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coda): 낮잠 자는 변증법


Andrés – New For U

“모순은 희망이다.” B.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일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4, 316쪽.)


우리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신문과 TV 그리고 인터넷에서 오늘의 불행을 탄식하는 서정시를 듣는다. ‘휴먼다큐’란 희한한 장르의 볼거리는 불행을 꾸며주는 따뜻하고 심지어는 서정적이기까지 한 잔재주를 부리며 불행이라는 것을 안온하고 나른한 감상의 대상으로 꾸며 놓는다. 이는 그로테스크하다 못해 역하다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비참함은 쓰라린 것, 차마 듣고 보기 어려운 것, 만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감정적 기대를 가지고 느긋이 감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가장 불쾌한 것은 불행한 이들이 자신의 불행을 바로잡고자 대들거나 싸우는 것은 불행의 축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동적인 불행,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행,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발, 비난, 규탄, 호소, 투쟁의 흔적은 말끔히 표백된 불행, 잠시의 감상적인 연민을 통해 쾌적하게 소비되고 곧 휘발되어 버려야 하는 불행을 매일 한 꾸러미씩 선물 받고 태연자약 즐긴다.
이러한 불행의 경연(競演)은 진보적 저널리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르포르타주와 같은 장르는 더 이상 위선적인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거짓의 증거로서 불행을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 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폭로를 통해 깨닫게 된 세계를 향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체 하는 언론 역시 불행을 폭로하는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그를 듣고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마치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불행을 기다리며 연민을 준비한다. 이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투사는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도착적인 초상일 것이다. 어쩌면 이는 윤리적인 허무주의가 취할 수 있는 극단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불어 이는 정치적 노선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나타난다. 좌파나 우파나 모두 불행이라는 세상의 기후(氣候)를 즐긴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긍정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극성을 부린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전환을 통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방면에서 실용적인 대안을 추구하고 가능한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다는 정반대 편에 있는 긍정의 감정에 몸을 떠는 생각은 어떨까. 알다시피 우리는 이런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인 지 오래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을 위하여 숱한 조언, 대안, 처방에 시달린다. 이를테면 우리는 맘만 먹으면 성생활의 쾌락을 극대화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외모를 바꾸고 수명을 한계 없이 연장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가장 맛난 식재료와 음식들 역시 돈 만 있다면 실컷 먹을 수 있다.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홈쇼핑의 자동주문 리모컨 버튼만 누르면 낙원과도 같은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하여 못 할 것이 없다. 단 돈 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실은 돈이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품과 쾌락의 만신전(萬神殿)은 휘황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가진 것은 일자리도 없고 호주머니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이라면 고작해야 2년 약정으로 빚을 내어 산 휴대전화 한 대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과거의 프롤레타리아가 가졌다는 ‘쇠사슬’ 대신 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소유물, ‘증오’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을 상징화하고자 이뤄졌던 시도들, 자본가 대 노동자라거나 소유계급과 무산 계급, 자본의 지배와 스스로의 지배로부터 소외된 자들 등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대립의 사슬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 뒤푸르는 최근 어느 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인간학(neoliberal anthropology)’을 분석하며 계급투쟁은 없고 오직 투쟁만이 있는 세계(대개 아무런 요구 없는 무의미한 분규, 아무런 이유 없는 살인, 다앙한 대상에 대한 중독 등으로 이어지는)라 부를 법한 것을 파헤친다. 그 글에서 그는 한 때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처럼 보이는 특징들, 일로부터 면제되고 여가를 누리는 등의 삶을 살아가는 계급 아닌 계급으로서의 젊은이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D-R. Dufour, The Art of Shrinking Heads: On the New Servitude of the Liberated in the Age of Total Capitalism, D. Macey trans. Cambridge: Polity Press, 2013.
비록 그들은 간헐적으로 일자리를 얻지만 그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하던 과거의 노동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단지 그들을 하나의 집단 혹은 철학적으로 말하여 주체화할 수 있는 어떤 정체성도 갖지 못한 비생산적인 소비자 인구집단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의 사회적 교류를 가능케 하고 누군가와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도와주는 것은 카카오톡이니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하는 ‘소셜(social)’ 미디어뿐일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을 침 튀기며 칭찬하는 주장들이 강조하는 그것의 ‘사회성(sociality)’이란 단지 덧없는 일시적인 사교일 뿐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내일이면 사라질 지금의 공감, 흐릿한 감정이입을 만들고 거품처럼 꺼지고 만다. 그 사회성을 통해 조합을 만들고 협회를 창립하고 상조회를 조직하는 등과 같이 단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여기에서 단체라고 말할 때 나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같은 단체(cooperative)를 염두에 둔다. 헤겔의 ‘법철학’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직능단체라고 번역한다. 그렇지만 이를 굳이 직능단체로 번역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협력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도모하는 근대적인 형태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코포라티브(cooperative)를 ‘단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뿐만 아니라 훗날 직능단체를 넘어 다양하게 형성되는 그러한 결사체들을 망라하는 이름으로서는 ‘단체’란 말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무산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빈곤을 초래하고 이로 인해 ‘천민(Pőbels, rabble)’이 생겨난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말한다.
