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왜 부정은 그토록 어려운가


Max Richter – Iconography

부정의 위기를 돌파하기

Du passé, faisons table rase, Foule esclave, debout, debout,
Le monde va changer de base, Nous ne sommes rien, soyons tout
과거는 깨끗한 판으로 덮일지니, 억압받은 민중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상은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뒤바뀌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전부가 되리라. 인터내셔널가 1절의 프랑스어 가사와 우리말 번역. 엔하위키미러 누리집에서 인용 (강조는 인용자),
https://mirror.enha.kr/wiki/%EC%9D%B8%ED%84%B0%EB%82%B4%EC%85%94%EB%84%90%EA%B0%80
“사건(event)은 상황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공백이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노동자계급이 상황의 공백인 것과 같다. 우리는 무이다.
; 전체이어야하지만 우리는 무이다. –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 A. Badiou, Ours is not a terrible situation, Philosophy Today, 2007, Vol. 51. No. 3. p. 363.

다르게 계속되는 정치 – 반정치의 시대
정치는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개 정치에 관심이 없다.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근심 많은 정치학자들이 걱정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 정치’에 의 관심이 없는 것, 이를테면 선거일에 등산을 가거나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 지지 정당이 없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것, 정치는 모두 야바위라고 냉소하는 것, 이 모두는 정치에 연루되는 방식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무관심과 냉소는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언제나 지배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정치가 조직되고 발현되는 다양한 형태에 유의해야 한다는 점을 잊곤 한다. 정치는 생각보다 은밀하게 더욱이 정치 같지 않은 형태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고 실행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점에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세상이 글러먹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이념적인 스펙트럼을 상관하지 않는다. 부정과 거부가 오직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일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사정이 정반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그런 사정은 더 신랄하게 나타난다. 미국의 티파티,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의 독립당, 스웨덴의 스웨덴민주당 같은 극우 정치조직의 열성적 활동과 인기는 차라리 쉽게 눈에 띄는 사례이므로 넘어가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주의를 집중하여야 할 곳은 제도화된 정치적인 경로를 거부하거나 우회한 채 분출하는 부정의 몸짓일 것이다. 그것은 자살과 중독에서부터 은밀한 폭력 행위에서 나아가 조직화된 테러와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맹목적인 폭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금융위기를 전후해 더욱 악화 일로에 있는 삶의 위기는 더 이상 기존의 정치적 대표 따위는 모두 소용이 없다는 듯이 굴러간다. 예외 없이 선거는 다가오고, 정권은 교체되고, 정책과 통치의 잘잘못을 따지는 국정감사와 의회 토론은 꾸역꾸역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것이 세계를 수선할 수 있는 나아가 세계에 대한 부정을 수용할 수 있는 장치라는 믿음은 갈수록 희박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 정치을 부정한다고 해서 정치 자체가 부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 세계에 대한 부정을 조직하고 나타내는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반정치적 정치라 불러도 좋을, 즉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가 정치의 정상적인 형태로 제도화한 것들(정당 활동, 투표 등)에서 벗어나 자신을 형식화하는, 숱한 ‘정치 아닌 정치’를 상대하고 있다.
“일베”, 어버이연합, 극우기독교도, 강박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스스로 우익보수라 자처하는 세력 등. 이들이 저지르는 행패는 나날이 확장 중에 있고, 흥행 성적도 제법 괜찮은 편이다. 이들처럼 천박하고 노골적이지는 않으며 스스로 앞서 든 이들의 상스러움에 거북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러나 그 못잖게 천박한 이들 역시 한 패거리이다. TV 뉴스쇼에 때만 되면 낯을 들이미는 정치평론가, 변호사, 현역 정치인들 말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자유민주주의적 국가 이념에 충실하다는 핑계 뒤에 숨어 “종북 콘서트”같은 이슈에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짖는다. 어쩌다 누가 나와 그에 이견이라도 말할라치면 그는 금치산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할 형편이 된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여론을 청취하고 합리적인 합의를 도출하자며 ‘민주화 이후’ 시대의 전리품처럼 여겨졌던 토론 프로그램이 사라졌다는 것은, 제법 생각해 볼만한 쟁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보수 정권이 집권하고 난 이후 언론, 방송 손보기의 탓이라고 간단히 일축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언론 줄 세우기 탓이지 언론이 민주화되면 다시 뜨거운 토론과 소통이 분출할 것이라 믿어도 좋을까. 나는 그런 소박한 생각을 지지하기 어렵다.
