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정년, 조 스트러머 그리고 386 세대

단 한번도 386이란 문자와 동일시해 본 적이 없는, 그 동네에서 스스로 호적을 파버린 날라리 문화평론가인 내게, 30대를 향한 모욕과 적대는 참으로 우습다. 가소롭다. 솔직히 말해 이보다 별 시덥잖은 꼴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오정(45세 정년)이란 괴담이 떠돌더니 이제는 삼오정(35세 정년)이란 더 섬뜩한 괴담이 횡행하고 있다. 완전계약제와 연봉제라는 유연한 고용 형태가 시대의 흐름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던 탈근대자본주의의 나팔수들마저 이런 추세에 뜨끔해 한다. 그래도 일말의 눈치는 남은 것이다.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만년 철밥통을 꿰찼거나 아니면 고액연봉의 오르가즘에 진저리치는 이들이 복창하는 노동의 자유가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겐 해고의 자유이며 빈곤의 자유란 것은 지난 5년의 세월이 충분히 증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 삼오정이라니 이건 해도 너무했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30대 이후의 일 맛을 터득한 숙련 노동자에게 조기 퇴직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이동을 보장해주라는 썩 겸손한 조언이 다투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잠시만 기다리자. 전통적인 위계의 고리타분한 직장에서 벗어나 “와우”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법한(물론 나는 지금 마돈나나 에미넴만큼이나 유명한 톰 피터스의 [와우,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자신을 브랜드화한 30대 초반의 CEO가 등장하여 우리의 불안을 씻어줄 것이다. 쇄신이 아니라 혁명이고 질서가 아니라 혼돈이며 직업이 아니라 인생의 실험이라는 탈근대 자본주의의 경영 구루들의 복음은 나날이 인기를 더해 가는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이다. 아쉽게도 나는 선착순 몇 천명만 받는다는 세계적인 경영 전도사 스티븐 코비의 장충체육관 내한 강연 이벤트에 가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주제에 주5일제 근무가 어디 언감생심인가. 내가 아는 한 일초도 쉬지 않고 “좆뺑이”치는 것이 탈근대자본주의이다. 그래도 스티븐 코비 박사의 강연은 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는 바로 내게 시간관리의 잘못을 알려주고, 베르그송이나 들뢰즈보다 더 쓸모 있는 지속과 생성의 시간론을 귀띔해 주었을지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게다가 그는 스타 아닌가.
정말 우연히 며칠 전 조 스트러머(Joe Strummer)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해 말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몸담았던 펑크 원조 [더 클래시(The Clash)]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랑 동갑내기인 커트 코베인조차 존 레논만큼 늙은 영혼처럼 추억되고 있는데, 하물며 조 스트러머를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러나 그의 부음은 내게 영 새삼스럽다.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가 죽었다는 부음을 들은 지 불과 며칠 전이었기 때문일까.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은 마치 예상한 부음인 듯 여겨진다. 언제나 음울한, 죽음을 자청한 자들의 괴팍한 기분을 그가 풍기고 다닌 탓일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두툼한 스웨터를 걸치고 탁자 옆에서 일본산 사탕 깡통 옆에서 찍은 사진의 기억 뒤로 나는 그의 멜랑콜리가 지겨웠다. “아픈 척도 한두 번이지 너는 해도 너무 한다”는 내 졸렬함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 스트러머의 부고를 접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우울에 빠졌다. 록큰롤의 명예의 전당의 역사에나 어울리는 기억을 주억거리며 내가 센티멘탈해질 이유가 뭐 있겠는가. 그가 조용필도 아니고 신중현도 아니고 한대수도 아닌데.
아마 그것은 내가 30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도 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직 주택청약예금에 가입도 못했는데, 남들 다 한다는 뮤추얼 펀드에 계좌도 만들지 못했는데, 30대 쁘띠 부르주아지를 향해 세상이 선고하는 부음을 들어야 하다니. 그래서 억울하고 약이 올랐던 탓일까. 60년대를 미국의 몰락과 타락으로 단죄하는 미국의 우익들과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가 나라를 망친다고 거품을 쏟는 꼰대 정객들의 광란 사이에는 묘한 닮은 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번도 386이란 문자와 동일시해 본 적이 없는, 그 동네에서 스스로 호적을 파버린 날라리 문화평론가인 내게, 30대를 향한 모욕과 적대는 참으로 우습다. 가소롭다. 솔직히 말해 이보다 별 시덥잖은 꼴이 없다. 이광재란 자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몰라도 그를 두고 그렇게 막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극구 노동운동을 하다 잘린 손가락이라는데, 모 일보의 논설위원이란 자가 나서서 그의 소영웅주의에서 비롯된 만용인지 아니면 출세의 의지에서 비롯된 쇼였는지 따지고 그의 순정한 삶에 침을 뱉을 일이 아니란 것이다. 댁들이 배불리 와인 홀짝이고 골프치고 해외여행 다닐 때, 정신이 나갔는지 마음이 본래 약했던 것인지, 눈물을 뿌리며 말리는 부모들에게 등돌리고 구로공단에 들어갔던 젊은 청년을 향해, 그렇게 사후적으로 뒷다마 까는 건 역사적인 예의가 아니다. 청와대 상황실장이 별거라면 별 것이겠지만, 문득 내가 작별했던 그 고약한 386들에겐 그건 정말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것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그런데 이번 글은 왜 이렇게 감상적인 거지, 제길. 편집자 양반, 자르려면 자르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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