즉 경제가 그것을 주어진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적인 대상으로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떤 조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경제의 근본적인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것, 적대적인 사회관계, 계급투쟁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을 통해서 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실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를 구분하기 위한 진정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숱한 정치철학자들이 현실 정치(realpolitik)로서의 정치(a politics)와 본연의 의미에서의 정치(the political)을 구분하여야 한다고 강조할 때, 실은 그것은 선험적인 원리로서의 경제적인 것과 경험적이 사실의 세계로서의 경제의 관계를 치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알튀세르는 전체(whole)와 총체(totality)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헤겔이 총체를 주장했다면 바로 그것을 전체란 범주로 전환한 것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사회를 하나의 지배 속에 구조화된 복합적인 전체로서 생각했던 반면 헤겔은 그것을 하나의 총체(totalité) 사고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 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나에게는 …… 헤겔에게는 총체성의 범주가 있는 반면, 맑스에게는 전체라는 범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루이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49-50쪽.
실은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그의 평생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최종심급, 구조화된 전체, 과잉결정, 모순을 불균등성” 같은 명제들은 앞의 글, 155쪽.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이 개념들이 차지하는 의의와 그것이 초래한 난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의 주석을 참조할 수 있다. E. Balibar, Structural causality, overdetermination, and antagonism,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A. Callari & D. F. Ruccio eds. Hanover: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6.
실은 바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총체와 전체의 차이는 무엇일가. 이를 우리는 총체란 중심과 기원을 갖는 반면 전체란 탈중심성과 불균등성 그리고 원인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총체와 전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은 앞서 말한 표현을 빌자면 자본의 한계는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는 자본의 한계를 전체라는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제는 정치를 결정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경제는 근본적으로 모순에 의해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총체로서 완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지젝은 이렇게 풀이하기도 한다.
“‘정치’는 경제가 자기 자신과 취하는 거리에 대한 이름이다. 정치 공간은 부재원인으로서의 경제를 전체 사회의 원인 중의 하나인 ‘대립적 규정’ 속의 경제와 분리시키는 간극에 의해 생긴다. 경제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즉 ‘무력’하고 무감각적인 유사 원인이기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것은 여기서 정확히 라캉이 말한 실재의 의미로 이중적이다. 그것은 다른 투쟁들 속에서 전치와 다른 형태의 왜곡을 통해 ‘표현되는’ 단단한 중핵인 동시에 이러한 왜곡을 구조화하는 원리 그 자체다.” 슬라보예 지젝, ‘멈춰라, 생각하라’, 주성우 옮김, 와이즈베리, 2012, 60-61쪽.
여기에서 지젝은 정치와 경제를 두 개의 부분 사이의 관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자기 이중화라는 것을 통해 정치가 발생한다는 논리를 제안한다. 경제를 대립적인 규정이라고 말할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의 대립적인 규정을 두고 했던 이야기에 익숙한 편이다. 그가 노동의 대립적 규정이라 부르는 예 가운데 하나를 들면, 노등의 대립적 규정, 즉 구체적이고 유용한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적인 노동이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럴 것이다. 우리는 미싱을 돌리거나, 계산대에서 수납을 하거나, 용접을 하는 등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일을 한다. 실은 현실에 있는 노동이란 그런 구체적인 노동일뿐이다. 그렇지만 자본에게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노동은 단지 잉여가치를 낳는 무차별적인 노동일일 뿐이다. 그것을 추상적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은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이라는 대립적인 규정을 지닌다. 대립적 규정이란 개념은 마르크스의 사고 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헤겔 철학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그 개념을 애용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그러한 개념이 자본주의의 적대적 모순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런 대립적 규정을 경제에 대입한다. 먼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결정하는 경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히 현실 경제, 경제현상이라고 부르는 경제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 점에서 경제는 두 가지 대립적인 규정의 결합이다. 지젝은 이런 대립적 규정 사이의 차이, 두 가지 경제사이의 간극이 정치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젝은 ‘전부는 아닌’ 다시 말해 그것을 완결적인 총체로 닫아버리지 못하게 하는 적대, 모순(=경제)으로 인해 정치가 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는 경제적 대립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불가능성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가 계속 작동하기 위해 정치를 발생시키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경제가 자신을 이중화(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안정된 질서를 갖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제와 현실경제라고 말할 때의 실제적인 경제적 사실들의 세계로서의 경제)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들뢰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인 것(the economic)’은 사회적 변증법 자체이다. 다시 말해 한 주어진 사회에 제기된 문제들의 총체 혹은 그 사회에 대한 종합적이고 문제설정적인 장이다. 엄밀히 말해 오직 경제적인 사회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해법들이 법률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일 수도 있고 또 그 문제들이 이러한 해결가능성의 장들 안에서 표현될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406쪽(번역은 필자가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이 때 들뢰즈가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경제적인 것이 사회적 변증법 자체라고 말할 때 그는 사회의 하위 영역 가운데 하나가 경제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자기부정의 몸짓 자체가 경제임을 분명히 한다. 사회가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를 찾아낼 때, 그것은 실은 경제에 의해 사회가 스스로를 재조직하는 과정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가 자신의 전매특허 개념이라 할 “미분적 잠재성(differential virtuality)”을 알튀세르가 말하는 구조 개념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조는 자신의 변이성들을 상이한 사회들 안에서 구현하면서 움직이고, 또 매번 각 사회 안에서 그 현실성을 구성하는 모든 결합관계와 항들의 동시성을 고려하면서 움직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의미의 ‘경제적인 것’은 결코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해석을 요구하는 어떤 미분적 잠재성을 지칭하고, 이 잠재성은 언제나 자신의 현실화 형식들에 의해 이미 은폐되어 있다.”, 앞의 글, 405-6쪽.