정권 눈치 보기에 바쁜 방송사 권력자들의 압력 탓으로 돌리기에 사정은 어딘지 석연치 않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귀찮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토론 혹은 대화를 은근 슬쩍 양보하고, 아니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처분하고, 비합리적인 조롱과 증오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뒷걸음질 치게 되었을까. 아직 토론과 대화는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여전히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긴요한 장치라고 강변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벌어진 시사적 사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법 신임이 두터웠던 박원순 시장을 위기에 몰아넣은 서울시 인권헌장을 둘러싼 소동 말이다.
이 사태는 합의를 통해 중재된 인권헌장을 마련하여야 한다는 서울시 측의 억지 때문에 비롯되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는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이 포함된 인권헌장을 제정, 선포하려 하였고 이 헌장을 마련하기로 했던 서울시 측은 동성애 혐오적인 기독교 집단의 저항을 걱정하며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성소수자운동가들의 서울시청 점거로 사태가 악화되자, 박원순 시장은 즐겨 울궈먹는 토론과 소통의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한 발 물러섰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현존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논의와 소통의 장을 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하지 않겠다는 말과 진배없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찾기 위해 합리적인 소통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인권이 보장될 수 있는 주체의 자질을 확정하기 위한 합리적인 토론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헛소리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 집단이 지닌 이런저런 특성을 분별하고 그로부터 인권을 보장받을 자격을 적용한다는 발상은 허무맹랑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권은 그것이 옳다고 비준해줄 수 있는 어떤 메타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권이 옳은지 여부를 가늠해줄 수 있는 인권에 앞서는 어떤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선언”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출현했던 것일지 모른다. 프랑스 대혁명이 제창한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수행적인(performative) 몸짓이다. 그것은 과거 우리가 가졌던 어떤 윤리적 인식의 규범에 비추어 발견된 것이 아니라(그랬다면 그런 미증유의 사태는 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근거 없이 진리로서 선언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그래야만 하고 또 옳을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인권 선언의 비합리성,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져야 할 규범으로 자처하는 맹목적 원리의 위대함으로부터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고 있다. 스스로 제법 명민한 척 잘난 체 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미국 애국자법이 제네바협정을 회피하고 불법 구금과 고문을 마음껏 행하고자 인권의 예외가 되는 인물들에 대한 소소한 자연적 규정을 마련한 것이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동 성폭력범을 비롯한 “악”의 화신에 대한 화학적 거세를 비롯한 생물학적인 신체의 개조에 이르기까지, 이제 인권은 수없는 합리적인 과학적 이성의 눈을 통해 예외적인 인간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법 바깥에 놓인, 인권의 외부에 놓인 인간 아닌 인간으로 변모시킨다. 주로 미국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추이로 전환하고 있는 처벌의 전환을 살피는 것으로 다음의 글을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로익 바캉, ‘가난을 엄벌하다’, 류재화 옮김, 시사IN북, 2010.
그러나 인권의 무조건적 보편성을 제약하는 데 있어 부정적인 방향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에 없이 특정한 자질과 역량에 따라 그/그녀의 삶을 평가하고 인정하며 보상하여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특한 경제 시스템과 마주하고 있다. 이를테면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는 개별적 인격체의 성과(performance)에 대한 대우의 원리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른바 역량 평가와 그에 따른 보상이다. 연봉은 그런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을 실행하는 정당하고 이성적인 논리의 화신으로 군림한다. 물론 그것은 앞의 부정적인 예외적 인간이 아니라 긍정적인 예외적 인간이다. 그는 천재이고, 스타이고, 핵심 인재이고, 영웅이며 등등으로 불리고, CEO의 성공 연설을 중계하는 컨퍼런스에서부터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의 문화적 풍경 어디에서나 창궐한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 혹은 인간 일반, 민중이 설 자리는 나날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권이 맞닥뜨린 위기를 보편성의 위기라고 기꺼이 말할 수밖에 없다. 각자가 지닌 특수한 내용에 따라 분류되고 선별된 인간 이하의 인간 혹은 인간 이상의 인간들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가정이 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런데 보편적인 인간은 조사와 분석을 통해 검출할 수 있는 모델-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선언되고 또 옹호되어야 하는 명목상의 인간일 뿐이다. 그것은 토론과 논증을 통해 발견되고 제시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인간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인권은 전적으로 막무가내의 선언적 주장이고, 비이성적인 것이라 치면 무엇에도 뒤지지 않을 화행이라 할 수 있다. 인권의 보편성으로부터 예외로 빼내야 할 인간의 종류를 찾아내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세상에 즐비하다. 이 때 우리는 기꺼이 이성의 비이성이란 말을 뒤집어 비이성의 이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옹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인권은 막무가내의 비이성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옳다고 말할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근대 세계의 이성으로 작동하여 왔다. 왜곡과 타락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참조하여야 하는 이상적 규범으로서의 역할 하여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신이 어쨌든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면 바로 그 비합리적인 출발, 기원의 맹목적인 선언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해야할까 말까. 나는 그런 질문을 질문으로서 여기고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사회의 문화적 차이와 전통을 뇌까리며 그것이 아직 시기상조라는 운운의 이야기를 들먹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연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은 계몽되었다고 자처하는 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국의 문화적 특수성과 전통, 종교적 배경을 거론하지 않은 채 성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러므로 다문화주의라는 헛소리만큼이나 문화적 차이와 생활양식의 차이에 따라 인권의 보편성을 변경하거나 수정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둡고 나쁜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이로부터 인권의 무조건적 진리를 수정할 수 있는 핑계가 하나둘씩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성소수자 인권이란 쟁점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성정체성에 따라 분류된 특수한 사회집단의 인권을 보장하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원리 자체를 지켜내는 것이다. 