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성공 시대,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을 다시 생각한다


연예 비즈니스에 의해 기획된 가수라는 것이 오명이던 시대는 갔다. 물론 이미 사라지고 만 HOT를 비롯하여 JTL과 문희준을 여전히 증오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혐오하는 청중의 반응은 SM기획사의 어설픈 몸짓 때문이었지 그들에게 속한 어떤 속성과 자질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을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춤의 텍스트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정작 우리가 작품과 제작된 상품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소비자가 아니라 “미적 대상”과 무관심한 척 거리를 둔 우아한 고전적인 청중으로 스스로를 제 아무리 위치시키려해도, 그들을 비웃는 조롱 안에는 이미 소비자로서의 적극적인 “참여”가 스며있다.
이제 HOT와 GOD로 대표되는 기획 연예 비즈니스의 시대는 이제 한물 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처량한 향수에 깊이 빠진 채 프로모터와 매니저와 음반기획자로 상징되던 록큰롤의 한 시대를 상기하는 짓과 같다. 비틀즈의 위대한 매니저였으며 특히 존 레논과의 동성애적인 애착을 억제하지 못한 채 우울증에 사로잡혀 자살한 브라이언 엡스타인,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하위문화와 스펙터클한 소비문화의 전령 사이를 오가며 “벨벳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를 후견했던 앤디 워홀, 그리고 저 유명한 “월 오브 사운드”의 필 스펙터와 디스코 시대의 영웅 버트 바카락의 스튜디오를 기억하는 이들. 그러나 알다시피 탈근대 자본주의의 음악산업의 아이콘은 데이빗 게펜이다. 그는 록큰롤의 비즈니스를 “신경제”의 패러다임과 접속시킨 장본인 아닐까. 비록 그는 닷컴 기업의 CEO는 아니었지만 게펜이라는 레이블을 “아마존닷컴”과 같은 브랜드로 만들어내고, 스토커와 같은 모습으로 청소년 하위문화의 흐름을 포착하여 그것을 취향의 규범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인수합병의 지옥 속에서 어마어마한 가치로 그것을 팔아 넘겼다.
어쨌거나 프로젝트를 통해 기획된 콘텐츠가 곧 문화와 예술인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누구일까. 아마 “비”라는 가수가 바로 새로운 시대의 문화산업의 화신 아닐까. 먼저 그는 요즘 뜨고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여성적인 그의 외모와 인상, 분위기. 시중의 평가는 그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컨셉의 진정한 재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꽃미남”의 느끼한 감상적 호소와도 거리를 두고 촌스럽고 멍청한 진짜 사나이와도 무관한 그의 이미지는 물론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HOT와 GOD 모두 분발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를 기획한 회사는 그를 정보경제의 콘텐츠로 가공하고 판매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요즘 마케팅과 경영학이 토해내는 살벌한 용어는 “비”를 위해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닷컴 기업을 떨게 만드는 “비즈니스 모델”이란 용어는 “비”에게는 우스운 말이다. “원소스 멀티유즈”란 디지털 경제의 황금율 역시 “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편익과 효용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을 팔아야 한다는 마케팅 구루들의 예언도 “비”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라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시들해진 “고객관계 경영”과 “휴먼 네트워크'”도 역시 “비”의 전공분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음반은 디지털콘텐츠의 쿠폰을 내장하고 있고, 그의 초상은 상품권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간접광고기법을 도입하여 여러 브랜드와 윈윈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모 치킨회사의 광고에 출연하여 “야마카시”란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를 선사하고 브랜드를 감성화한다. 그의 음반에는 “비의 1일 매니저되기”와 “리니지 무료이용권’이 들어있어 고객관계관리를 솔선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저 유명한 문화산업론은 이 정도면 무색해진다. 도구적 합리성이 문화를 좀먹고 상품 세계의 추상적인 화폐가치에 의해 문화는 표준화된다는 그들의 문화산업론은 그간 많은 질타를 받았다. 어쩌면 아도르노는 사르트르의 운명과 흡사할 지경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더 이상 사르트르를 철학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철학적인 “사고”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그를 데카당트한 혹은 저항적인 에세이스트로 기억할 뿐이다. 이러한 처지는 아도르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을 역설하고, 파시즘의 정신병리가 만들어내는 집단적 주체성에 골몰했으며, 무엇보다 문화산업의 등장을 고발했던 아도르노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고상한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기조차 했던 고상한 에세이스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되새길 때가 오지 않았을까. 문화산업은 탈근대 자본주의의 경제 자체가 되어 우리에게 복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의 유보 조건을 달 필요가 있다. 그가 문화의 상품화를 우려했다면 지금 그것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모든 상품이 문화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헤겔적인 논리로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먼저 경제가 문화를 부정하였고 그리하여 경제는 문화를 자신의 논리로 물들이며 ‘식민화’하였다. 그러나 문화는 이제 곧 경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의 최종적인 승리가 어떤 모습을 취하는 것일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도르노가 보았던 것은 문화가 판매될 수 있는 상품이기 위해 그리고 상품의 핵심적인 논리인 장벽 없는 이동과 거래 즉 교환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일차원적”인 물신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문화는 언제나 출판사, 방송국, 음악산업, 영화산업을 통해 매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이다. 상품은 스스로를 가치화하기 위해 곧 문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은 이제 트렌드와 유행,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고 장식하는 심미적인 대상이다. 따라서 비의 마케팅 성공담은 곧 우리 시대의 문화산업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실천하는 역설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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