“빈곤 그 자체가 사람을 천민화하지 않는다. 천민은 빈곤에 결부된 마음의 자세에 따라, 즉 부자나 사회 또는 정부 등에 대한 내심으로부터의 분노 여하에 따라 비로소 그렇게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게 되면 인간은 우연에만 의존하게 되고 경박해지며 노동을 기피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나폴리의 걸인이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천민에게는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데 대한 자부심은 없이 생활비를 얻어 쓰는 일이 스스로의 권리인양 이를 요구하는 악습이 생겨난다.” G. W. F. 헤겔, ‘법철학’,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8, 429쪽.
‘나폴리의 걸인’. 이들은 훗날 룸펜-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게 될 이들의 화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력하고 추상적인 부정에 휩싸인 젊은 세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헤겔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의 효과, “빈곤의 과잉과 천민의 출현” 앞의 글, 430쪽.
이라는 부정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단체를 제시한다. 이때의 단체란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상조회 같은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형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헤겔이 단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인륜적인 토대’로서의 그것이다.
그렇다면 왜 단체가 인륜적인 토대라는 것일까. 헤겔을 읽어본 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그가 생각하는 인륜이란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의 편에서의 정신적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윤리로서의 인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집단과 스스로 동일시하며 그 모임이 지닌 객관적인 절차나 규칙을 수행할 때 부지불식간에 어떤 윤리적 태도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말하는 인륜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명예롭다는 느낌을 갖는 주체의 내면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장, 말투, 의례, 습속, 공간의 형태 같은 객관적 사실의 편에서 본 것도 아니다. 둘은 동시에 발생하고 동일한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엄숙하게 꾸며진 장례식장에서 사랑하던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사를 들을 때 굳이 내면적으로 반성하지 않아도 애틋한 슬픔에 휩싸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장례식 같은 단순한 의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직업적 생활로부터 만들어지는 단체는 자신을 계급적인 주체로 조직하는 단체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헤겔이 말하는 단체란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 그리고 그런 조직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계급적인 문화 혹은 ‘계급의식’ 같은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계급의식이란 말을 누구보다 혐오했던 이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곧잘 말하고는 했던 것처럼 계급의식이라는 개념은 인간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투사하여 계급을 주체로서 가정하고 계급에게 특유한 의식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좇아 계급이란 언제나 계급투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효과일 뿐이라는 점을 십분 인정한다고 해서 계급의식을 손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롤테라티아트라는 계급이기 때문에 자생적으로 그러한 계급의식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혹은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항상 좌절되기 때문에 특수한 자기의식의 형태로서 자신을 체험하려 한다는 것, 달리 말해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 구성하기 위해 단체(노동조합이나 당 등)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계급의식을 체험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이란 어떤 계급적 주체의 투명한 자기의식이기는커녕 그러한 자기의식의 불가능성을 해결하려는 시도 속에서 나타나게 된 자기의식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륜과 단체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헤겔이 살던 시대로부터 멀어진 지금 우리는 단체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확장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적인 대의제에 영합하는 것은 아닐) 정당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형태의 투사들의 조직일수도 있다. 우리는 다양한 역사적 모습으로 존재했던 그런 단체들을 알고 있고, 그것이 미래에 취할 형태 역시 다양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단체를 조직한다는 것은 단지 힘을 모으고 조직하며 투쟁을 감행하며 성원을 교육하고 단련시키며 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는 일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단체로서 조직화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순을 다른 방식으로 주관하면서 동시에 객관화하는 것이다.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서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주체의 편에서의 전환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에서의 전환을 초래한다. 노동자계급이 조직화되어 자신을 새롭게 주체화할 때 자본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방식을 조직할 수 없고, 이윤을 착취할 수 없으며, 국가를 지배할 수 없으며…, 등등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주체의 편에서 단체로 조직된 주체로의 전환이 이뤄지자마자 나타나는 일은 주체의 각성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새로운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는 결국 보는 이의 관점에 달려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력한 낭만적 부정을 가리킬 따름이다. 느낌의 공동체니 기억, 애도의 공동체니 하는 말들은 우리 시대의 윤리-정치적 유행어구들일 것이다. 그런 몸짓은 ‘세계 없는’ 주체의 편에서 이뤄지는 낭만적인 부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부정을 회피한다. 현실적 부정 혹은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세계를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것에 항시 주관적인 것이 연루되어 있고 또 그 역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흔히 유물론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주체의 의식이란 자기 앞에 놓인 세계의 반영이라 여기는 것으로 간주되고는 한다. 