따라서 토론과 소통을 통해 합의할 만한 인권의 기준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저 주장되고 선언되며 강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짓은 너무 폭력적이며 독단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하긴 그렇다. 우리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선언했던 프랑스 대혁명을 유혈 낭자한 공포정치로서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설득당하고 또 논쟁의 무대에서 수세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의 전환, 즉 진리의 비합리성을 폭로하고 그로부터 잔인한 폭력의 기원을 찾으려는 이들이 떠들어대는 폭로와 고발 앞에서 쩔쩔 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반대로 기꺼이 그것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보편성의 원리를 특수한 주체나 주장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가두지 않는 한, 보편성이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열려있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한, 보편성의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믿음인가 지식인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째 불길하고 터무니 없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보편성의 비합리성, 비이성의 이성을 말하면서 토론과 숙의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말하려면, 바로 그것이 어쩔 수없이 인정해야 하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자.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달리 말해 앞의 주장이 옳다면 일베와 어버이연합의 막무가내식의 광신적인 주장이나 비합리적인 중언부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권의 문제가 토론과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익 보수 세력은 이를 몸소 체현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어떤 사실에도 굽힘없이 자신의 믿음을 막무가내로 우긴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 앞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인간이란, 세상이란, 신의 섭리란 그런 것이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경험적인 증명 없는 어떤 말의 수행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철학적 허세를 접고 겸손하게 토론과 소통의 민주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몽매와 독단에 빠진 그들이 스스로의 편견에서 벗어나 사실에 합리적으로 눈뜨고 그로부터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바꾸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까.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글에서인가 지젝은 반유태주의자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착하고 다정한 유태인 이웃과 평화롭게 지낸 반유태주의자가 있었다.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고 한다. “아니, 당신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유태인 이웃을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를 통해 유태인은 사악한 음모가도 아니고, 방탕한 색정광도 아니고, 돈만 밝히는 수전노가 아니란 것을 깨닫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떻게 반유태주의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거요.” 그러자 그 반유태주의자는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고 한다. “바로 그 점 때문이라오. 유태인이라는 자들은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그 오랜 시간 동안 시치미를 뗄 수 있다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사악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소.”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이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관찰과 검증을 통해 절대 설득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신념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어떤 토론과 소통도 초과하는 지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끈질긴 고집, 어떤 합리적 토론으로부터 면제된 듯이 보이는 신념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어떤 주체의 행위를 두고 그것이 급진적이냐 보수적이냐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시 뒤로 돌아가 이런 맹목적인 신념, 진리에 대한 믿음을 현실과 대조함으로써 그것을 합리적으로 검증하고 어느 것이 더 지지할 만한 주장인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 모두 자신의 믿음을 잠정적으로 유예하고 모두 함께 체험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대조하고 검증함으로써 소통을 이뤄내자 따위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적 지식이 알려준 대로 미신에서 벗어나 ‘지식’의 차원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 믿음은 자신을 과신하다가 결국 오만한 독선 나아가 비합리적인 광기로 치달을 위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이 알려준 대로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정치란 것이면, 우리는 굳이 정치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실이 닫힌 전체로서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문가의 손에 세계의 관리를 맡기고 그들의 처방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면 끝이다. 그렇지만 세계는 언제나 부정성에 의해 지배당한다. 자본주의적 세계에서 그 부정성은 바로 착취와 적대이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적인 금융화 이후의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에게는 마침내 도래한 유토피아이고 최상의 세계이지만, 실업과 불안정한 삶에 직면한 노동자와 민중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한 세계이고 절망적인 디스토피아이다. 따라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세계가 불가능할 때, 즉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객관적 현실이 없을 때, 우리는 세계의 그러한 모순을 상징화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상징화하는 행위를 정치적인 실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극악한 맹목적인 신념과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름의 정치를 행사하는 우파 ‘또라이들’은 미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부정성에 대처하려고 애쓴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광신적인 몸짓에 가까운 이들의 행동은 그 반대편에 놓인 좌파들에 비해 더 큰 관심을 얻는데 성공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부정성에 대처하는 투쟁과 저항을 조직하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좌파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겸손히 물러나 정책을 개발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조직하는데 분투한다. 그 결과 얄궂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 풍경 속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자는 우파이고, 좌파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양한 개선을 통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며 세계를 ‘알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 좌파적 ‘깨시민’들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법률가들에게 상담을 하며 구구한 사안에 따라 조직된 시민사회운동단체에게 후원금을 내고, 트위터를 통해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발신한다.
