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격동 어느 어둑한 골목 끝 환한 불빛, 퀴어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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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여년 가까이 되어버린 오랜 시절의 일이었다. 지금은 문을 닫고 사라지고 만 시네코드선재가 자리하고 있던 곳, 아트선재센터 지하에 인적 드문 극장이 있었다. 프로시니엄 무대 뒤편으로 흰 색의 스크린이 놓여있고 그 맞은편엔 아마 붉은 색이었으리라 짐작하는 푹신한 팔걸이의자들이 느긋한 부채꼴로 펼쳐져 있었다. 그 때 인사동을 지나 종로경찰서 앞 건널목을 건너 다시 풍문여고를 거쳐 극장에 이르는 길은 소란스러운 지금과 달리 제법 한적했다. 그러나 한 번도 스산했던 적은 없다. 외려 그곳은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몰려든 이들로 갑자기 부산한 세계로 둔갑하기도 했다. 1998년 10월 16일, 1년 전 무산되었던 서울퀴어영화제가 아트선재센터에서 마침내 개최되었던 날도 그랬을 것이다. 그 날 어떤 이들이 영화제를 찾아주었는지 낱낱이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화제를 찾는 일 자체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일일 밖에 없던 시절, 영화제를 찾은 이들은 불안하고 근심어린 낯빛으로 혹은 적잖이 상기된 표정과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극장을 서성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가운데 누군가는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이를 난생 처음 조우하기도 했을 일이다.

그 전 해인 1997년 9월 19일, 제1회 서울 국제 퀴어영화제(Seoul International Queer Film & Video Festival)의 개막식이 개최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자리한 연세대 동문회관 극장에는 영화제 개막식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영화제의 문을 열 수 있으리란 기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정이었음에도 말이다. 문간에는 영화제 개최를 막기 위해 도착한 서대문구청 관계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극장을 대관한 연세대학교 동문회관 측에 영화제가 심의를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기에 불법이라고 통고하였고, 극장 측은 단전을 하고 극장을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당시 영화제는 물론 국내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사전 심의를 받아야 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인 공연윤리위원회가 적용하는 심의 규정에는 동성애에 관한 표현을 담은 영화는 상영할 수 없다는, 지금 생각하면 희비극적인 조항이 있었다. 당연히 심의를 신청한다 해도 심의필을 받는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화제는 당시의 심의규정을 거부함은 물론 그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학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지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고 몇몇 언론 매체 역시 돕고 나섰다. 게이,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 소수자의 삶을 재현하는 영화 자체가 상영이 불가능한, 돌이켜보면 터무니없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심의규정은 폐지되었고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 역시 완화되었다. 기억하기론 국제영화제로서 몇 년 이상 영화제를 개최하면 심의를 면제한다, 운운의 규정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가벼운 몸싸움을 벌이다 전력을 차단하겠다는 극장 측의 통고를 받고 극장에 모여든 이들을 향해 영화제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모두들 울먹이거나 깊은 한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해 서울퀴어영화제가 열렸다. 차비조차 마련해 주지 못하는 조건에서도 많은 스태프와 자원봉사들이 나섰다. 당연히 그러한 조건을 감수하며 영화제를 계속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화제가 개최되기 전에 좌석을 판매하고 그렇게 얻은 수입으로 영화제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는 등의 꾀를 부려봤지만 영화제를 계속한다는 것은 지극히 버거운 일이었다. 상영을 위해 필름을 해외에서 수송하는 비용만으로도 몇 년간 빚을 갚아야 했다. 그럼에도 몇 차례에 걸쳐 영화제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아트선재센터의 도움 덕택이었다. 퀴어영화제란 말만 들어도 경악하는 세상에서 선뜻 극장을 대관하겠다는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지만 아트선재센터는 영화제가 둥지를 틀 곳을 기꺼이 내주었을 뿐 아니라 거의 무료에 가까운 대관료로 영화제를 응원해주었다. 그에 힘입어 서울퀴어영화제는 격년 간 열기로 했던 영화제를 접고 다시 아트선재센터에서 서울퀴어아카이브(Seoul Queer Archive)란 이름의 비정기적 영화제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시아지역을 비롯한 비서구사회의 성소수자 영화나 다큐멘터리와 단편을 비롯한 주변적인 퀴어영화의 경향을 알리는 일을 지속하였다. 그렇지만 퀴어아카이브 역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 예산을 동원하는 것이 영화제이다. 그렇지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문득 아트선재센터의 따뜻하고 어둑한 좌석에서 관객들이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을 보며 무슨 기분에 휩싸였을지 궁금하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은 성소수자들에게는 언제나 긴요한 문제이다. 그들은 안전하게 숨어있고 싶기도 하고 또 자신이 존재함을 알리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이성애규범적인(heteronormative) 재현에 맞서 저항하고 싶어 하며 또한 자신이 욕망하는 환상을 끈덕지게 드러내고 싶어 한다. 퀴어영화제가 열릴 즈음은 1990년대 초반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화려하게 이름을 알린 ‘뉴 퀴어 시네마’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탐 칼린(Tom Kalin)이나 토드 헤인즈(Todd Haynes), 바바라 해머(Babara Hammer), 데릭 저먼(Derek Jarman),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 액트업(ACT UP) 그룹 등이 나타나 “다르지 않은 우리”가 아닌 너무나 다른 퀴어한 자들의 세계를 스크린 위로 운반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문으로 그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영화들을 애타게 보고 싶어 했다. 1970년대의 성혁명, 1980년대의 에이즈 위기(AIDS crisis) 이후 도착한 북미와 유럽의 퀴어 세대의 반란, 그것은 황홀하고 가슴 뛰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의 ‘민주화’ 이후, 청년문화와 하위문화를 둘러싼 문화적 소동으로 들썩였던 한국에서, 새로운 레즈비언, 게이 청년 세대는 이 뜨거운 소식을 자신의 현실로 만들려 했다. 서울퀴어영화제는 문화적 입장권을 획득함으로써 유교적 가부장이 군림하던 이성애적 세계에 자신이 침투할 수 있는 작은 틈새를 만들고자 했던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를 뒤잇는 실천, 제도, 주체들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성소수자들의 세계의 튼튼한 제도적인 하부구조를 이룬다.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소격동 어느 골목 끝자리, 20여 년 전 흔들리는 눈빛으로 걸음을 옮긴 이들을 맞이하는 따뜻한 불빛의 극장이 있었다. 영사실의 카메라에는 먼 바다를 건너온 필름이 팽팽히 감겨있고 극장 어귀에는 조마한 표정으로 서있던 이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서울퀴어영화제입니다.” 서울아트선재센터의 극장은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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