그러나 그런 발상은 유물론이라기보다는 소박한 경험적 사실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유물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세계는 주관적인 의식으로 결코 투명하게 반영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반영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순적인 세계란 주체의 의식 속에 반영되는 사실의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모순이란 그런 점에서 이중적이다. 그것은 주체가 세계를 투명하게 반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인임과 더불어 주체가 자신을 주체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자유롭다고 말하는 세계에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인민은 자신을 그러한 주체로서 체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스스로를 주체화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자본가나 임금노동자로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만 가까스로 객관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삼위일체 공식이란 것을 통해 고발한 것처럼, 자본을 통해 기업가적 이윤을 토지로부터 지대를 노동을 통해 임금을 얻는다는 물신주의적 환영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던 바대로의 세계로서 나타난다. 그 탓에 지금은 더 이상 인기 없는 개념이 되었지만 물신화와 소외란 말을 손쉽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 수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소외란 개념이 자본의 적대적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영원히 주체화할 수 없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말이겠는가. 물신주의란 개념이 상품, 화폐, 자본, 이윤, 지대, 임금이라는 환상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라는 장치가 순조롭게 운행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말이겠는가. 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그것을 모순 없는 세계로 나타도록 하는 주관성에 대한 분석과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가 생전 출간한 ‘자본’의 첫 번째 권에서 ‘물신주의’에 대한 장을 그토록 공들여 다시 쓰고 다듬으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던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택한 이후에 세상은 전연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어야 한다. 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를 모순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최악의 세계와 최선의 세계를 변증법적인 부정의 관계 속에서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처럼 보인다. 변증법이 긴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잠 자는 변증법을 깨워야 한다.
“잘 알려진 한 구절에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할 것을, 즉 이 발전을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보아도 해악한 자본주의의 특징들과 자본주의의 독특한 해방적 역동성을 하나의 사고 속에 동시에 어느 쪽 판단도 희석시키지 않고 다룰 수 있는 사고의 형태를 가지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사고 능력이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생긴 최선의 것이자 동시에 최악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 ‘포스트모더니즘론’, 정정호, 강내희 편, 터, 1990, 191-2쪽.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란 조건 아래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이 직면한 어려움을 깊게 사색한 드문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하나이다. ‘향수(nostalgia)로 대체된 역사’, ‘비판적 거리의 소멸’, ‘안과 밖을 분간할 수 없는 쇼핑몰화 된 세계의 공간감’ 등, 그가 열거한 조건들은 자본주의 비판이 처한 곤경을 밝혀준다. 그렇지만 그는 인용한 글에서 그런 곤경을 자본주의의 해방적 역동성으로 기꺼이 인정하면서 그것을 부정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을 요청한다. 말하자면 최선과 최악의 것을 함께 사고하고 그것을 변증법적인 모순의 관계 속에서 인식할 것을 주문한다. 그 역시 잠에서 깨어난 변증법을 찾는 것이다.
변증법? 변증법적 사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실제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벗어나 지루한 철학 공부를 시작하고 머릿속에서 사물과 사태의 연관을 사색하는 일에 탐닉해야 한다는 말인가. 당연 그래도 좋고 또 그러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진정으로 변증법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브레히트가 말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B. 브레히트, 앞의 글, 340쪽.
브레히트는 ‘모순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모순이 난관이나 절망이기는커녕 희망인 이유를 그는 말한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의 세계에는 모순이란 없다. 쉼 없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세계, 발전하고 변화하는 세계는 모순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외려 모순은 그런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되돌아오는 것, 모든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무엇, 브레히트의 말을 빌자면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를 일컫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이를 자본주의의 적대라고 칭했고 또한 정치가 자리하여야 할 장소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최선이면서 동시에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 최선인 듯 보이는 세계와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를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극과 극은 결국 통한다는 싸구려 지혜로 이런 배리(背理)를 설명하여 봤자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은폐하는 짓에 불과하다. 서로를 배척하는 두 가지의 시선을 조정할 수 있는 방편은 없다. 최선이거나 최악일 수밖에 없는, 서로 전연 다르게 현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통합하는 방편을 찾으려면 그것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변증법의 가능성을 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했다. 내게 있어 정치란 그런 변증법적 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모쪼록 그것이 글을 읽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_ <변증법의 낮잠:적대와 정치>의 마지막 장

“코다(coda): 낮잠 자는 변증법”의 5개의 생각

  1. 오랜만의 블로그 글…반갑네요. 근데 이 블로그에 자주 와서 서동진님의 글에 감탄하곤 하는 저의 모습이 ‘불편함이 탈색된 감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의 정치적 취향에 딱 맞는 서동진님의 글. 짱이에요!’ 뭐 이런식…^^;;;…

  2. 오랜만에 방문했더니 새 책 출간 소식이로군요.얼른 읽어봐야겠어요.
    날씨가 많이 추워지는데 늘 건강하시기 바래요.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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