믿는 자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세상, 불길한 맹목적 폭력과 광기가 횡행하는 세상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초조한 시선은 이해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신공안정국이니 하는 이름으로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의 정세를 예측하는 호들갑스러운 예언의 게임은 그다지 좋은 전술적인 선택이 아닌 듯 보인다. 헌법재판소의 수치스러운 정당해산은 터무니없는 일이고 엄청난 정치적인 야만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 형성된 정치 체제의 한 축이었던 허울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적인 규범으로 작용했던 사법 정의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엄청난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두고 독재정권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독재는 우리 시대에 은밀하게 매력을 뿜어내는 이름에 해당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솔직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마디로 말해 어떤 강한 권위를 통해 세계의 무질서를 종결하고자 하는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인가.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결정의 힘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물음이란 새로운 질서를 결정하는 그 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란 것이다. 그것이 신의 섭리인지, 모든 것을 헤아리는 위대한 정치가의 의지인지, 보편적인 정의를 대표하는 당파인지를 집요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낡은 것을 지우고 새롭게 수립한 질서가 불길한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손쉽게 일베나 어버이연합 같은 우익 세력의 저속하고 외설스런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고 이들의 비합리적인 몽매를 조롱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건전하고 고상한 좌파처럼 세계의 부정성에 대처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게다가 그들은 ‘열정’을 동원함으로써 미적지근한 자유주의적 좌파 엘리트들 사이의 점잖고 지루함만이 감도는 미적지근한 정치적 논쟁에 응수한다. 정치연구소, 싱크탱크, 정책전문집단을 대표하는 이들은 저술, 강연, 토론 등을 통해 차분하고 냉정한 주장을 펼친다. 만약 어떤 열정이라도 발휘될라치면 그것은 ‘포퓰리즘’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쓴다. 그 결과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다는 듯이 결국은 서로의 의견 차이를 확인하고 끝나는 언어 게임만이 있을 뿐이라는 듯이, 우리는 이른바 ‘소통’이라는 무대의 구경꾼이 된다. 반면 그래도 이 저속한 우익은 온갖 저속한 환상(박정희 시대에 대한 근거 없는 향수,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반북주의, 구역질나는 반여성주의, 그리고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지역감정 등)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열정을 길어 올리려 발버둥을 친다. 그들이 동원하는 열정이란 것이 앞서 말한 적이 있는 ‘결정하는 행위’가 수반하는 폭력적인 비합리성을 암시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나쁜 세계에 대해, 세계의 부정성에 대응하려는 몸짓은 추악하고 반동적이다. 그렇다면 좋은 열정과 나쁜 열정을 분리하고 그것을 좋은 열정으로 전환시킬 방법은 없는 것일까.

헤겔의 잉여론 – “나폴리의 걸인들”과 일베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이제 3대째로 이어지는 빈곤의 생애사를 가늠하면서 청년층의 빈곤을 탐색하는 어느 언론사의 기자가 쓴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가난하면 불안해지고, 불안하면 자존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이 없으면 사태를 강압‧폭력으로 해결하려 들고, 그런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배신감, 고립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고, 중산층의 또래보다 더 빨리 더 깊이 사귄다. 이들은 곧잘 20대 초중반에 동거‧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데, 2세를 어떻게 돌볼지 배운 바가 없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빈곤층으로 전락한 40‧50대는 이제 환갑을 넘겨 손자‧손녀를 맞고 있다. ‘포스트 1997년 세대’가 3대째 승계되고 있다. 현재 7살 미만의 (가난한) 미취학 아이들은 5-10년 뒤에 정규교육과정에 진입한다. 그 무렵이 되면, 빈곤청년을 넘어 빈곤아동의 문제가 폭발하지 않을까. 나는 두렵다.” 안수찬, “그들과 통하는 길”, ‘사람과 정책 I’, 2011, 225쪽.