미분적 잠재성이란 부분들의 합으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각 부분들의 결합관계 자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는 경제에 의한 과잉결정이나 과소결정과 같은 방식으로 조직되는 전체(whole)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포퓰리즘이라는 수수께끼?

경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표면은 정치이지만 본질은 경제’란 같은 말은 고쳐 읽을 필요가 있다. 결국 경제는 자신이 돌아가기 위해 언제나 표면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경제적 지배계급이 곧 정치적 지배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경제적 모순은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정치적 당파들 사이의 갈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최근 세계 전역에서 횡행하는 포퓰리즘, 즉 무력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극단적인 정치적 우익이 대표하는 것 같아 보이는 기이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는 중요하다.
이를테면 한국 판 포퓰리즘으로 간주되는 박근혜 정권을 생각해보자. 거의 부동의 높은 지지율을 누리고 있는 현 정권은 얼마 전부터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기치 하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선제공격을 펼치고 있다. 코레일의 민영화 이후 의료서비스의 민영화로 이어지는 행보를 박근혜 정권은 공기업을 비롯하여 사회 각 부분에서 고통분담을 회피하는 기득권 수호 세력에 맞서는 정의로운 투쟁이라 강변한다. 그리고 국가는 바로 그러한 특권세력에 맞서 단호히 정의를 행사하는 권력이라 역설하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금융화가 초래한 사회적 불평등을 기득권세력과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보통 국민이라는 대립으로 치환하고 스스로를 기꺼이 반기득권 정권이라 선언한다. 당연히 이는 얼토당토 않는 헛소리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먹힌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문제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전년 영업실적 결산에 따른 대주주 배당금 분배 기사는 기득권 세력이 누구인가를 남김없이 말해준다. 재벌 총수나 경영자들은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배당금만으로도 각기 수십억 원씩이 넘는 돈을 챙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깨닫는다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착취적 사회관계가 어떻게 정치를 조직화하도록 결정하는가이다.
공기업의 방만한 부실 경영이 일어난 실제 이유는 기업처럼 이윤을 내야한다는 이유로 바깥 돈을 끌어들여 투기적 사업을 벌이도록 강요받고 그를 위해 끌어다 쓴 돈의 이자를 갚느라 엄청난 빚을 진 데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짜 적 대신에 고액 임금에 다른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온갖 복지 혜택을 누리는 귀족 집단이라 낙인찍힌 이들을 애꿎은 공적(公敵)으로 비난한다. 그럼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박근혜 정권의 기만을 폭로하고 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알다시피 우리는 그 이상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그러한 투쟁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현 정권은 가진 자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권이라 규탄하며 윤리적인 분노를 조직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더욱 난감한 것은 박근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기는커녕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은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나머지 집단에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 국민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순순히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현 정권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 반응은 야박하게 말하자면 짜증스럽고 성가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포퓰리즘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두를 대표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자본의 이해를 대표할 뿐이라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아마 그런 식의 비난에 크게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실하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착한 국민과 조금도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우리에게 기생하는 사회의 공적(公敵)이라는 대립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인기를 누리는 정치권력과 마주하고 있다. 그 정치집단이 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는 포퓰리즘은 정치의 실제 내용은 경제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경제적인 것이야말로 부재하는 원인이란 입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는 절대 투명하게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내적 모순을 다른 갈등으로 언제나 탈바꿈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모순을 정치적 갈등과 분리시키는 이 간극이야말로 박근혜 정권에 대항하는 정치가 대면해야 하는 근본적인 쟁점이다. 많은 이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현 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 가진 자들의 권력을 거침없이 휘두르고 있다고 개탄한다. 반면 없는 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정권이 믿음직하고 자신을 편들어 준다고 믿는다. 이 터무니없는 낙차는 전연 엉뚱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에서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제는 물론 결국 정치를 결정한다. 그렇지만 경제가 정치로 직접 내달리는 경우는 없다. 경제는 정치가 어떤 식으로 조직될 것인가를 결정한다. 혹은 경제는 정치가 어떻게 자신을 정치로서 현실화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그러한 작용의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실은 정치적 분석의 무능을 말해주는 또다른 이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정치를 결정하는 그 정치, 그것을 분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지지와 인기를 가능케 한 대중심리의 역학에서 정치의 원인을 발견하고자 한다. 포퓰리즘이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의 진정한 원인인 경제적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좌파 정치가 박근혜 정권이 성공적 집권할 수 있었던 정치적 논리를 포퓰리즘에서 찾고 이를 극복할 방편으로 그것이 은폐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고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을 때, 실은 그것은 정치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 이해의 대립이 정치적 입장의 대립으로 직접 번역될 수 있다면 운동으로서의 정치는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둘은 절대 대응하지 않고 항상 어긋나기 때문에, 정치를 정치화하는 운동이 필요한 것이리라.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전례 없는 정치적 무능은 바로 그러한 운동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일도 없다. 바로 이런 곤경으로부터 정치는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는 정치를 두 제곱한다. 경제는 정치의 실체도 내용도 아니다. 경제는 정치가 스스로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포퓰리즘은 바로 그런 두 제곱된 사고가 불가능할 때 불투명하게 보이기만 하는 정치를 그리기 위해 만들어낸 무력한 표상일 뿐이다. ❐
_말과활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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