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8.

Brody-Son-of-Saul-1200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 안티고네적 윤리의 삽화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이 영화의 모든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슈비츠라는 집단적이면서 정치적인 악을 고발하기보다 끝까지 자신의 아들을 온전히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사울의 집요한 고집을 과연 옹호해도 좋을 것인가. 감독은 이를 말하는 데 영화의 모든 것을 건다.

그는 1.375:1의 비율의 40mm 렌즈를 사용했다고 한다. 나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사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좁아진 화면을 보며 움찔 놀랐다. 그것은 갑자기 비율이 달라지며 시야가 좁아진 화면에 대한 놀라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바로 인물의 초상을 비추는 데 진력할 것인가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의 죽음. 토막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시체. 그리고 시체처리라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존더코만도란 인물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적나라하고 참을 수 없는 외설스러운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것을 화면의 깊이 없는 그리고 짧은 초점의 배경으로 밀쳐버린다. 가스실에서 주검을 끌어내고 그것을 나르고 혹은 그 주검들을 헤치고 아들의 주검을 찾는 동안 화면은 그 사체들을 형체 없이 뭉개진 색들로 제시된다. 단지 우리는 단 하나의 표정. 무언가를 향한 집요함을 간직한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울의 얼굴이다.

마치 종업원이 손님을 대할 때처럼 타인을 하나의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역할로 환원시키는 것이 나치즘의 윤리적 악의 비밀이었음을 고발하며 그를 온전한 하나의 인물로, 즉 스스로의 내밀한 존엄을 간직한 인격으로 대하는 방식은 바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레비나스 식의 윤리학은 여기에서 정반대의 버전으로 바뀐다. 그는 타인의 낯에 드리운 타인으로서의 동일성을 모두 외면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제대로 매장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심지어 그는 만원이 된 가스실을 대신해 구덩이에 쳐박히게 된 처지에 놓인 유태인들을 헤집고 다니며 오직 랍비인 듯 한 사람의 몰골을 찾는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감독에게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공개편지를 쓰며 이 영화를 괴물 그 자체에 비견했다고 한다. 그의 평론을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괴물이란 말을 끌어들인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가해한 윤리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 역시 곧 처리될 운명에 놓인 것을 알게 된 존더코만도 유태인들이 강제수용소에 대항해 투쟁할 때, 주인공인 사울은 그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강제수용소의 잔학을 알리는 글을 작성한 이가 아들의 장례를 방해하자 그는 기꺼이 그를 고발하겠다고 까지 말한다. 분명 사울은 광기에 가까운 윤리에 사로잡혀 있다.

안티고네적인 윤리란 법과 같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상징적인 규칙을 초과하는 윤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위법이지만 윤리적으로는 옳은 행위 혹은 선택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윤리적인 패를 내걸 때는 언제인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거나 그것을 상대화하면서 새로운 도덕적 질서를 공식화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윤리적 결정은 어떻게 유효화될 수 있을까. 그 예외는 어떻게 새로운 상징적 법의 질서를 창설할 수 있는 기회로 검증될 수 있는가.

주말에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본 샹탈 아커만의 죽기 전 영화 <저기>가 생각난다. 이 질식할 듯한 롱테이크의 영화는 오직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텔아비브의 어느 아파트의 외부와 가끔 그 내부의 풍경만으로 이뤄져있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멀리 거울에 비쳐진 그러나 어떤 초점도 없이 나타나는 거무튀튀한 형체로서의 아커만을 보게 된다. 그녀는 머리를 감고 말리는 모습으로 어슴푸레 나타난다.

영화를 보며 이 영화가 몇 개의 샷으로 이뤄져 있는지 셈을 하려다 포기해 버렸다. 서른? 마흔? 아마 그 어느 즈음일까. 모르겠다. 영화에서 우리는 오직 아커만의 얼굴 없는 목소리만을 듣는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자란 아커만은 단지히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려다 일자리와 안전이 보장된 브뤼셀로 이주한 아버지의 손길에 의해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자살을 선택한 고모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텔아비브에서 고통스럽게 반유태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히브리어를 떠올리며 하염없는 무력감을 고백하고 집 근처에서 벌어진 살인테러에 관해 말한다. 이 영화는 어떤 초점도 없는 디지털 캠코더로 대상을 기록한다. 초점 없는 흐릿한 눈길. 관객인 나는 블라인드를 통해 비쳐진 평평하고 밋밋한 화면의 어떤 귀퉁이에서 차를 마시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하는 인물을 찾아보고 잠시 그곳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 초점 없는 화면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답을 찾으려 했다. 그렇다. 여기에서도 다시 아우슈비츠가 돌아온다. 이 영구미제의 아니면 해결불가능한 것으로 둔 채 영원한 죄책감을 통해 윤리적 악을 반성해야할 의무의 상징으로서의 아우슈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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