그가 전하는 불길한 소식을 듣고 있자면 우리는 초조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빈곤을 3대째 대물림한 아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80만원에서 150만원 남짓의 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청년 세대들이 아이를 낳고 있다. 중산층 출신의 공무원 지망 대졸 청년들은 빈곤의 나락의 경계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며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심을 한다. 기저귀 값이랑 어린이집에 보낼 돈은 그렇다 쳐도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어떻게 애를 기를 것인지 생각하며 아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어떻게 미리 앞서 고민할 필요가 있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마 이미 보험이며 연금이며 펀드며 하는 것들을 들먹일 것이다. 이미 언제나 미리 앞서 고민하는 게 대세인 세상이다. 현재 빈곤한 청년층이 일베의 기반이 되고 은밀하게 보수 정치세력의 지지부대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가상공간에서 ‘넷(net) 우익’의 수준으로 “찌질 하게” 반항할 뿐이다. 세월호 사태 때 그들이 보여준 행태처럼 길거리로 뛰쳐나올 때도 있지만 아주 심약하고 소극적인 모습일 뿐이다. 아마 지금의 빈곤아동이 성장했을 때 그들이 어떤 ‘사회문제’를 낳고 또 반동적인 열정을 길어 올려 어떤 정치적 혹은 반정치적 행위를 만들어낼지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최근 부쩍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헤겔의 ‘법철학’에 등장하는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게 어떨까 싶다. 나는 이를 기꺼이 헤겔의 ‘잉여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빈곤 그 자체가 사람을 천민화하지 않는다. 천민은 빈곤에 결부된 마음의 자세에 따라, 즉 부자나 사회 또는 정부에 대한 내심으로부터의 분노 여하에 따라 비로소 그렇게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게 되면 인간은 우연에만 의존하게 되고 경박해지며 노동을 기피하게 되는 데, 이를테면 나폴리의 걸인들이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천민에게는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데 대한 자부심은 없이 생활비를 얻어 쓰는 일이 스스로의 권리인 양 이를 요구하는 악습이 생겨난다. 인간은 누구도 자연에 대해서는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사회관계에서는 빈곤은 곧바로 어떤 계급에게 가해지는 불법의 형식을 띤다. 어떻게 하면 빈곤을 퇴치할 것인가 하는 이 중대 문제야말로 특히 근대사회를 뒤흔들며 괴롭혀오고 있는 문제이다.”(강조는 인용자) G. W. F. 헤겔, ‘법철학’,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8, 429쪽.
여기에서 헤겔은 근대사회의 총체성으로 지양될 수 없는 잔여적인 부분으로서 천민을 언급한다. 요즘 유행하는 철학적 용어를 빌자면 잉여, 과잉, 초과, ‘몫 없는 자의 몫’(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translated by Julie Ros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같은 것이, 천민이라는 인물의 지위를 잘 말해줄 것이다. 최근 헤겔의 천민에 관한 서술에 유의하며 근대 정치에서 총체성과 적대의 관계를 분석하는 많은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에 관해 대표적인 논의는 단연코 프랭크 루다의 저작일 것이다. Frank Ruda, Hegel’s rabble: an investigation into Hegel’s philosophy of right, London & New York, Bloomsbury, 2013. 한편 그 책에 실린 지젝의 서문을 비롯하여 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주석이라 할 수 있는 다음의 글 역시 참조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 “왕, 천민, 전쟁 …… 그리고 섹스”, ‘헤겔 레스토랑: 헤겔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늘’,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바 있는 부정의 행위이자 규정의 행위로서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힘의 정체성을 헤아리는 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천민은 정치이론 안에서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룸펜-프롤레타리아 혹은 천민은 지배집단이 자신의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동원하는 사악한 사회의 외부 혹은 사회의 바닥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e)이라는 정치권력을 부르주아 계급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동자계급도 아닌 비대표의 대표로서의 정치권력으로 정의하였다. 이는 정치는 곧 계급적 대표의 행위라는 상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정치론을 뛰어넘는 특출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마르크스는 보나파르티즘의 ‘사회적 토대’라고 부를 만한 것을 분할지 농민을 비롯한 사회의 주변적 잔여, 말 그대로 찌꺼기 같은 집단에서 발견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집단이랄 것도 없이, 사회에 포함되어 있지만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리킬 만한 어떤 지위와 권리도 가지지 못한 잡다한 부류의 인간들의 연쇄이다. K.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출판사, 2012.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흔히 알려진 마르크스를 배반한다.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마르크스란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원회이자 계급적 지배의 도구라고 역설하는 마르크스이다. 물론 이는 훗날 마르크스에게 부과된 환상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서 흔히 생각하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마르크스, 부르주아계급을 대표하고 노동자계급을 소외시키는 국가권력이라는 주장에서 벗어난 독특한 국가이론을 전개하는 마르크스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보나파르티즘은 예외적인 국가권력의 형태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예외적이기는커녕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개의 사회계급이 투명하게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그렇다면 그것은 코포라티즘을 주장하는 것이지 계급투쟁에 의해 항상 비대칭적인 적대에 의해 분열된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항상 자신을 대표할 수 있지 못하도록 배제되어 있는 어떤 주체들이 자신을 보편적인 주체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해 정치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최근의 해석을 좇는다면 우리는 후자의 편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두 부분 사이의 대립과 조화의 변증법(마치 음양의 분열과 조화처럼)이 아니라 전체와 비-전체의 변증법, 통합된 전체로서의 자본주의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하며 전체와 그것을 넘어서는 초과, 과잉 사이의 변증법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해를 지지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먼저 우리는 착취를 통한 정상적인(?) 지배가 아니라 이른바 지대를 통한 지배, 즉 노동의 착취가 아니라 다양한 공유지를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물론 이자를 비롯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부를 늘려가는 기생적인 자본가들과 아무런 일자리도 없거나 있더라도 임시적이고 불규칙적인 일자리가 주어지는 등등의 노동 없이 자본 혼자 설치며 자기 증식하는 듯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를 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는 ‘탈취를 통한 축적’이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자본은 축적이라는 지상과제에 직면하여 삶의 편익과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오직 첫째도 이윤 둘째도 이윤인 병적인 비합리성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합리성을 대체할 어떤 합리성의 형식도 발견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개선하고 수선하려는 어떤 합리적인 시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합리성 속의 비합리성이라 할 수 있을 이윤 추구의 유령을 쫓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적이기도 하다.
앞의 글에서 헤겔은 빈곤이 근대사회의 근본 문제, “불법적인 형식”을 띤 사회관계(즉 자본주의)의 효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뒤이어 이 천민(Pöbels, rabble)이 지닌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즉 천민이 자신을 어떻게 주체화하는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가 나폴리의 걸인이라고 말한 이들은 오늘날, 프랑스 방리유의 빈곤 청년들이자, 튀니지, 아르헨티나, 스페인의 슬럼가에 사는 빈곤청년들이고, 일본이라는 격차(隔差)사회의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이며, 한국의 가난한 잉여세대들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헤겔이 말한 마음의 자세는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할 수 있다. 한쪽 극에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 가장 먼저 거품이 꺼지고 오랜 불황 속에서 살아온 일본의 빈곤한 청년 세대가 체득한 ‘득도’의 자세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욕망도 없기에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반면 우리는 불같은 증오에 휩싸여 폭력으로 분출하는 청년층의 마음의 자세를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인 뒤푸르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는 상징화된 전체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권위 이는 라캉주의에서는 오이디푸스, 아버지의 이름, 상징적 법, 대타자 등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가 몰락하게 되었을 때, 이에 대처하기 위해 나타나는 다양한 반응 형태를 분석한다. 즉 사회의 대다수가 천민화되어가는 세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다양한 사회문제를, “대타자의 부재를 벌충하기 위한 포스트모던한 형태들”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나폴리의 걸인들, 잉여이자 루저인 자들이 어떻게 자신이 부정할 상대가 사라졌을 때 그러한 부정의 좌절을 해소할 부정의 음성적 형태를 찾아내는지 설명한다. 이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지젝 같은 이들이 반복하여 말하곤 하는 후기근대적, 포스트-오이디푸스적 양식의 주체성의 형태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즉 상징적 대타자로서의 아버지의 형상 혹은 사회의 일반적인 규칙을 상징화하는 법(law)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그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특히 사회의 상징적인 규칙의 바깥으로 밀려난 채 살아가야 하는 청년세대나 노인들, 그리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을 비롯한 ‘천한 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뒤프르가 꼽는 것은 엄격한 위계로 조직된 ‘무리 짓기(the group)’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과 미국의 경우에는 청소년 갱단, 힙합 문화를 통해 나타난다. 물론 한국에서라면 단연코 ‘일베’일 것이다.
,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를 휩쓸고 있는 오순절파 교회로 대표되는 ‘숭배(cults)’, 그리고 권위가 강요하는 요구에 답하려는 욕망이 무효화되는 것을 대체하기 위해 그 욕망을 욕구(need)로 전환하며 욕망하기 대신에 특정한 대상(약물, 게임, 음식 따위)에 대한 탐욕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중독(addic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권위, 상징적인 규칙이 없다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그 권위를 떠맡고 나서는 나르시시즘 제법 오래 전의 일이지만 훗날 벌어지게 될 ‘묻지마’ 폭력의 원형적인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지존파 사건”을 들 수 있다. 2014년에 공개된 정윤석 감독의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는 이 사태를 파고들면서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초래한 병리적 사태로 자리매김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당시의 사회학적 배경과 연결하여 엉거주춤 설명하는 데 멈춘다. 반면 상상하기 어려운 끔직한 폭력에 매료당한 그들의 악마성과 영화의 후반부 그들을 지켜본 이들이 고백하는 더 할 나위 없는 순진함 사이의 격차는 전연 설명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범죄의 심리학 같은 것을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등이 그것이다. Danny-Robert Dufour, The Art of shrinking heads, David Macey, trans. Cambridge & Maiden: Polity Press, 2008, pp. 86-91.
이 때 우리는 유사 범죄자, 악당, 깡패, 반사회적인 일탈과 비행을 일삼는 밑바닥 인생, 게임 및 마약 중독자, 테러리스트 등의 다양한 사회학적인 집단의 모델을 얻게 된다. 그들은 사회 안에 통합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저 악명 높은 ‘사회정화’같은 국가기구의 폭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에서 전체주의적인 폭력과 억압을 발견하고 격렬히 반대하고 항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억압적 훈육 정책이 되돌아와 잉여들을 관리하고 길들이는 일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그런 단속과 기율의 권력들이 더없이 팽창하고 극단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의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되는 이들을 감시, 단속, 배제하는 다양한 과학기술은 나날이 번창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보안, 경찰의 활동은 번창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시와 통제의 권력은 더 이상 경찰의 형상을 하지는 않을 것도 분명하다. 그것은 그저 저 혼자 알아서 작동하는 정보통신기술의 기계장치일 것이고 우리는 탈인격화된 정보로서 그것에 의해 분류, 사정,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SF영화들을 눈여겨본 이들이라면 이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사이보그인가 인간인가를 묻는 <블레이드 러너> 류의 SF로부터 나는 과연 범죄자인가 선량한 인간인가를 골똘히 묻는 현기증을 다루는 SF로 이동했다는 것은 적잖이 서글픈 일이다.
일베에서 규정적 부정의 주체, 인민으로
그러나 미래의 그런 시나리오와 상관없이 우리는 헤겔의 잉여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의 표현처럼 “근대사회를 뒤흔들며 괴롭혀오고 있는 문제” 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은 그 글에서 마르크스 이후 시대의 사람인 것처럼 진지하게 바로 이 잉여로서의 천민을 관리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예컨대 경찰에 의한 단속과 탄압, 자선 사업, 식민지로 천민 수출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의 중대 문제라고 생각한 바로 나폴리의 걸인들, 잉여라는 존재에 대한 헤겔의 해결책은 어딘지 어색하고 궁상맞다. 이 때 해겔의 모습은 마치 구조적인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는 관변 철학자의 모습에 차라리 가깝다. 그리고 이는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보편성을 발견하는 마르크스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글머리에서 인용한 <인터내셔널가>의 노랫말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주장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즉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무(nothingness)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장을 통해 프롤레레타아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의 찌꺼기인 바로 이 잉여적인 주체가 보편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터내셔널가>에서 “세상은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뒤바뀌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전부가 되리라”라고 노래할 때, 바로 그 아무 것도 아니었던 자들로서의 프롤레타리아는 또한 전부가 될 잠재성을 가진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지 않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세계를 이루는 부분들로서 자격과 권리를 할당받지 못한 채 언제나 자본가의 변덕에 따라 자신의 삶이 처분되는 신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이다. 그들은 바로 그들의 결정과 행위를 통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의 위치를 예약한 수많은 사회적 집단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배제라는 이름으로 고발하는 새로운 불평등이 낳은 사람들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본주의적 적대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성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선뜻 그렇다고 답하는 이들은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주체화하는 영웅적인 천민이기는커녕 상종하기조차 싫은 인간 쓰레기 같은 모습의 인물들, 헤겔이라면 자신의 시대에서 본 ‘나폴리의 걸인들’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일베’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적 착취의 적대를 끝장내는 영웅적 결단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또 최악의 농담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아한 철학적 논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이런 논변과 거리를 두는 게 잘 하는 일일까. 그렇지만 일베와 또 다른 모습을 한 또 다른 천민들의 모습에 주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베와 사토리 세대도 있지만 우리는 그와 동일한 자리에서 지금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또 다른 천민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해도 그러한 천민들의 항의의 소식을 거의 매일 접하다시피 한다. 내가 아는 한 테르보른은 산업노동자 계급의 뒤를 이어 그들의 자리를 물려받을 새로운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주체의 윤곽을 그려내는데 가장 기민하고 성실한 노력을 보이는 학자이다. 그는 얼마 전 ‘새로운 대중(new masses)’이란 개념을 빌어 세계적으로 분출하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주체들을 그려보려 한 적이 있다. Göran Therborn, New Masses, New Left Review 85, 2014.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주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먼저 전자본제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이다. 원주민 집단이 바로 그를 대표한다. 이는 우리에게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도처, 특히 아시아의 인도와 남미 전역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이를 이미 치아파스주의 싸파티스타의 저항을 통해 목격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해방적 잠재성을 가진 주체가 되는 것은 역시 자동적이지 않다. 반세기 가까이 공산당이 집권한 적이 있던 인도의 서벵갈 지역은 지역 정권의 중국식 자본주의 발전을 선택하면서 빈곤한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해 우익 정권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했다. 두 번째로 그가 꼽는 이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살면서도 그 사회적 생산관계 외부에 놓인 이들, 즉 무토지 농민들, 임시직 노동자들 그리고 길거리 상인들이다. 이들은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에서 보듯이 새로운 저항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남미의 새로운 사회운동, 이를테면 브라질에서의 공짜 교통요금 운동(Movimento Passe Livre)이나 아르헨티나에서의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 분노한 실업자와 노동자는 물론 상당수의 중산층까지 가담한 도로점거대(piqueteros)는 산업노동자의 파업을 대신하는 새로운 투쟁의 모델로 삼을 만하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반대의 사태로 전환할 수 있을 가능성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아랍의 봄은 이집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무바라크 없는 그렇지만 그보다 더 악랄한 군사독재와 그를 지지하는 열광적인 군중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주체는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이다. 그들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일부(특히 프랑스)에서 혹은 새롭게 자본주의 대열에 합류하여 높은 성장을 보이고 있는 나라들(중국,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소득 수준이 개선되고 보다 나은 소비를 향한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골몰하기도 한다. 그들은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전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품을 구매하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고 나아가 여유가 된다면 꿈도 못 꾸던 해외여행을 할 수도 있다. 그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혁명적인 주체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외려 그들은 부패와 부정에 반대하면서 사회적 조화와 단결을 거스르며 특권을 누리는 부자와 관료들에 대한 증오의 형태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가능성이 더 크다. 네 번째의 주체는 중산층이다. 테르보르는 이들을 반자본주의적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로 간주한다. 물론 중산층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규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루 소득이 어느 정도 되어야 중산층으로 여길 수 있을지 규정하는 것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곳에서나 중산층으로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득 범위에 있는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곤경과 불안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힘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너무나 변덕스럽다. 그들은 극우적인 포퓰리즘에 가장 먼저 가담할 후보이자 동시에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위해 나서는 다른 계층들에 기꺼이 합류할 수 있는 후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처지가 영락할까 두려워하는 중산층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상대적으로 여유를 누리지만 점점 더 많은 부담을 감당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을 결합할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런 객관적인 계층적 위치들을 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테르보른이 명민하게 말하듯이 이러한 계층적 위치들이 결합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비판”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화적 비판의 여하에 따라 이들은 보나파르티즘의 산파가 될 수도 있고 혁명적인 민중의 독재를 창설할 주역이 될 수도 있다. 이 때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비판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우리는 이를 자본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베화되고 마는 좌절한 청년 실업자들은 어떻게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주체로 주체화할 수 있을 것인가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상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혹은 자학적으로 거부하는 이들(너도 병신이고 나도 병신이며 모두다 병신이라고 말하는 병신의 사이비-평등주의)을 어떻게 규정적인 부정의 주체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결국 우리는 다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데올로기란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묻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이 창궐하는 세계에서 규정적인 부정이라 할 수 있는 부정, 세계의 객관적인 현실을 인식하고 분석하며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세계의 윤곽을 그려내는 부정(우리가 급진 정치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그 부정)을 구원하려면 새로운 부정의 형식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부정의 온전한 형식을 구성하려 진력하는 길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절대 피할 수 없다. 손쉬운 사회적 악(갑질하는 뻔뻔한 어떤 개인)을 향한 증오에서 아무런 이유 없는 폭동에 이르는 숱한 비뚤어진 부정을 규정적인 부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_말과활에 기고한 글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왜 부정은 그토록 어려운가”의 1개의 생각

  1. 자캠 강연 때 하셨던 말씀이 좀더 보충되었군요. 일베에서 인민으로의 전환,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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